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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30 (15:34) from 211.198.19.221' of 211.198.19.221' Article Number : 67
이덕휴 (dhleepaul@hanmail.net) Access : 8 , Lines : 42
<a href="http://godislove.net/wwwb/ChurchMaker.cgi?db=misupart17&mode=read&num=10&page=3&ftype=&fval=&ftitle=&backdepth=1"target="blank"><u><strong>종교다원주의</strong></u></a>를 비판함
삼가 이정배교수님께 다음과 같은 문안을 드리게 됨을 불편하게 생각하면서 몇말씀 올리고자 하오니 해량하시기를 앙망합니다.
종교다원주의를 관조하시는 교수님의 시각에 대한 반론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합니다. 본란에서 종교다원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개인이나 교단의 입장에 따라 시각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는 의미의 내용으로 파악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인터넷상으로 김경재교수님께 올린 글을 다시 한번 더 게재하고 같은 내용으로서 교수님의 견해에도 문제가 있음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먼저 교수님의 견해는 종교(신)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 본 종교다원주의를 말씀하시는데 신학과 종교의 차이점과 그의 접목이라는 불투명한 신학의 형식객체로서의 종교신학의 위치를 신학의 선상에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세계에서 논증가능한 학문으로서의 이른바 종교(신)학은 하나님의 영적세계를 주제로하는 신학에서 논의할 자리는 없습니다. 신학은 오직 신학자와 신앙인으로서 그것도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만이 논의되어야 할 거룩하신 하나님에 관한 학문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이른바 종교간의 대화라는 장르를 현실가능하지 아니한 우리나라의 종교적 신학적 사고범주에서 종교간의 대화를 모색하는 그 자체가 이미 학문적이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하고(그 전에 인천대학교에서 법철학석사를 했음) 이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소명을 받고 그 소임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금년 봄 크리스챤 아카데미 제2대 원장으로 취임하신 한신대의 김경재교수님께서는 유,불 및 여타의 종교에서 갖는 그들의 구원관을 인정하시는 입장에서 종교간 대화?를 주장하시는 논지를 모일간지에 게재하셨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고 교수님과 전후 3차례에 걸쳐서 <a href="http://godislove.net/wwwb/ChurchMaker.cgi?db=misupart17&mode=read&num=8&page=3&ftype=&fval=&ftitle=&backdepth=1"target="blank"><u><strong>서신</strong></u></a>을 교환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존경하는 이정배교수님의 페이지에 들어왔다가 본란의 글을 읽고 다시 한번 한국의 신학자들의 학문성에 의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학과 종교를 어떻게 동위선상에 올리겠다는 그 코페루니쿠스적 발상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정통 신학을 연구하시는 입장의 학자들은 이런 말을 주의깊게 언급하지만 신학의 덧을 입은 학문분과를 공부하시는 분들께서 신학의 진정성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생각입니다.
종교다원주의의 맹점은 뭐라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관점에 타종교에서도 동참할 수 있다는 논지를 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벌써 시작부터 빗나간 논리를 펼치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영권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들 죄인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시여 천국에 이르도록 하시는 주님의 십자가의 영광에 그늘을 지운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김경재 교수님께도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 바 있습니다. 이정배교수님께서도 한 번 참고 삼아 읽어보시고 신학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가 다시한번 재고해 보심이 어떨까하는 의미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만일 제가 경솔하였다던가 아니면 잘 못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이 주장하시는 유일하신 권능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김교수님께서는 이 글을 읽으시고 A4 용지 4장분의 긴 <href="http://godislove.net/wwwb/ChurchMaker.cgi?db=misupart17&mode=read&num=5&page=3&ftype=&fval=&ftitle=&backdepth=1"target="blank"><u><strong>서한</strong></u></a>을 필자에게 보내주시고 한번 만나자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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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ten by 이덕휴 (dhleepaul@hanmail.net) < URL: http://godislove.net/misupart >
** 다음 글은 필자가 김경재교수님의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한 내용을 교수님께 서한으로 보낸 것을 게재합니다. -------------------------------------------------------------------------- 존경하옵는 교수님 지난 한 주일 동안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셨기를 앙망하옵니다. 보내주신 金科玉條와도 같으신 E-Mail친서에 한 없는 감사와 황공함을 감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 일주일 동안 끊임없이 교수님의 사상과 21세기의 기독교의 나아갈 방향에 스스로 묻고 대답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연구라고 하여야 별 것이겠습니까마는 나름대로 현실의 종교간의 대화의 문제, 그리고 역사적 상대성에 대한 제반문제를 고민 하면서 일주일이 지나도 교수님께 감사의 글을 보내드리지 못하는 것은 불경이 아닌가 걱정하면서 자판 앞에 앉았습니다.
제가 교수님의 신학사상을 전혀 모르고 시도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교수님과 교수님의 글을 읽고 또한 설교 말씀도 듣고 나서 교수님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몇가지를 다시 여쭙는 것으로 교수님의 회신에 鄭重히 답신드립니다.
1. 종교다원주의의 발원
종교 다원주의의가 拔源한 구라파와 우리나라(또는 동양)의 종교다원주의 운동(적당한 표현이 없어서 하나의 운동으로 칭하겠습니다)은 존 힉이 말한 구원의 패러다임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라는 모티프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힉은 말하기를 구원의 메신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神"을 구원의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바라 보자는 것입니다. 즉 이슬람 세계의 알라, 유대의 야웨,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실체에 대한 여러 명칭에 따른 종교상대적 구원관을 인정하자는 주장입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 지난 20여년 전부터 일관되이 주장하시는 바가 구라파에서 행하는 종교다원주의 운동을 한국의 종교간 대화의 방법과 상호 창조적 연대성에 입각하여 소위 김재준, 함석헌, 서남동, 유동식님들로 이어지는 기독교 문화의 토착화 운동에 전념하신 남어지 孺, 佛, 仙 3교가 지배적인 우리나라에서 외래 기독교에 조선의 한복을 입혀가지고 기독교와 화해하자는 주장을 펼치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힉이 주장하는 메시지와는 전혀 그 메타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불교나 유교(실은 유학) 그리고 무속을 망라한 도교 등은 결코 한 분 하나님과 같은 線上에서 논의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구원이나 창조의 대열에 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교수님께서는 20여 년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한국 기독교의 일차적 과제로서 복음의 본질규명은 필연적으로 한국문화의 형식 속에 담긴 실체와의 대결, 충돌, 변혁, 형태 변화가 어떤 형태로든지 운명적이라고 본다"고 하시면서 "전통문화의 실체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김경재, "복음의 문화적 토착화와 정치적 토착화," 한국의 신학사상, 대한기독교서회,1983, 309쪽).
그러나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더블어 모든 사회현상이 다변화되어 간다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을 일점 일획도 포괄적인 차원에서 타종교 및 전통사상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갈 1:6-9 참조).
바르트도 말하기를, "신학적 실존은 자기의 존재와 자기의 사고의 시발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절대성과 배타성을 인정하고, 거기에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고백하고, 거기에 계속 복종할 것을 결의하는 인간이 신학적 실존"이라고 하였습니다(1934의 바르멘 선언 참조).
교수님께서 주장하시는 종교 다원주의 운동은 신학적 실존은 차치하고 우선 민족과 국가, 그리고 인종간의 화해의 개념을 종교화 시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타종교와 화해무드를 예수 그리스도의 化肉의 성육신 교리가 기독론적으로 주장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실체는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2. 우리나라와 구라파는 종교적 갈등이 심화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유럽의 역사는 종교전쟁의 역사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카톨릭과 異敎, 카톨릭과 개신교와의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구한말 입성한 소위 "야소교"라고 명칭된 기독교는 당시 정치적, 시대적 상황에 따른 비극이었을 뿐,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아니었습니다.
년전에 일부 몰지각한 개신교도의 훼불사건 등은 종교간의 갈등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정신분열증적 범죄이지 하나의 종교적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 불, 선 등의 종교에서 누가 과연 그네들이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한판 붙자고 도전장이라도 냈다는 말씀입니까? 도데체 우리나라에서 종교다원주의 운동을 주장하면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는 원칙에 반대하기라도 했습니까? 모두가 한 형제요 더구나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누가 떡쪄놓고 고사지낸다고 훼방놓기를 합니까 아니면 불을 지릅니까?
그런데 유독 일부 토착적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시는 분들만, 구원에 관한한 왜 타종교권을 포섭하자고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종교에서 바로 이 대목에서 지난번 제가 존경하옵는 교수님께 불경스럽게도 "기독교를 잘 모르시는 것은 아닙니까"라는 의미의 참으로 죄송스러운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깊은 뜻은 바로 기독교 신학이 갖는 유일성, 배타성(타 종교를 배척하거나 싸워 이기자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구원사상의 배타성),절대성과 아울러 창조와 부활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지, 구원의 메시지가 없는 불교나 기타 토속적 민간종교에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제가 그러한 표현을 하였습니다.
3. 전통문화로서의 종교
한국인에 있어서 불교나 유교 또는 도교를 믿는 것을 저는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전래의 문화를 감히 어디 귀신이나 된듯이 말하는 초기 선교사들의 잘못 전해진 비선교적 행위의 잔재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성 아래에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십계명은 당시 야웨 하나님을 모르고 바알신을 섬기던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명이었지 불교나 유교가 어디 귀신섬기는 우상입니까? 다만 우리 기독교인의 구원자는 하나님이시고 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는 스스로 성불하면 그만이라는 애기입니다.
솔직히 말하여 그네들의 신앙을 직시하고 하나의 이웃이면 족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서로 상대를 인정하느니, 배척하느니 하는 말을 표면화시킬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한국종교 지도자회의면 회의, 공동구제사업이면 사업 등 서로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왕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지금 불교나 유교를 매도하는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단체라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4. 타종교에서의 구원관
타종교에서 자기네들만 구원의 메신저를 가지고 조상이 귀신이다, 제사지내는 것은 우상숭배다 라고 하는 문제를 창조주 하나님의 구속사에 연계시킬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고도의 신앙관과 신학, 그리고 종교사회적 문제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이 문제 역시 초기 그릇된 사고방식을 가진 선교사들의 잘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네들은 소위 메모리얼 데이라고 하여 추도식을 다하면서 우리가 엎져서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가르친 몰지각한 선교사들의 값어치 없는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교수님의 "한국에 있어서 종교다원주의 운동"에 대한 저의 작은 견해를 愼重에 愼重을 기하면서 말씀 올립니다.
필부에 지나지 않는 제게 그 귀한 시간에 답변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 번 더 깊은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자정부터 쓴 글이 새벽 4시에 겨우 맺을 수 있었습니다.
2000. 06.25 주일 새벽 인천에서 이덕휴 목사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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