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무왕 법민
왕이 평소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였다.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법사가 말하였다.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 왕이 말하였다.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짐의 뜻에 잘 맞는다.”
2. 문무왕 법민
서울에 성곽을 쌓고자 하여 이미 진리(眞吏)에게 명령하였다. 그때 의상법사가 이 소식을 듣고 글을 보내 아뢰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땅 금을 그어서 성으로 삼아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가히 재앙을 씻어서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에 역사를 바로 중단하였다.
3. 문무왕 법민
왕이 하루는 서제 거득공(庶弟 車得公)을 불러 말했다. “네가 총재(冢宰)가 되어 백관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四海)를 태평하게 하라.” 공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만약 소신을 재상으로 삼고자 하신다면, 원컨대 신은 국내를 가만히 다니면서 민간 부역의 괴롭고 편안함과 조세의 가볍고 무거움과 관리의 청렴하고 탐오함을 살펴본 뒤에 취임하고자 합니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4. 만파식적
용이 말하였다. “비유컨대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은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성왕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 또한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값을 따질 수 없는 큰 보배를 내어 저로 하여금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天尊庫)에 갈무리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은 잦아지고, 물결은 잠잠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5. 성덕왕
제33대 성덕왕 신룡(神龍) 2년 병오에 흉년이 들어 인민들의 굶주림이 심하였다. 정미 정월 초하루에서 7월 30일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한 사람에 하루 3승(升)을 지급하는 것을 공식으로 하였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모두 30만 5백 석이었다.
6. 수로부인
다시 이틀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엎어지면서 땅을 쳐 보아도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 또 한 노인이 있어 말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라고 했으니, 이제 바닷속의 방생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 말을 따라 했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7.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을 불러 말하였다. “짐이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께서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시오.” 표훈이 천제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가능하나 아들은 합당하지 못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원컨대 딸을 바꿔 아들로 해 주시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 청하니, 상제가 말하였다. “가능하기는 하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가 다시 불러 말하였다. “하늘과 사람 사이는 어지럽게 할 수 없는데, 지금 스님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후로는 다시 다니지 말라.”
8. 원성대왕
왕이 꿈을 점쳤던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니 아찬이 일어나 절하며 말하였다. “그것은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약 대위(大位)에 올라서도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꿈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왕이 이에 좌우를 물리치고 해몽하기를 청하자 아찬이 말하였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冕旒冠)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까지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9. 원성대왕
왕이 추격하여 하양관(河陽館)에 이르러 친히 연회를 베풀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칙명하여 말하였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세 용을 붙잡아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을 가할 것이다.” 이에 하서국 사람들이 물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풀어 주도록 하자, 각각의 연못물이 한길 남짓이나 솟아오르고 용들이 기뻐하며 뛰다가 가 버렸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밝은 지혜와 성스러움에 감복했다.
10. 흥덕왕 앵무
제42대 흥덕대왕이 보력(寶曆) 2년 병오에 즉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갖고 왔는데, 오래되지 않아 암컷이 죽었다. 그러자 홀로된 수컷이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시켜 앞에다 거울을 걸게 하였다. 새가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짝을 얻었다고 여겨 그 거울을 쪼다가 그림자임을 알고서는 슬피 울다 죽었다.
11. 경문대왕
헌안대왕(憲安大王)이 낭을 불러 대궐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물었다. “낭은 국선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특이한 일을 보았는가” 낭이 대답하였다. “신은 아름다운 행실을 지닌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네.” 낭이 말하였다.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이가 그 첫째입니다. 큰 부자이면서도 검소하고 평이하게 옷을 입는 사람이 그 둘째입니다. 본래 귀하고 세력이 있으면서도 그 위세를 부리지 않는 이가 그 셋째입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서 그의 어짊을 알고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말했다.
12. 경문대왕
범교사가 왕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제가 아뢰었던 세 가지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드러났습니다. 맏공주에게 장가듦으로써 지금 왕위에 오른 것이 그 첫째이옵고 예전에 흠모하던 둘째 공주를 이제 쉽게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음이 그 둘째이오며 맏공주에게 장가듦으로써 왕과 부인께서 심히 기뻐하심이 그 셋째이옵니다.” 왕이 그 말을 고맙게 여겨 작호를 주어 대덕(大德)으로 삼고 금 130냥을 내려주었다.
13. 경문대왕
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 왕후와 궁인들이 모두 알지 못했으나 오직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 도림사의 대나무 숲속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 대나무를 향하여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 그 후에 바람이 불기만 하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라는 소리가 났다.
14. 처용랑 망해사
제49 헌강대왕(憲康大王) 시대에 서울에서부터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이 즐비하여 담이 이어져 있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풍악과 노랫소리가 길거리에서 끊어짐이 없었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開雲浦)에 나가서 놀았다. 왕이 궁으로 돌아오려 하여 물가에서 낮에 휴식을 취하였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어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용이 부린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주어야 합니다.” 이에 해당 관청에 명령을 내려 가까운 곳에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시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이 개고 안개가 흩어졌다.
15. 진성여대왕 거타지
연단(燕丹)의 피눈물 흘림에 무지개가 해를 뚫고
추연(鄒衍)이 슬픔을 품자 여름에 서리 내렸네
지금 내 길 잃음이 그들과 같건마는
황천(皇天)은 어찌하여 아무 조짐 안 보이나
16. 김부대왕
나라가 보존되거나 멸망하는 데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힘을 다해 본 후에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천 년이나 전승해 온 나라를 남에게 쉽사리 내줄 수 있겠습니까?
17.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바라니 열 명의 신하들이 간하였다. ‘오직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는 비옥하고 윤택한 평야를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좀처럼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18.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호암사(虎巖寺)에는 정사암(政事巖)이 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宰相)을 의논할 때 뽑을 만한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국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19. 후백제 견훤
백제가 개국한 지 6백여 년에 당나라 고종(高宗)은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 명으로 바다를 건너게 하고, 신라의 김유신은 군사를 다 거느리고 황산(黃山)을 거쳐 당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으니 어찌 내가 이제 도읍을 세워 예전의 원분(怨憤)을 씻지 아니하랴.
20. 후백제 견훤
나는 하늘이 무너진 원한과 해를 돌이킨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듯이 나라에 견마(犬馬)의 근로를 다하려 했소.
21. 후백제 견훤
무릇 열녀는 두 남편을 받들지 않으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오. 만약 내 임금을 버리고 반역한 아들 신검을 섬긴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대할 수 있겠소.
22. 가락국기 (구지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어 버릴 테다
23. 가락국기
하늘이 나에게 명령을 내려 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했소. 그러므로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 왕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고, 감히 우리나라와 우리 백성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소.
24. 가락국기
제가 재간을 다투는 마당에서, 매가 되었을 때 독수리에게, 참새가 되었을 때 새매에게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죽이기를 싫어하는 성인의 어지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투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25. 가락국기
수로왕(首露王)은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가지런히 했으며,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식 사랑하듯이 하니, 그 교화(敎化)는 숙연하지 않아도 위엄이 섰으며,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26. 가락국기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씨(許氏)이고 이름은 황옥(黃玉), 나이는 열여섯이랍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올해 5월에 아버지인 왕과 어머니인 황후께서 저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애비와 애미가 그저께 꿈에 함께 하늘에 계신 상제를 보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구나. ‘가락국의 원군(元君)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했으니, 신령스럽기도 하고 성스럽기도 하다는 말은 오직 그에게 해당될 것이다. 새로 나라를 다스리느라고 아직 그 짝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지어 주도록 하라.’ 말씀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구나. 너는 지금 당장 부모에게 하직하고 그곳을 향해 가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