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제물(자연)의 때와 곳을 지키는 살림살이
텅 빈 넉넉함은 자연의 철과 자연의 자리를 아는 제물(자연)살림살이입니다. '텅 빈' 넉넉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제 따앙=제 자리를 지키고, 제 하늘=뜻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1)제물의 때와 철
봄을 봄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름을 여름대로 살아야 합니다. 가을을 가을대로, 겨울을 겨울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때와 철의 얼과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침을 아침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낮을 낮대로, 저녁을 저녁대로, 밤을 밤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한 보기로서 제철의 먹을거리로 하늘밥을 삼아야 합니다. 때는 철을 아는 비롯음=맨처음 자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제 때에 태어나서, 제 때에 살다가, 제 때에 돌아가야 합니다. 때를 잃어버리면 '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무도 때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때를 아는 것은 '나'를 아는 것입니다. 때를 안다는 것은 또한 '철'을 아는 것입니다. 철을 모르면 얼간이가 됩니다. 철이 들어 있지 않으면 얼빠진 사람이 됩니다. 때와 철을 아는 것은 한울의 때와 철을 아는 일이 됩니다. 때와 철을 안다는 것은 '한울'을 아는 것입니다.
'때'는 'ㄷ+ㄷ+ㅏ+ㅣ'입니다. '다, 모두, 모든 것(ㄷ)+열리다(ㅏ)+모두, 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 '나'를 한울=우주로 열면 모든 나의 뜻이 이루어지다'를 뜻합니다.
'철'은 'ㅊ+ㅓ+ㄹ'입니다. '나'를 깊게=높게=넓게 비추어 보면, 그만큼의 '한울'을 얻는다를 뜻합니다. 때와 철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고, '나'를 아는 것은 한울=우주를 아는 것입니다.
밖(겉)을 안다는 것은 안(속)을 안다는 말과 똑같은 말글인 셈입니다. 나의 안과 겉을 안다는 것은 한울=우주의 안과 밖을 아는 것과 같은 일인 것입니다. 제물의 때와 철을 아는 일, 때와 철따라 그대로 산다는 것이야말로 텅 빈 넉넉함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2)제물(자연)의 뜻과 자리
내가 설 자리, 깃들 곳, 내가 잠을 잘 자리-곳,앉을 자리, 곳, 갈곳, 있어서는 아니 될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산새들은 나뭇가지에, 아니면 풀섶 어디메에 보금자리를 짓습니다. 산새들이 보금자리(집)를 짓는 모습을 보면, 저 일이야말로 '한울'을 짓는 일이로구나 하고 가슴 뭉클합니다. 제자리, 제가 깃들 곳이야말로 '한울'의 자리이며 하늘이 깃들 곳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어느 결엔가 제물(자연)이라는 곳=자리에서 멀리, 아주 멀게 떠나 왔습니다. 제물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만큼 우리는 제물답지 못합니다.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제물의 자리로 돌아가서 우리의 곳=자리를 다시 회복해야만 합니다. 제자리를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면 나를 잃게 되고 드디어는 '한울'(우주)을 잃게 됩니다. 우리 모두 다 제자리(곳)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제자리 찾기=복본(複本)이란 말에서도 그 듯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리'는 "제 스스로 저(나)를 한울로 자라나게=한울의 뜻이 다 이루어지게 한다"를 뜻합니다.
(3)아기집(봇)-자궁의 길을 따라서
텅 빈 넉넉함의 길은 아기집(봇)-자궁의 살림살이를 따르는 길입니다. 자궁-아기집(봇)의 살림살이란 씨를 받아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살다가, 그 씨앗은 어머니의 봇(자궁)에서 나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내보냅니다. 아기가 스스로 제 갈 길 따라 바깥누리로 나옵니다. 아가는 자라면서 어머니, 아버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서 나라와 겨레, 오누리에 넉넉한 살림살이로 쓰여지게 됩니다.
텅 빈 넉넉함이란 바로 자궁-아기봇이 아기를 세상으로 내보내어, 세상으로 나와서 자궁을 텅 비게 하고 세상을 넉넉하게 하는 자궁의 살림살이의 길을 듯합니다. 자궁은 비우지 않으면 다시 채울 수 없으며, 씨앗을 받아서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어 온세상을 넉넉하게 할 때 자궁의 일은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텅 빈 넉넉함은 제물(자연=생태계)의 길과 똑같습니다. 논밭의 살림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씨를 받아 키워서 꽃 피우고 열매 맺은 다음 논밭을 텅 비워놓고, 그 열매가 온누리에 넉넉함으로 쓰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선이(사람)의 몸도 제물-논밭과 마찬가지로 채움-비움-넉넉함의 길을 따를 때 몸은 몸답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 너, 우리 모두가 텅 빈 넉넉함의 제물(자연,생태계)의 길, 우주의 길-한우릐 길을 따르게 될 때, 살림살이의 보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온전히 비우지 않으면 온전히 채워질 수 없습니다. 텅 빈 넉넉함이란 나에게만 채워짐이 아니라 모두에게 채워짐을 뜻합니다. 나만 채움은 경쟁이고, 싸움이고, 모두의 파멸입니다. 나를 텅 비게하여 모두를 넉넉하게 함으로 도로=다시 나를 넉넉하게 하는 길이야말로 바로 텅 빈 넉넉함의 길입니다.
아기집(봇)-자궁은 텅 비어 있을 때 씨가 들어갑니다. 씨가 가득 차면 비워내어야 합니다. 텅 빈 제자리로 돌아가야 다시 채워지고, 넉넉함의 제자리로 돌아가야 다시 채워지고, 넉넉함의 제자리로 돌아갈 때 텅 빈 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몸은 비움-채움-비움의 길을 따를 때 너, 나, 우리 온누리에 넉넉함을 주는 우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몸은 땅으로 비우는 것이고 채우는 것입니다.
몸은 하늘로 우는 것이고 채는 것입니다.
몸은 텅 빈 넉넉함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몸은 우주=한울의 텅 빈 넉넉함이기 때문입니다.
텅 빈 넉넉함은 항아리=자루=그릇의 원리입니다. 강의 길이고 바다의 길입니다. 텅 빔-가득 참-모든 목숨들의 가득참(충만)-넉넉함 다시 비움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제물의 길 닦기(수행)의 살림살이인 것입니다.
텅 빈 넉넉함은 아기집의 길과 마찬가지로 텅 비움으로 넉넉함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의 길입니다. 종교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몸의 사상과 미학'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길은 바로 텅 빈 ㄴ가운데서 넉넉함으로 살아가는 참 비움이고 텅 빈 참입니다.
텅 빈 넉넉함은 줌으로써 얻어지는 넉넉함이고, 짐으로써 이기는 역설이며, 십시일반의 법칙입니다. 열 사람이 한 술씩을 주면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끼니(밥상)가 됩니다.
텅 빈 넉넉함의 '텅 빈'은 없음이 아니라 넉넉한 있음이요 가득 채워진 있음입니다. 있음과 없음=가짐과 비움을 나누지 아니하고, "비움이 채움이고 채움이 비움이다"를 말해주는 참비움이고 빈 참인 몸의 길(수행)입니다.
(4)쉼의 자리와 비움의 넉넉함을 위하여
쉼(쉬다)은 넉넉함의 비롯음의 잠자리입니다.
쉼은 바쁨=분주함을 비우는 것입니다.
쉼은 바쁜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쉼은 숨가쁜 것을 느리게 하는 것입니다.
쉼은 쉬다의 이름씨입니다.
쉼은 들숨과 날숨의 맨처음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쉼은 살아있는 몸찾기이며, 참다운 하늘로. 따앙으로, 한 '나 찾기'이며, '나의 맨 처음 자리-비롯음의 자리'를 찾는 자연수행(길닦기이며 마음닦기)입니다.
쉼은 비움을 통해서 넉넉함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쉼은 멈춤이 아닌고 삶=살림살이 고르기입니다. 제자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쉼은 '살림살이'에서 벗어남이 아닙니다. 비껴서는 것이 아닙니다. 쉼이야말로 살림살이의 알맹이입니다.
쉼은 일의 한 알맹이입니다.
쉼은 창조적인 삶 살림살이에 살아있는 숨을 불어 넣어주는 새로운 삶의 길잡이입니다,
쉼은 무엇무엇을 '하지 않음'이 아닙니다. 멈춤이 아닙니다. 썩음이 아닙니다. 쉼은 삶에 목숨을 불어 넣어주는 힘입니다. 자라나게 하는 힘 모음자리입니다.
쉼은 밤의 침잠이며 일에서 잠시 떠나서 제자리를 찾는 낮의 피정입니다. 쉼은 일의 잠재적 힘이며 창조의 잠재적 힘입니다. 쉼이 없으면 일할 수 있는 힘은 고갈되어 가고, 창조는 메마르게 됩니다. 쉼은 넉넉함으로 가는 나를 비우는 물러섬입니다.
(다사함 김명식의 따뜻한 혁명, 자연수행의 길 <텅 빈 넉넉함으로> , '제 2부 제물 살림살이'에서 )
첫댓글 구분이 확실한 사계절 제물에 감사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때를 아는 것이네요.
삼라만상의 모든 제물이 다 때와 장소에 맞아야 한다는 것!
채움과 빔은 같은 의미라는 것!
거듭 음미합니다.
오묘한 글 감사합니다.
텅 빈 넉넉함으로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