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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선교의 내적 근거
3. 예배의 선물: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3) 선교의 도구로서의 변화
변화는 앞의 두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동체의 변화는 두 과정의 단순한 반복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과정이 새로운 사회를 향해 열려 있을 때 나타나는 결과이다. 이때 변화는 실제의 삶과 상관없는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변화나 외부로부터 그 의미를 인정받고 평가받아야 하는 변화가 아니다. 진정한 변화는 이 둘 모두를 극복하고 있는데, 사회변화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공동체의 새로운 가치와 하나님의 주권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사회변화를 동시에 거부한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자는 사회개혁자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예배자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든지, 또 예배가 그 사회의 질서를 옹호하고 있을 때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예배 공동체는 그 자체로 사회를 개혁하는 징표가 된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 새로운 질서가 선포될 때, 이는 기존의 질서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항상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는 바른 예배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잘못된 사회를 고발하지도 못하고, 또 그 사회에 새로운 공동체의 모형을 제공하지도 못하는 잘못된 예배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임재는 무엇보다도 기존의 질서가 허구임을 폭로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제시한다. 출애굽 사건에서 하나님은 애굽의 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심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는 애굽 사회의 질서가 허위임을 폭로하셨다.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던 정치는 억압의 정치였으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경제는 불평등의 경제였으며, 신으로 추앙된 바로의 종교는 거짓의 종교였음이 폭로되었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향한 소망을 실행할 수 있었다. 예언자들은 무감각하게 기존의 질서를 따라 살던 사람들의 삶을 폭로함으로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예수는 기존의 사회가 하나님께 수용될 수 없음을 폭로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질서를 통해서만 임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예수의 왕으로 오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 죄인과 세리와 함께한 삶,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죽음을 이긴 부활은 세상의 질서가 영원할 수 없음을 폭로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세상이 왔음을 선포한 사건이었다. 초대교회의 삶은 그 자체로 바깥세상의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주권을 확장한 선교였다. 성서는 새로운 사회는 기존의 공동체가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잘못을 폭로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하나님은 그의 주권이 새로운 사회의 질서가 될 수 있도록 그의 백성을 도구로 사용하심을 증거한다.
예배의 최종단계는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목적은 세상의 질서를 하나님의 질서로 바꾸어 나가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엡6:12).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를 지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엡3:9~10).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해방운동, 유럽의 장거리 미사일 철거 운동,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운동 등에서 나타났던 교회의 역할은 예배가 주는 변화의 선물을 통해 주어진 것이었다.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방법과 내용을 설명하는 데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입장과 신학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복잡성과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기본적인 자세는 견지되어야만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부르셨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초대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둘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자신을 선교의 도구로 인식해야 한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상적인 영역에서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셋째,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이때 상황의 구체적인 변화를 위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이 투입되어야 하지만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수단은 궁극적인 변화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 넷째, 하나님의 질서를 세상에 선포하는 과정은 기존의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가치, 구조, 그리고 제도를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변화가 기존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특정 개인을 대상으로 진행된다면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궁극적인 목표를 상실한다. 다섯째, 변화는 질서와 공동체 형성이라는 앞의 두 과정의 연속성 상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앞의 두 과정을 무시할 때 예배는 선교의 내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
4. 예배의 내용: 하나님께 돌아옴(계약의 갱신)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예배가 가지고 있는 변화의 잠재력은 반드시 궁극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예배를 통해 주입된 새로운 질서는 잘못된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는 교회가 인간의 질서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얼마나 왜곡시켰는가를 잘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고착화된 개념 역시 예배를 새로운 사회를 위한 과정이 되게 하지 못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성서가 제시하는 예배의 기본 틀을 분석하는 작업은 예배 자체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예배와 선교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사야의 소명(사 6장)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진 만남의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기존의 사회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질서의 주인으로 등장한다. “(스랍들이)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3절). 이때 이사야가 보인 반응은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즉 자신의 삶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질서 앞에 노출되자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이사야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 거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의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사야의 죄의 고백은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자였다는 고백으로 요약되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사죄의 은혜를 내려주셨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6~7절).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 단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 나아옴
(2) 죄의 고백을 통해 세상의 질서 속에서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함
(3) 사죄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 안으로 받아들여짐
이제 이사야는 하나님의 질서를 경험함으로 세상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전에는 세상 안에서 세상의 질서 앞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며 살았던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a절). 전에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고백하였지만, 이제 사죄의 은혜를 경험한 이사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b절).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난 인간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의 질서를 세상에 전할 사람을 찾으심
(2)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
(3)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이사야의 소명 기사는 하나님과 이사야의 만남의 내용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만남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다 자세히 전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나와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다. 출애굽 하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1) 바로를 신으로 추앙받는 질서 안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으나, (2) 이제는 바로의 질서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찾음으로 자신의 잘못된 삶을 고백하였고, (3)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은 (1) 자신들이 약속의 땅을 상속받도록 부름 받았음을 인식하고, (2) 그 부름에 응답하여, (3)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전에 바로의 노예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시내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들의 신분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는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을 체결하였다(출24:1~11). 계약의 내용에 관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기로 서약하였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24:3). 계약체결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하나님의 질서 아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확인하는 모임의 중심 주제는 언제나 계약의 갱신이었다. 세겜에서의 계약갱신은 이스라엘이 세상의 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그의 백성이 되기를 결단한 좋은 예를 보여 준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5~16)
그렇다면 계약체결을 통해 이스라엘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공동체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계속되는 계약의 갱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선교의 동력을 얻을 수 있는가? 평화에 대한 이해는 이상의 질문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제공한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기 전, 시내산의 계약체결의 예배에서 이스라엘은 평화를 위한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렸다(출24:5). 적과 싸우기 전, 이스라엘은 화목제를 드리고 “하나님은 평화”라고 고백하였다(삿6:24).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기 전, 예수는 그들에게 평화를 주었다(눅24:36).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의 세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선교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계약의 갱신으로서의 예배는 공동체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줄 뿐 아니라 평화를 새로운 사회의 씨앗으로 선물한다.
계약의 갱신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했던 옛 세계로부터 하나님의 질서 아래 새롭게 형성된 세계로 나아 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호세아 2:8~23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본문이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배의 구도뿐 아니라 예배의 보다 깊은 의미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즉 (1)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하고 우상을 섬김으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8~13절), (2) 하나님과 계약을 갱신함으로 그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는 이스라엘(14~15절), 그리고 (3)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16~23절)의 모습이 차례로 그려진다.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 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1-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 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
13-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 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본문은 한편으로는 완전히 잃어버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은혜로 회복된 사회의 모습을 동시에 제시한다. 8~13절은 그동안 이 사회를 지탱시켜 온 질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가를 고발한다. 그 고발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그분이 주신 질서를 남용하여 우상, 즉 다른 질서에 순응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게 평화의 상징으로 제시되던 ‘포도원과 무화과 동산’이 쑥밭이 되고(12절), 엄청난 심판이 선언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새롭게 계약을 체결한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 16~23절 사이에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나는 “그 날에”(16, 18, 21절)는 과거의 질서 속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가 선포된다. 전에 이스라엘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백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신분이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 날에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23a절). 이스라엘의 변화는 하나님의 질서를 수용함으로 가능했다. “(그 날에)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23b절).
이상과 같은 이스라엘의 변화 한가운데 계약의 갱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스라엘은 광야로 나가 다시 한번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적인 희망, 즉 옛 질서를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14~15절). 계약체결을 통해 주어지는 약속 안에서 인간이 중심이 된 세계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이 펼쳐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타일러 광야로 데리고 나갔다는 진술은 새로운 사회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예배는 계약갱신의 장이며, 그 내용은 겉으로 드러난 세상의 질서를 절대시하지 말고 하나님의 미래에 참여하라는 선교적인 부름이 된다. 즉,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다시 보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게 해 준다.
5. 나가는 말: 예배 후 예배
하나님의 질서를 온전히 따라 살지 못하는 세상의 삶이 반영되는 예배, 그리하여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예배, 그리고 예배를 통해 경험된 하나님의 질서를 세상에 확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가치구조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는 삶을 회개하고 다시 한번 예배 공동체로 모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해석학적 순환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삶을 예배와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배의 연장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흐름이 가능한 예배를 위해 등장한 것이 ‘예배 후 예배’라는 개념이다. ‘예배 후 예배’는 1970년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교회와 선교의 관계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개념이다. 세계교회협의회 제5차 총회(나이로비, 1975)를 위해 준비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선교가 본질적으로 세상에 자신을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참된 선교는 궁극적으로 역사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실존(질서)을 반영하는 교제의 사건 안에서 그 교제의 사건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교회의 의미는 이를 분명히 증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의 실존을 반영하지 못하는 선교는 심각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신학적 입장은 이후 예배와 삶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같은 해 발표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예배를 통해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는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해 줄 뿐 아니라 선교의 방법을 제시하는 장이 된다고 진술했다.
부활하신 예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배에서 임재하신다. 공중예배를 위해 모인 공동체는 …… [예배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한다. ……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경험된 신비가 교회 공동체의 일상의 삶으로 이어질 때,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 선언하면서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갈 수 있다.
이후 예배와 삶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신학은 계속 발전되었으며, 세계교회협의회 제6차 총회(벤쿠버, 1983)에서는 “교회는 예배를 위해 모이고, 세상의 삶을 위해 흩어진다. 이 같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예배 후 예배’의 차원이 회복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한 교회의 봉사[선교]는 예배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며 예배와 선교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또 제7차 총회(캔버라, 1991)에 와서는 “예배 공동체는 교회 바깥의 보다 큰 공동체의 모형이 되어야 한다”고 예배 안에서 공동체가 변화하는 과정과 세상의 변화와의 관계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롭게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상을 새롭게 하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예배행위 자체를 한국교회에서 ‘예배 후 예배’의 개념은 아직까지 깊이 논의되지 않고 있다. 예배 자체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질서 아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 경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예배행위 자체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세상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야 하는 신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자체를 위해 남용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예배를 삶과 분리시키거나 예배를 정성껏(혹은 성의껏) 드리면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신앙에서 벗어나 예배를 통해 바른 선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1997년 말 나라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갔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삶의 위기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그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신도들의 마땅한 자세이다. 그러나 삶의 위기가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하나님을 찾은 잘못된 예배 때문이 아닌지, 그리하여 예배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지를 되돌아보면서 변화된 삶을 향한 해석학적 순환이 일어날 수 있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풀어야만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참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응답’보다 ‘정성을 드림’을 지나치게 강조한 예배를 지양해야 한다. ‘드림’ 중심의 예배는 세상을 향한 선교보다는 교회 자체를 위한 전도를 더욱 강조하게 되고 결국은 예배가 선교로 ‘응답’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배와 삶의 균형을 위해서는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질서 앞에 자신을 드려야 할 뿐 아니라 예배를 통해 받은 은혜를 하나님의 질서로 가득한 세상을 위해 사용하여야 한다. 찬송가 149장 1절과 4절은 예배 전과 예배 후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예배와 삶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