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접푸리’(졉프리) 교우촌
인천 경서동 진펄마을에 있는 녹청자 가마터. 최양업 가족이 살던 부평 접푸리라는 주장이 있으나 교회사학계에선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의 둘째 아들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바로 아랫동생인 최의정(야고보)은 「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증언(101회차)에서 서울 도성 밖 공덕리 일대에 3년여 살다가 박해를 피해 신자 300여 명이 교우촌을 이루며 사는 강원도 김성(현 김화읍)으로 이주했다고 밝혔다.
최양업 신부도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3년이 지나자 이웃 사람들한테 신자 집이라는 것이 탄로 나서 관가에 붙잡혀 갈 위기에 처해 산속으로 피신했다”고 한다(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1827년에서 183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최양업 가족이 김성에서 얼마간 살았고, 언제 부평으로 이주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최양업이 부평에서 조선 교회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돼 1836년 2월 6일 서울 후동(현 주교동)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적어도 1836년 초 이전에 그 가족이 이곳에 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양업 가족의 강원도살이는 무척 고달팠다. 부평에서 최양업 가족과 3년을 같이 살았던 이 베드로는 “앞집 포교가 잡으려 해 세간을 다 버리고 도주해 시골로 피하니 가산이 점점 다 없어졌다”고 했다(「기해ㆍ병오 순교자 시복 재판록」 97회차 증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