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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지은이: 사마달·일주향 - 차례 - 제 9 장 빙요화(氷妖火) 제 10 장 개방( 幇)의 참패(慘敗) 제 11 장 생존자 (生存者) 제 12 장 곽영명(郭永明) 제 13 장 혈륜(血輪) 제 14 장 동창의 개(犬)들 제 15 장 조여드는 살수(殺手) 제 16 장 정사대전의 서곡(序曲) 제 17 장 조운검문의 멸화 제 18 장 실패 (失敗) 제 9 장 빙요화(氷妖火) 1 바로 그것이 착각이었다. 투아앗! 실침들이 허공에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것은 그슬린 하늘에서 취견개를 향해 물방울들처럼 덮쳐내렸다. "이 몹쓸 것이 암수를!" 취견개는 황급히 놀라서 호신강기로 전신을 감싸며 타구봉을 원을 그리듯 빠르게 휘둘렀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취견개의 머리 바로 위에 타구봉 빛깔의 우산이라도 씌워진 듯했다. 그러나 그 실침들은 끝 부분에 작은 물방울 같은 알갱이들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리고 타구봉에 맞는 순간 일제히 터지면서 하얀 분말을 흩뿌렸다. 양이 작고 별 것 아닌 듯 보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강호에서 오래 지내온 자들은 다 안다. "패독산(敗毒酸)!" 취견개는 당황하여 냅다 소리를 지르면서 귀식공에 들어갔다. 눈 코 입의 모든 구멍을 막고 그 자리에서 허공으로 뛰어 오르기를 삼 장여. 그러고도 모자라서 허공에 뜬 채 다시 강변을 향해 오 장 가까히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황급한 퇴각이 창피스러웠지만 아무리 망신을 당해도 패독산에 중독되는 것 보다는 낫다. 패독산에 한 번 걸려들면 아무리 고수라도 족히 한 달은 고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귀식공으로 몸 내부에 침투하는 독은 막는다고 쳐도 살갗에 닿은 패독산이 일으키는 반응은 가렵고, 아프고, 진물이 터지는 황당한 증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지라도 개방의 장문인이 부스럼까지 달고 다녀서야 체면이 서겠는가. 취견개가 배에서 멀리 떨어진 순간 꽝!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선실의 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그야말로 바람처럼 마고가 날아 들어갔다. 마고가 날아 들어간 찰나에 놀란 곽충이 야유화를 등 뒤에 두고 있다가 개방의 제자들이 들어서는 줄 알고 무조건 쇠작살을 쏘았다. 쨍! 쇠작살이 허공에서 네 조각이 나 흩어지고 그 한 조각은 곽충의 마빡을 관통해버렸다. 곽충은 뒤로 비명도 없이 드러눕고 야유화가 마고의 손에 허리를 잡혔다 싶은 순간 다시 선실 지붕에 뻥하니 구멍이 났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마고는 야유화를 낚아챈 채 하늘 높이 솟구쳤다. 취견개가 눈이 동그래져서 소리쳤다. "이 요물이 감히 어느 안전에서 수작을?"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마고는 야유화를 안은 채 등평도수의 신법으로 강 건너에 가볍게 내려서 버렸던 것이다. 모두가 그 기민함과 용의주도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특히 개방의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여 강 건너의 마고와 야유화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취견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게 웬 허파가 뒤집어질 일인가? 강호 풍상 일갑자의 자신이 어린 계집년에게 확실하게 당해버린 끔찍한 순간이었다. "어서 강 건너의 형제들에게 알려라!" 취견개의 고함에 그제서야 정신이 들은 제자들이 서둘러 폭죽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수채의 잔당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선 체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강을 건넌 마고는 이미 무서울 것이 없었다. 길이 조금 멀어지기는 했지만 가장 두려운 상대인 취견개가 강 건너에 있지 않은가? 취견개는 그제서야 강을 건너려고 신형을 솟구쳤으나 십 장여나 차이가 난 상태에서 자객보다 빨리 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자객들은 무공에 있어서는 명문정파의 고수들보다 못해도 대부분이 신법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신법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달아나는 데에 있어서 남보다 뒤떨어지면 자객이 아니다. 마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야유화를 옆에 낀 상태로도 순식간에 강을 건넜으며 강을 무리하게 건넌 탓에 더 이상 서있을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다만 정신력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력은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강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험악한 산세를 향해 달리게 하였다. 곧 추격이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험로에 약하다. 산 속에서 동냥을 하며 사는 거지는 없는 탓이다. 그래서 그녀는 산 속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렸다. 그러나 개방의 조직력은 대단했다. 폭죽이 터지고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서 마고는 개방의 제자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개방의 제자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았으며 산 속으로 그녀가 숨어들 것에 대비해서 관도 건너편을 완전히 봉쇄한 채 그녀를 노리고 다가들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질렸기 때문이 아니라 살의를 불태우기 때문이다. 서서히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에서 진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막으면 모두 죽이리라. 비선과가 소매에서 풀리고 야유화는 그녀의 등 뒤에서 숨을 죽이고 섰다. 야유화는 이제 더 이상 겁을 내지도 않았고 부자연스럽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을 시달리다 보니 무공만 없다 뿐 모든 것에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개방의 제자들이 다가들면서 일제히 타구봉을 허리 아래로 내렸다. 허리 아래로 타구봉이 내려갔다면 그것은 목숨을 내놓고 목적만 이루겠다는 뜻이 된다. 즉, 방어는 없고 공격만이 남았다는 뜻이다. 마고가 등 뒤의 야유화를 슬쩍 건드렸다. 앉으라는 뜻이다. 야유화가 그 자리에 배를 안고 몸을 숙였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야유화가 앉자마자 확 피가 튀었다. 다가들던 개방의 제자 두 명이 뒤로 벌렁 나자빠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둘. 그 다음이 하나. 마고는 비선과를 번개처럼 휘둘렀다. 밀려드는 개방의 제자들이 유성횡천진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마고에게 쉽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마고의 비선과는 긴 무기다. 길다는 것은 그만큼 적을 멀리 떼어놓을 수 있지만 그만큼 사용하기가 어렵다. 물론 마고의 비선과는 그런 점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비선과는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이 진 속에 갇힌다는 것이다. 기관으로 작동되는 진의 경우에는 피하기가 쉽지만 사람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진은 생문과 사문이 순간적으로 바뀌어서 파해해 나가기가 어려운 게 당연하다. 마고는 생문을 찾아 빠져나가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야유화의 존재가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개방의 제자들을 남김없이 도륙하는 길을 택했다. 아니면 최선을 다하고 죽는다. 목숨을 걸고 돈을 버는 게 자객이다. 그녀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매번 여기가 내가 죽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번번이 살아남았다. 사독패를 만났을 때도 역시 그 자리에서 죽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살아남았다. 물론 갇히는 몸이 되었지만 죽는 것과 갇히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죽는 것 다음으로 무엇이든 생각한다. 꽃다운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마고의 손속이 매섭고 독랄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이상 하나라도 더 죽인다. 그리고 야유화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신에게 이번 일을 맡기려고 자신을 탈출시킨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힘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만일 그걸 보여줄 수 없다면 이미 살아남아도 소용없는 일이다. 자객으로 살아왔고 자객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객으로서 자격을 잃는다면 무엇으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퍽! 둔탁한 울림이 견정혈을 울렸다. 진세가 유성횡천진에서 사룡유천진으로 바뀌었다. 흐름이 빨라지고 타구봉이 어지럽게 다가오고 물러갔다.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여력도 없다. 오직 닥치는 대로 갈려 죽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퍽! 다시 둔부에 충격이 왔다. 쓰러질 뻔했으나 야유화의 어깨를 짚으며 빙그르르 돌았고 그 순간에 비선과를 용맹무쌍하게 돌려 위기를 모면했다. 눈 앞이 가물거리는 것 같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이 그런 것 같았다. 진세의 흐름이 빠르게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안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견정혈에 통증이 심해졌다. 타구봉의 위력은 베거나 찌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두들기는 충격에 있다. 그 둔탁한 고통이 서서히 배가되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부위에 마비현상이 일어난다. 내공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도 느껴졌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는 않았다. 개방의 제자들은 지원대가 더 오기 전에는 이제 제대로 된 진세를 구축하기가 어려워졌음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쓰러진 시체가 다른 제자들의 보행에 걸림돌이 될 정도로 많아졌다. 개방은 명문정파다. 소림사와 함께 쌍벽을 이룬다. 사상자가 많이 나고 형제들이 옆에서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더욱 더 맹렬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숫자가 줄어서 그 진세의 위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고 마고는 그것을 알았다. 물론 마고도 지쳤다. 마고가 지쳤음을 개방의 제자들도 알았다. 서로가 피눈물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자나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나 개방 제자들의 모습에는 처절함이 배어있었다. 마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워가면서 대체 이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자신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리면서 싸운다. 일반인들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개방은 항상 그래왔다. 무림의 공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든가 혹은 나라의 역적이 설치면 개방이 당연히 나섰다.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싸우고 죽어갔다.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방은 거지인 것이다. 그들의 율법은 타구봉과 술독 외에는 어떤 것도 소유해서는 안되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이미 수 백 년 전부터 그렇게 행해져 내려온 율법이었다. 마고의 비선과가 무디어졌다. 상대는 명문정파 중에서도 개방이다. 그 무서움에 치를 떨면서 서서히 그녀는 무너져 가고 있었다. 암기 몇 개가 허리에 감추어져 있었지만 내공이 반갑자에 이르른 그녀로서도 암기를 정확하게 쓸 수 있을지 의문이 일었다. 눈 앞에서 사물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인가. 여러 가지 모양새로 다가오던 적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세가 달라진 것 인지 진세가 풀리는 것인지 그것조차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 다음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개방의 제자들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이리저리 쓰러지면서 진세가 파해되고 있었다. 그리고 개방의 제자들을 몰아붙이는 붉은 피풍의 검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결같이 검을 들고 있었고 검을 쓰는 모습이 이미 달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그것이었다. 어떤 자들인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모습인데 그 기세는 화산파나 점창검파보다 더 대단했다. 검객들은 길을 트고 길이 트이는 대로 누군가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거구에 갑옷을 입고 검은 피풍으로 몸을 감싼 사내. 투구에는 화려한 용이 양각되어 있었고 손에는 크고 굵은 보검이 칼집째 들러있었다. 주변에서는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세 속을 그대로 걸어 들어왔다. 거구에서 나오는 기도가 마고를 멍하니 바라보게 만들었다. 곤륜왕이었다. 2 전신이 동상으로 인해서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해있었다. 심맥이 남김없이 끊어져 있었고 고통으로 인하여 온몸이 뒤틀어진 사태였다. 극심한 냉기에 몸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고통이 더욱 심해지자 스스로 혀를 깨물었다. '아버님……!' 사이룡은 시신을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그대로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눈물은 슬플 때 흘리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고통스러워도 눈물을 흘린다. 피와 살로 된 인간이면 누구나 운다. 무인이라도 눈물은 흘리게 된다. 그러나 사이룡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은 꿈일 것이다. 꿈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렇게 허망하게 아버님의 시신을 마주하게 되겠는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혀를 깨물고 자결하겠는가. 아버님은 무인이 아니셨던가.' 사이룡이 그렇게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그의 등 뒤로 금불선사가 다가와 섰다. "미초서생, 이제 그만 일어나시오. 시신을 자세히 좀 보아야하지 않겠소?" 사이룡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분노로 팽팽하게 당겨진 전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척비척 물러섰다. "어떻게 되어 돌아가신 것인지 알 수 있겠는가?" 사이룡은 넋나간 얼굴로 금불선사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거침없이 난제를 풀어나가고 의학에도 정통한 그였지만 지금은 머리 속이 웅웅거리는 벌떼 소리로만 가득한 느낌이었다. "꿈이 아니겠습니까?" 금불선사가 눈을 내려감고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꿈이라니." 사이룡은 다시 아버지의 시신에게로 몸을 굽혀서 공손히 시신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시신을 안은 채 성큼성큼 뇌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의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냥 눈물이 아니라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피눈물이 있을까만은 실제로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로 희석되어 분홍빛을 띄우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흰자위의 실핏줄들이 터져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한 아버님이었는가. 이 세상 누가 아버님에게 원한을 가질 것이며, 이 세상 누가 아버님을 원망이라도 할 것인가. 무림인이든 아니든 뇌옥의 옥리든 죄수든 아버님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누구나 존경하고 따랐고 최대한 예의를 보여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렇듯 어이없는 일이 어찌 일어날 수 있는가. 사이룡이 뇌옥을 벗어나자 뒤처졌던 왕문희와 정룡현이 도착하여 말에서 내리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얼이 빠졌다. "실제로 이런 괴변이……." 왕문희는 더 이상 말을 잊었고 정룡현은 얼른 시신을 함께 받아서 자신의 피풍을 깔고 그 위에 눕히도록 도왔다. 뒤따라 나온 금불선사가 사이룡에게 말했다. "심정은 알겠지만 심정을 가다듬고 들으시게. 시간이 별로 없으니 슬퍼할 겨를도 없어서 하는 말일세." 사이룡은 금불선사를 돌아보았다. "안에서 내가 살핀 결과로는 첫째로 강호상에서 오래 전에 사라졌던 흑천이라는 방파의 살수집단인 좌도흑랑대와 천리문의 고수들이 처음 자네 아버님과 싸웠네." "그들 정도로는 아버님을……!" "그랬지. 안에 죽어있는 좌도흑랑대의 시신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겠나? 자네 아버님은 좌도흑랑대를 옥졸들 하나 이용하지 않고 홀로 해치우고 계셨던 것 같네." "……!" "그러나 다 척살하지 못하고 그만 새로운 상대를 만나신 것이네. 그것도 사람이 아닌 반인반귀의 요물을 만나셨네." "아버님을 해한 빙공(氷功)은 대체 어떤 것입니까? 수라사(水羅寺)의 빙공이나 북천호가(北天虎家)의 빙공으로는 이럴 수가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이토록……." 사이룡은 다시금 북받쳐 오르는 분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불선사가 사이룡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미초서생은 혹시 아버님으로부터 빙요화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가?" 사이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테지. 자네 아버님도 말로만 들었을 옛날 이름이니 자네에게까지 이야기했을 턱이 없지." "그게 무엇입니까?" "빙요화가 나타난 것일세." "빙요화라니요?" "적어도 빙요화 본인이 아니면 빙요화의 전수자가 나타났다고 해야겠지." "대체 그것이……?" 금불선사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전설적인 최고의 빙공이 있었네. 그것을 익히려면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어야만 하는 빈인반귀의 몸이 되어서야 익힐 수 있는 사공이지."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금불선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있었네. 기구한 운명의 여인 하나가 그것을 익혀서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금불선사의 얼굴 가득 주름이 깊어졌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더 지난 이야기라네." 3 여인의 긴 손톱이 사내의 등을 긁었다. 길게 네 줄기 혈흔이 그어지면서 피가 배어나왔다. 근육질로 뭉쳐진 구릿빛의 넓은 등판을 긴 혈흔은 위에서 아래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그러나 사내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열락의 도원경 속에서 전신의 핏줄이라는 핏줄은 모조리 터져나가고야 말 것만 같은 환희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무표정한 얼굴. 내려깐 두 눈이 사내의 얼굴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젖을 빨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녀의 가슴이었다. 알맞게 봉긋하고 실핏줄이 드러나도록 희고 투명한 가슴에 사내의 입이 물려져 있었다. 사내는 몽혼약이라도 들이킨 양 게걸스럽게 가슴을 물고 전신을 허우적거렸다. 온몸의 힘줄이라는 힘줄은 모두 툭툭 불거져 나온 꼴이었다. "그만." 여인은 사내를 발로 가볍게 밀어냈다. 그러나 눈이 허옇게 까뒤집힌 사내는 다시 그녀의 젖가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만 하래두." 여인의 흰 손가락이 슬쩍 움직였다. 희고 고운 손 끝에 기이하도록 긴 손톱이 아름다웠다. 퍽! 사내의 미간에서 붉은 피가 튀었다. 붉은 점 하나가 생기는가 싶더니 이내 분수처럼 선혈이 솟구쳤다. 사내는 그대로 벌렁 자빠져서 피를 쏟는데 여인은 피에 나삼자락을 더럽힐까 얼른 자락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대로 침상에 드러누워 천정으로 시선을 보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죽은 사내를 끌어내는 것이리라. 피를 닦고 다시 사내를 들여보내겠지. 아니, 사내도 지겹다. 별로 재미있는 상대들이 아니다. 이보다는 무언가 더한 놀이가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강호에 나왔는데 이렇게 무료할 수가. 그 곤륜왕이라는 작자는 좀 괜찮은 남자 같은데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 다른 남자처럼 다루려고 들면 못 다룰 것도 없는데 왜 그 남자는 뭇 남자들과 다른 걸까? 가까이 하면 좀체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면 한없이 자신이 작아지는 것만 같고 주눅이 들고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아니, 난 사람이 아니야. 여인은 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사람이 아니야.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이젠 반인반귀가 되었어. 내가 반인반귀가 되니까 엄마는 스스로 죽어버렸지. 스스로 죽지 않으면 빙요화 때문에 늙지를 않아서 죽지도 않는다고 했어. 너무 오래 살아서 싫다고 했지. 죽기 전에 남긴 이야기. 믿을 수가 없어. 엄마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게. 엄마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더 남자를 싫어했고 세상을 싫어했고 외로운 걸 좋아했는데. 사랑이라니. 여인은 눈을 감고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의 모습이 떠오르자 엄마가 했던 기나긴 엄마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떠올려졌다. 4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아름답고 착하고 연약했다. 그래서 뭇 남자들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남자들에게서 대접을 받을 수는 없었다. 여인은 거리의 창기였고, 거리의 창기라는 말은 교육받은 기루의 기녀는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녀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심어진 집 앞에 다른 동료 창기들과 나란히 서서 지나가는 사내들과 눈을 맞추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고, 하루 종일 사내들을 몸 위에 올려놓고 지내야만 저녁 한끼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만일 그녀 정도의 미색에 그녀 정도의 성품이라면 그녀에게 조금만 운이 닿았어도 그녀는 세상을 보란 듯이 살 수 있는 유명한 명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를 못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창기로 살아가야만 할 운명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름꾼이었고 어머니는 창기였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녀 나이 열 살에 그녀는 노름판의 판돈을 대신 해서 미루나무가 있는 커다란 집으로 팔려나갔다. 미루나무는 그때부터 그녀와 가장 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녀의 나이가 이제 열 다섯을 넘었어도 그녀와 친구가 될만한 것은 미루나무 뿐이었다. 미루나무 외에는 누구도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집안의 누구도 손님을 받지 못하는 날에도 그녀는 뛰어난 미색 때문에 손님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녀 덕에 쉬어터진 만두라도 얻어먹게 되는 같은 동료 창기들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식사로 만두를 먹지 않았다. 물론 만두보다 질긴 것은 더더욱 먹지 않았다. 미루나무집의 주인은 언제나 그녀에게 멀건 죽만 주었다. 죽에 고기를 갈아서 넣어주는 것은 순전히 장사 때문이었다. 가장 손님을 많이 받는 그녀가 아프거나 죽으면 그만큼 손해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그녀가 언제 어느 때도 웃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거리에서 손님과 눈을 맞출 때도 절대 웃지 않았다. 손님이 화대를 후하게 주어서 주인에게 칭찬을 들어도 웃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린 아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나는 사람의 어린 아기가 자신을 보고 방긋방긋 웃으며 재롱을 떨어도 그녀는 절대 웃지 않았다. 물론 아기도 오래 그녀를 보고 방긋거릴 수 없었다. 아기의 부모가 질색을 했으므로. 그녀는 그렇게 아무리 즐거운 일이나 우스운 일이 생겨도 웃지 않았다. 웃으면 황금 한 푼을 준다고 꼬드기는 손님 하나가 결국은 화를 내고 가버리는 바람에 황금 한 푼을 놓친 주인에게 종일 시달리며 웃음을 강요 당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녀같은 처지에 하루 종일 주인이 웃으라고 하는데도 웃지 않으려고 할때는 인내심이나 강한 의지같은 종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내심이나 강한 의지로는 절대 미루나무집 주인의 매질과 고문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마침내 포기했을 때 그녀는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심한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그녀는 절대 웃지 않았다. 물론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가 그렇게 웃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죽만을 먹거나 웃지 않는 데에는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로 타당한 이유였다. 그녀에게는 이빨이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녀가 처음 열 살의 나이로 미루나무집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녀는 아직 남자손님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녀가 손님을 받기를 원했고 어린 그녀를 원하는 손님들이 종종 있기도 있었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에 손님을 받으면 자칫 상하게 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주인은 머리를 굴렸다. 그는 그래도 그 계통에서 늙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머리 회전이 제법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는 아주 간편한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그녀의 이를 모두 뽑아내고 입으로 손님을 받게 하자. 입이 작았으므로 이빨을 모두 뽑아내지 않으면 손님을 받기가 어렵고 손님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주인은 그녀의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리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철없는 것이 울기는 우라지게 울어대는데 한 번에 두 개, 한 달에 네 개 이상은 뽑지 말라고 놀러 왔던 의원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주인은 꼬박 칠 개월을 그녀의 이빨과 싸워야만 했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른이든 어린 아이든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처음 서너 달은 이빨이 뽑히고 퉁퉁 붓고 하는 고통 때문에 울고불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점점 자신의 이상하게 변해가는 입을 벌린 모습 때문에 날마다 울고불고 하였다. 고통은 습관이 되어지지만 수치스러움은 절대 습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앞니가 완전히 빠지던 사 개월 째부터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이빨을 다 뽑은 그날 주인은 이빨을 다 뽑은 기념으로 그녀에게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구구. 구구(口狗)인지 구구(狗口)인지는 알 바가 없이 사람들은 그날부터 그녀를 구구라고 불렀다. 물론 주인이 머리를 잘 쓴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송곳니까지만 뽑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인은 내친 김에 미루나무집의 명물을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빨을 완전히 다 뽑은 것인데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빨이 하나도 없으면 볼이 허물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그녀에게 항상 물뿌리 나무로 만들어진 이빨 대용을 입에 넣고 지내도록 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잇몸이 터져서 피가 나고 짓물러서 고름이 잡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금세 굳은 살이 박히고 잇몸은 나무의 억셈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가 없는 것보다 더 흉측했지만 대신 볼이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워낙 연약하고 마음이 고왔던지라 그렇게 되어서도 자살을 시도하거나 표독스러워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주인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돈벌이가 작으면 주인에게 미안해했다. 자신은 돈을 받고 팔려 왔으므로 당연히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녀 자신이 너무나 별볼일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동료들이나 손님들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그다지 몹쓸 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손님들이나 동료들이 자신을 좀 덜 미워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손님들은 그녀를 구박하고 업신여기고 괴롭히면서도 꾸준히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이제 그녀의 입 놀리는 기술은 천하의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손님들에게 너무나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손님들이 꾸준히 와야만 주인이나 동료들이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두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된 인생이었고 인간의 인생은 누굴 탓할만한 것이 아니므로 결국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선택된 그녀 자신의 탓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녀는 죽을 때까지 웃지 않을 것이다. 5 그런 어느날. 미루나무 집에 괴이한 인간 하나가 찾아들었다. 허름한 마삼에 봉두난발을 한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는데 그 모습이 구토를 일으킬 정도가 아니라 꿈에 볼까 무서울 정도로 징그럽게 생겨먹은 인간이었다. 얼굴에서부터 전신이 완전히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그냥 죽어있는 게 아니라 썩어 문드러지는 걸 억지로 말린 듯한 형상이었다. 불에 데었어도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고, 동상에 걸려서 얼었다가 풀렸다가 다시 얼기를 수십 번은 해야 그렇게 될 성싶었다. 게다가 두 눈동자는 푸른 빛을 띠었고 양 손은 갈쿠리 같이 괴상하게 휘어지고 보기 싫은 손톱이 네 치 정도나 자라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창기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버리고 말았다. 주인도 이런 놈은 침상을 버릴까 두려워 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다. 물론 어디서 진물이 나거나 고름이 잡히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런 인간까지 집안에 들인다면 소문이 나서 다른 손님들이 오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런데 단 하나 창기 중에서 구구만은 그를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구구는 괴인을 향해 다가가면서 눈을 맞추었다. 여기저기로 숨어든 창기들이 눈짓 손짓에 발짓까지 해보였지만 그녀는 그냥 괴인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생전에 주인이 싫어하거나 동료가 싫어하는 짓은 절대 하지않았었다. 그런 그녀가 왠지 이 괴인에게는 마음이 동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중에 주인에게나 동료들에게 호되게 당할 것은 각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구를 괴인에게로 이끈 것은 바로 저 괴인도 자신처럼 주변으로부터 당연히 학대를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괴인에게 하룻밤이라도 여인의 정성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단지 그것이 이유였다. 괴인은 그녀에게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괴인은 구구와 함께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집안으로 들어서던 주인은 다른 창기들의 말을 듣고 기겁을 해서 뒤를 쫓으며 당장 나가라고 악을 썼다. 그러나 괴인이 슬쩍 한 번 돌아 본 그 순간에 주인은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괴인의 두 눈에서 파란 인광이 귀기를 머금고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주인은 창기를 데리고 장사를 하는 몸이니 당연히 무공을 알았다. 무공 깨나 할 줄 모르면 이런 장사는 해볼 엄두도 못내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그 눈빛만으로도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깨닫고 분루를 삼키면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괴인과 구구는 그렇게 해서 한 방에 들어가 앉았다. 방이라야 침상 하나가 전부였다. 그나마 침상 위가 아니고는 사람이 앉을 만한 곳은 없었다. 그 침상 위에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소저는 이름이 무엇이오?" "구구이옵니다." 괴인이 물었고 구구는 입을 가린 채 대답했다. "좋은 이름이구만, 다 갖춘 옥이라니." 그녀는 놀랐다.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도 풀이할 수 있는 것인가? 무식하니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엄청나게 고마웠다. 괴인은 옷을 입은 채 침상에 모로 눕더니 다시 말했다. "날 뒤에서 좀 끌어안아 줄 수 있겠는가?" 구구는 그가 시키는대로 했다. 그의 뒤에 나란히 누워서 그를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괴인에게 있어서 한 가지 더 예상치 못한 괴이한 점은, 바로 그 자세 그대로 괴인은 밤을 지내더라는 점이었다. 괴인은 아무 것도 시키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하고 밤을 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괴인은 다시 말했다. "나는 보다시피 흉측하기 짝이 없어서 누구나가 꺼리는 사람이오. 나는 항상 사람이 그리웠는데 오랜만에 소저를 만나서 푸근하게 하루를 지낼 수가 있었소. 이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혹시 소저는 나와 함께 살 마음이 없으시오? 나는 비록 행색은 이렇지만 가진 의술이 조금 있어서 우리 고장에서는 먹고 살만한 사람이오. 물론 소저에게 매일 나와 함께 생활을 해달라고는 절대 강요하지 않겠소. 나같은 몰골을 평생 어 찌 보고 살겠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가끔 어젯밤처럼 그렇게……." "하지만 저는 이곳에 묶인 몸이라……." "그 점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소저가 허락만 한다면 나는 소저가 이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아니 앞으로 사는 날까지 어디서나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드리겠소, 약속하오." 그의 말은 구구에게 있어서는 마치 선몽 속의 신선이 하는 말과도 같았다. 사실 괴인은 침상에서 첫 마디를 꺼낸 것부터 구구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어느 손님들이든 그녀에게는 당연히 하대를 한다. 그리고 구구라는 이름을 두 가지 이상으로는 해석하지 않는다. 게다가 밤새 그 이름값을 하라고 볶아대지 않는 손님은 괴인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구구로서는 난생 처음 편안하고 아늑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엄마 젖을 떼고 난 이후 진짜 처음이었다. 구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긴가민가하여 그저 꿈이라면 조금 늦게 깨었으면 했다. 그런데 괴인은 대뜸 주인을 불렀다. 그 무시무시하고 눈만 부라려도 근처의 모든 이를 남녀노소할 것 없이 떨게 했던 주인이 비루먹은 개처럼 괴인 앞에서 비실거렸다. 게다가 괴인이 전대에서 암소 눈알만한 황옥 하나를 꺼내 던지자 한눈에 그 진가를 알아 본 주인은 그야말로 입이 찢어질 판이었다. 어차피 창기는 늙는다. 지금은 잘 팔려도 미색이 퇴색하면 자연히 돈벌이는 줄게 되어 있다. 물론 그때 가서는 그때대로 다 써먹을 수야 있겠지만 허드렛 일이나 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런데 황옥이라니. 6 괴인은 남창(南創)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는 남창에서 꽤 알려진 유명한 의원이었고 사람들은 그의 흉측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서라도 찾아와서 약을 지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흉독의(兇毒醫)라고 불리웠다. 왜냐하면 독에 중독되거나 독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그에게 와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몰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흉독의는 돈을 꽤 잘 벌었다. 돈이라면 나름대로 아쉽지가 않았다. 그는 돈을 잘 버는 외에 돈을 잘 쓸 줄도 알았다. 같은 동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자주 도왔고 과부나 고아나 거지들도 자주 도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몹시 사랑해주었다. 그녀는 항상 그와 함께 있었다. 하루 열 두 시진을 항상 그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맥을 할 때에도 약을 지을 때에도 그녀는 항상 그의 곁에 앉아서 심부름을 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랑에 겨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운우지정을 나누었고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야속하고 슬프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행복했지만 주변에서는 두 사람을 오해하고 있었다. 바로 신부가 웃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흉독의에게 어디선가 어떤 사연이 있어서 끌려는 왔으되 자신의 신세 때문에 웃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생각을 해보라. 저런 천하절색이 어찌하여 저런 몰골의 의원과 살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구구는 남창으로 온 뒤 너무나 그 모습이 변해버렸다. 그녀의 모든 면모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더니 마침내는 그녀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하절색임을 보여주게 되었다. 두 사람을 두고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들을 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그녀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오해를 풀어주기라도 해야겠다는 듯이 그녀는 마냥 웃으면서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웃으면 그녀의 꽃잎같은 두 잎술 사이로 가지런히 아름답게 고른 하얀 치아가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에게 새로운 이가 솟아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야만 할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인간은 백 살이 넘기 전에는 절대로 세 번째 이빨을 가질 수 없으니까. 그녀는 그것을 당연히 흉독의가 준 것이라고 여겼다. 그가 매일 하늘에 기원해서 자신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흉독의는 그녀에게 있어서 생명이요, 하늘이요, 이 세상의 전부였다. 7 인생은 길다. 어느 한 상태로만 지속되기에는 너무나 길다. 구구는 십 오 년의 불행한 생활 끝에 꿈에서도 바라보지 못했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칠 년을 살았으니 지난 세월이 언제 그랬었던가 싶도록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마치 자신은 태어날때부터 행복했었던 것처럼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날. 폭풍우가 그리도 무섭게 쏟아져 내리던 어느날 밤. 십여 명의 무림 고수들이 느닷없이 흉독의의 의가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흉독의에게 어떤 무공의 비급을 내놓으라고 했고 흉독의는 당연히 거절하여 맹렬히 무림인들과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구구는 처음으로 흉독의가 상당한 수준의 고수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흉독의는 바람처럼 움직이고 악귀처럼 싸우면서 몰려든 무림인들을 상대하여 싸웠다. 그의 싸우는 모습에서 구구는 처음으로 그의 무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림인들은 마침내 일단 물러가게 되었다. 그들 중 다섯은 다치고 다섯은 죽어서 갔다. 그들이 물러가자 흉독의는 그제서야 구구를 앉혀놓고 그녀에게 자신의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흉독의의 본명은 전숙희(全肅熙). 호는 광신의(狂神醫)였으며 무림에서 유명한 의원이었다. 그는 의술이 뛰어나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했고, 특히 무공 대결로 인해서 내상을 많이 입는 무림인들은 그에게 와서 자주 치료를 받고는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해치는 무공을 배우기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배우고 싶어했고 끝없이 노력하여 신의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기에 의원으로 지내면서 무공이 강한 자들에 대해서 별반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날 의원으로만 만족하던 그에게 무공을 배워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는 엄청난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어느 여인을 한 명 사랑하게 되었고 그 여인은 그를 사랑했으되 그녀는 무림에서 알아주는 금화문(錦畵門)의 문주 금화자(錦畵子) 마운(麻雲)의 딸이었다. 집안이 전통적으로 무가였고 무인만을 인간으로 취급하는 그들이었기에 당연히 무공이 없는 전숙희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전숙희가 지닌 뛰어난 의술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고 무공도 모르는 자에게 딸을 줄 수는 없다고 냉대하였다. 그리고 여인 역시 무공이 강한 남자를 원했기에 전숙희는 그녀와 결혼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숙희는 도저히 그녀를 포기할 수가 없었기에 그녀에게 최고의 무공을 익히고 다시 나타날테니 결혼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녀에게 삼 년 내에 무림의 최고수가 되어 나타나면 결혼하겠다는 허락을 구한 후에 그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거듭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의 무공은 별반 나아지지를 못했다. 무공이란 어느날 갑자기 후다닥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무공을 익히려고 각 방파에 찾아도 가보고 스승을 찾아 떠돌기도 했으나 어느 방파에서도 단시간 내에 고수를 만들어 줄만한 능력은 없었다. 그는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고강한 무공을 가장 단기간 내에 습득하는 길은 절세의 무공비급을 손에 넣어 연마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무공 비급을 찾아 세상을 주유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엄청난 무공비급 하나를 손에 넣었다. 빙요수전(氷妖首典). 무공 비급의 이름으로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이 한 권의 비전은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비전이었다. 그는 비록 무공이 얕지만 무공에 대한 속성, 그러니까 무공비급을 구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의학을 잘 알았으며 의학과 내가상승의 무공을 익히는 구결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빙요수전은 그가 아는 한 만약 오성 이상만 익힌다면 천하에서 제일가는 빙공을 익히는 것이 될 것이고 현 강호무림에서 그를 대적할 자는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도 있는 고강한 것이었다. 전숙희는 미친 듯이 빙요수전을 익히기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그는 혼신을 경주해서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동안 빙공을 익히느라 그는 전신이 동상으로 얼었다가 썩었다가 짓물렀다가 수없이 고난의 반복만을 되풀이했다.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아, 이것은 음기가 강한 여인네들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다. 남성의 양기는 계속해서 상극으로 부딪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빙공을 익힐 수도 없고 밖으로 표출되기도 전에 내부에서 먼저 나 자신의 양극과 부딪쳐 내 몸을 망가뜨리고 있구나.' 만일 그가 뛰어난 의원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죽은 시체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의술을 지녔기에 자신의 몸을 자신이 직접 치료하면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원했던 무공의 증진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실망을 안고 다시 사랑하던 여인을 만나러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자 했다. 그는 그녀를 만나서 빙요수전을 전해주고 대신 익히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를 본 순간 사람들은 질겁을 해서 모두 달아나고 그의 근처에도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그녀의 살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그곳의 호위 무사들에게 무참하게 두들겨 맞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서 그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저항할 힘도 저항할 가치도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겨우 이 정도 사랑을 믿고 내가 이렇게 미친 듯이 헤매었던가. 허탈하고 허무할 뿐이었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자신이 무공을 갈고 닦던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산 속에서 미친 듯이 다시 빙요수전을 익히려고 했다. 다시 오 년이 지나고, 그는 겨우 일성을 터득할 수 있었다. 오 년에 단 일성. 그것을 익혔을 뿐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공이 이미 반 갑자에 이르고 내부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번져서 주변의 사물을 마음만 먹으면 얼어붙게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단한 결과였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결과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 년에 일성을 익힌다면 모두 완성하는 데에 오십 년이 걸린다. 아니,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다. 이후는 더 어려워서 지금의 몇 배, 몇십 배가 더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빙요수전을 그만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홀연히 산을 내려왔다. 그녀를 사랑했던 기억도 무공을 배워 보겠다던 미련도 모두 산에 훌훌 털어버리고 의술로 사람들을 돌보며 살리라 마음먹고 산을 내려왔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의술을 펼쳐주었다. 처음에는 그의 몰골로 인해서 접근을 꺼리던 사람들도 그의 의술에 탄복해서 제법 사람이 꼬이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평안하게 흘러가는 듯싶었다. 마음은 평정을 찾았고 사는 데에 불편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아니, 그렇지가 못했다. 고독. 진정으로 뼈에 사무치게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누군가가 단 하루만이라도, 아니 단 한 시진 만이라도 자신과 함께 끌어안고 누워 있어 준다면, 아니 그렇게 크게는 바라지 말고 그저 손만을 잡고 누워 있는다면. 그는 날마다 고독이라는 적과 싸우기 시작했다. 혼자 도를 닦고 혼자 살아가기를 원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원해서 그러는 것이므로 고독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 있기 싫어도 혼자 있어야만 하는 사람은, 친구가 필요해도 스스로 친구 하나 사귈 수가 없는 사람은 고독이 무엇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요 고통스러운 것이다. 미워했던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를 다시 찾지는 못하더라도 그녀를 생각하면서 창기라도 끌어안고 하루를 보내리라.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졌지만 시도해 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에서 구구를 만났다. 그는 처음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도저히 창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었다. 어째서 저토록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저런 창기가 되어서 미루나무 아래에 서서 지나는 남자들과 눈을 마주쳐야만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저 여인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가 남달랐다. 그래서 언제나 여인을 볼 때면 여인의 전체적으로 풍기는 아름다움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는 여인의 눈을 본다. 구구의 눈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에는 선함이 담겨져 있었다. 눈이 선한 여인의 아름다움. 그는 그녀와 함께 하루를 지내면서 다른 것은 원치도 않았다. 자신의 괴물같은 몰골에 여인과의 정사를 바란다는 건 진정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만 여인이 자신을 잠시 끌어안고 있어주기만을 바랬다. 말로는 밤이 새도록 안아 달라고 했지만 사실 자신이 잠이 들 때까지만 안아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녀는 달랐다. 여인은 밤이 새도록 그와 함께 있어주었고 그냥 있은 게 아니라 정성껏 그의 흉측한 몰골을 어루만져 주었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들 수 있게 해주었고, 그의 겨드랑이에 머리칼을 비비며 잠이 들었다. 그는 행복했다. 자신의 전 생애에 있어서 더 행복한 시간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감사하고 떠나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녀를 두고는 떠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스스로 추악한 욕심이라고 자신을 나무라고 가끔 오면 된다고 자위했지만 그는 미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인에게 자신과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주인이 놓아주지 않을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은 자신이 설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그 앞에서 자신의 입안을 보여주었다. 전숙희는 그녀의 입안을 본 순간 자신이 미쳐버릴까 두려웠다. 인간은 잔인하다. 인간은 소나, 말이나, 늑대나, 이리보다 잔인하다. 그것은 당연하다. 인간이 그들보다 더 영리하기 때문에 잔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전숙희는 아름다운 그녀를 이따위로 만든 주인 놈을 단방에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맑고 고운 영혼에 아름다운 자태를 생각하면 신성함을 발로 짓밟고 침을 뱉아버린 것만 같아서 끓어오르는 살의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녀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주인을 그 자리에서 쫓아가 죽여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구구가 그에게 입 안을 보인 것은 자신의 이런 몰골을 데려가겠느냐는 뜻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입 안을 보인 것이 자신과 함께 가겠다는 허락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인에게 처벌 대신 보석을 주었다. 그녀가 주인에게 고마워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그녀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리라. 8 "그날 밤 전숙희는 무림의 고수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네. 그러나 구구는 빙요수전을 가지고 탈출할 수 있었지. 전숙희가 그녀에게 비급을 가지고 도망가도록 강요했기 때문일세. 그녀는 가지 않겠다고 울고불고 했지만 이미 전숙희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고 그녀를 설득했네. 빙요수전을 익혀서 두 번 다시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일세." "이해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지키려면 차라리 빙요수전 따위를 주어버리고 둘이 계속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이룡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금불대사가 머리를 저었다. "자넨 판관이면서 그 정도도 모르겠나? 빙요수전 같은 귀한 비급을 손에 넣으면 가장 먼저 인간들이 하는 짓은 바로 자신들이 그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게 하는 일일 것이고, 그러자면 제일 먼저 그 두 사람을 없애야만 할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전숙희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완벽하게 그녀를 빼돌렸던 것이네." "대단한 것은, 그녀가 탈출한 후 무림인들이 비급은 얻지도 못한 채 전숙희만을 죽이고 사라지자 그녀는 다시 살던 집으로 되돌아 와서 죽은 전숙희의 시체에서 목을 베어가지고 사라졌다네. 그리고……." "빙요수전을 익혔겠지요." 금불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네." "그 후 다시 강호에 나타났습니까?" 사이룡은 이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원한을 갚으려면 슬픔에 젖어 있어서만은 안된다. "그녀가 다시 강호에 나타난 것은 그날로부터 정확히 이십 년 후였네. 무공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그녀가 빙요수전을 익히는 데에는 이십 년도 기적적이지. 이십 년 만에 그것을 익혔다고 하면 그녀는 그야말로 혼신을 경주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금불대사가 먼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개 구름이 하늘 가득히 떠있었다. "그녀가 빙요수전을 익히고 난 후에 다시 강호에 나타나서는 예전의 원수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잔인하게 죽여버리고 말았네. 물론 그녀는 나타날 때마다 항상 해골을 지니고 다녔지. 바로 전숙희의 해골을 말일세. 그녀는 원수를 찾아내어 만날 때마다 원수 앞에서 해골을 꺼내놓고 지난 날을 상기시켜 주고는 잔인하게 죽였다네. 그리고 해골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이세요? 정말 잔인하게 죽였어요." 9 여인은 백랍같은 얼굴을 흔들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잊으려고 애썼다.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다 해준 후 그녀에게 절대 강호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했다. 천산의 빙궁(氷宮)에서 위글(回契)의 사내들을 노리개로 삼으며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강호는 더러운 족속들이 도처에 널려있어서 그들과 부딪치며 살면 마음의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으리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 세상 누구도 감히 무시하지 못할 무공을 전수해 주었지만 그 빙요수전을 익히는 것은 엄청난 각오와 시련이 뒤따랐다. 어머니의 강요로 힘들게 그것을 배웠지만 그것을 강호에 나가서 써먹지는 말라고 하니 배우나마나한 무공이었다. 위글족의 사내라면 그녀가 익힌 간단한 내가상승의 무공으로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다. 그녀는 중원에 가고 싶었다. "이제 중원에 가는거야." 여인은 새로 불러들인 사내가 앞에서 덜덜 떨며 옷을 벗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사내 놈은 자기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사내를 향해 부드럽게 눈웃음을 보냈다. "네게 하는 말이 아니야, 겁내지 말아. 남자는 여자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해." 사내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기를 얻었는지 남성이 불끈 솟구쳤다. "이리 와." 여인의 긴 손톱 끝이 사내를 불렀다. "이리 와서 내게 네 힘을 과시해 봐. 날 짓밟고 네 것으로 만들어 봐. 정복자가 되어 봐." 사내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흰 나삼 자락을 찢듯이 벗기고 그녀 위에 올라가서 근육이 터져라고 찍어눌렀다. 젖가슴을 빨면서 두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넣었다. "호호호. 그래, 그렇게. 그렇게……." 여인이 흐드러지게 웃었다. 여인의 이름은 빙요화,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다른 이름이 없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