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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살장의 살인귀들 비류신과 홍부용은 함정으로 떨어지는 순간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밑으로 떨어지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그 영향으로 두 사람은 별로 큰 충격을 받지 않고 지면에 내려설 수 있었다. 이때-- 누린내가 두 사람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시키는 동시에 두 줄기의 그림자가 질풍처럼 덮쳐 들었다. 두 사람은 황망한 중에 당한 일만으로도 마음의 안점을 잃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계속해서 마수를 받게 되자 크게 놀랐다. 함정 속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안력으로 주위의 사물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두 개의 그림자는 제각기 손을 활짝 벌린 채 달려들었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상대의 정체를 살필 겨를도 없이 오른손을 휘둘러 날카로운 장력을 쏟아 냈다. “윽--” 두 그림자는 어디에 장력을 당했는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나동그라졌다. 그들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비류신은 한 번 쓰러져서 다시 움직이지 않는 두 그림자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주위에 눈길을 돌렸다. 홍부용도 여자답지 않은 담력으로 주위를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머무르는 순간, 흠칫 놀라며 동시에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정말 가공할 만한 광경이었다. 비류신은 물론이고 여자인 홍부용 역시 상대가 누구든 고강한 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함정 속의 광경을 본 순간 그럴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함정 속은 한마디로 인간이 만든 지옥과 같았다. 어둠의 구석구석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의 사자와 흡사해 보였다. 함정은 바로 지하실이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큼지막한 석대 위였고 그 밑으로 십여 개의 계단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계단 모서리마다 살을 베일 듯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고, 큰 돌을 깎아 만든 듯 이음새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처음에 함정 속으로 빠졌을 때, 하루 동안 꼬박 어둠과 싸우는 사이 어둠에 적응할 수 있는 안력을 얻었던 것이다. 이곳 두 번째 함정도 처음 못지않게 어두웠지만 그들은 십여 장 근처의 정경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지하실 바닥에는 무수하게 많은 해골 조각들이 보였다. 그 중에서 인광을 발하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 모양은 마치 전설 속에나 나옴직한 지옥의 백골성을 연상케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더 깊숙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계단 끝으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여러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느 사람은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온갖 비극 중에서도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처참하고 몸서리나는 것이었다. 옷은 모두 찢긴 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고 온몸은 때가 끼어 거무스름한 빛을 냈다. 앙상한 갈비뼈와 해골 같은 얼굴, 그리고 이상스러울 만치 배만 툭 불거져 나온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인의 형상이었다. 그들은 형상만 사람처럼 생겼지 유령이나 지옥의 사자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었다. 살은 이미 썩은 지 오래 된 듯했고, 어떤 사람은 가죽과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해골에 가죽을 씌운 듯했다. 그들은 구석에 앉아 백골을 먹고 있었다. “우드득--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어도 뼈를 깨무는 소리가 역력하게 들렸다. 그들은 마치 닭고기나 쇠고기를 먹는 듯 입맛을 다셔가며 꿀꺽꿀꺽 삼켰다. 그들은 같은 사람의 뼈를 맛있게 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지쳐 있는 것일까? 그렇다! 그들 대부분은 벌써 십여 년간이나 쌀밥을 구경하지 못하고 오직 죽은 사람의 뼈를 양식 삼아 살아온 것이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뜻하지 않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광경을 보면서 두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 사람의 뼈를 먹다니… … 두 사람은 섣불리 행동을 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만 그러했지 그 뒤의 광경은 그보다 더할 것 같아서였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조금 전에 쓰러진 두 사람의 비명소리를 들은 듯 비류신과 홍부용이 있는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괴이한 광경과 괴인 같은 사람들에 홀린 듯 멍청한 눈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두려움으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히히… 낄낄… …” 낮고 높은 웃음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그러자 이제까지 제 할 일만 하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두 사람이 있는 층계 밑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산 사람의 신선한 냄새를 맡은 야수가 눈빛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듯했다. 비류신과 홍부용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괴인들은 굶주림에 지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에게 살기등등한 기세를 보였다. 만약 그들의 뜻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둘은 순식간에 살과 뼈가 그들의 제물로 사라질 것이다. 비류신은 홍부용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큰일 났구나.저들에게 잡혀 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까지 저들과 똑같은 괴인으로 변할 것이 아닌가?’ 공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히히… …” 사방에서 곧 그 웃음을 받은 또 다른 웃음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그 웃음소리는 듣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만의 신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네 명의 괴인이 일시에 층계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경공과 무공을 익힌 듯했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일시에 쌍장을 들어 강맹한 장력을 쏟아 보냈다. 네 줄기의 장력은 곧장 네 괴인의 가슴팍을 향했다. 네 괴인은 열 개의 계단 중에서 여섯째까지 다다른 순간 강맹한 장력을 맞고 이장 뒤로 나동그라졌다. 귀신의 울음인지, 늑대의 부르짖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비명소리가 지하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야윈 체구에 장력을 맞았으니 괴인들의 몸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낄낄낄… …” 이번에는 옆쪽에서 괴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네 괴인의 죽음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근처에 있던 괴인들도 따라서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다음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자세를 낮추었다. 층계 밑으로 보이는 괴인은 모두 삼사십 명이나 되어 보였다. 그들은 갑자기 조금 전까지 같은 동료였던 사람에게 무자비한 손길을 가하는 것이었다. 긴 손톱을 곤두세우고 팔, 다리, 머리 등 신체의 모든 부분을 갈기갈기 찢어 먹기 시작했다. 삼사십 명이 네 구의 시체에 달라붙어 아우성을 치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우드득!” 어느 괴인이 뼈를 깨무는지 둔한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네 구의 시체는 뼈 하나 남김없이 사라졌고 삼사십 명의 괴인들 입가에는 선혈이 낭자해졌다. 홍부용이 강호에 나온 이래 처음으로 보는 광경에 자꾸만 몸서리를 쳤다. 어느 때는 고개를 돌리며 눈살을 잔뜩 찌푸리기도 했다. 동료 네 명의 시체를 거뜬하게 먹은 괴인들은 다시 비류신과 홍부용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길에는 또 먹을 것을 달라는 암시가 깃들어 있었다. 괴인들은 어찌된 일인지 웃지도 않았다. 지하실 안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침묵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보다 더한 공포와 긴장을 쌓이게 했다. 얼마 후 괴인들은 서서히 계단 밑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기세로 보아서는 삼사십 명 모두가 일시에 계단을 오를 것 같았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괴인들이 하나 둘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서 있는 괴인은 벌써 두 개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홍 낭자, 차라리 앞으로 나서서 정면충돌을 합시다.” 그 사이 서너 명의 괴인이 계단 위까지 올라와 두 사람을 덮치려 했다. “꺼져라!” 홍부용은 날카롭게 고함을 치며 손바닥을 쫙 펴더니 장풍을 쏟아 보냈다. 장력은 넓게 퍼져 괴인을 한꺼번에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뒤에서 따라 올라오고 있던 괴인들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새로 죽은 동료에게 달려들었다. 홍부용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요, 우선 우리도 밑으로 내려가도록 해요.”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나누고 마치 독수리처럼 빠르고 가볍게 몸을 날려 지하실 바닥으로 내려섰다. 괴인들은 죽은 동료의 살과 뼈를 먹느라 두 사람이 뒤로 내려선 것도 몰랐다. 비류신은 신속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지하실에는 서너 명의 괴인 이외에도 많은 괴인이 보였다. 불빛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 찾을 수 없었다. 괴인들이 서너 명의 시체를 뜯어 먹은 것은 잠깐이었다. 두 사람은 괴인들 뒤에서 능히 손을 쓸 수 있었으나 차마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가 없어 한참 동안을 머뭇거렸다. 괴인들은 모두 뼈만 앙상하게 남았으므로 힘이나 무공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여자보다도 연약한 상대에게 등 뒤에서 손을 쓴다는 것은 강호 무림인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괴인들은 동료를 다 뜯어 먹고 다시 계단 위를 바라보고서야 두 사람이 그들 뒤에 내려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히히… 낄낄… …” 입가에 선혈을 흘리며 괴상하게 웃는 괴인들의 모습은 정말 오래 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밑으로 내려선 것을 죽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던지 서슴없이 덤벼들었다. 아니 서슴없기보다는 자기가 먼저 신선한 살을 먹으려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비류신은 발을 크게 구르며 청천벽력과 같은 고함을 질렀다. “모두 멈추지 못할까!” 그 음성은 마치 일시에 만 마리의 준마들이 달리는 말발굽 소리 같았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는 조그만 지하실 벽을 부술 것도 같았다. 괴인들은 모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고 우뚝 섰다.그러나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진영은 부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본 괴인들 얼굴은 더욱 징그러웠다. 움푹 파인 눈두덩, 툭 불거진 광대뼈, 입술의 형체가 없어진 입, 가느다란 목, 그리고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등… … 비류신의 고함소리는 양쪽 벽에 아직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괴인들 중에서도 과격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계속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을 내밀고, 긴 손톱으로 두 사람을 위협하듯 빙글빙글 돌리는 괴인도 있었다. 두 사람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주위를 천천히 휘둘러보았다. 어느새 괴인들은 육칠십 명이나 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드러누워 있던 괴인과 별 관심을 보이기 않던 괴인들도 모두 두 사람 주위에 모여 있었다. 두 사람은 흠칫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괴인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두려워하는 기색을 엿보이자 고함소리에 주춤했던 기세를 되찾은 듯했다. “낄낄낄… …” 누가 먼저 웃었는지 육칠십 명의 괴인들 중 반 정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홍부용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이때 괴인 다섯 명이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그들은 길고 뾰족한 손톱이 주 무기인 듯 그것만 앞으로 내밀며 휘둘렀다. 비류신이 먼저 장력을 내쏟았다. “악!” 일시에 다섯 명의 괴인이 처절한 비명소리를 남기며 나동그라졌다. 괴인 무리들은 이번에는 나가떨어진 그들에게 달려들어 살을 뜯지 않았다. 아마 신선한 두 사람의 피를 더 욕심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섯 명이 쓰러지자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이 모두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동시에 쌍장을 휘둘렀다. 곧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여덟 명이 쓰러졌다. 휙-- 휙-- 두 사람의 거센 장력이 계속 이어지면서 괴인들은 쓰러졌다. 지하실은 이제 완전히 도살장으로 변했다.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달려드는 괴인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장력을 날리는 비류신과 홍부용 중 그 어느 편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들 모두가 삶을 위한 투쟁을 이런 방법으로 지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괴인들은 수적으로 우세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속속 쓰러지는 괴인들을 넘어서며 계속 공격이 이어졌다. “어머!” 홍부용의 놀란 외침소리가 날카롭게 일었다. “왜 그러오! 혹시 다치기라도 했소?” “아니에요, 옷이 찢겼어요.” 홍부용의 치마가 몇 군데 찢어져 있었다. 괴인들은 미친 듯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죽음을 초월한 공격은 그 기세가 말할 수 없이 고강한 것이었다. 맹수가 몸에 상처를 입으면 보통 때보다 몇 배 사납게 날뛴다고 하듯 이 괴인들도 동료의 처절한 죽음을 볼수록 전세가 가열되는 것 같았다.한사람이 죽으면 그만큼 거칠어지고 또 두 사람이 죽으며 그만큼 무섭게 달려들었다. 비류신의 옷도 몇 군데가 찢어졌다. 그는 상황이 험악함을 재인식하고 재빠르게 장검을 뽑아 들었다. “홍 낭자, 이대로는 안 되겠소. 낭자도 검을 뽑으시오. 우리가 살려면 할 수 없이 저들을 죽여야 되오!” “좋아요.” 홍부용은 장검을 뽑으면서 앞으로 덮치고 있는 두 명의 괴인을 베었다. 두 개의 장검이 큰 원을 그릴 때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일며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장력을 사용했을 때는 선혈을 그리 많이 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때그때마다 선혈이 뿌려졌다. 목이 떨어지고 배가 잘리는 도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많던 괴인들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손을 거두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두 사람은 등을 돌리고 붙어 있던 자세를 버리고 각자 앞으로 나섰다. 괴인들도 두 패로 갈라졌다. 그러나 검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듯했다. 비류신은 남자라서 그런지 사납게 검을 휘둘렀다. 괴인이 달려들기를 기다리는 홍부용과는 정반대로 그가 스스로 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주위에는 괴인들의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괴인들은 모두 가련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다 지하실 속에 빠져 십여 년 동안이나 시체로 굶주림을 채우고 살아 왔지만 그들에게도 생의 애착은 있는 것이다. 괴인들은 두 사람이 지령보의 인물이라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원한을 풀기 위해 목숨을 건 공격을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괴인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지만 않았더라면 힘을 합해 지하실을 뚫고 나갈 의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괴인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상대의 정체와 뜻을 미처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손을 쓴다는 것은 분명 괴인들의 잘못이었다. 비류신과 홍부용의 검법은 세상의 어느 고수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그런 검날에 몸을 부딪지는 것처럼 무모한 행동을 하는 괴인들은 낙엽이 떨어지듯 하나 둘씩 계속 쓰러졌다. 죽음을 맞으며 지르는 비명소리는 듣는 사람의 폐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얼마 후-- 그렇게 많던 괴인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괴상한 웃음소리도 사라졌고 처절한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느 구석에선지 중상을 당해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괴인들의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끊겨진 팔 다리와 낭자한 선혈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두 사람은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피비린내를 강렬하게 맡았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손을 쓰다 보니 지하실 가득히 들어찬 피비린내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모든 일이 끝나자 두 사람은 후회와 죄책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상대가 먼저 손을 썼고, 또 목숨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하지만 막상 처참하게 죽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주위의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이때 왼쪽 어둠 속에서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쨍,쨍! 비류신과 홍부용은 장검을 고쳐 잡고 쇳소리가 들리는 곳을 주시했다. 두 사람이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 소리가 멈췄다. 지하실 안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비류신은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누구요? 누가 있소?” 그러나 대꾸하는 것은 메아리 뿐 이었다. 비류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상대에게 약점을 보이기도 싫었으며 또 상대가 몇 명이나 되고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비류신과 홍부용이 막 다른 곳으로 발을 옮기려 할 때, 무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길게 들렸다가 뚝 그쳤다. 어둠의 지하실, 처절한 죽음,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그런 보이지 않은 상대가 긴장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상대의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고 긴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좀 전 쇳소리가 들렸던 곳을 대략 짐작으로 파악하고 그곳에 천천히 다가갔다. 상대는 두 사람의 일거일동을 아주 자세하게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홍부용이 낭랑하게 물었다. “누구요? 어째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것인가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둠 속에서 처량하고 힘없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당신들은 지령보의 사람들이오?” 비류신이 그 사람의 음성과 물음을 듣고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 있었다. ‘그렇구나. 죽은 사람들은 모두 지령보의 소대천에게 감금당한 것이로구나. 물론 저 사람도 감금당한 사람 중에 하나겠지.’ 그는 주저 없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오, 우리는 잘못하여 지령보의 지하실로 떨어진 사람들이오. 우린 소대천과 서로 원수지간이오.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어둠 속에서 냉소가 흘렀다. “흐흐흐… 당신들이 지령보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그의 냉소는 괴인들의 웃음과 전혀 달랐다. ‘음, 저 사람은 도인이 아니면 고강한 무공을 지녔던 것 같군.우리가 여기서 여러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군.’ 비류신이 이 같은 생각을 하고 뭐라 변명을 하려는데 홍부용이 먼저 냉랭히 소리쳤다. “믿지 못하겠거든 그만두시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다른 사람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그럼 당신들은 지령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겠소?” “무엇으로 어떻게 증명해야 되나요?” “매우 간단하오. 당신들이 맹세만 하시면 되오.” 비류신이 물었다. “만약 우리가 맹세를 하지 않겠다면 우리를 어떻게 하시겠소?” 처음 유령 같은 목소리의 사람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조금 전에 죽은 사람들과 똑같이 몇 십 년을 이곳에서 살아야 하오. 이곳에서 죽은 사람의 고기를 뜯어먹고 뼈를 갈아 먹어야 되는 것이오. 보아하니 당신들은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이곳에서 아까운 인생을 끝마치려는 것이오? 살아서 소대천에게 오늘의 원한을 풀어야 될 게 아니오?” 그의 말은 홍부용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직접 괴인들의 참상을 보았고, 또 지하실의 구조로 보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인물들에게 은근히 기대를 걸고 싶었다. “당신들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인가요?” 홍부용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비류신이 곧이어 말을 받았다. “홍 낭자, 저 사람들의 말은 거짓말이오. 저 사람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다면 오늘까지 이곳에 있었겠소? 벌써 오랜 전에 이곳을 빠져나갔을 것이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냉소가 터졌다. “흐흐흐… 우리는 이곳에서 십오 년 동안이나 지냈소. 그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데 힘을 기울였소. 그 결과 며칠 전에야 비로소 그 길을 찾는데 성공했소. 흐흐… 십오 년이라면 당신들은 아주 어렸을 때요. 만약 두 시주가 우리들의 몇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면 틀림없이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 주겠소.” 비류신과 홍부용은 상대의 말 중에 섞인 시주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속세를 떠난 중들인가 보구나.’ 어둠 속에서 처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사, 저 젊은 두 사람은 혹시 소대천의 첩자일 수도 있을 것이오. 지령보의 인물이 아니라고 무엇으로 믿을 수 있겠소? 괜히 그 얘기를 꺼낸 것 같소.” 그러자 카랑카랑한 음성이 말을 받았다. “빈승의 눈이 흐려지지만 않았다면 내 판단이 옳을 것이오. 저 사람들은 절대로 간사하고 흉악한 놈에게 이용당할 사람들이 아니오.” 그의 말은 비류신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당신들은 불도를 닦는 분들 같은 데… 그럼 우리에게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힘을 빌리려 하오?” “시주들께선 이쪽으로 오시오. 서로 얼굴이나 보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비류신은 홍부용을 힐끗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리들도 당신을 보고 싶소.” 두 사람은 상대의 음성이 들린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각자 장검을 힘껏 움켜 쥐고 진기를 끌어 모았다. 두 사람이 앞으로 이 장 정도 다가갔을 때, 돌연 유령의 웃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히히히… …” 그 웃음은 두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장검을 가슴 앞으로 치켜들고 앞쪽을 주시했다. “앗!” 비류신과 홍부용은 일시에 깜짝 놀란 소리를 지르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지하실에는 또 하나의 석실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그 전면으로 굵은 쇠창살이 가로막힌 것이 보였다. 그 창살 사이로 몇 사람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앞으로 흘러내렸고 그 머리카락 사이로 누르스름한 이가 보였다. 그들 몇 명은 앙상히 뼈만 남은 다리로 지탱하고 서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런 다리로 서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정도였다. 괴인들은 유독 아랫배만 불룩하게 튀어나왔지만 이들은 배까지 가죽 뿐 이었다. 움푹 파인 눈과 볼. 그리고 뼈가 보일 듯한 가슴, 기다란 손톱 등이 먼저 죽은 괴인들과 똑같았다. 더군다나 이들의 몸은 창살에 갇혀 있으므로 그 모양이 무섭기도 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웃음도 나왔다. 인간의 허세와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세가 이렇게 울 속에 갇힌 동물처럼 하찮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비류신과 홍부용은 담력이 크다고 자부해 왔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든가 그대로 즉사했을 것이다. 비류신은 재빨리 냉정을 되찾고 버럭 큰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은 누구요? 사람이요 아니면 귀신이요?” 창살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람들이 만약 나는 귀신이오. 하더라도 곧이 믿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귀신의 존재를 시인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시인은 하지 않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귀신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 중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주, 우리들의 지금 모습은 정말 귀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못된 꾐에 빠져 오늘날까지 이렇게… 이 피맺힌 원한을 꼭 풀고 싶소.” 비류신과 홍부용은 자신들에게 부딪힌 곤경을 염려하기 전에 창살에 갇혀 있는 아홉 사람에게 동정을 보냈다. 그들의 운명이 너무나 가련해 보였기 때문이다. 비류신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당신들은 누구에게 꾐을 당했소? 어떻게 하다가 이곳에서 십오 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었느냔 말이오. 당신들에게 어떤 난경(難境)이 있었는지 서슴지 말고 말해 보시오. 나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고 또 힘이 닿는 데까지 당신들을 도와주겠소.” 왼쪽 끝에 있는 사람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당신… 당신의 말이 사실이오? 거짓이 아니오?” 비류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군자의 한마디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것이오. 그러니 안심하고 어서 말해보시오.” 그러자 오른쪽 두 번째 있던 사람이 비류신의 허리에 꽂혀 있는 채찍을 가리키며 물었다.“당신 허리에 있는 채찍은 혹시 잔금섭혼신편이 아니오?” 이번에는 세 번째 사람이 홍부용의 수중에 들려 있는 장검을 가리켰다. “아, 저 여인의 장검은 빙화동의 주인인 백화선녀가 지니고 있던 만화신검(滿花神劍)이 아니오?” 비류신과 홍부용은 서로 얼굴을 바라볼 뿐 아무 대꾸도 못했다. 지하실에서 십오 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다고 하는 사람이 두 사람의 무기를 틀리지 않고 알아맞히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터였다. 홍부용이 부드럽고도 공손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이오? 혹시 강호에서 명성이 높았던 고인들이 아닌지요?” 왼쪽 끝에 있던 사람이 전신을 가늘게 떨며 말을 받았다. “시주, 우리는 당신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를 보고서 어느 정도 짐작되는 것이 있소. 시주는 지령보의 주인인 야월광명지신도 소대호의 제자가 아니오? 그렇지 않으면 간악한 소대천의 제자요? 솔직하게 말해 보시오. 만약 소대천의 제자라면 우리는 떳떳이 죽음을 택하겠소. 그러므로 우리를 놓아 주겠다는 유혹으로 비밀을 캐내려고 한다면 부질없는 일이오.” 그의 목소리는 죽음을 각오해서인지 처량하고 비통했다. 비류신은 그 사람의 추측대로 소대천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슬픔을 느끼게 했다. “나는 소대호의 제자요. 이것은 절대 거짓이 아니니 믿어도 좋소.” “그럼 지주의 사부께서는 아직도 생존해 계시오?” “사부께선 어제 세상을 떠나셨소.”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람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세상을 떠나셨소? 혹 그분이 작고하시면서 시주에게 무슨 당부를 하지 않으셨소?” 창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비류신이 소대호의 제자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십오 년 전에 소대호와 약속이 있어 지령보를 찾아왔을 때, 소대호는 이미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소대호에게 제자가 없었음은 물론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또 나올 수 없는 곳에서 제자에게 무공을 연마시킬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몇 가지 일을 당부하셨소. 그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니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할 수가 없소. 사부님도 비밀을 지키라고 하셨으니 말할 수 없음을 이해하여 주시오.” 그러자 세 번째 사람이 나오지도 않는 침을 뱉으며 말했다. “너 이 악랄한 놈아, 우리들 앞에서 교활한 흉계를 꾸미려고 하는 구나. 너희들 같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만 저지르는 놈들은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비류신은 다급히 손을 가로 흔들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절대로 소대천의 제자가 아니오.” 홍부용은 새침해지며 말을 꺼냈다. “저 사람들은 믿지 못하는 모양이니 더 말하지 말아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요? 우리는 우리대로 빠져나갈 곳을 찾기로 해요.” 이제까지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오른쪽 사람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시주, 너무 화내지 마시오. 우리는 처음부터 시주를 믿고 있소. 그러나 우리가 시주에게 부탁할 것과 우리가 지니고 있는 비밀은 강호 무림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서 그렇소. 그러므로 우리들은 십오 년 동안이나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비밀을 지킨 것이오. 물론 소대천에게 치명적인 일이오. 만약 이것을 그가 안다면 단번에 강호 무림은 악의 소굴로 변하고 소대천은 승승장구 날뛸 것이오.” 비류신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안심하시오. 나와 이 낭자는 모두 소대천에게 원한을 갖고 있소. 소대천의 간사한 계략에 빠져 이렇게 당신들을 만나게 된 것이오.그리고 나와 낭자는 언제나 강호의 대의를 위해 일할 것이니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소. 내가 만약 이곳을 살아서 나간다면 그 즉시 소대천과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투를 벌이겠소.” 홍부용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으니 당신들의 정체나 말해 보세요.” 그러자 말을 할 때마다 시주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부처님의 은덕으로 두 시주께서 우리가 못 이룬 강호 평정을 이룩해 주시오. 우리는 바로 중원 무림의 구대문파 장문들이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