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대역무도(大逆無道)
불(火), 불꽃이 밤하늘에 춤을 춘다. 멀리서 불타오르는 저주받은 도관을 쳐다보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마무쌍과 그 소녀였다. 천향검봉 백리령하(天香劍鳳 百里玲霞)! 당금 천하오미(天下五美)의 하나가 바로 그녀였다. 중원검성(中原劍聖)이라 불리는 당대 검성문(劍聖門)의 검주(劍主)인 백리종도(百里宗濤)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녀는 이곳을 지나다 처녀들이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악적을 처단하겠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설마 여기에 마면귀령관이 숨어 있고 그의 무공이 그토록이나 높을 줄은…… 수행했던 본문의 고수들은 모두……" 백리령하는 다시금 몸서리를 쳤다. 아마도 당분간 그 악몽과 같은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걱정마시오.그 자는 더이상 해악을 끼치지는 못할 것이오." 마무쌍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가 비록 소협의 신위에 낭패하여 도망갔지만 그자가 무림 오대사인(五大邪人) 중 하나인만큼 만일 나머지 마두들을 규합하여 소협께……" 백리령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불타며 무너져가는 도관을 지켜보고 있던 마무쌍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리령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으나 아마 그자에게는 그런 간담이 없을 것이오." 백리령하는 다시금 홀린 듯 마무쌍을 바라보았다.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이분의 웃음은 너무도 기이하다! 어찌하여 내 마음이 이토록 흔들린다지?' 검성문의 당대검주인 중원검성의 외동딸로서 수많은 영웅호한을 접해본 백리령봉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마무쌍과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근엄한 것 같기도 하고 냉혹한 것 같기도 하며, 어찌보면 장난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그녀는 마무쌍의 웃음과 같은 매혹적인 웃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파도가 일고 있는 것이다. "저…… 소협께선 어디로 가시겠어요? 만약 아직 정해놓은 곳이 없다면 소매가 모시고 싶은데요…… 아버님께서 무척 반겨하실 거예요." 백리령하는 옷고름을 만지작거렸다. 좀 전의 생각만 하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마운 말이나 그만한 일로 신세를 지고픈 생각은 없소." "그만한 일이라니요? 제 목숨을 구해주셨고 또 제 몸까지……" 황급히 말하던 백리령하는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그녀는 감히 고개도 들지못했다. 마무쌍은 내심 혀를 찼다. "지난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시오. 나는 오늘밤 아무일도 없었던 것으로 치겠소." "아무 일도 없었다니요? 여자로서 그런 일을 당했는데 더구나 내 몸은……" 마치 외치듯 갑자기 언성을 높이던 백리령하는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모는 말하셨지. 우는 것이 여자의 최고 무기라고……' 마무쌍은 백리령하의 등 뒤에 가 섰다. "당신이 계속 운다면 나는 그만 가봐야겠소." 신기하다. 절대로 그칠 것 같지 않던 울음이 그 말 한 마디에 뚝 그쳐버리고 만 것이다. 마무쌍은 그녀의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몸이 바르르…… 진동했다. "천향검봉이 마무쌍에게 알몸을 보였다는 소문이 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면 검성문을 한 번 구경하고 싶소." 마무쌍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백리령하의 몸은 어느 새 마무쌍의 품속에 깊숙이 안겨 있었다. 나비처럼 몸을 날렸다고나 할까. "나빠요! 나빠요!" 백리령하는 앙탈하듯 마무쌍의 품에서 흐느꼈다. 마무쌍은 쓴웃음 지었다. "뭐가 나쁘단 말이오! 나는 당신을 구한 죄밖에 없소! 천하오미 중의 하나가 아무의 품에나 마구 안기다니 소문나겠소." "나라지요. 얼마든지……" 백리령하는 마무쌍의 품에서 중얼거렸다. "아니, 그랬다가 시집은 어떻게 갈 작정이오?" "시집은 두 번 가나요?"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요?" 마무쌍이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백리령하가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마무쌍의 눈은 하늘과 같고 백리령하의 눈은 호수와 같았다. "당신은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거요?" "누구면 어떤가요? 저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살아온 것 같아요. 어쩌면 이것은 운명이예요!" 백리령하의 눈은 꿈꾸는 것 같았으나 그녀의 태도는 대담하고도 확실했다. "영하…… 당신은 참으로 경솔한 여인이오." 마무쌍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힘껏 부둥켜 안았다. 금마곡을 벗어나자마자 만난 여자였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렇게 쉽게 끌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분명한 것은 그가 아직 여인들을 다룰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는 것과 실제의 경험이라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아……! 경솔…… 그래요. 이런 것이 경솔이라면 나는 언제나 경솔하고파요. 백리령하는 그의 품에서 가쁜 숨을 뱉아냈다. 막 울음을 그친 미인의 얼굴, 함초롬히 웃음을 머금은 미인의 얼굴은 폭발적인 유혹이었다. "영하!" 마무쌍의 고개가 숙여졌다. 한 가닥 그림자가 드리움을 느끼면서 백리령하는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았다. 콩당! 콩당! 두렵다. 그러나 가슴이 터질 듯한 기대와 흥분이 그녀의 전신을 휩쓴다. "으--- 음!" 백리령하가 비음을 토해냈다. 두 입술이 불꽃을 튀긴다. 미친 듯한 격정(激情)의 전류가 두 사람을 떨게 한다. 꽃이 핀다. 세상의 온갖 환희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모를 일이다. 한낱 입술에 어떻게 이런 힘이 숨어 있는지…… * * * 장안(長安). 섬서성(陝西省)에 위치한 고도(古都). 한(漢), 당(唐)이래의 전성기를 거쳐 지금은 문화 교통의 요충(要衝)이 되고 있는 곳이다. 후에 서안(西安)이라 불린 곳은 장안의 약간 북쪽에 위치한다. 그 장안으로 들어가는 관도(官道)를 걷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먼길을 걸어온 듯 그 인영의 걸음은 매우 느렸다. 그러나 주의해 본 사람이 있다면 기이함을 느끼리라. 느린 걸음인듯한 그 한 걸음의 보폭은 무려 오 장이나 되는 것이다. 가히 축지신행(縮地神行)의 질풍. 게다가 여행 끝인데도 전신에 걸친 백의(白衣)는 금방 입은 것처럼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주의를 기울인 사람이 그의 얼굴을 보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어찌 이토록 수려한 미공자가 있을 수 있는지를, 그의 맑은 눈빛은 또 어떠한가? 그 모습을 보고 어제까지 그가 남루한 옷차림의 일개 소년임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와 첫 입맞춤을 나눈 여인까지도, '마무쌍(魔無雙)! 마귀 중의 마귀라는 뜻이야! 그래도 괜찮은가?' '호호호…… 이렇게 멋진 마귀가 있다면 얼마든지요!' 피식, 마무쌍의 입가에 실소가 스쳐갔다. 그는 천향검봉 백리령하와 헤어져 남하하는 중이었다. 백리령하는 마무쌍이 검성문으로 동행할 것을 바랐다. 하지만 마무쌍은 신산귀유를 만나기 위해 낙양으로 가야했고, 검성문은 수천 리 떨어진 무릉산(武陵山)에 있는지라 마무쌍은 후일을 기약하고 백리령하를 먼저 보냈다. '잊지마세요! 한 달 후에 아버님의 회갑이예요! 그때까지는 꼭 오셔야 해요!' 마무쌍은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백리령하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 나온 첫날에 미인이란 말이지……?" 사부인 가군자의 주의는 평생 처음보는 여러 가지로 인해 제대로 기억되지 않았다. "너는 강호에 나가거든 되도록 여인을 보고는 웃지마라." 두두두…… 급촉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 한 대가 마무쌍의 등 뒤에 나타났다. 사두(四頭)의 호화로운 마차는 흙먼지를 미친 듯이 피우며 질풍같이 치닫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대번에 마무쌍을 깔아버릴 듯했다. 마무쌍이 비켜서자 마차는 이미 저만치 달리고 있었다. 흙먼지 속에 좌우에서 네 필의 말이 호위하고 있음이 보였다. '상당한 고수인데?' 마무쌍은 네 필의 말 위에 앉은 기수(騎手)들의 기세를 보고 흠칫 하여 자신도 모르게 마차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순간, 마무쌍은 마차 뒤쪽에 난 창의 휘장 틈으로 한 사람이 밖을 내다보고 있음을 발견했다. 약 오십 정도의 중년인 듯한데 사각형의 얼굴에는 고귀(高貴)한 위엄(威嚴)이 서려 있었다. 순간적으로 마무쌍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마무쌍과 그의 눈이 마주친 순간, 두두두…… 마차는 흙먼지에 파묻히며 사라져 갔다. 하지만 마무쌍은 그 찰나지간에 그 중년인의 눈에 고뇌와 노기가 서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무쌍의 신안(神眼)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저런 고수들을 호위로 거느리고 있다니…… 한데……' 기이함을 느낀 마무쌍의 안색에 갑자기 미미한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스…… 거의 들을 수도 없는 기척! 아니, 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 무서운 속력으로 관도의 좌우에서 마차를 따라감을 느낀 것이다. 지옥흑마왕으로부터 최고의 살수은잠법(殺手隱潛法)을 훈련받은 마무쌍이 아니면 느낄 수도 없는 기척이었다. '대단한 은신미행술(隱身尾行術)이다!' 마무쌍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방금의 그 마차를 뒤쫓고 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마차의 사람이 무림인은 아닌 것 같았는데……?' 순간, 마무쌍의 몸이 바닥에서 한 치 가량 떠올랐다. 쉬--- 이--- 잉! 동시에 한 가닥 바람이 일어나며 그의 몸이 번개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보았다면 외쳤으리라! 아아……!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 * * * 장안제일루(長安第一樓)! 객점 겸 주루(酒樓), 장안성 내에서 시설 규모 모두가 명실공히 최고를 자랑하는 곳이다. 마무쌍은 그 장안제일루의 객잔에 머물고 있었다. 그 신비의 마차가 여기 투숙했기 때문이다. 독채를 세 개나 한꺼번에 전세내어 들어간 그들은 밤이 되도록 숨도 쉬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일도 없었다. 하지만 마무쌍은 점점 흥미가 생기고 있었다. '그들의 인원이면 독채 하나라도 쓰고 남는다. 아무리 부자라도 쓸데없이 세 개나 얻을 필요는 없지……' 그는 알고 있었다. 어디선가 빈틈없는 감시의 눈이 번뜩이고 있음을, 그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감시자는 대단한 고수들이다. 대체로 감시는 졸개들이 하고 행동에만 고수가 나서는 법…… 더한 고수가 나타난단 말인가? 도대체 마차 안의 중년인이 누구이기에……' 마무쌍은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누운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별이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스--- 윽! 마무쌍의 몸이 앉은 채로 소리도 없이 창문을 날아 나갔다. 달그락…… 달그락…… 독채의 문이 열리며 조심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사실상 말발굽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천조각으로 말발굽을 쌌기 때문이다. 한 대의 마차가 소리도 없이 독채를 빠져나와 장안제일루를 떠나갔다. 원래 독채에는 막바로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던 것이다. 마차는 무엇인가를 꺼리는 듯 조심스레 천천히 사라져 갔다. 마차가 막 동관대로(東官大路)로 사라진 순간, 다른 독채의 문이 열리며 또 하나의 마차가 나타났다. 그 마차는 조심스레 장안제일루를 빠져나가더니 이번에는 서관대로(西官大路)를 달리기 시작했다. '양동작전인가? 아니지…… 독채는 세 채를 얻었다!' 어둠 속에서 마무쌍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세 번째 마차가 마지막 독채에서 나와 이번에는 남쪽으로 사라졌다. '마차는 모두 똑같아서 어디에 그가 탔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로 그는 갑자기 쫓기게 된 것 같은데 이런 준비를 할 수 있었다니…… 대단하다!' 마무쌍은 내심 감탄했다. 마차가 사라지자 주위는 다시 정적을 되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무쌍은 이미 그 마차들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마무쌍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무쌍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호이산지계(調虎移山之計)……' 마무쌍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행자는 아무런 흔적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중년인은 그것을 알고 이러한 안배를 할 능력이 있다…… 내가 그라면 결코 그 마차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무쌍의 그런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더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독채 구석의 담장을 넘어 검은 그림자가 번개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두 사람이었고, 그 두 사람의 가운데에는 또 한 사람이 있음을 마무쌍은 알아보았다. '지독하군!' 마무쌍은 정말 감탄했다. 감시자는 아직도 있었던 것이다. 두개의 검은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지붕을 타고 방금 독채를 빠져나간 자들을 뒤쫓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가? 이 지독한 심기(心機)에 잠시 아연했던 마무쌍이 막 그 뒤를 쫓으려는 순간,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어두운 구석 담장 그늘에 숨어 움직이는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그다!' 마무쌍은 신음했다. 그는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이 낮에 마차에 있던 중년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록 복면은 했으나 그 기품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무공을 모르는 듯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담을 넘고 있었다. '멋지군! 나까지 속여 넘길 뻔 하다니……' 감탄한 마무쌍은 공력을 모아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신비인들의 행적은 더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결국 그들도 이 사중오중의 연막에 속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마무쌍이란 의외의 미행자는 떼어버리지 못한 것을…… * * * 상국사(相國寺)는 장안 양대고찰(兩大古刹) 중의 하나였다. 개원사(開元寺)가 고관대작(高官大爵), 부호(富豪)들이 드나드는 절이라면 이 상국사는 서민(庶民)의 절이었다. 그렇다고 이 상국사의 규모가 개원사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규모만을 따지면 오히려 상국사가 개원사를 능가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언젠가부터 하나의 관습화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한 가닥 검은 그림자가 번개같이 상국사의 후원 담장에 올라섰다. 예리한 눈빛으로 사방을 살핀 인영은 소리없이 후원 안으로 내려섰다. 휘--- 휘휙! 동시에,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서너 명의 인영이 담장을 뛰어넘어 인영의 뒤를 따랐다. 은밀하고도 번개 같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후원 법당에 이르렀다. "다 왔습니다. 이제 심려 놓으시옵소서!" 앞장 선 흑의인이 굽신해 보이더니 한 걸음에 법당 앞에 내려섰다. "무상법사(無相法師)! 무상법사는 안에 계시오? 궁유명(宮遺銘)이오." 그는 나직이 외쳤다. "누구시라고?" 잔잔한 음성과 함께 법당 문이 열렸다.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며 한 노승이 나타났다. '시체?' 그를 본 흑의인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번--- 쩍! 그 순간에 좌우에서 번갯불 같은 검세가 폭죽이 튀듯 쏟아져 나와 흑의인을 덮어 씌웠다. 쨍! 째--- 애--- 앵! "으--- 윽!" 불똥이 튀고, 예리한 금속음과 함께 묵직한 신음이 터졌다. 피보라가 피어났다. "우--- 욱!" 일그러진 신음과 함께 흑의인은 이미 오 장 밖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의 눈에 저만큼 날아가고 있는 자신의 팔이 보였다. "웬놈들이나?" 그는 분노한 외침을 터뜨렸다. 차---앙! 검집이 하늘로 날으며 그의 손에서 검이 빛을 발했다. 동시에 중년인을 호위했던 세 명이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았다. 발검(拔劍)의 기세로 보아 검도의 최고급고수들에 틀림이 없었다. "흐흐흐…… 풍운신룡검(風雲神龍劍) 궁유명…… 과연 대내(大內) 일등시위장(一等侍衛長)답구나!"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것과 함께 법당 안에서 전신을 칠흑같은 흑의로 감싼 괴인이 나타났다. 보이는 것은 복면 속에서 음산히 빛나는 두 눈뿐, 무서운 살기가 암암리에 피어나고 있었다. 동시에, 사방에서 이십 명 정도의 흑의검수가 나타났다. 그들에게도 드러나는 것은 두 눈뿐이다. 순식간에 중년인 일행이 삼엄한 검광에 포위된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어이없이 팔 하나를 잃은 풍운신룡검 궁유명이 신음했다. "크흐흐…… 정녕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작전이었다! 어이없이 속았지. 하나 여기 온 것이 실수다!" 풍운신룡검 궁유명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네놈들은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이러는 것이냐? 어서 썩 비키지 못할까?" "크흐흐흐…… 황제폐하라면 더욱 좋겠지. 쳐라!" 흑의괴인이 음산히 외쳤다. 번--- 쩍! 소리도 없었다. 무서운 빠르기로 흑의검수들이 덮쳐들었다. "이분이 뉘신 줄 알고!" 궁유명을 비롯한 네 명의 고수가 사력을 다해 그들을 막았다. 궁유명은 절정고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팔 하나가 잘린 부상자였다. 게다가 적의 검법은 기궤악독(奇詭惡毒) 했으며, 그 수준 또한 이미 일류고수를 능가하고 있었다. "으--- 얍!" 쩡! 쩡…… "윽!" 검광이 무섭게 번뜩이고, 피가 튀고 비명이 터졌다. 무서운 격전! 그러나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우열은 대번에 드러났다. "으---악!" 중년인을 보호하던 흑의인 한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흑의검수 한 명이 번개같이 중년인에게 덮쳐들었다. "비켜라! 감히 어디라고!" 옆의 흑의인이 다급히 검을 휘둘렀다. 몸도 돌보지 않는 공격이었다. "으--- 악!" 흑의검수가 두 동강이 되어 거꾸러졌다. "으--- 아--- 악!" 그러나, 그 흑의인도 다른 흑의검수들에 의해 처참한 분시(分屍)가 되어 쓰러져 갔다. 그 와중에 흑의검수 하나가 번개같이 중년인을 덮쳤다. 그는 중년인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대신, 그를 나뀌챘다. "놔라! 비키지 못하느냐?" 중년인이 두 눈을 부릅떴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흑의검수에게 제압되어 전권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폐하(陛下)!" 풍운신룡검 궁유명이 처절히 부르짖었다. "폐하?"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백의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쏴--- 쏴 궁유명은 전신의 모든 기력을 다 쏟아냈다. 수중의 검이 풍운이 일듯 신룡이 꿈틀거리듯 노호했다. 차--- 차--- 창! "으--- 윽!" 격렬한 금속성과 함께 몇마디 비명이 일었으나 쓰러지는 자는 없었다. 무리한 공력의 운용으로 그의 잘려진 팔에서 쏟아지는 선혈이 더욱 비감(悲感)할 뿐이었다. 중년인은 이미 흑의검수 두 명에 의해 사오 장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폐하! 폐하!" 궁유명은 미친 듯 검을 휘두르며 전권을 빠져나가려 했다. "목적달성은 했다! 흔적을 남기지 마라!" 팔짱을 끼고 있던 흑의괴인이 음산히 외쳤다. 그 순간이었다. "으--- 윽!" "욱!" 두어마디 신음과 함께 중년인을 끌고 가던 흑의검수 두 사람이 쓰러졌다. 동시에 환영처럼 중년인의 곁에 백의인이 나타났다. 흑의괴인은 대번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번--- 쩍! 누구냐고 물을 사이도 없었다. 그의 몸은 단숨에 칠 장 거리를 날았고, 한 줄기 섬광이 말할 수 없는 빠르기로 백의인을 쪼갰다. 무서운 살수였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토록 빠른 살수가 있음을 믿기 힘들 것이었다. "마령일견휴(魔靈一見休)?" 놀란 듯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파--- 앙! "으……" 신음을 뱉아내며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내려서는 인영은 흑의괴인이었다. "십성수준의 마령일견휴를 피할 사람은 별로 없을테지……" 담담히 중얼거리는 백의인은 바로 마무쌍이었다. 마무쌍은 고개를 돌려 중년인을 향했다. 그의 안색은 매우 정중했다. "소생은 방금 귀하에게 폐하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중년인이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넓은 사각형의 고귀한 풍모를 가진 얼굴이 드러났다. "그분은 당금 황상폐하이시오!" 궁유명이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사실입니까?" 마무쌍의 안색이 굳어졌다. 황제라니? 황제가 어찌하여 이런 지경을 당한단 말인가? 중년인이 탄식했다. "짐이 바로 당금의 성화제(成化帝)요!" 중년인, 스스로를 황제라 인정한 그의 눈에 경악이 물결쳤다. 흑의괴인이 소리도 없이 덮쳐온 것이었다. "살수에게도 지키는 것은 있는 법!" 마무쌍이 코웃음쳤다. 마무쌍은 벼락같이 흑의괴인의 장도(長刀)를 후려갈겼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흑의괴인은 쾌재를 부르면서 전력을 쏟아 쾌도를 그어냈다. 그의 무공은 흑의검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쨍! "으--- 으--- 억!"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차가운 빛이 허공으로 퉁겨졌다. 가공스럽게도 손과 도가 마주치자 도가 장난감처럼 부러져 나간 것이다. "우--- 왁!" 흑의괴인이 두 눈을 찢어질듯 부릅뜨고 잇달아 비틀거리며 물러나다 선혈을 토해냈다. 독심환영마후의 현음명부진살(玄陰冥府眞煞)에 심맥이 상한 것이다. 마무쌍의 몸은 선천적인 신체(神體)에 신주팔대마존의 노력, 거기에 더한 가군자의 오행생사금침대법(五行生死金針大法)에 의해 도검불침(刀劍不侵)의 금강체가 되어 있었다. "무례를 범합니다." 마무쌍이 황제를 껴안으며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위기를 당하고 있는 궁유명 등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궁유명은 이 광경을 보고 대경했다. "무슨 짓? 어서 피하시오! 부디 폐하를 부탁……" 그는 채 말도 맺지 못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마무쌍의 손짓에 자신을 공격하던 흑의검수 십여 명이 추풍낙엽과 같이 날아가는 것을 본 것이다. 퍼--- 엉! 암천(暗天)에 한 가닥 불꽃이 피어났다. 흑의괴인이 던져낸 신호탄이었다. "어…… 어서 폐하를 모시고 피해 주시오, 역도들이 또 올것이오!" 궁유명은 긴장이 풀리자 금방이라고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외쳤다. "아아…… 짐의 부덕이다!" 황제가 신음했다. 마무쌍은 번개같이 궁유명의 혈도를 짚어 지혈을 시켰다. 나머지 세 명의 위사는 이미 고혼이 된 지 오래였다. 마무쌍은 가볍게 탄식하더니 일 장을 궁유명에게 가격했다. 퍽! "으웩!" 궁유명은 비틀 하면서 검은피 한 모금을 토해냈다. 한데, 서 있기조차 힘들만큼 상처를 입었던 그의 눈에 대번에 신광이 돌아오지 않는가? 꺼졌던 등잔에 불이 붙는 것과 같았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궁유명은 물론 황제까지도 믿을 수 없는 듯 마무쌍을 쳐다보았다. "우선 시끄러움은 피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무쌍이 조용히 말했다. "으--- 아--- 악!" 악독한 기세로 덮쳐들던 흑의검수 둘이 마무쌍의 손짓에 지푸라기처럼 날았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었다. 궁유명은 황제를 옹위하고 마무쌍을 따랐다. 한 줄기 그림자가 마무쌍을 막았다. 흑의괴인이었다. "죽고싶어 환장했군!" 마무쌍이 냉담히 외쳤다. 번--- 쩍! 한 줄기 섬광이 뻗어나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었다. 흑의괴인은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양단되어 있었다. "무…… 무섭다! 도대체 어떻게 손을 썼는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궁유명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검이나 도를 쓴 것 같은데 마무쌍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당연했다. 흑의괴인을 죽인 것은 잔백수라도였고, 그것은 이미 잔백수라환이 되어 마무쌍의 손목에 감겨있는 것이다. 마무쌍의 손속에는 사정이 없었다. 그만큼 그가 지닌 마공은 무서운 것이다. 지옥음령참혼도의 제일변 음혼참(陰魂斬)! 과연이었다. * * * 장안제일루. 마무쌍이 얻었던 별채에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마무쌍과 황제, 일등시위장 궁유명이다. 그들은 역으로 제자리에 감쪽같이 돌아온 것이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짐은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당할 뻔했네. 정녕 무어라 치하를 해야할지……" 황제가 탄식을 했다. "과찬의 말씀을…… 이 나라 백성이면 누구나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무쌍은 잠시 머뭇하다 입을 열었다. "한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여쭈어도 될른지……?" "짐이 왜 궁을 떠났으며 이런 곤욕을 치르는가 말이겠지?" 황제의 위엄어린 얼굴에 고소(苦笑)가 스쳐갔다. 당금 황제는 매우 정력적이고 활동적인 군주였다. 역대황제들은 봄, 가을, 혹은 여름에 별궁(別宮)으로 나들이를 했다. 일종의 휴가인 셈이다. 별궁은 천하에 축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제는 별궁에 가지 않았다. 간다해놓고 실은 심복무장 몇만 데리고 변경순시를 떠났던 것이다. 변경순시는 만족스러웠고, 황제는 피곤하긴 했으나 기꺼운 마음으로 귀로에 올랐다. 한데, 언제부턴가 괴이한 기운이 그를 노리고 있음을 황제 등은 느끼게 되었다. "소관(小官)이 있는 힘을 다해 보았으나 결국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소…… 공자가 아니었다면 소관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오!" 궁유명이 길게 탄식했다. "한데 상국사로 가신 것은 무슨 까닭이었습니까?" "상국사의 주지인 무상선사는 소관과 지면(知面)일뿐 아니라 당금 소림사 장문인의 사제였소…… 그런데 그들이 미리 그곳에……" "그들이 누구이기에 폐하를 노리는 겁니까? 더구나 이번 길은 호위무장밖에 모르는 극비라는데……" 마무쌍은 말 끝을 흐렸다. 황제를 노린다. 그것은 구족구멸(九族具滅)의 대역죄(大逆罪)가 아닌가? "알 수 없소……" 궁유명은 머리를 흔들었다. "폐하께선 짚히는 곳이 없으십니까? 초민(草民)이 보기에 이들은 직업살수들입니다." "그럼 누군가가 그들을 사주한단 말인가?" 황제의 눈에 놀람이 일렁였다. "직업살수는 청탁자(請托者)가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일류였습니다." "으--- 음……" 황제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찍어 눌렀다. 마무쌍의 말은 누군가가 모반을 꾸민다는 것이다. 실로 천하가 경동할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마무쌍의 눈에서 신광이 쏟아졌다. 동시에, 와장---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좌우의 창문이 박살나며 인영이 날아들었다. 밤하늘을 달리는 유성과 같은 검광이 꼬리를 끌며 폭사되었다. 우지끈! 지붕이 터져나갔다. 인영이 한 가닥 광채가 되어 보이지도 않게 쏘아져 내렸다. 파파--- 파! 바닥의 돌이 갈라지고 흙먼지가 비산하는 가운데 흑영이 유성과 같이 치솟았다. 전후좌우(前後左右)에서 상하(上下)에 이르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완벽한 합공이었다. 게다가 그 빠름은 어떠한가? 채 방비도 하기 전에 죽어갈 무서운 기습(奇襲)이었다. "으--- 윽!" 황제와 궁유명은 절망의 신음을 터뜨렸다. 보고 있어도 어떻게 피할 방법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마무쌍은 눈썹 하나 까딱치 않았다. "구천단---섬광(九天斷閃光)!" 한 가닥 햇무리와 같은 검광이 찬란하게 방 안을 맴돌았다. 그 빠름을 무엇으로 형용하랴? 쨍! 째--- 앵! 차--- 아--- 앙! "으---악!" "크--- 으으……"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마무쌍의 허리에서 한 가닥 섬광(閃光)이 뻗어나가고, 거기에 마주친 검과 도가 마치 무우토막인 양 잘려져 사방으로 튕겨져 날고, 피보라가 일었다. 마지막으로 비명이 이는 순간에 사방에 남은 것은 고요 뿐이었다. 너무도 빨라 도대체 어떻게 손을 쓴 것인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다. 그렇게 가공하게 나타났던 흑의인 열 명 가량이 피를 뿌리며 천천히 나동그라지고 있었다. 그들이 채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마무쌍의 몸은 이미 희미한 백영이 되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으--- 악!" "아--- 아--- 악!" "으--- 와아!" 단말마의 처참한 비명이 어둠을 가르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비명소리의 이어짐은 얼마나 빠른지 마치 한순간에 터지는 듯했다. 한 자리에 앉아 목을 내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 믿을 수 없다……!" 밖을 내다본 궁유명의 안색은 완전히 흙빛이었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희뿌연 백영과 거기서 번뜩이는 검광 뿐이었다. 나무와 함께 두 동강이 나는 자! 바위와 함께 두 조각이 나는 자! 검과 함께 양단되는 자…… 백영이 스치고 가는 곳에 살아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궁유명은 평소 자신을 절정고수로 자부했다. 그러나 사람이 이토록 빨리 움직일 수 있고 이토록 공포스러운 검법을 구사할 수 있음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어찌 상상할수 있겠는가? 구대 최강고수의 모든 것을 전수한 마무쌍이 삼백 년의 가공할 공력을 쏟아 구천섬광마검을 전개하고 있음을…… '대체 그는 누구일까?' 궁유명이 넋을 잃을 때, 마무쌍은 이미 그에게 등을 보인 채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구천신검이 들려있지 않았다. "궁대협! 폐하를 호위하시오. 적의 괴수(魁首)가 나타났소." 마무쌍은 앞을 바라본 채 천천히 말했다. 순간, 이루 말할 수없이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누구냐? 나는 당금 천하에 너와같은 자가 있음은 들은 적이 없다……" 그 낮은 음성은 괴이하게도 주위에 공포감을 조성했다. 마무쌍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은 목소리 뿐인 괴물이오?" "……" 상대는 마무쌍의 태연함에 어이가 없는지, 기가 죽었는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지살기(地殺旗)가 너의 손에 죽고…… 천살기수(天殺旗手)가 네 손에 몰사한 것이 우연이 아니…… 군" 예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궁유명이 그 말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어 부르짖었다. "처…… 천랑단(天狼團)이다!" 천랑단(天狼團). 당금 무림의 최대살수집단의 하나. 사혼방(死魂房)과 함께 공포의 조직으로 불리는 곳, 그들은 직업살수다. 그리고 그들이 못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천랑단주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천랑단주인 천랑마효(天狼魔梟)의 존재가 공포, 그것임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마무쌍도 가군자에게서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천랑단이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이미 백년에 이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