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로서 제사를 계속 지내야하는가?
법률방송 2024.10.30
[13회] 조선 사람들은 언제부터 제사를 지냈나? /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3회] 조선시대 집성촌 형성과 제사
요약: 선비가 출현하면서 종법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종법제도의 핵심은 제사이다. 제사는 조선이 세워진 이후에나 처음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당이 처음으로 지어지고 종법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종친들끼리 모여 살면서 족보가 생긴다. 15세기~16세기에나 완성된 관습이다.
13-1. 제사를 거부한 사대부들
- 현재 국민의 60~70%가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고려시대는 국교가 불교이고, 모든 관혼상제는 절에서 행해졌다. 이 관습은 천 년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러므로 기존의 장례 절차는 사찰에서 행해졌다.
- 유교에서는 이 관혼상제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낯선 방식으로사대부의 저항이 강했다.
- 제사는 주자 성리학을 도입한 조선이 건국되면서부터 조선 초에 처음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사당과 제사를 모르는 사대들은 제사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13-2. 사당의 건립
- 태종1년 사대부들에게 사당 건립을 강제하고, 공간이 좁은 도성 안에는 방안에 궤짝을 놓고 그 위에 신주를 모시게 하라. 지방에 파견된 관리는 사당에서 분향제배의 모범을 보여라..
- 태종6년 아직도 가묘(家廟, 사당)을 세운 자가 백 사람에 한두 사람밖에 없고, 사대부들이 법령을 잘 따르지 아니하니 자세히 살펴서 논죄하게 하소서.
- 태종13년 호화로운 집을 지어도 가묘는 짓지 아니한다. 벌을 엄하게 내려야 한다.
13-3. 사찰의 폐쇄와 제사의 정착
- 태종과 세종이 절을 다 없애 버린다. 3000개를 36개만 남기고 스님들은 환속시킨다
- 세종13년 사당은 세운 것 같은데 신주(위폐)를 설치하지 않는 곳이 많다. 규정 다양화와 명령 및 처벌을 강화하였다.
- 세종: 주자 성리학 사상을 퍼트리기 위해서 한글 창제하고 예법으로 뿌리 내리고자 함이다.
- 이 후 제사를 어느 정도 지내기 시작한다.
13-4. 족보의 시작
- 사당, 제사 성립. 그 다음 단계는 족보이다.
- 족보는 주자 성리학 도입 전에는 없었다. 사대부 계층이 생기면서 명분을 위해 자기들 족보를 만들게 된다.
- 제1호 족보는 1476년 성종7년 안동권씨 족보.
- 서거정이 쓴 서문에는 관리를 등용할 때 조상의 기록과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족보가 필요하다.
- 몇대 전 기록은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고 따져본 사람들이 없었다. 급작스럽게 100년 전 기록은 알 수 없다.
- 15세기부터 기록이 존재한다.
- 조선 초기에는 인구의 90%가 성이 없었다. 16세기 까지도 인구의 40%는 성이 없었다. 왜나하면 노비였기 때문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노비제 혁파와 노비들도 성과 이름을 갖게 됨. 1910년 민적법 시행으로 인구조사 및 100% 성씨 등록을 한다.
- 김씨는 한국 인구의 1/4임. 노비들이 주인의 성이나, 가장 힘이 세고 많이 사용하는 성씨를 따라간다. 김씨가 많아진다.
13-5. 친족 중심 사회
- 사당을 세우고 성씨별로 집단으로 살면서 집성촌이 생긴다 → 동과 리로 바뀜. 동리가 동네가 된다
- 고려 때까지는 군현제이고 사찰을 중심으로 두레를 형성해서 살아간다.→ 조선시대에는 사당을 중심으로 동족마을 형성하게 된다.
- 왕은 백성을 대신해서 종묘와 사직 제사를 모시고. 종묘는 왕실의 사당이고. 사직은 곡식과 땅의 신을 모신다.
- 조선의 질서는 사당, 제사, 장가는 시집으로, 집성촌, 족보, 15~17세기에 뿌리를 내린다. 주자 성리학의 나라가 된다.
- 존댓말, 친척, 친구 관계에는 모두 주자 성리학이 자리 잡는다
150년이나 200년 후 불교국가에서 완전히 유교국가로 변신한다
세종의 개혁이 성공한다
친족 중심의 사회: 모든 인간 관계를 가족관계로 소화 시키려고 하고 모든걸 친소관계에서 본다. →이는 근대화의 걸림돌이다
→ 그리고 여성들의 지위가 급격히 나빠지고 처참하게 변한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