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8월 28일(금) 요한계시록 2:18-29 찬송 499장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개역 개정)
-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
요한 당시 아시아 주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그들이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대처해야 할 지를 보여 주는
본서의 본론 제 1부인 2:1-3:22안에서 네 번째 단락을 형성하고 있는
오늘 말씀은 본서의 형식적 수신자인 아시아 주 내에 있는
일곱 교회 중 네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아디라는 옛 무시아 지역의 수도였던 버가모가
천연적인 방어 요새를 갖추고 있지 못해 내륙으로부터 오는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비대가 항상 주둔해 있던 작은 도시였다.
그리고 이처럼 수도 방위 수비대가 항상 이 도시에 주둔했을 만큼
두아디라는 이 지역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이 도시는 지역적으로는 작지만 크게 번창하여
염색 산업으로 유명한 공업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도시의 염색 공업 발달은 동업조합을 발달시켰고,
발달된 조합은 조합원의 친목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우상 숭배와 음행을 성행하게 만들었다.
결국 두아디라도 앞의 거대한 세 도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와 다를 바 없이
우상 숭배와 행음이라는 죄악의 도시였으며,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는 그러한 죄악의 문화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두아디라 교회는
한편으로는 모범적인 신앙의 열심과 자세를 보였으나(19절)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권을 계속 쥐기 위해 우상을 섬기고 행음하는(20절)
이율 배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주님은 두아디라 교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였고(21절), 그래서 주님은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면
죄에 합당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22-23절)
그러나 주님은 올바른 신앙을 지킨 남은 자들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을 주시겠다는 축복을 약속하신다.(24-29절)
이러한 두아디라 교회는 신앙적으로는 성실한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타협주의적인 자세를 취한 교회의 전형이며,
교리는 지키되 행위는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2:1-7)와
반대되는 유형의 교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행위 없는 교리만의 신앙도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지만
교리를 등한시한 채 행실에만 열심을 내는 신앙도 불완전한 신앙이므로
양자는 항상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즉 올바른 신앙이란 교리 정립과 교리 실천,
곧 믿음과 행위를 지혜롭게 조화시키는 신앙이어야 한다.(약 2장)
만약 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두아디라 교회처럼
말씀을 수호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도
우상을 섬기는 일과 행음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신앙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고전4:19-20; 골3:17; 요일3:18)
둘째, 세상과의 타협은 당장에는 현실적인 부나 즐거움을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진리를 떠나 사망에 이르는 결과만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참된 신앙을 끝까지 지켜 주님께 올바른 제자로 받아들여지려면
서머나 교회 교인들처럼 비록 육체적 고통과 물질적 궁핍이
지금 온다고 할지라도(2:9) 하나님이 장차 주실 참된 부요함을 바라보며
죽기까지 충성하는 절개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빌3:7-8)
24절)「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4절 말씀은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 중 문맥을 생각해 볼 때 ‘이단 사상에 물들지 않은 자들에게
주님은 이미 그들이 지키고 있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및
거짓 교훈을 좇지 않는 것 이외의 짐은 더 이상 지우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라는 해석이 가장 합당하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가?
신앙이란 성숙과 성장을 해야 하는 것이지만,
과도한 목표와 과도한 훈련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반절에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의지적 선택의 정반대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다른 짐을 지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짐의 정체가 무엇인가?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다.
다시 말해 두아디라에 남아 있는 순결한 성도일지라도
완벽하고 완전한 성도는 아니란 말씀이다.
아직 부족한 점이 있고, 연약한 부분이 있고, 훈련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더 혹독한 훈련으로 내몰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훈련의 강도를 높이기보다 현상태를 유지하면서
쉼을 얻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방법이다.
주님의 양육에는 템포가 있다.
강도를 높였다 낮추었다 하는 것이다.
마치 운동 선수가 좋은 근력, 지구력, 순발력을 갖추기 위해
계획된 트레이닝을 하는 것처럼 완급 조절이 신앙에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영적 원리는 성격이 급하고 성취욕이 강한
성도들을 통해 간혹 무시되곤 한다.
폭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일순간에 신앙의 성숙을 이루겠다며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신앙은 항상 하늘을 향해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마치 초보 마라토너가 매일 30km를 달리겠다는 계획을 잡고
일주일 안에 완주할 것을 꿈꾸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의 신앙 훈련 트레이너이신 주님도 우리에게 무리한 짐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신앙은 성숙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단시일 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단계가 있다. 힘든 훈련을 마치면 쉼이 필요하다.
만약 적당한 훈련과 적당한 영양 섭취와 적당한 쉼이 없다면,
마라톤을 준비하다 종아리, 허벅지, 허리, 발 목 등에 부상을 당하는 것처럼
신앙도 부상을 당하게 된다.
주님과 보조를 맞추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을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그 훈련을 받을 때
우리는 주님이 바라시는 온전한 신앙을 갖춘 튼실한 성도가 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