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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신무합기도 홈페이지
신무 합기도
신무 합기도란 무엇인가.
합기도는 한국무술인데,이것은 아이끼도와 쿵푸와 한국의 발싸움기술에
대항하기 위한 유도의 부드러운 기법을 조합한 것이다. 상체는 태권도의
발차기보다 낮게 고정하며,높은 발차기에서는 한손을 땅에 짚고 찰 수
있다. 이런 방식의 발차기는 등근육에 덜 무리가 간다.
신무합기도에는 형이 없으며,카타(가라데의 형)을 포함하지도 않는다.
기본적 생각은,격투는 어떤 형식에 의존하여 진행되지 않으며,오직 빠른
반사신경과 상황에 대한 지식의 접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신무합기도의 기법에서 힘은 주된 것이 아니다. 기법은 유연하게
진행되나 폭발적이다.물이 흘러내리는 원리에 의해서. 신무합기도의
기법은 미국인들이 종종 말하듯 'street wise'한데, 이것은 거리에서의 공
격을
의미한다. 신무 합기도는 직접적이고,복잡하지 않으며,효과적인
방식이다. 기법의 힘에 중점을 두는 것 보다는, 지한재 총재는
상대공격을 무효화시키고, 그것을 봉쇄하며 간결하게 흩뜨리라고
지적한다. ; "그렇지 않으면 죽게된다."
정신과 육체
지한재 총재에 따르면,정신은 무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그는
정신의 싸움을 조절하는 것이 신체적 싸움을 아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무 합기도는 던지기,꺾기,혈도제압,발차기,주먹을 포함하는 내적인,외적
인
방식의 조합이다. 무기들(짧고 긴 봉,지팡이,단검과 검)도 신무합기도에
포함된다. 무기는 손의 연장으로 간주된다. 손과 몸의 움직임은
빈손이거나 무기를 들었거나 같다. 이것이 무기술을 더 쉽게 한다.
신무 합기도의 기와 키아이
(*주* 키아이란 아마도 기합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카타에
대해서 별도의 설명이 없었고,기합의 일본어 발음인 키아이를 사용한
것을 볼때 이 웹 싸이트를 만든 핀란드의 경우 일본 무술의 용어가
상당히 보편적으로 이용되는 것 같습니다. )
명상은 신무합기도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내적 힘이 신체의
여덟가지 중요부분으로 흘러드는 길을 터준다. 신무합기도는 두뇌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신체를 4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인식한다.
(심장,폐,신장,장) 이것들은 또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며,두 부분
모두가 두뇌의 해당하는 부분을 조절한다.
지한재 총재는 기의 힘이 두뇌로 하여금 아드레날린분비를 증가시킨다고
믿는다. 피는 더 빨리 순환하고 정신은 또렷해지며,신체는 더욱 민첩하고
강해진다. 기에 의해 기법은 더욱 효과적이 된다.
내적 힘의 도움으로 능력이 4배로 향상된다.
신무합기도의 기합소리는 자신의 이를 악물고 터져나와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기합소리를 지르면, 진동이 귀를 통해 두개골의 후두부로
전파되며, 이것이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고 기의 힘을 되돌린다.
(*주* 지한재씨가 과연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이 글에 나온 내용으로 보면 지한재씨가 돌팔이 한의사로
제자들에게 인식되는거나 아닌지 걱정되네요. 아마도 지한재씨는
서양인들에게 기의 개념을 이해시키는데 한계를 느껴 아드레날린의
분비와 기합소리를 연관시킨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그 설명을 자신들의
의학지식으로 나름대로 해석해서 이 글을 썼을거고... )
지한재 총재에 대해 - 합기도의 진실한 개척자.
지한재 총재는 1936년 남한에서 태어났다. 13세때 그는 최용술로부터
그의 육체적 수련을 시작했다. 지 총재는 18살때부터 도인 이씨의
지도아래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 총재에게 무기술과 한국의 택견
발차기와 명상을 가르쳤다. 한 여자도인이 5년동안 정신 수련을
가르쳤다.
지 총재가 23살이 되었을때 그는 한국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경호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청와대에서 18년동안 근무했다. 이것이 지한재로 하여금
많은 정치적 영향력과 인맥을 갖게 하였다. 그는 또한 대통령 경호대의
300여명의 경호원과 한국경찰,보병학교와 한국 특수전부대의 무술 지도
책임자이기도 했다.
1969년 미국인들이 펜타곤(미 국방성)에서 한국 정부 수뇌들과 회담을
가졌고,이 때문에 지한재는 미국으로 여행하게 되었고 닉슨 대통령의
비밀 경호원들과 F.B.I 요원들을 지도했다. 이런 교류의 과정에서
태권도 사범인 준 리(*주* 이준구 사범;미국 최초의 태권도 사범. 원래는
'준 리의 가라데 클럽' 관장이었죠. 나중에 최홍희의 설득으로 이름만
바꿨지만. 이분덕에 지금도 미국 태권도는 가라데랑 무쟈게 닮았답니다.)
가 지한재를 브루스 리(이소룡)에게 소개했다. 브루스 리는 지한재의
지식에 열광했고 그에게 자신을 지도해줄 것을 청했다.
70년대 초반 홍콩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의 웡씨가 지한재 총재를 무술
지도 사범 및 기술자문과 영화배우들의 트레이너로 고용했고,몇몇
영화에는 직접 배우로 출연했다.
브루스 리는 지총재가 사망유희라는 영화에서 댄 이노산토,카림 압둘
자바와 브루스 리의 상대로 싸울때 황금 벨트를 매기를 원했다.
황금 벨트는 무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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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ter Ji-Han-Jae
Ji studied between 1953 to 1956 under grandpatriarch Choi and received the 3. Degree black belt.
After his breakup with Choi, who refused to show him the higher Dan techniques , he founded the "Ma-Jan-Dong-Kwan" in 1957 and moved to Seoul in 1960 to open up his own school.
The dispute between the two lasted up to the death of grandpatriarch Choi. Ji integrated all known acrobatic, high and jumped kicking techniques in his Hap-Ki-Do style.
In 1962, he was the co-founder of the "Ki-Do-Yae" (Korean Ki-Do Association) and later trained under a monk called Hei-Dong-Seu-Nim.
In 1965, he was the co-founder of the "Korea Hap-Ki-Do Association. (Dae-Han-Hap-Ki-Do-Hyub-Hoe) which was canceled in 1973. This organization was reestablished by Oh-Se-Lim in 1984.
Also in 1984 Kim-Moo-Woong, Jae-Nam-Myung established the "Republic of Korea H.K.D. Association (Dae-Han-Min-Kuk-Hap-Ki-Do Association) and Ji created his own H.K.D. style called "Sin-Moo".
The lineage of the most highest ranking korean H.K.D. practitioners today goes back to Chi-Han-Jae and his limited uncomplete H.K.D. knowledge.
So, only a handfull of Choi private students had learned probable the higher Dan techniques (as example: prinziples of knife fighting, the two arts of the middle sword and techniques / prinziples of the long sword) he had developed.
Master Jung-Moo-Kwon decided to unify the different Hap-Ki-Do groups and created the eagle image. (And does not like the common meaning that Ji Han Jae used it first !)
The first 12 Hap-Ki-Do schools in 1963 were: Yu-Sul, Yu-Kwon-Sul, Bi-Sul, Sung-Moo-Kwan, Kuk-Ki-Do, Kuk-Sool-Hwe, Shin-Moo-Kwan, Kuk-Sool-Kwan, Moo-Sool-Kwan, Kwang-Moo-Kwan, Han-Pool and Ki-Do.
- Klaus Schuhm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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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경호관 지한재
(출처 : 모르겠습니다.)
제3공화국시절 청와대 경호실에 18년동안 근무하면서 할리우드 영화판에 배우노릇까지 한 합기도 창시자 지한재 이야기로 넘어가자. 지한재의 스승은 훗날 합시도의 기초가 되는 유근술의 대가 최용술이었다. 최용술은 일본인 양자로 있으면서 이 유근술을 배웠는데 해방이 되고 대구에 머물면서 수제자인 지한재에게 이를 가르쳤던 것이다. 지한재는 유근술에다 태껸을 가미, 새로운 무술을 만들어 '기를 합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합기도라 했다. 대구에서 합기도를 가르치다 육사의 합기도 교관으로 올라온 지한재는 5.16과 함께 권력의 심부로 접근하게 된다. 최고회의 부의장이던 박정희의 경호원으로 발탁됐던 것이다. 박종규가 경호실장이던 때는 2백여명의 직속 경호원을 직접, 차지철 때에는 군대와 경찰소속까지 합기도를 가르쳤기 때문에 권력 깊숙한 곳에서 안면을 넓혔다. 합기도가 청와대 무술의 기본이 된 것은 지한재 덕택이었다. 지한재는 특히 박종규와 가까웠다. 기업은행 서대문지점의 창고에 합기도 도장을 열게 주선해 준 것도 박종규였다. 박종규는 지한재가 조직한 합기도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지한재를 경호관이라는 부이사관급 직책까지 달아준 은인이었다. 지한재가 미국에서도 박종규의 대형사진을 도장에 걸어놓고 있는 것은 이런 연유가 있다. 지한재가 할리우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통령 경호관으로 있을 때였다. 69년 5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한국에 대통령 경호에 소요되는 M16소총 등 최신 무기와 무전기 등을 보내 주었다. 이 경호장비들은 미국의 대통령경호의 그것과 꼭 같은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답례로 지한재를 미국에 보내 합기도 교육을 시키도록 했다. 미국에 간 지한재는 미공군첩보단(OSI)와 미연방경찰(FBI)및 백악관 경호원48명에게 합기도를 가르쳤다. 워싱턴에 머물면서 지한재는 이준구로부터 이소룡을 소개받았다. 이소룡은 지한재가 시범 보이는 합기도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홍콩의 유명한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사를 소개해 주었다. 지한재는 이 영화사의 무술지도자가 되었다. 지한재가 참여한 첫 영화는 이소룡의 마지막 작품'죽음의 게임(Game of Death)'이었다. 이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이소룡은 위 아래가 붙은 특유의 노란 옷을 입고 나와 악당들과 대결하는데 지한재는 단역으로 출연, 결국 이소룡에게 맞아죽는 역할을 했다. 지한재는 골든 하베스트사에서 무술지도자로 있었으나 이소룡이 살아 있었을 때는 빛을 보지 못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술하면 이소룡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소룡이 죽자 상황이 달라졌다. 지한재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골든 하베스트사가 '합기도'란 영화를 만들어 지한재로 하여금 합기도 실력을 마음껏 시연토록 했다. 한국에서는 '흑연비수'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는 '레이디 쿵후'로 소개되었다. 이 영화는 중국인 3남매에게 합기도를 가르쳐 이들을 일본군과 맞서게 한다는 내용인데 지한재는 이들의 사부로 나왔다. 영화배우에다 대통령 경호관, 거기에 합기도 최고수로, 지한재의 인생은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되고 그는 경호관직에서 물러났다. 대신 민정당에 재빨리 가입, 대구공고 선배인 전두환의 경호를 맡았다. 지한재가 합기도 유단자들을 대거 민정당에 가입시켜 당총재 경호에 투입한데 대해 계파간에 문제가 되었다. 시비의 초점이 된 것은 경호비의 출처였다. 경호비는 한국화랑도협회의 한 간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이 간부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내놓은 3천3백만원의 경호비는 자신의 회사 이사회 동의없이 지출됐다는 것이었다. 지한재와 이 협회 간부는 회사 공금을 빼돌려 착복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지한재는 1심에서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지한재는 항소를 했으나 2심에서도 마찬가지의 선고가 내려졌다. 그는 자신이 정치판의 단단한 사슬에 얽매였다는 것을 느꼈다. 감방 속의 그는 울분을 달래기 위해 조화를 만들었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종교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그는 성경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독특한 돌려차기 형을 개발한 것도 감옥에서의 성경읽기서 얻은 암시 때문이었다. 시계방향으로 빠르게 도는 스핀 킥이 그것이다. 10월의 형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머물 집도 없었다. 아내가 변호사비를 대느라 그 많은 재산을 다 처분했던 것이다. 도장도 사라졌고 제자들은 냉담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고작 잡힌 일이란 것이 한 종교단체의 대표 가방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분노와 수치심 속에서 그가 결심한 것은 한국을 떠나자는 것이었다. 오랜 친구였던 전경환을 찾아간 지한재는 미국에 갈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전경환의 주선으로 무술사범을 초청하는 독일인을 따라 독일로 건너 간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수중에 5만원을 지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한재는 어렵게 허름한 도장 하나를 구해 '신무합기도'란 간판을 달았다. 50이 다 된 나이에 빈주먹으로 시작한 미국생활이었다. 고생끝에 그나마 이제는 제자들도 많이 생기고 한국에 남아 있는 아이들은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종종 전해듣고 있다. 그러나 지한재는 한국땅을 다시 밟지 않으리라는 그때의 결심을 아직 다삭히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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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무명씨
대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 어르신들이 이야기하실 것은 못 되고 또한 많아봐야 40대 이전의 공간이 되므로 저같은 어린 사람이 노땅 행세를 해야 하겠군요.
이소룡이란 사람은 원래 영화배우가 아니고 미국 LA 차이나타운에서 쿵후도장을 운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는 겨우 영화의 단역에 출연하던 형편이었습니다. 물론 홍콩에서도 어려서부터 TV극에 출연하는등 유별나게 스크린을 좋아하였던 것 같습니다. 우연한 기회에(1964년 켈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쿵푸시범을 하던 중 발탁되어 영화를 찍었으며 그 영화가 용쟁호투입니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실력을 갈고 닦아야 됩니다. 우리 나라 영화 배우들도 이렇게 픽업된 사람이 많지요
하옇튼 이소룡은 그런 기회를 타고 영화배우로 일약 스타가 되었으며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헐리우드 영화에 백인들을 때려 눕히는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요즘은 동양인이 백인을 때려 눕히는 영화가 거의 없지요). 근래에 필립 리(원명 이 원 영)가 찍었던 베스트 오브더 베스트 3에나 그런 장면을 볼까....
아뭏든 그런 것을 계기로 미국의 대도시에서 이곳 저곳 동양 무술의 도장들이 잇따라 문을 열게 됩니다.
사실 이준구씨가 이소룡과 처음 조우하던 시점이 이소룡의 절정기를 예비하는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까지 이소룡은 무술은 주로 중국계열의 영춘권을 주류로 한 무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춘권을 구경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영춘권의 손기술을 현란하다 못해 예술이나 서커스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준구씨는 이소룡가 사귀면서 태권도(후일 최홍희 씨는 이준구씨의 기술에 대해 태권도적인 엄격한 것이 없고 가라데와 미국식 춤을 결합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슴; 최홍희 저 [ 태권도와 나 2부]에서)적 발기술을 전수해 주었고 이준구씨는 그로부터 쿵푸의 손기술을 많이 도움 받았다고 합니다.
아뭏든 이소룡의 활약과 함께 크게 성장한 영화사가 있으니 이름하여 골든하베스트입니다. 성룡의 취권을 비롯하여 많은 홍콩영화가 그 영화사를 통해 배급되었습니다.
한편 지한재(관장님으로 호칭해야 할지 이재는 뚜렷한 관계 설정이 없습니다)님은 대구에서 합기도를 최용술도주님으로 부터 지도받고 서울에 올라와 합기도 보급에 힘썼습니다. 지한재님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박종규씨와 친분이 두터웠고 청와대 직속경호원을 지도하는 등 권력의 핵심부에서 안면을 익혀왔습니다.
1969년 닉슨은 백악관에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장비(경호용)들을 청와대 쪽에 보내 주었고 청와대는 그 답례로 지한재님을 미국의 백악관에 보냈습니다.(이 중에는 재미있는 후일담도 있습니다. 당시 이준구 백악관 사범이 경호 무술을 지도해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엄청나게 거구의 흑인 상대 두명을 물색해다 시범을 보이라고 붙여 주었다는 군요. 아뭏든 그 두 흑인은 멱살 잡기 한 수로 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한 분은 너무 무서운 발차기(뒤 돌려차기 였던가)를 보여 주다 뒤꿈치 뼈가 깨지는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차는 사람의 뛰꿈치가 깨질 정도면 어지간 했겠지요)
이때 지한재님은 이준구씨로 부터 이소룡을 소개 받습니다. 이소룡은 합기도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홍콩의 유명한 영화사인 골든 하베스트사에 소개해주어 이 영화사의 무술 지도자가 되기도 합니다. 성룡의 사학팔보나 소권괴초에 보면 합기술적 기술이 꽤 나옵니다.
지한재님은 박정희 시해직후 경호관직을 물러났으며 민정당에 가입했고 대구 공고 선배인 전두환의 경호를 맡게 됩니다. 그때 지한재님은 한국합기도혀뵈의 회장이었는데 합기도 유단자를 대거 민정당에 가입시켜 당총재의 경호에 투입합으로써 계파간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시비의 발단은 경호비의 출처였는데 경호비를 모(무술단체) 협회의 한 간부로 부터 지원받았습니다. 그런데 경호비를 전달한 사람과 지한재님은 3천3백만원이라는 경호비가 그 사람이 경영하던 회사의 동의 없이 지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공금 착복을 했다는 혐의로 구속됩니다. 이렇게 하여 지한재님은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구치소에서 살다가 원주로 이감됩니다. 이것이 권력의 충돌과정에서 야기되는 파워게임인지 진실로 공금 착복을 하기 위해 둘이 계획했던 것인지는 나름대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은 한국정치사에 하도 많은 일이라.... 예를 들자면 장준하씨 같은 의문의 추락사라든지...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음독자살을 한 유럽의 한국대사라든지......등등등등...
아뭏든 지한재님은 징역을 사는 과정중에 성경에 깊이 몰입했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서 독특한 지한재식 발차기(뒤 돌려차기;회축)를 개발합니다. 대한합기도 협회 소속 사범들은 거의 이런 뒤돌려 차기를 익힙니다. 태권도식 뒤돌려 차기는 뒤로 돌아서 안면을 발바닥으로 후려 내리는 식인데 합기도식 뒤돌려차기는 단전에서 튕겨내어 상대의 몸을 두동강 내는 식으로 합니다. 직접 한번 보십시요.
10개월 형을 끝내고 귀가한 그에게 남은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도장도 사라지고 가산은 변호사비로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는 오랜 친구였던 전경환씨에게 해외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고 그의 도움으로 무술사범을 초청하는 독일인을 따라 독일로 간 후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의 나이 48세였습니다.
암튼 그 후로 미국에 도착한 그는 신무 합기도라는 간판을 걸고 합기도를 보급합니다.
다시 사망유희(죽음의 게임)라는 영화 얘기로 돌아 갈까요.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은 노란 옷을 입고 나오지요. 사망탑은 원래 다섯단계인가(기억이 안남)로 되어 있는데 각 층에 고수들이 있지요. 그런데 어느 장면인가 보면 갑자기 연결이 않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거기서 잘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무술영화의 무술지도를 맡았던 분이 단역으로 출연하여 처절하게 맞아 죽는 장면은 제가 생각해도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물론 척 노리스 같은 인물도 그런 역할로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죠.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지한재님이 그 영화에 개입했었고 사망탑에서 대결하다가 패배하는 역할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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