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2월 8일,
김만철 일가 귀순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북한을 탈출한 지 24일 만인 1987년 2월 8일 특별전세기편으로 서울에 도착,
귀순했다. 이로써 첫 가족단위 탈북 사례가 되었다.
1987년 1월15일 새벽 1시.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의 바닷가에선 북한군의 삼엄한 경비망을 피해
68세 노인부터 11세 어린이까지 김만철 일가 11명이 배에 올랐다. 그들은 오직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김만철은 당시 북한군 해안경계부대의
군의관이었기에 항해가 자유로운 어로감시선을 훔쳐 탈 수 있었다. 그들이 가려고 했던
‘따뜻한 남쪽 나라’는 사실 인도네시아였다고 한다. 무작정 동쪽 공해상으로 향했던 배가
엔진 고장을 일으켜 표류하다가 20일 오후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발견되어 쓰루가항으로 예인됐다.
일본에서 조사를 받으며 남한행을 희망했지만 조총련 관계자가 통역을 맡았던 까닭에 북한도
김씨일가의 탈북을 알게 되었고 이후 남한과 북한은 각각 일본에 자국으로의 인도를 요청하게 되고
민감한 외교문제로 비화된다. 결국 일본 정부에 의해 추방형식으로 대만으로 보내진 다음 이들의
의사에 따라 한국으로 귀순하게 된 것이다. 대만을 거쳐서 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의 첫마디는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왔다” 였다. 목숨을 걸고 북한 땅을 탈출한 지 24일 만이다.
김만철 일가의 귀순은 당시까지 분단 이후 단일 귀순 케이스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이후 97년 5월 안선국씨와 김원형 일가 14명이 해상탈북했고, 2002년 5월 북한주민 21명을 태운
어선이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출발하여 서해 공해상을 통해 귀순했다.
한편 김만철 일가가 북한을 탈출하던 그날, 백령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여수 선적 저인망어선
‘제27 동진호’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된다. 엿새 뒤인 1월 21일에 북한적십자가 대한적십자를
통해 송환 의사를 전달할 때까지만 해도 김만철 일가의 탈북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김씨 일가의 탈북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동진호 선원 12명의 송환을 거부했고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중 6명은 남북이산가족 만남에서 만났지만 나머지 6명은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김만철은 귀순 후 강연 활동과 신앙 생활에 매진하였고 한국에 와서 모은 돈으로 경남 남해에 땅
1만5000평을 구입해 ‘평화의 집’이라는 선교기도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원 운영을 맡았던
목사가 기도원을 담보로 2억원을 대출받고는 이 돈을 갚지 않고 필리핀으로 도주하면서 김씨의
남한 생활에 어려움이 닥쳤다.
결국 기도원을 헐값에 매각하고 어렵게 은행 빚을 갚았으나 김씨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남에게 돈을 빌려줬다 떼이고 사업에도 수 차례 실패해 빚을 지고 빈털터리가 된 후
2001년부터 한동안 컨테이너 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