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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악은 악을 기피한다.
충성심을 가장한 삼수의 은근한 협박을 받으며 구차스러운 언약을 하는 등 그런 상황 아래 산 목숨이라 할 수 없는 일각, 모골이 얼어붙는 하룻밤을 사당 마룻장 밑에서 보내고 구사일생한 조준구는 하인들 눈에도 민망스러웠다. 얼마나 허둥대었기에 파리가 앉으면 낙상하겠다던 이마는 찢겨져 핏자국이며 왼쪽 눈가장자리는 퍼어렇게 부풀어올라 눈 하나가 짜부러졌고 얼굴 몸뚱이 찢어진 의복 할 것 없이 그을음 거미줄이 줄레줄레 묻어서 갈 데 없는 미치광이 모습이다. 남달리 몸치장에 알뜰했던 성미였던 만큼 그런 꼴을 하고서 이를 부드득 갈아젖히니 하인들이 돌아서서 웃음을 깨물지 않을 수 없다.
"아아니! 목을 쳐죽일 그 화적놈들이! 아이고오, 이 일을 어쩌누."
안방으로 달려간 홍씨는 홍씨대로 울부짖는다. 아무리 뒤져보아야 목숨만큼이나 아끼던 그 많은 패물은 간 곳이 없다. 서울 육의전에는 바리바리 사다 나른 숱한 청나라 비단, 은전 한푼 남아 있는 게 없다. 눈꼬리를 치키고 똥똥한 작은 몸을 솟구쳐가며 고방으로 달려간 홍씨, 그곳인들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울부짖고 악담하고 금새 목이 잠긴다.
"마님, 그저 목숨이 살아남은 것만 천행으로 아시야제요. 고방 빈 것쯤 만석 살림이 끄덕이나 하겄십니까. "
삼수는 환심을 사려고 말하는 것이나 눈앞에 보이는 사태에 눈이 뒤집힌 홍씨
"이놈아! 불난 집에 부채질이냐!"
하다가 뒤늦게 생각이 난 듯 별당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서희 이, 이년! 썩 나오지 못할까!"
나오기를 기다릴 홍씨는 아니다.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서희를 끌어 일으킨다.
"네년 소행인 줄 뉘 모를 줄 알았더냐? 자아, 내 왔다! 이제 죽여 보아라! 화적놈 불러들일 것 없이!"
나오지 않는 목청을 뽑으며, 거품이 입가에 묻어나온다.
"자아! 자아! 못 죽이겠니?"
손이 뺨 위로 날았다. 앞가슴을 잡고 와락와락 흔들어댄다. 서희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울고 있던 봉순이
"왜 이러시요!"
달겨들어 서희 몸을 잡아당기니 실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홍씨 손에 옷고름이 남는다.
"감히 누굴! 감히!"
하다가 별안간 방에서 뛰쳐나간다. 맨발로 연못을 향해 몸을 날린다. 그는 죽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애기씨!"
울부짖으며 봉순이 뒤쫓아간다.
"죽어라! 죽어! 잘 생각했어! 어차피 너는 산 목숨은 아니란 말이야! 죽고 남지 못할 거란 말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서희는 연못가에서 걸음을 뚝 멈춘다. 돌아본다. 흙빛 얼굴에 웃음이 지나간다.
"내가 왜 죽지? 누구 좋아하라고 죽는단 말이냐?"
나직한 음성이다. 홍씨 눈을 똑바로 주시한다.
"사람 영악한 것은 범보다 더 무섭다는 말 못 들으셨소?"
여전히 나직한 음성이다.
"무서우면 어떻게 무서워? 우리 내외한테 비상을 먹이겠다 그 말이냐?"
아이고! 아이고! 눈물도 안 나오는 헛울음을 울더니 이번에는 봉순에게 달겨들어 머리끄덩이를 꺼두르고 한 소동을 피운다. 읍내서 헌병, 순사들이 왔다는 말에 홍씨는 겨우 본채로 돌아갔다. 서희는 찢겨진 저고리를 내려다본다.
"길상이놈이 날 죽으라고 내버리고 갔다. "
눈이 부어오른 봉순이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찾았지마는 사당 마릿장 밑에 숨은 줄이야, 우, 우찌... 으흐흐흐. "
되풀이 입술을 떨면서 서희는 말했다.
"길상이놈이 날 죽으라고 내버리고 갔다. "
달려온 헌병들에게 맨 먼저 당한 것은 삼수다.
"나, 나으리! 이, 이기이 우찌 된 영문입니까!"
헌병이 총대를 들이대자 겁에 질린 삼수는 그러나 무엇인가 잘못되었거니 믿는 구석이 있어서 조준구를 향해 도움을 청하였다.
"이놈! 이 찢어죽일 놈 같으니라구!"
무섭게 눈을 부릅뜬 조준구를 바라본 삼수 얼굴은 일순 백지장으로 변한다.
"예? 머, 머, 머라 캤십니까?"
"이놈! 네 죄를 몰라 하는 말이냐? 간밤에 감수한 생각을 하면 네놈을 내 손으로 타살할 것이로되 으음, 능지처참할 놈 같으니라구 이놈! 어디 한번 죽어봐라!"
"나, 나으리! 꾸, 꿈을 꾸시는 깁니까? 이, 이 목심을 건지디린 이, 이 삼수놈을 말입니다!"
그러나 조준구는 바로 저놈이 폭도의 앞잡이였다고 이미 한 말을 다시 강조할 뿐이다. 물론 이 경우 폭도란 의병을 일컬은 것이다.
"이눔으새끼! 가아. "
헌병은 총대로 등바닥을 후려친다.
"아이고오! 살리주소! 나으리! 나으리마님! 사, 살리주시요! 이놈 살리, 소, 소인은 나으리를 사, 살리 디맀는데 이럴 수 있십니까?"
삼수는 걸레조각처럼 끌려나갔다. 노비들은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문 밖으로 끌려나간 뒤에도 삼수의 울부짖음은 계속 들려왔다. 울부짖음이 끊어졌는가 싶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뒷산 쪽에서 총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숲속에서 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얼렁뚱땅 넴기느라고 진땀을 뺐구마. 사당문 열고 들어갈 때는 간이 콩알만해지데. '
'나리께서 거기 계시는 걸 알았던가?'
'하모, 알았지러. 알았이니께 간이 콩알만해졌지. 그눔아들이 지서방맨치로 날 직일라 카는 데는 참말이제 눈앞이 캄캄하더마. '
'그런데 어떻게?'
'아 그랬는데 윤보가 나를 집안 내막 잘 알 기라 캄서 죽는 대신 나으리를 찾아내라는 기라. 그래 찾는 시늉을 했지. 살고 봐야 안하겄나? 게우 그눔아아들이 대숲을 뒤지는 새 사당에 숨어들어가서 나으리께 안심을 시키놓고 의심을 받을까봐서 따라가는 척하다가 뺑소니를 안 쳤나. 참말이제 그눔아아들한테 들키기만 했이믄 두 양주분 지금쯤 황천 가시는 길일 기구마는.'
아침에 넉살좋게 지껄이던 삼수 모습을 하인들은 생각해보는 것이다. 끌려나갈 때도 소인은 나으리를 살리디맀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 하지 않았던가. 삼수가 믿지 못할 위인인 줄은 모두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서 조준구의 본성을 하인들은 똑똑히 보았다. 이용하고 나면 버리는 무자비한 생리에 소름이 돋았다. 실상 조준구는 사당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이 찢어죽일 놈! 어디 한번 죽어봐라!'
마음속으로 별렀던 것이다. 일본 헌병들이 오기까지 안심할 수 없어서 참았을 뿐이다. 삼수가 공포감을 안겨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삼수가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도 틀림이 없다. 언약 따위 저버리는 것쯤은 능사라 하더라도 죽이기까지, 그러나 삼수는 이제 성가신 존재, 없어져주는 편이 홀가분하다. 어젯밤의 일이 없었더라도 어쩌면 조준구 머릿속에 삼수를 폭도로 몰아버릴 생각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 난 이틀 만에 진주서 출동한 일본군 이 개 소대는 소위 그네들이 일컫는 폭도들의 행방을 쫓아 지리산 방면으로 향했고 읍내서 온 헌병들은 마을을 결딴내고 있었다. 아낙들과 늙은 부모들은 매를 맞고 총칼로 위협받으며 읍내로 끌려가기도 했고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이 북새통에 한조가 돌아왔다. 그 동안 진주에 있다가 솔가할 결심으로 마을에 돌아온 그가 이번 일에 관련이 있을 리 만무다. 사건의 내용조차 모르고 왔다. 한데 그는 삼수 다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저놈도 폭도 중 한 놈이오. 아주 악질이란 말이오. "
조준구는 서슴없이 손가락질을 했다.
"머라꼬? 한조가 잽히갔다고?"
바깥 동정을 살피고 온 두만네 말에 두만아비는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댁네가 울고불고 야단났구마요. "
"하기사 머, 죄 없이믄 나오겄지. 한조가 무신 죄 있다고. "
눈에 불안이 가득 실렸으나 슬그머니 앉는다. 들일도 못하고 답답하게 방에 갇혀서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마을에 불을 지른다는 것이 참말인가, 생각지 말자고 몇 번을 다짐했건만 잃어버린 소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등 심중이 괴롭기만 한데 한조가 잡혀갔다는 것은 또 무슨 징조란 말인가.
"보소."
"... "
"참말이제 이러다가 큰일나겄소. 야무네가 그러는데 조간가, 그 도적놈이 찔렀다 안 카요."
두만네는 남편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소근거린다.
"머라꼬? 그 양반이 찔러? 와. 머 땜에? 한조는 벌써부터 여기 안 있은 거는 다 아는, "
"그러니께 큰일나겄다는 거 아니겄소. "
두만아비는 양볼을 실룩거리며
"하 참, 그래도 죄가 없는 바에야. "
"그기이 그렇잖은갑더마요. 조간가 그 도적놈이 왜말도 잘하고 왜놈들하고 친분이 두터바서 못하는 짓이 없다 안 카요. 그 금지옥엽 겉은 애기씨가 거무겉이 돼가지고 시달림을 당하는데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겄더라 안 캅니까. 날이믄 날마다, 저거들 시키는 대로 안 하믄 왜놈한테 넘기겄다고 얼림장이고. "
"... "
"한조 그 사람도 여기 안 있었노라, 한사코 발멩을 했다 카더마는, 마구 발길질을 함서 개 끌듯 끌고 갔다 안 카요. "
"그, 그라믄 나도 여기 없었는데, 그, 그것 가지고는 바, 발멩이 안 된다 그, 그 말이겄네?"
"그거사 한조 그 사람은 흉년 때 일로 해서 조가가 빼물고 있었겄지요. "
"그, 그래도 법대로만 한다믄 무신 죄 있다꼬?"
그러나 며칠 뒤 들려온 소식은 한조가 총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추달을 받다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게 되자 죽인 것이라 했다.
'이래가지고 우찌 살겄노. 사람으 목심이 포리 목숨이니. '
한조네 식구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다 못해 강가로 나온 두만아비는 눈앞에 있는 강물이 보이질 않는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당할지,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지난날 한조 모습이 눈앞에 삼삼거려 견딜 수 없다. 까닭 없이 조준구한테 끌려가 매를 맞고 미칠 것 같다면서 밭둑에 앉아 있던 한조, 번갯불에 콩 구워먹을 놈 하며 빈정거리면서도 의리를 저버린 일이 없는 윤보의 얼굴, 영팔이와 용이의 얼굴, 친구도 이웃도 없이 혼자 남은 외로움이 찬 강바람과 함께 전신에 스며든다. 목구멍에서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헛기침으로 막아보지만. 마을은 산천초목이 떠는 형세에 빠졌다. 일본 헌병들의 총칼도 무서웠지만 조준구의 손가락이 더 무서웠다. 손가락 간 곳에 죽음이 있었다. 다른 마을에도 몇 사람인가 죽었다는 말이 있다. 일본 헌병이나 조준구가 점점 더 서슬 푸르게 날뛰며 포악해지는 것은 지리산 방면으로 출동한 일본 군대가 성과를 올리지 못한 때문이라고도 했다. 성과는커녕 그들은 마을을 떠난 무리들의 행방조차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났을 무렵, 마을에는 쫓겨난 사람 도망간 사람들로 하여 빈집이 많아졌다. 임이네는 임이와 홍이를 데리고 읍내 월선네 집으로 밀고 들어갔고 영팔이 한조의 식구들은 진주로 달아났다. 그 밖에 삼십줄의 달수 붙들이 따줄이, 그의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윗마을에서는 더 많은 집이 비었다고 했다. 표면상으로는 일이 일단락져서 조용해진 듯싶었다. 그러나 때때로 일본 순사들이 마을에 나타났고 말 탄 병정들이 흙바람을 일으키며 시위하듯 지나가곤 했다.
"이엉 갈구마는. "
삐뚜름하게 갓을 쓴 서서방이 지팡이를 든 채 턱을 치키며 지붕 위를 올려다본다.
"야."
두만아비는 건성으로 대꾸한다.
"거 폭신폭신하니 잠자리 좋겄다. 금년이야 묵을 사램이 없어 그렇지 시절이야 좀 좋은가?"
횡설수설인데 입맛을 쭈욱 다시며 말하는 품은 노인답게 의젓하다.
"이팽이. "
"야."
"내일 우리집에 안 올랑가?"
"... "
"우리집 마당에서 광대놀이 한다는 말 들었겄제?"
두만아비와 맞잡아서 새끼를 잡아당겨 서까래에 묶던 한복이
"운봉할배."
"와."
"고만 집에 가소."
"아따, 내가 빈말하는 줄 아나? 한마당 논다 카이 그러네. 누가 기경값 내라는 것도 아니겄고, 이분의 광대는 재주가 볼 만하다니께."
"운봉할배."
"와."
"손주를 누가 안아가믄 우짤라꼬 나와 댕기요."
"머라꼬? 아아니, 씨종자 하나 있는 거를 누가 데꼬 간다는 기고? 음. 총 메고 온 사램이 데리간다 카더나?"
퀭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서서방은 허둥지둥 지팡이로 길바닥을 두드리며 집을 향해 걸어간다. 두만아비와 한복이는 영만이가 올려주는 용마름을 지붕 꼭대기에 펴면서 말이 없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일은 거지반 된 듯싶다.
"요새는 와 그런지 부쩍 광대 얘기를 하구마요. "
한복이 혼잣말같이 뇐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는갑다. "
"... "
"실성한 중에도 신은 남아 있어서... 그래도 요새는 걸식하로 안 나가니께 과수댁네 심장이 덜 상할 기구마."
"양자 데리온 후부터는 그 버릇을 잡았다는가배요."
"참말로 사램이 살아갈라 카믄 별놈의 풍상을 다 겪는다."
일에 이골이 나서 장골 한몫을 하나 몸집은 열일곱 나이에 비하여 작은 한복이, 부지런하고 착한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두만아비는 말상대를 하거니와 경위 없이 욕심스런 봉기하고도 요즘에는 잘 지낸다. 봉기 역시 풀이 죽어서 두만아비를 찾아오곤 했다. 외로워서도 그랬었지만 같은 낙오자의 비애 같은 것, 공범자로서의 상련, 그런 마음이 그들을 전보다 친밀하게 했는지 모른다. 이들과 달리 한복이는 그 일에 참가하지 않았던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영만아, 새끼 좀 올려도고. "
한복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영만이 새끼 한 묶음을 올려준다.
"해가 질라 카는데 어서 하고 저녁 묵도록 하소."
두만네가 지붕 위를 향해 말했다.
"다 돼가거마는."
두만아비 대꾸다.
"한복이 니 배고프겄다."
"괜찮십니다."
일을 끝내고 지붕에서 내려왔을 때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깜박거리는 등잔불 아래 김이 나는 된장국, 풋김치, 간갈치는 구워놓았고 수북이 올라간 보리밥, 한복에게는 오래간만의 성찬이다.
"한복아. 묵고 더 묵어라이."
남편 앞에 밥상을 날라다놓은 다음 영만이와 겸상한 것을 갖다 놓으며 두만네는 말했다.
"이것도 많십니다."
"무슨 일만 있으믄 니가 와서 거들어주이, 어서 묵어라."
"야, 묵겄십니다."
두만네가 나간 뒤 말없이 밥을 먹던 두만아비는
"한복아."
하고 불렀다.
"야."
"우리 짚 가지가서 니도 지붕을 잇도록 해라. 많이 남았이니께."
"고맙십니다."
"고맙기는. 영만이 니도 가서 거들어주어라."
"그란해도 그럴라 캅니다."
밥을 꿀떡 삼키며 대답하는데 밖에서 봉기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팽이 저녁 묵나?"
"들어오나."
두만아비가 내다보며 말했다. 봉기가 방안으로 들어오고 두만네도 숭늉 대접을 들고 들어온다. 밥을 먹다 말고 한복이와 영만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치른다.
"임자 밥 있거든,"
남편 말이 끝나기 전에
"야 가지오겄소."
"아, 아입니다. 이엉 가는 거를 보고 거들어주지는 못했지마는 여기 술 한 병 가지왔이니 술잔이나 갖다주소. 밥은 무신."
두만아비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큰마음 먹었구나, 술을 가지고 오다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뜰란가? 하듯 영만이 한복을 힐끔 쳐다본다. 한복은 눈을 내리깐 채 서둘러 밥을 먹는다. 한복이는 봉기를 볼 때마다 인사도 하고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꾸도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묵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오 년 전 보리 흉년이 들었던 그 해 가을이다.
'참말이제 악세풀겉이 멩도 질기다. 부모가 있이도 벵들어 죽고 굶어 죽었는데 천지간에 의지가지할 곳 없는 저 어린기이 우찌 살았이꼬. 아비는 샐인 죄인으로 죽었고 어매는 살구나무에 목을 매달아서, 아 내가 그 목맨 줄을 지금도 가지고 있거마는. 중값 줄라 캐도 안 팔고 갖고 있지러. 멩색이 양반의,'
장거리서 발길을 돌려놓는데 뒤통수를 향해 쫓아오던 봉기의 음성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원한도 아니면서 쓰라린 그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급히 밥을 먹고 아이들이 나가자 주거니받거니 술잔을 나누면서 봉기는
"나 삼수놈 죽은 생각을 하믄 자다가도 춤을 추고 싶다마는 그것 말고는 모두 한심스러븐 일뿐이라."
시작한다.
"듣자니께 그 목이 뿌러질 놈이 하기는 총 맞아서 지 멩대로 못 산 놈이다마는 그놈이 사당 마릿장 밑에 조가가 숨은 거를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카는데."
"머라꼬?"
두만아비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기사 모리는 척 안 하고 있는 곳을 알리주었더라믄 삼수놈은 지금 땅 밑에서 썩고 있지는 않을 기다마는."
"그러고도 삼수를 직이?"
"그놈이사 천벌을 받아 죽었지. 하여간에 그때 조가 그 작자를 결딴냈더라모... 설사 참니 안 했다 카더라도 누가 우리를 직이기야 했겄나."
"그렇더라 캐도 일은 크게 벌어진 기니께 동네가 풍지박산되는 거는 매일반일 기고, 한조 겉은 억울한 죽음이야 없었겄지마는... 말을 하자 칸다믄 애씨당초 조씬가 그 사램이 이 동네에 안 왔든 기이 제일 좋았든 기라."
"그렇지, 그래... 아무튼지간에 윤보 그놈이 날만 보믄 부애질을 하더마는, 저눔이 무신 원수가 져서 날만 보믄 싶더마는, 흉칙스런 오양보다는 몇 갑절 잘난 놈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보라모? 말 탄 왜병들이 그리 수없이 찾아댕기도 흔적이나 있이야 말이제? 어디 깊은 곳에 굴을 파고 들앉았다가 잠잠해지믄 한판 치고 나올 작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겄네."
"한판 치고 나온다 캐도 이자 다 소용없일 기다."
"제에기! 요새겉이 답답할 줄 알았다믄 나도 그만 끼여드는 긴데, 아 왜 그 패물이다 은덩이다 비단이다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숱허기 실어갔다누마."
"실어갔이믄 갔제. 그기이 어디 니꺼 될 거더나?"
"말이 그렇다는 기지."
"똑똑한 놈들은 다 가고 말깨나 하는 놈들..."
두만아비는 입에 술잔을 가져간다. 마을의 사정은 그러하거니와 최참판댁에서는 홍씨와 서희 사이의 팽팽한 대결이 그 양상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었다. 늘 서희 처리에 불평이 많았던 홍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경질을 부리며 조준구에게 따졌다.
"서희년은 왜 저대로 두는 거지요?"
"글쎄."
"아니 영감."
"성급히 굴 것 없소. 제물에 터지게 돼 있는 거요."
서희 문제에 대해서 신중을 기하느라 좀 생각해보자고만 하던 조준구였다.
"서희년 일이라면 영감은 노상 어정쩡하게 단을 못 내리시는구려. 우리 목에 칼이 들어올 뻔했는데도 이러고 계시겠다 그 말씀이오? 다시 당하는 일이 있어도 할 수 없다 그 말씀이오?"
"내가 왜 그 생각을 아니 하겠소. 허나 상대가 아녀자니, 삼수놈 경우처럼 직결처분만 받는다면야... 기껏 죄목을 붙여도 의병 뒷배를 보아주었다는 정도일 테고 상사람도 아닌 양반의 규수를 심히 다루지도 않을 테니."
"아아니 영감, 의병 뒷배를 보아준 죄목뿐이라니, 우릴 죽이려 했던 게 누구였지요?"
"부인은 내 말부터 들으시오. 윤보 김훈장 일당놈이 날 죽이려 한 것은 친일파라 해선데 그것은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명분이 서고 떳떳한 일이요만 서희년이 우릴 죽이려 했다면 경우가 달라진다 그 말 아니오. 자연 서희년은 발명하고 나설 거구 또 그 계집애가 일본말을 조금은 한단 말이오. 사납고 머리가 명석하니 무슨 짓을 할지 알 수도 없거니와 아무래도 다소는 허물이 드러날 게고 한편 그 사람들한테 약점을 잡힌다는 것도 재미롭지 못한 일이오. "
"... "
"뭐 내가 미리부터 그네들 환심을 사왔고 그까짓 입막음하는 것쯤, 어느 나라 사람이든 돈 보고 싫다는 자는 없으니 별일이야 없겠으나 순리로 조용히 하니만 못하지요. 하여간 서희년은 만만한 계집애가 아니니 그 사람들과는... 아무래도 상사람 경우하곤 달라서 그것이 나중에 무슨 화근이 되어 돌아올지 모를 일 아니겠소? 어차피 토지는 모두 우리 앞으로 넘겨놓았으니."
"그러니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역시 병수하고 혼인시키는 그 이상의 상책은 없소."
"우릴 죽이려던 계집아일 며느리 삼아요?"
"며느리랄 거 있소? 볼모지. 병수놈도 사람 구실 못하는 아이니 형식일 뿐이지요."
"병수놈도 혼인 아니 하겠다고 펄펄 뛰는 건 어쩌구요?"
아들의 얘기는 귓전에 닿지도 않는다는 듯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소. 서희년도 꼼짝할 수 없게 됐단 말이오. 말하자면 자승자박한 셈이지. 나는 모르는 척할 터이니 부인이 서희를 달래시오. 그냥 달래는 게 아니라 왜병들이 벼르고 있다는 협박을 하면서요. 사실 서희년을 어떻게 한다는 건 아까 내가 말한 여러 가지 이유말고도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아무리 그 사람들하고 친하기로 잡아가시오, 죽이시오 한다면 그 사람들 앞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하니,"
흉년 때의 사건, 서희가 홍씨에게 말채찍을 휘두르려 했었던 사건,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결국 내외의 의견은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만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길상이마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떠나버린 지금 서희는 날갯죽지가 부러진 한 마리의 새, 빈사 상태다. 핼쑥하게 여윈 모습에 퀭하니 뚫린 두 눈에는 일찍이 그에게서 본 일이 없는 비애의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홍씨는 별당에 나타나 지껄이는 것이다.
"우리 내외를 죽이려다 못 죽였으니 그게 분해서 머릴 싸매고 이리 누워 있는 게냐?"
"... "
"너를 어른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도 못할 짓이 없는 게야. "
많이 누그러져서 말했다.
"너도 총명한 아이니까 모를 리 없겠지. 요즘 지방의 수령 방백 따위가 쪽을 쓰는 줄 아니? 일본 사람 세상이야. 일본 별순사들이 만사를 쥐고 펴는 세상이란 말이야. 그 사람들이 영감 말이라면 믿어주고 사정도 봐주고 그러니 망정이지. 우리가 몰라라 해보아,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끔찍스런 일을 저질러놓고 계집아이라 해서 가차 있을 줄 아느냐? 영감이 그래도 너를 생각하여 무릎 밑에 접어놓고, 접어놓고 하시니 말이지. 소행이야 괘씸하다뿐이겠느냐? 의병이고 나발이고 그놈들을 끌어들여 감히 우릴 죽이려고 했었던 너 아니야? 내 오기를 말할 것 같으면 죽든살든 결판을 내고 싶다만. "
목청이 높아지고 눈꼬리가 치올라갔으나 본시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
"아무리 규중에서 바깥 사정을 모르기로, 의병인지 화적놈인지 그 일만 해도 그렇지.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구? 일본나라에 항거해서 살아남을 순 없는 거야. 나라 금상님도 일본 눈밖에 나서 임금자리를 물러난 걸 설마 모르지는 않겠지? 우리를 죽이려 했고 지서방을 죽였으니 벌써 그것부터가 살인 죄인이요 더더군다나 우리 영감을 친일파로 몰아서 죽이려 했으니, 의병인지 화적놈들인지 일본 병정들도 그놈들한테만은 사정이 없다는 게야. 너도 생각해보아. 흉년 들던 해에도 그 불한당을 네가 끌어들이지 아니 했느냐? 이번에도 그놈들이고 보면, 김훈장인가 그 늙은이, 길상이놈까지 끼여들었으니 너하고 공모하지 않았다는 말은 못할 게야. 안 그러냐?"
매일이다시피 그 말이 그 말, 추운 마루에서 서성거리는 봉순이는 욕설과 포악스런 행동을 거두어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넌더리가 난다. 신체의 아픔도 습관이 되면 으레 아픈 거거니 싶듯이 이제는 홍씨가 무슨 말을 해도 별로 겁나지는 않았다. 그저 지겨울 뿐이다. 그러나 한마디 말도 새나오지 않고 완강하게 침묵을 지키는 서희의 심중을 아는 만큼 봉순이는 초조해진다. 홍씨에 대한 서희의 증오심은 봉순의 습관화돼버린 무섬증과는 다르다. 날로 새롭고 날로 생생해지는 증오심, 서희가 완강히 침묵을 지키는 것은 자기 내외를 살해하려 했다는 홍씨의 말을 인정하기 위해서다. 그의 감정 같아서는 백 번이라도 너희들을 죽이려 했다는 말을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무던히 끈덕지고 무지하여 늙은 말고기같이 질긴 홍씨였지만 교활하기로는 서희가 몇 수 위다. 전신으로 살의를 인정하면서 증거를 잡히지 않으려는 침묵인 것이다.
서희 성미에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인내였으리라. 결국 홍씨는, 벙어리냐! 왜 말이 없느냐! 독사 같은 계집애! 하며 그예 악을 쓰다가 물러간다. 그가 나가자 봉순이는 덜덜 떨면서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간다.
"애기씨!"
"... "
"미음이라도 한모금 드시야지요."
봉순이는 부리나케 다시 밖으로 쫓아나간다.
'어디로 도망을 갈까? 간다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서희는 농발 대신 장롱을 괴어놓은 막대기 두 개를 멀거니 바라본다. 언젠가 김서방댁이 농발을 어찌하고 막대기로 장롱을 괴어났을까 보냐 하며 의아해한 일이 있었지만 막대기는 아무도 관심 않은 채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어왔다. 그 막대기가 서희 육신의 일부분인 양 서희 의식에서 떠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다. 막대기는 한지에 싸여 있었는데 한지는 거무스름하게 때가 묻어 있었다. 그 막대기가 할머니 방 장롱을 괴어놨던 것인지 서희는 가끔 생각해보지만 기억 속에는 없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날 밤 할머니의 얼굴이요 들려오는 것은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서희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등잔불은 누가 켰는지, 불빛 아래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 앉은 서희는
"네, 할머님!"
"김서방이 죽었느니라. "
할머니의 움직이지 않는 눈을 바라보며 서희는
"네, 알고 있습니다. "
"봉순네, 복이놈도 병이 났어. "
"... "
"내가 좀더 오래 살아 네 뒤를 보아주고 싶지마는 사람의 일은 어찌 알겠느냐?"
"할머님!"
"하기는... "
하다가 윤씨부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뜻은 한치 앞일을 뉘 알겠느냐, 이 액병의 환란 속에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을지 그걸 뉘 알겠느냐, 그런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봉순이는 제 어미 곁에 간 모양, 별당에는 이들 할미 손녀 이외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었다.
"내 지금 할일이 있으니 서희 너는 말 말고 있어야 하느니라. 아니다. 마루에 나가서 누구 사람이 오는지 살펴보는 편이 낫겠구나. "
무섭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떨면서 서희는 마루에 나가 어두운 뜰을 바라보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갔을까. 방안에서는 꽤 오랫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롱 옆구리에 달린 고리가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장롱을 열고 닫는 소리도 났다. 이윽고 윤씨부인은 방문을 열고 손짓하여 서희를 들어오게 했다. 방바닥에 농발이 하나 댕그렇게 놓여 있었다.
"농발 대신 저기 막대기를 괴었느니라. 후일 너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만일을 위해 마련해주는 게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것을 쓰게 되고 못 쓰게 되는 것은 오직 신령의 뜻이 아니겠느냐?"
그러고는 농발을 들고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 성큼하게 큰 키에 긴 두 팔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