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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지낼 진동이 격려모임에 갔다가 동창회 카페에 글도 좀 올리라는 '대파'의 명령(?)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카페를 둘러보다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곳을 들어가 봤다가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 우리 친구들과 함께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소회와 글을 올린다. 즐겁고 명랑한 게시판 분위기에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한데 모두들 이해해주라.
돌아간 동운이, 병용이, 영민이, 승호 - 다 소중한 친구들이었지. 친구들에 대한 소회를 적어본다.
1988년 가을 내가 기숙사 생활할 때, 어느날 어떤 일로 새벽 3시경에 깨어있었는데, 동운이가 찾아왔었어. 동대문에서 우리대학 기숙사까지 걸어오는 길이래. 그 먼 거리를. 약간 취해있었는데, 잠시 이야기하다가 샤워하고 내 침대에서 잠이 들었지. 누가 저 밑에 썼다만 씨~익하고 웃는 모습, 맘씨 착하고 따뜻한 그 친구를 어이 잊을 수 있을까. 동운이 죽고 가장 슬퍼하고 안타까워 하고 오래오래 기억하는 친구가 진동인데, 어디 진동이만이겠어. 동운이 묘비 뒤에 적힌 가족들의 수만큼이나 우리 친구 동운이가 얼마나 외롭게 살았다는 것이 느껴지지. 포천재림묘지에 있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묘소에 가려면 동운이 묘를 지나야 하는데, 아버지 어머니 묘소에서 20미터 떨어져 있어.
언젠가 선규가 많은 책을 나에게 준 적이 있었어. 그 책들을 보다가 그 속에 병용이가 선규에게 쓴 편지가 들어있었지. 군대에서 쓴 것같았는데, 병용이 체취가 묻어있는 그 편지를 선규에게 돌려주었지. 병용이 묘소가 포천재림묘지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네. 약혼자가 한동안 병용이 묘소를 찾았다니, 약혼자에게는 얼마나 좋은 이었겠는지.....마음이 아프다.
영민이는 단월리에 있었던 한국고압용기주식회사에 근무했었는데, 1988년 그곳에 가서 보았지. 달리기와 축구도 잘하고 몸도 민첩했지. 글씨도 잘 썼고, 그 특유의 웃음과 미소. 영민이 여동생이 우리 누나와 같은 교회를 다녀서 우리 집에도 여러번 왔었지. 영민이를 몇 년도인가에 모교체육대회에서 봤는데 장례식에서 볼 줄이야.
아래의 글은 1994년인가 1995년인가에 지금의 재림신문(http://www.annkorea.com)의 전신인 '세천사신문'에 '一聲 칼럼'이란 이름으로 글을 연재했었는데, 그때 20번째 글로 올렸던 내용이다.
지금 생각하면 글도 좀 투박하고 한데......특히 뒷 부분 '죽음 앞에서의 진실' 부분은 설교나 교훈 투의 글인데, 이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도 그 신문이 우리 교회 신문이니까 영적이고 무슨 교훈과 관계된 것도 연계시켜야 할 것 같아 썼던 것이니까 이해들 해주라.
'재림공원묘지'에 연락해서 돌아간 우리 친구들 묘자리 번호를 확인했어. - 김동운(1992년 1월 30일 장례) 제 8지역 1021번(재림공원묘지 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오른쪽에 간이화장실이 있음. 간이화장실 바로 앞쪽에 있음) 재림공원묘지 규정: 장례식 시 5년치 관리비를 한꺼번에 받음. 묘지 관리는 15년 자동 계약. 장례 후 6년 후부터 매년 관리비 30,000원을 내야 함. 15년이 지난 후 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무연고처리.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는 가족은 너무 오래되어 내야 할 관리비 액수로 인한 부담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1995년도 분부터 받는다. 그러나 교회 묘지라 쉽게 무연고처리를 하지는 않는다고. 동운이 경우는 장례 후 한 번도 가족들이 다니지 않는다고. 사실 삶에 바쁘고, 찾아오면 가슴 아프지, 외국에 나가있는 경우도 있고들 해서 가족들이 찾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형님(김길동)을 누가 좀 알면 연락을 드려주기를 바라네. 1997년~2006년도 분. - 전승호(1982년 7월 23일 장례) 제 6지역 187번(재림공원묘지 길을 따라 가다가, 동운이 묘자리가 있는 곳의 간이화장실이 나오기 50미터 전에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데, 갈라지기 바로 전에서 좌측을 바라보고 세 번째 열 정도). 학교에서 사고사해서 사망 처리된 건이라 시간이 지나도 그냥 두고 있다고. - 김병용(1992년 3월 9일 장례) 제 8지역 769번(동운이 묘자리가 있는 같은 제 8지역) 가족들이 계속 찾아오고 있다고. - 유영민(2000년 7월 28일 장례) 제 4-3 지역 264번(재림공원묘지 입구에서 100미터 정도 가다보면 언덕이 나오는데, 언덕 지나자마자 바로 오른쪽). 가족들이 계속 찾아오고 있다고.
* 참고로 아래의 정보를 올립니다. - 소재지: 경기도 포천군 소홀읍 송우리 산66-3 (우)487-820 - 사무실: 경기도 포천군 소홀읍 송우리 389-8 (우)487-820 - 전 화: (031) 542-1081 - 팩시밀리: (031) 542-7021 - 관리총무: 김종성 011-9985-3929
죽음 앞에서의 맹세
얼마 전, 수원에서 부부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와 도봉산에 올랐다.....(중략). 이 친구를 찾을 때 내 느낌은 각별하다. 그와 나는 한 친구를 살리기 위해 죽음과 싸운 경험이 있다. 참으로 오래도록 뭍어둔 이야기이다.
오랜 동안 뭍어둔 이야기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어느날 고교 AY임원이었던 그 친구와 나는 ‘사슴의 동산’에서 열린 서울삼육중고등학교 연합 임원수련회에 참석했다. 도착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칠즈음 햇볕은 몹시도 따가웠다. 몇몇 학생들이 물 속에 들어가자 너도나도 물 속으로 들어가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동이 일어났다. 잠시 후, 한 친구가 물 속에서 누군가를 끌고 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텐트 밑에 깐 주황색 담요를 들고 뛰었다. 돌 위에 뉘어있던 친구를 담요 위에 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물에 빠진 친구가 물 속으로 몇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할 때, 다른 학생들은 그 친구가 장난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 후배가 건너편으로 건너가다가 발에 물컹하니 뭔가 걸려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과 물 속에 들어가 꺼내온 박경근이라는 친구, 부부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김선규라는 친구와 나 이렇게 넷이서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이미 입술은 검게 변해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인공호흡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더더욱 인공호흡의 한 기법인 ‘마우스 투 마우스’는 더욱 그랬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방법에 순간적으로 적응한 우리는 돌아가면서 인공호흡을 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으면 한 사람은 가슴부위를 세게 압박했다. 온 힘을 다해 불어 넣으면 머리가 띵하다 못해 혼미해져 교대로 해야 했다. 나중엔 한 번도 벅찰지경이었다. 우리는 마치 오랜 훈련을 한 듯이 신속히 돌아가며 인공호흡을 했다. 공기를 불어 넣고 가슴부위를 압박하면 밥알과 국찌꺼기가 튀어 올라왔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그것들을 꺼냈다. 나중엔 코로도 밥풀이 나왔다. 입에서 피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은 울고 불고 난리였다. 얼마가 지났는지 살아날 가망이 없자 선생님이 차를 불러오라고 했다. 소형 용달차가 냇가 위를 튕기듯이 달려왔다. 우리는 친구를 싣고 용달차 위에 올라탔다. 용달차는 쏜살같이 내달렸다. 우리는 그 용달차 뒤 좁은 공간에서 마치 미친사람들처럼 돌아가면서 인공호흡을 반복했다. 이미 축 늘어져 죽었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이 감복해서라도 살려주시기를 소망하면서......
청평의원에 도착해 친구를 옮기자 의사와 간호사가 왔다. 인공호흡을 몇 번 하더니 “죽었어요”라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그 순간 그 의사선생님이 얼마나 매정하게 느껴지던지. 박경근이란 친구는 “어떻게 의사가 적극적으로 해보지도 않고 죽었다고 나가버리”냐고 분개해하며 의사를 쫓아나갔다. 아직도 내 앞에서 친구가 죽어서 누워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친구의 살아있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다. 일말의 희망이 아직도 내겐 있었다. 죽은 친구에게 다가가 엉덩이로 발을 누르듯이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이 정도 슬며시 기대앉으면 아플거야. 승호야, 아프면 일어나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이게 죽음이구나. 죽음은 바로 내 옆에 있구나.” 허망하게 검게 변해버린 친구를 바라보는 그 순간, 온몸의 피가 끓었다. 친구가 움직였다. 분명히 발이 움직였다. 튀듯이 일어나 발을 바라보았다. 오른쪽 발이 꿈틀꿈틀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소리쳤다. “선생님! 살았어요, 살았어요, 살았어요, 살았어요!” 의사와 간호사, 친구들 모두 뛰어들어왔다. 의사는 인공호흡을 두어번 하더니 이번에도 “죽었어요”라는 한 마디 말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익사 순간에 살려고 발버둥칠 때 신경이 경직되는데 그 경직된 신경이 풀리면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사슴의 동산으로 돌아오니 벌써 모두 떠날 준비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침통함과 흐느낌, 그리고 따가운 한여름의 햇볕 속에 매미는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모르는지 요란하게 울어댔다.
떠나는 아들의 관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그 어머니의 애절한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은 조여온다.
죽음 앞에서의 진실
친구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깨달은 바는 죽음 앞에서의 진실은 진실 자체요 그 진실을 믿을 때 그 믿음은 영원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 인간에 대한 진실한 신뢰의 기초이리라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의 진실됨처럼 이 세상을 그렇게 진실되게, 겸허하게, 솔직하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 죽음의 진실 앞에서 때로는 어찌그리 못나보이는지. 어찌그리 나약한지. 뭇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이 이리도 무뎌졌는지.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내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밝은 삶의 진실과 진리를 전하는 일에 왜 이리 약한지...... 죽음 앞에서의 그 진실을 가지고 되뇌이는 가운데 늘 힘이 되는 시가 있다. 시인 괴테(Goethe)의 시 중에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란 시가 그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훌륭한 것은 한평생 바칠 수 있는 사업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흉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죽음은 신앙인의 삶의 테마이다. 혹자의 ‘고백록’에서처럼 삶의 말년이 아닌 매일의 삶 속에서 죽음의 의미를 새기며 산다면,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죽는 경험을 하며 산다면 이 경박하고도 1차원적 인간(one dimensional man)들이 난무하는 이 세상은 좀더 사람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사람다운 세상. 사람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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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곳에 보니까 승호 동생이 전승국 목사라고 하는데, 재작년에 전승국 목사가 몹쓸 병에 걸렸어. 서울영어학원교회 본원에 있는 박승호 목사가 대학원 후배인데, 전승국 목사의 소식을 전해와서 삼육넷에 소식을 알리고 헌혈증을 수집해서 전달했는데, 우리네 삶이란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나보다. 전승국 목사가 전승호의 동생이라니. 그 전부터 알고 지내왔지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형' 이야기도 해주고 더 가까워질 수도 있었을텐데. 조만간 전승국 목사를 한 번 찾아가봐야겠다. 그리고 말해야겠다. 내가 전승국 목사의 형, 승호의 친구였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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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ok on the bright side. (긍정적으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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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박사과정 때는 학생들의 수만큼 자료를 복사해와 나눠주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여하튼 함께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지요. 그러한 것도 '참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참 '참여'라는 것은 다양한 것 같아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함께 하려는 마음, 더불어 하려는 마음, 고민하고 고민하는 자세 말이지요. 교육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젊은이의 자세를 보여주세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이 로고를 보시면서 삼육교육의 의미와 명지원 교수가 추구하는 교육철학의 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shalom!
위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상단에 직사각형 모양의 긴 이미지는 삼육대학교 예술대자인학부(Division of Art Design)의 김성운 교수님의 작품입니다. 이미지 오른쪽 하단의 수채화는 김성운 교수님의 작품이고, 풍선이미지를 통해서 교육을 통한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형상화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김성운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그리고 로고 제작을 위해 아래아한글에서, 파워포인트에서 작업을 하다가 기술적인 문제에 부딪혀 헤매고 있을 때, 삼육대학교 출판부의 김해동 선생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김해동 선생님은 삼육대학교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 명지원 교수가 후원하는 단체(여러분께도 권합니다)
우선, 여러분!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삼육대학교가 기르려고 하는 인간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학"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지난 1학기, 삼육대학교가 기르려는 인간상을 이루려는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요? 그래서 그러한 인간상에 얼마나 다가섰는지요? 명지원 교수가 강조한 '참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셨는지요. 그 '참여'의 의미와 삼육대학교의 교육이념 및 기르려고 하는 인간상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진지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아래의 글을 진지하게 읽어주세요.
삼육교육의 이념 = 참여정신 = 100주년 기념 문구 '지역사회와 더불어'
▲명지원 교수가 매달 일정 금액을 보내는 곳입니다. 물론 삼육대학교 학생 여러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수장학금'을 내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지요. 제 아내와 보내는 곳입니다. 지난 해, 몽골에서 난치병 환자가 왔는데, 그분께 30만원, 어느 암에 걸린 SDA 젊은 가장을 위해 60만원......등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고정적으로 아래의 싸이트에 일정액을 보내지요.
한국사랑밭회 www.withgo.or.kr
세이브더칠드런 town.cyworld.com/savethechildren
두 기관이 어떤 일을 하는지 한 번 (사이버상으로) 방문해 보십시오. 여름방학 때, 이런 곳에 가셔서 자원봉사도 해보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명지원 교수가 말하는 참여의 정신을 발휘해 보시죠.^^ 나중에 한다, 여유있을 때 한다는 생각으로 하면 평생을 걸려도 못합니다. 제가 살아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여유있는 분들이 그런 분들을 돕는 것은 아니더군요. 여유가 좀 없더라도 마음이 그런 곳으로 향한 분들은 그렇게 하더군요. 상담학과 3학년에 배전호란 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의 가족들은 매달 어느 기관에 후원금을 보냅니다.
각 가정의 차이는 그런 것입니다. 후원에 대해 전혀 생각이나 대화가 오가지 않는 가정이 있는가하면, 그런 생각은 있지만 실천을 못하고 있는 가정, 다만 얼마라도 후원을 하는 가정.............그 차이가 가져오는 삶의 차이는 처음엔 거의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5년, 10년, 15년...........그 집안의 가풍이 됩니다.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년이 되기까지 남들에게 그러한 도움 한 번 못주고 정년을 맞이하는 분들이 있을거구요, 어떤 직업을 가지신 분들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자, 여러분.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빠, 언니, 동생들과 의논을 하고 우리 주위의(세계를 포함하여) 이웃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의논해 보세요.
얘, 얘......우리가 바로 불우이웃인데, 누가 누굴 돕는다는거니?.............^^ 혹시 이런 부모님 계시지 않을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부모님 말씀도 맞지요. 우리 모두는 불우이웃입니다. 한달에 5,000원, 또는 10,000원 아니면 그 이상을 우리가 돕지 못할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 인간,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덧글을 올릴 학생들 중 후원할 만한 단체명을 아시면 올려주세요. 이 글을 보는 학생들이 가깝게 느끼거나, 한 번 들어본 단체들이 있을 수 있고, 그러면 선택하고 실천하는데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shalom!
여러분, 사랑합니다!
충고 이후에는
1. 상대방의 아픔을 달래 줍니다.
2. 인내하며 결과를 지켜봅니다.
3. 효과를 위하여 지혜롭게 반복합니다.
4. 힘과 용기를 주어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줍니다.
▲ 전부열 목사님께서 이끄신 가을기도주일 첫 날 말씀에...... 오래 전에 삼육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의 일화를 소개하셨지요. 어떤 학생이 "교수xx가 시켰어!"라고 하는 말을 들으셨다고 했는데, 그때 그 학생을 돌아보지 않으셨다고 하셨죠. 그 이야기를 듣고 함석헌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고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던 이야기입니다........
▲ 전부열 목사님을 존중하는 오랜 저의 마음을 담아 전 목사님께 아래의 글을 그 기도주일 금요일 오후에 보내드렸습니다. "말씀의 선물로 깊은 감동을 주셨으니 말씀으로 돌려드리겠다"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우리 시대의 사상가요 시대정신이며, 미래적 비전을 제시한 함석헌 선생님의 삶의 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 전부열 목사님과는 오래 전에 같은 학과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였었습니다. 학생들이 참 잘 따르고, 학생들을 진정으로 아끼고 이해하시는 목사님으로 기억하지요. 항상 학생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와 학생들의 문화를 잘 꿰뚫어 이해하시는 분이셨지요.
▲ 전부열 목사님께 드릴려고 아래의 글을 일일히 타이핑을 했답니다. 여러분께도 선물로 드리지요. 느낌이 있으시면 메뉴로 만들어 놓았으니 거기에 글을 남겨보세요. shalom!
▶ 전부열 목사님을 만나뵈려면 http://youract.cyworld.com (기도주일 관련 동영상도 있어요)에 가보세요.
눈을 가린 선생님
석헌은 기숙사 사감을 겸하고 있었다. 그래서 밤이면 기숙사를 돌며 학생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살폈다.
어느 겨울밤의 일이었다. 늦은 시간에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었다. 석헌은 방 앞에 멈춰 서서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무 큰 소리로 떠들지마. 함 도깨비 들으면 어쩌려고."
"맞아. 그 놈의 함 도깨비는 모르는 것이 없으니까 우리가 이렇게 술마시며 떠드는 것도 다 듣고 있을지 몰라."
그때 다른 학생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야, 너희들 함 도깨비를 뭘로 아는 거야. 함 도깨비가 시시하게 학생들 방이나 엿듣고 다니는 그런 선생인 줄 알아? 함 도깨비는 죽으면 죽었지 그런 치사한 짓은 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석헌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후 그는 절대 학생들 방문 앞을 얼씬거리며 안의 이야기를 엿듣지 않았다.
3·1 만세운동 이후 다양한 형태로 학생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 사항도 많아졌다.
"식민지 교육을 반대한다!"
"수업료를 내려라!"
"조선어 문법을 정식 과목에 넣어 달라!"
학생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도 있었지만 지나친 면도 없지 않았다. 가령 특정 교사를 해임하라고 요구하는 일 따위가 그랬다.
그 무렵 학생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오산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회주의 계열 학생들이 민족주의 계열 교사들의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기에 학교 당국은 주동자들을 퇴학시켰다. 그러자 학생들은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수업을 거부하고 운동장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은 갈수록 사나워졌다. 그들은 몽둥이를 들고 떼지어 다니며 학교 건물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교사들은 몸을 피했다. 학생들은 마침내 교무실로 몰려갔다. 교무실에는 석헌 혼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흥분해서 몽둥이를 휘둘러 대던 학생들은 차마 그를 내려치지는 못했다. 대신 몇몇 학생이 그의 뺨을 때렸다. 석헌은 묵묵히 뺨을 맞으며, 그들이 모두 교무실에서 물러갈 때까지 얼굴을 가린 손을 떼지 않았다. 학생들은 석헌이 무서워서 눈을 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함 도깨비가 생각보다 겁쟁이라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며칠 후 가까스로 사태가 진정되었다. 학생들은 석헌의 뺨을 때린 것이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교무실로 몰려갔던 학생들이 사죄를 하기 위해 석헌의 집을 찾아왔다.
"선생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저희들이 선생님께 털끝만큼도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너무 흥분해서 선생님께 손찌검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선생님, 용서해 주세요. 선생님께 용서를 받지 못하면 괴로워서 앞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내가 자네들을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뭐 있겠나? 개인적으로는 자네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조금도 없네. 그렇지만 교사로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 옳은 일이 아니야. 만일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학교 공부는 무엇하러 하고, 인격 수양은 또 무슨 필요가 있겠나? 주먹질 하는 거나 배우면 되지."
"......."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석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 태도로는 절대 일본을 이길 수 없고, 빼앗긴 나라도 되찾을 수 없네. 이번 일은 자네들 잘못보다 자네들을 잘못 가르친 내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이번 일을 하나님이 시킨 일로 생각하고 감사히 여기고 있네. 내 뺨을 때린 것은 자네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야. 바른 교육을 하라는 하나님의 뜻이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학생들은 감정이 북받쳐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울었다.
"자, 자, 그만들 울어. 이번 일은 자네들에게나 나에게나 큰 가르침이었어."
석헌은 온화한 목소리로 학생들을 달랬다.
얼마 후 분위기가 진정되자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그때 선생님께서는 왜 다른 선생님들처럼 피하지 않고 교무실에 남어 계셨습니까?"
"피하긴 내가 왜 피해.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떳떳해서 피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야. 자네들을 형제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왜 피하냐는 거지."
"저어, 그런 그때 왜 얼굴은 두 손으로 가리고 계셨습니까?"
다른 학생이 또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 아닌가? 나를 때린 학생이 누구인지 알면 수양이 부족한 내 좁은 마음에 나중에라도 그 학생을 잊지 못하고 나쁜 감정을 품게 될까 두려웠어. 그래서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거지."
"......."
석헌의 이야기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가 무서워서 눈을 가리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실을 알게 되자 모두들 몸 둘 바를 모르며 다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 사건이 있은 후, 학생들은 석헌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함석헌 - 평화를 사랑한 아름다운 사상가 (서울: 보보스, 2007), 8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