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기진(金基鎭) 평론가 (1903∼1985 )
문학평론가·소설가·시인. 팔봉(八峰)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충청북도 청원(淸原)출생.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20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학부 중퇴, 23년부터 17년간 매일신보·시대일보(時代日報)·중외일보(中外日報) 등의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45년부터 5년간 출판사 <애지사(愛知社)>를 운영하였다. 60년 경향신문 주필, 72년에는 한국펜클럽과 한국문인협회의 고문을 지냈다. 일본유학시절인 1922년 신극운동단체인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하였으며, 문예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의 동인이 되어 신경향의 문예운동을 전개하였다. 23년에는 귀국하여 《개벽(開闢)》 《클라르테운동의 세계화》라는 평론을 발표함으로써 현실변혁의식이 강한 프롤레타리아문학을 제창하였다. 25년 민족주의문학에 대립하는 계급문학의 건설을 기치로 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결성하여 사회주의문학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온건파였던 그는 프로문학의 관념론에 갈등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평론집 《통속소설소고(通俗小說小考, 1928)》와 《대중소설론(1929)》 등을 통하여 프로문학 구제책으로 예술대중화론을 폈다. 작품으로는 신경향적인 시 《애련모사(哀戀慕思, 1923)》 《권태(1923)》 등과 수필 《떨어진 조각조각(1923)》, 소설 《붉은 쥐(1924)》 《젊은이상주의자의 죽음(1925)》 등이 있다. 또한 프로문학적 평론에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조선프로문예운동의 선구자(1929)》 외 다수가 있다.
----------------------------------------------------------------------------
2. 박영희(朴英熙) 평론가 (1901∼?)
시인·소설가·평론가. 호는 회월(懷月). 서울 출생. 1916년 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를 졸업하고 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하였다. 재학시 나도향(羅稻香)·김기진(金基鎭)·김복진(金復鎭) 등과 친교를 맺었다. 20년 일본으로 건너가 2년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한 뒤 21년 귀국하여 종합교양지 《신청년(新靑年)》, 시 전문지 《장미촌(薔薇村)》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22년 《백조(白潮)》 동인이 되었다. 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으나 33년 탈퇴, 34년 전향선언을 하였다. 49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사 강의를 맡기도 하였으나, 6·25 때 납북되었다. 초기 작품 경향은 시를 위주로 탐미적·감상적인 낭만주의 경향을 띠었으나 카프 활동기에는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소설과 비평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저서로는 소설과 평론을 묶은 《소설·평론집(1930)》, 시집 《회월시초(1937)》, 평론집 《문학의 이론과 실제(1947)》 등이 있다.
--------------------------------------------------------------------------
3. 정인택(鄭人澤) 소설가 (1909- ? )
서울 출생. 1930년 <매일신보>에 <나그네 두 사람>을 발표하여 등단. <매일신보>, <문장>지 기자 역임. 월북 작가. 초기 작품들은 이상(李箱)과 가까웠던 관계로 심리주의적 경향을 지녔으나, 그 후 그는 무기력한 지식인과 소시민의 삶의 세계를 그렸으며 친일적인 경향을 띤 작품을 쓰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우울증>, <시계>, <향수>, <촉루>, <청포도>, <착한 사람들>, <연련기(戀戀記)>, <여수(旅愁)>, <단장(短章> 등이 있다.
---------------------------------------------------------------------------
4. 이희적(李熙迪) 변호사 -자료없음-
---------------------------------------------------------------------------
5. 이광수(李光洙) 소설가 (1892∼1950 ) -과거 현재 교과서 등장-
소설가·평론가·언론인.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03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1905년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갔다가 학비곤란으로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편입, 이 무렵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시·소설·문학론·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0년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5년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 이듬해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7년 한국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무정>과 두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발표하였다. 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으며,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하이[上海]로 탈출, 안창호(安昌浩)의 민족운동에 공명하여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고 계몽적인 논설을 많이 썼다. 21년 귀국한 뒤 《개벽》에 <민족개조론(1922)>을 발표하고, 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민족적 경륜>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선도자(1923)> <허생전(1924)> <재생(1924)>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 <혁명가의 아내(1930)> <흙(1932)>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사랑》 《무명》을 발표하였다. 39년 조선문인협회장이 되었고, 이어 창씨개명을 하면서 일본에 협력하였다. 광복 후 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중 병보석되었다가, 50년 납북되어 자강도 만포시(滿浦市)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되는데, 초기작품은 자유연애의 고취와 조혼폐습의 거부 등 반봉건·계몽적 성격이 강하며,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편 사회적 현실을 천착하지 못한 면을 보여 친일문학가로 보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
6. 주요한(朱耀翰) 시인 (1900∼1979 )
부흥부장관,상공부장관,대한일보 사장,대한해운공사사장 -과거 현재 교과서 등장-
시인·언론인·정치가. 평양(平壤) 출생. 일본 도쿄[東京] 제 1 고등학교를 거쳐 상하이[上海] 후장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중에 《독립신문》 기자를 지냈으며, 귀국한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다. 8·15 후에는 흥사단 일에 관계하면서 민주당 민의원이 되었고 4·19 후에 부흥부장관 및 상공부장관을 지냈다. 그 뒤 《대한일보》 사장, 대한해운공사사장 등을 지냈다. 1917년 소설 《마을집》으로 문단에 등단하였고 19년 《창조(創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시작생활을 시작하여 《불놀이(1919)》 《빗소리(1924)》 등을 발표하였다. 한국 현대시의 형성과 발전에 선구적인 공적을 남졌다. 저서로는 시집 《아름다운 새벽(1924)》 《봉사꽃(1930)》 등과 논저 《자유의 구름다리(1959)》 《부흥 논의(1963)》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 1963)》 등이 있다
----------------------------------------------------------------------------
7. 김동환(金東煥) 시인 (1901∼? )-과거 현재 교과서 등장-
시인. 호는 파인(巴人). 본관은 강릉.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생. 소설가 최정희(崔貞熙)의 부군(夫君).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를 거쳐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문과를 졸업하였다.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1924)》로 추천받고 문단에 등장,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 《국경의 밤》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신경향파에 속했으나 향토적이며 애국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민요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를 주로 썼다. 일제시대에 《삼천리(三干里)》지를 창간·주재한 것을 비롯해 1938년 순문예지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하였다. 작품으로는 시 《신랑신부(1925)》 《쫓겨가는 무리(1925)》 《파업(罷業)》, 희곡 《바지저고리(1927)》 《자장가 부르는 여성(1927)》, 소설 《전쟁과 연애》 등을 발표했고, 수필집 《나의 반도산하(半島山河, 1941)》 《꽃피는 한반도(1952)》, 시집 《승천(昇天)하는 청춘(1925)》,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과 합작한 《3인시가집(三人詩歌集, 1929)》 등이 있다. 6·25 때 납북되었고, 이후 평남일보교정원을 거쳐 58년까지 재북(在北)평화통일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있었으나 현재는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이다.
---------------------------------------------------------------------------
8. 김동인(金東仁) 소설가 (1900∼1951 ) -과거 현재 교과서 등장-
소설가. 호는 금동(琴童)·춘사(春士). 평양(平壤)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中學部)를 졸업하고, 그림에 뜻을 두어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美術學校]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創造, 1919)》를 도쿄[東京]에서 간행했으며 귀국한 후 격문(檄文)을 초(草)해 주었다가 출판법위반혐의를 받아 6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첫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은 한국 최초의 리얼리즘 또는 자연주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단편 《마음이 옅은 자여》 《목숨》 《발가락이 닮았다》 등을 썼고, 이어 결정론(決定論)의 사상이 엿보이는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 《배따라기》 《태형(笞刑)》 《감자》 《김연실전(金硏實傳)》 등을 발표했다. 한편 이와 대조적인 작품인 《광화사(狂畵師)》 《광염소나타》 등은 유미주의(唯美主義)·낭만주의 경향을 보이는 그의 대표작이다. 간결한 문체(文體)와 양식적 완결성이 잘 드러난 그의 작품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또한 모든 작품에서 김동인은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적 교훈주의를 배척하고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내세운 순수문학운동을 벌였다. 방탕한 생활과 사업의 실패로 초래된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문·잡지 등에 닥치는 대로 역사소설·사담(史談) 등을 썼으며 아편중독에까지 걸렸다. 6·25 중에 서울 자택에서 중병으로 사망했다. 대표작품으로는 중편 《여인(1930)》 《붉은 산(1932)》, 역사소설 《젊은 그들(1929)》 《대수양(大首陽, 1932)》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1935)》 등이 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사상계(思想界) 및 동서문화(東西文化), 79년부터는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에서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수여하고 있다.
------------------------------------------------------------------------------
9. 모윤숙(毛允淑) 시인 (1910∼1990 )한국현대시 협회 회장 -과거 현재 교과서 등장-
시인. 호는 영운(嶺雲). 함경남도 원산(元山)출생.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졸업, 배화여고(培花女高) 교사, 중앙방송국 기자 등을 거쳐 1935년 《시원(詩苑)》 동인으로 참가하며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첫 시집인 《빛나는 지역(1933)》에서 민족적인 것에 대한 애정과 정열을 노래하였고, 그의 대표적인 일기체 산문집 《렌의 애가(1937)》를 냈다. 초기의 《추억》 《광야로 가는 이》 등에 이어 40년대에도 《초롱불》 《대동강》 《달 없는 밤에》 등을 발표, 소녀적 감성과 이상주의를 표현하였다. 49년 월간 《문예》를 창간하였고, 54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에 참여하였다.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 한국현대시협회 회장을 지냈다.
---------------------------------------------------------------------------
10. 현영섭(玄永燮) (?∼? )녹기연맹 이사, 조선어 사용 폐지 주장
친일파.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졸업 후 1937년 한국 거주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 <녹기(綠旗)연맹>에 가맹, 녹기일본문화연구소의 기관지 《녹기》에 논문·수필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38년 간행한 《조선인이 나아갈 길》은 <내선일체 3대서>의 하나로 꼽혀 당시 한국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언젠가는 조선인이 완전히 일본민족이 될 운명에 있다. 그것이 우리 조선인이 나아갈 길이다>라고 역설한 그는 39년 《신생조선의 출발》을 발표하여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38년 중·일전쟁 1주년 기념으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주사(主事)로 발탁되어 시국순회강연회, 출진학도 격려회, 조선언론보국 순회강연 등에 참가, 한국인으로서 내선일체를 제창함으로써 더 많은 한국인을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따라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보내는 데 한 몫 하였다. 해방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일본으로 건너가 숨어 살았다.
-----------------------------------------------------------------------------
11. 백 철(白 鐵) 문학평론가 (1908∼1985 )전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장
문학평론가. 본명은 세철(世哲).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생. 1927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31년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무렵 《지상낙원》 《전위시인》 등의 동인이 되었고, 30년에는 일본 나프(NAPF)의 맹원(盟員)이 되었다. 32년 귀국, 《개벽》지 편집부장으로 있으면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34년 제 2 차 카프검거사건에 연루, 수감되었는데, 이 사건은 그의 문학활동에 전향의 계기가 되었다. 광복 후 교육계에 투신,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다시 비평활동을 시작하였다. 63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위원장에 취임, 72년 중앙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문학론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도식적 측면을 비판하여 이데올로기나 계급투쟁의 도구로서보다는 인간탐구를 본령으로 하는 것이었다. 《조선신문학사조사(1949)》를 출간하였고, 이후 《영미의 새로운 세대문학(1960)》 《세계문학과 한국문학(1962)》 등의 평론을 발표하였다. 이광수(李光洙)·김동인(金東仁)·김소월(金素月) 등의 작품론을 정리하는 한편, A. 지드·I.A. 리처즈 등의 해외작가나 비평가 등 해외문학의 동향을 소개하였다.
-----------------------------------------------------------------------------
12. 장혁주(張赫宙) 소설가 (1905.~) 한국 출신의 작가로 일본으로 귀화
--------------------------------------------------------------------------
13. 이 찬(李 燦) 시인 (1910∼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시인. 함경남도 북청(北靑) 출생. 1928년 서울 경복중학교 재학 당시 《신시단(新詩壇)》에 시 <봄은 간다>를 발표하여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30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노문과(露文科)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동지사(同志社)를 결성한 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담하였다. 33년 대학 중퇴 후 귀국하여 카프 중앙위원을 지냈으며, 37년부터 북청·삼수·혜산진 등지에서 인쇄업에 종사하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8·15 직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에 선임되었고, 61년 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64년 아시아·아프리카 단결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 작사자로 알려져 있으며, 시집으로 《대망(待望, 1937)》 《분향(焚香, 1938)》 《망양(茫洋, 1940)》 등이 있다
-----------------------------------------------------------------------------
14. 김용제(金龍濟) 시인 독립운동가에서 변절한 민족반역자 -자료없음-
----------------------------------------------------------------------------
15. 최재서(崔載瑞) 국민문학주간, 평론가 (1908∼1964 )연세대학교·한양대학교 교수역임
영문학자·문학평론가. 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상수시(尙壽施).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1933년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모교 강사를 비롯하여 연세대학교·한양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31년 A.C. 브래들리를 소개하는 <미숙한 문학>을 《신흥》 5호에 발표하면서부터 문단활동을 시작, T.E. 흄·T.S. 엘리엇·H. 리드·I.A. 리처즈 등 영국문학 가운데 주지주의문학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으며 프로비평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한편 한국작가와 작품에 대한 비평작업에도 힘써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1936)》 《빈곤과 문학(1937)》 등에서는 이상(李箱)·박태원(朴泰遠)·이태준(李泰俊)·김기림(金起林)·채만식(蔡萬植) 등의 작품에 나타난 지성·풍자·도덕성 등을 과학적 안목으로 명쾌하게 분석하였다. 39년 이후 《인문평론》과 《국민문학》에 친일적 성향의 평론을 다수 발표하였다. 저서로는 《문학과 지성 (1938)》 《전환기의 조선문학(1943)》 《문학원론(1960)》 《영시개설(1971)》 《셰익스피어 예술론(1963)》 등이 있으며, 특히 셰익스피어에 관해 국제적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
16. 이석훈(李石薰) 소설가(1908∼? )
소설가. 호는 금남(琴南).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고등학원 문과를 수료한 뒤 신문사·잡지사·방송국 기자를 지내다가 1933년 《신동아(新東亞)》에 <황혼의 노래>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34년 대표작 《광인기(狂人記)》 등을 쓰고, 35년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연극운동에참가하였다. 36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조광(朝光)》의 편집을 맡았으며, 37년에는 평양(平壤)에서 《낙랑문고(樂浪文庫)》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46년 해군에 입대하여 정훈장교로 근무하다가 제대한 뒤, 6·25 때 납북되었다. 러시아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지식인의 고뇌와 애정의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주요작품은 《이주민열차(1935)》 《결혼(1936)》 《백장미부인(1939)》 《질투(1941)》 등과, 번역서로 L.N. 톨스토이의 《부활》이 있다.
------------------------------------------------------------------------------
17. 정인섭(鄭寅燮) 문학인, 교육가 (1905∼1983 )
연희전문학교.중앙대학교.영국런던대학교수역임56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회장,70년아시아문학번역국회장
평론가·영문학자. 호는 눈솔. 울산(蔚山) 출생. 1922년 <색동회>의 발기인이 되어 《어린이》에 동시 등을 발표하였고, 2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중 김진섭(金晉燮) 등과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 29년 대학을 졸업한 뒤 연희전문학교·중앙대학교·영국런던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56년 국제펜클럽한국본부회장, 70년 아시아문학번역국회장으로 일하였다. 시·수필·평론 등 다양한 문학활동을 하는 가운데 《영역한국시선》을 출간하는 등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에도 힘써 63년 한국번역문학상을 받았다. 저서에 평론집 《세계문단주조론》 《한국문단논고(1959)》, 수필집 《빗소리 바람소리(1968)》 《못다한 인생(1976)》, 시집 《산넘고 물건너(1968)》 등이 있다.
-----------------------------------------------------------------------------
18. 최승희(崔承喜) 무용가 (1911∼ 1967 ) 월북
무용가. 서울 출생. 1926년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에게 배웠다. 29년 귀국하여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열고 발표회를 가졌다. 31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던 안막(安漠)과 결혼한 이후 반일적 내용의 《광상》 《해방을 구하는 사람들》 《고난의 길》 《고향을 그리는 무리》 등과 한국인의 멋을 표현한 《에헤라 노아라》 등의 춤을 안무하였다. 37년부터 세계무대로 진출하여, 38년 파리공연에서 <세계적인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고, 39년 뉴욕 공연에서는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40년에는 중남미 순회공연을 가졌으며, 46년 월북하여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다. 한국 전통무용과 서양발레를 접목시킨 새로운 동양 발레를 꿈꾸었던 최승희는 광복 이전 독무(獨舞) 중심 작품활동과 달리 월북 이후에는 군무(群舞) 중심의 무용극 위주로 작품활동을 했다. 50년 《춘향전》 《장고춤》 《검무》 등의 민속무용과 《해방된 조국》 《봄의 노래》 등의 혁명적 신무용 및 《반야월성곡(半夜月成曲)》 《사도성의 이야기》 등 7편의 무용극을 창작하였다. 《사도성의 이야기》는 56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그녀가 시도했던 다양한 실험을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때는 베이징[北京]에서 《조선민족무용 기본동작》이라는 무보(舞譜)를 만들었고, 55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나 주체예술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67년 숙청되었다.
-----------------------------------------------------------------------------
19. 오정민(吳禎民) 연극평론가 -자료없음-
-----------------------------------------------------------------------------
20. 김정의(金正義) 일제 국민가요 작가 - 자료없음-
-----------------------------------------------------------------------------
21. 박경조(朴景祚) 일제 국민가요 작가 -자료없음-
---------------------------------------------------------------------------
22. 김용환(金龍煥) 만화가 (1912~1998 )
만화가. 경남 진영 출생. 1934년 도쿄제국미술학교 졸업. ≪니혼쇼넨≫ ≪쇼넨구라부≫ 등 잡지에 삽화를 그렸다. 1942년 ≪도쿄조선민보≫에 <코주부>를 선보이고 1946년 영자지 ≪서울타임스≫에 시사만화 <코주부>, ≪어린이신문≫에 <복만이의 모험> 등을 연재, 한국 만화의 개척에 앞장섰다. 초대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역임, 잡지 ≪학원≫ 등에 <코주부 탐정> <코주부 삼국지> 등을 연재했다. 1959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극동사령부, ≪통일일보≫ 등에서 활동하고 1995년 미국으로 이민, 여생을 보냈다. <코주부>는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서민적 캐릭터로, 세태풍자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으며, 치밀하면서도 생동 활달한 필치의 펜화는 독보적인 경지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 ≪귀갑선 해전기≫ ≪한국의 민화≫ ≪코주부 삼국지≫ ≪코주부 시사만화집≫ ≪그림 한국사≫ ≪한국의 풍속화≫ 등이 있다.
----------------------------------------------------------------------------
23. 이용설(李容卨) 의학박사 (1895∼1993 )
제2대 국회의원,세브란스병원장,기독교청년회(YMCA)이사장,흥사단이사장,87년 도산기념사업회 고문
의학자. 평양(平壤) 출생.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미국 노스웨스턴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37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면서 낙후된 의료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신의학 기술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50년 제 2 대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55년 세브란스병원장에 취임하였다. 65∼84년 삼동소년촌이사장, 65년 기독교청년회(YMCA)이사장·흥사단이사장을 지내고, 68∼81년 재단법인 명휘원(明暉園)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87년 도산기념사업회 고문을 맡았다. 수당과학상(秀堂科學賞)을 받았다.
----------------------------------------------------------------------------
24. 홍해성(洪海星) 극작가(1893∼1957 )
연극배우·연출가. 본명은 재원(在遠). 대구(大邱) 출생.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과를 자퇴하고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로 옮겨 소극장 단역배우로 일하며 연극을 배웠다. 1929년 귀국하여 극예술협회 회원이었던 고한승(高漢承)의 후원으로 신흥극장을 조직하여 창립공연으로 《모란등기》를 연출하였으나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30년 12월 A.P. 체호프작 《벚꽃동산》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다음해 <극예술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시연(試演)으로 N.V. 고골리의 《검찰관》을 연출하였다. 35년 11월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전속연출자가 되었고, 57년 7월 마지막으로 국립극장 환도기념공연인 K. 쉔헤르작 《신앙과 고향》을 연출하였다. 한국 근대극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신파극에 리얼리즘연출기법을 도입·토착화시킨 선구적 연출가이다.
-----------------------------------------------------------------------------
25. 유치진(柳致眞) 극작가 (1905∼1974 )
중앙국립극장장,동국대학교 교수,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장,드라마센터 소장
극작가·연출가·연극평론가. 호는 동랑(東朗). 경상남도 통영(統營) 출신. 1931년 리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극예술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신극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듬해 희곡 《토막》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일제의 탄압에 의해 극예술연구회가 해산되자 41년 현대극장을 창립, 《북진대》 《흑룡강》 《대추나무》 등의 친일적인 작품을 쓰기도 했다. 47년 극예술협회를 조직했고, 한국무대예술원을 창설하여 초대 원장이 되었다. 50년 중앙국립극장장, 60년 동국대학교 교수,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장, 드라마센터 소장 등을 지냈다. 초기 작품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인해 한민족이 겪는 황폐화 과정을 농촌현실에 비추어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그려냈으나, 일제의 횡포가 심해지자 애정을 주제로 한 낭만주의적 역사극을 주로 다루었다. 8·15 후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전쟁의 비참함, 분단문제 등을 다룬 작품을 썼다. 예술원상, 문화훈장, 3·1연극상 등을 받았다. 주요 희곡작품으로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소》 《조국》 《별》 《장벽》 《마의태자》 《원술랑》 《한강은 흐른다》 등이 있고, 저서로 《유치진 희곡전집》 《동랑 자서전》 외에 많은 연극관계 논문이 있다.
-----------------------------------------------------------------------------
26. 김태진(金兌鎭) 극작가 -자료없음-
---------------------------------------------------------------------------
27. 박영호(朴英鎬) -자료없음-
---------------------------------------------------------------------------
28. 이 익(李 翼) 배우 - 자료없음-
--------------------------------------------------------------------------
29. 안석주(安碩柱) 영화감독 (1901∼1950 )
--------------------------------------------------------------------------
30. 안종화(安鐘和) 영화감독 (1902∼1966 )대한영화사 촬영소장, 공보처 관리.서울시문화상수상
영화감독·신극운동가. 서울 출생. 1920년 신파극단 혁신단의 《장한몽》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27년 김을한(金乙漢)·이경손(李慶孫) 등과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창설하였다. 30∼50년대에 걸쳐 《꽃장사》 《청춘의 십자가》 《수우(愁雨)》 《천추의 한》 등을 연출하였다. 38년 조선일보사와 함께 처음으로 영화제를 열었다. 광복 후 대한영화사 촬영소장, 공보처 관리 등을 지냈고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저서에 《신극사 이야기(1955)》 등이 있다.
----------------------------------------------------------------------------
31. 최인규(崔寅奎) 영화감독 납북
----------------------------------------------------------------------------
32. 박기채(朴基采) 영화감독 -자료없음-
--------------------------------------------------------------------------
33. 방한준(方漢駿) 영화감독 -자료없음-
--------------------------------------------------------------------------
34. 서강백(徐康百) 평론가 -자료없음-
-------------------------------------------------------------------------
35. 노천명(盧天命) 시인 (여성)( 1911∼1957 )
시인. 초명은 기선(基善). 황해도 장연(長淵) 출생.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시작되었고, 졸업 후 35년에 《시원(詩苑)》 동인으로 시 《내 청춘의 배는(1935)》을 발표하였다. 38년 간행된 제 1 시집 《산호림(珊瑚林)》에 실린 대표작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의 <사슴>을 비롯하여 <자화상> <귀뚜라미> <장날> 등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있으며 제 2 시집 《창변(窓邊)》은 45년 매일신보사에서 간행되었다. 고독과 향수, 소박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정감의 세계가 그의 초기 시들의 특색이다. 제 3 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는 6·25 당시 옥고를 치른 체험과 거기서 오는 현실도피적인 시, 반공애국시, 고향에의 향수 등이 실려 있다. 제 4 시집 《사슴의 노래》는 그의 사후 58년에 간행되었으며, 산문집으로 수필집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 등이 있다.
-----------------------------------------------------------------------
36. 홍양명(洪陽命) 경제학자 -자료없음-
--------------------------------------------------------------------------
37. 고승제(高承濟) 경제학자 (1917∼1995 )
한국개발연구원 이사장,79∼86년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장·경제연구소장·행정문제 연구소장
경제학자. 함경남도 홍원(洪原)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明治]학원에서 영문학을, 릿교[立敎]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 야마자키[山崎]경제연구소와 도쿄경제연구소에서 동양과 영국·미국의 경제를 조사·연구하고 이론경제학에 관한 학술서를 번역하였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의 교수, 1950년 고려대학교 교수, 51년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54년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고 57년 연구논문 《이조금업사(李朝錦業史)》로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61∼67년 컬럼비아대학 및 시카고·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73년 한국개발연구원 이사장을 지냈다. 79∼86년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장·경제연구소장·행정문제 연구소장을 지냈다. 저서로 《한국경제론》 《경제학입문》 《한국금융사연구》 등이 있다.
--------------------------------------------------------------------------
38. 안함광(安含光) 평론가 (1910∼1982 ) 조선문학사 저술
문학평론가. 황해도 신천(信川) 출생. 본명은 종언(鍾彦). 해주고등보통학교 졸업.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해주지부에서 활동했다. 30년 농민문학문제를 제기하면서 비평활동을 전개했고, 33년 사회주의리얼리즘 수용문제를 둘러싼 문학논쟁에 참여, 조선의 특수성을 기초로 한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38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면서 40년대 초 국민문학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했다. 8·15후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가담했으며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57년 당내 숙청에 연루되어 문학활동을 중단당하고 60년대 중엽 복권되었다가 다시 숙청되었다. 평론으로 <농민문학문제에 대한 일고찰> <민족문화론> <국민문학의 문제>등이 있다.
----------------------------------------------------------------------------
39. 김 억(金 億) 시인 (1893∼? ) 납북
시인·평론가. 본명은 희권(熙權). 필명은 안서(岸曙).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오산중학(五山中學)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를 중퇴한 후 모교인 오산중학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때 동아일보와 경성방송국에 근무하였다. 20세인 1912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투르게네프·베를렌·구르몽 등의 시를 번역·소개하여 한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는 베를렌·보들레르 등의 시를 번역한 것으로 이 땅에 상징주의와 퇴폐주의 경향을 탄생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개인시집으로는, 23년 간행된 《해파리의 노래》가 있는데, 이는 근대 최초의 개인시집으로 자연과 인생을 민요조 형식으로 담담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50년 6·25 때 납북되었으며, 58년 행방불명될 때까지 재북 평화통일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불의 노래(1925)》 《안서시집(1929)》 《안서민요시집(1948)》 외에 번역시집 《신월(新月)》 《원정(園丁)》 등이 있다
------------------------------------------------------------------------
40. 이창수(李昌洙) 평론가 -자료없음-
41. 배상하(裵相河) -자료없음-
42. 이영근(李永根) 미국에서 친일활동하다 일본인 도움으로 귀국 -자료없음-
43. 대조실신(大朝實臣) 내선일체 잡지간행 -자료없음-
------------------------------------------------------------------------
44. 송 영(宋 影) 극작가 (1903∼1978 ) 월북
소설가·극작가. 본명은 무현(武鉉). 서울 출생.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 건너가 노동자 생활을 체험하고 귀국하였다. 22년 김영팔(金永八)·최승일(崔承一) 등과 함께 국내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 단체인 <염군사(焰群社)>를 조직하였고, 25년 《개벽(開闢)》의 현상공모에 <늘어가는 무리>가 당선되어 공식 등단하였으며, 이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조직에 관계하였다. 29년 카프 준기관지 《조선문예(朝鮮文藝)》의 인쇄책임자가 되었고, 31·34년 두 차례에 걸쳐 카프검거사건으로 피검되었으며, 이후 소년잡지 《별나라》를 중심으로 소년문학을 전개하였다. 37년부터 동양극장 전속 극작가로 일하면서 《동극(東劇)》지 편집을 맡아보다가 카프가 조선문학건설본부에 흡수, 통합되자 46년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대의원·조국전선중앙위원·대외문화연락위원장 등 요직을 역임하다가 68년 공직활동을 중단하였다. 작품으로는 《선동자》 등 소설 46편과 《모기가 없어지는 까닭》 등 희곡 40여 편, 이 밖에 수필, 평론 등이 있다.
--------------------------------------------------------------------------
45. 박순천(朴順天) 친일시국강연 (1898∼1983 )65년통합야당인 민중당의 총재
정치가. 본명은 명련(命蓮). 동래(東萊) 출생. 1917년 부산진 일신여학교를 졸업, 마산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 교사로 재직하였다. 19년 3·1운동 당시 마산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1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도피생활을 계속하였다. 20년 도쿄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吉岡女子醫學專門學校]에 들어 갔으나, 3·1운동 때의 보안법 위반혐의로 국내로 압송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26년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고령(高靈)에서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하다가, 39년 서울 조선공예주식회사 금강전구공장 여공감(女工監)으로 있었다. 8·15 직후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하여 신탁통치에 반대하였다. 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서울 종로 갑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 56년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고 65년에는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총재가 되었다.
-----------------------------------------------------------------------------
출처 민족반역자처단협회(http://cafe.daum.net/koko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