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카드 사이버 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 모음

<2001년 제1회 대상 수상작> 사라진 향원사 신 정 민 바람이 절을 짓는다 하나의 기둥을 세우고 다른 기둥을 세우려 하면 먼저 세운 기둥이 쓰러진다 내가 슬그머니 기둥이 있던 자리에 서자 기둥은 더 이상 넘어지지 않는다 기왓장들이 삼삼오오 몰려오고 흩어진 주춧돌들이 절터를 일으켜 세운다 주차장이 된 연못이 꿈틀거린다 어딘가에 부딪혀 돌아 온 소리가 기둥이 서있던 자리에 선다 벽이 내 어깨를 짚고 일어선다 그러자, 바람이 벽 위로 지붕을 얹는다 암,수컷 기와들이 차례로 줄을 선다 늦은 저녁, 새들의 소리가 처마 밑에 탱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뒤늦게 수습되어 온 얼굴 없는 부처와 탑신만 남은 석탑이 제자리에 앉는다 내가 부처의 옷깃을 잡으려 손을 내밀자 바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달아난다 건너편에 서있던 메아리가 따라 나선다 멀리가던 향기마저 뿔뿔이 흩어지고 주춧돌은 다시 발길을 잃는다 나는 기둥이 서있던 자리에서 빠져 나온다 와르르, 흔적도 없이 절이 무너진다 향원사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 가슴속의 향원사도 사라진다 이제 향원사는 어디에도 없다 <2001년 제1회 금상 수상작> 길 조 명 진 햇살이 참 따뜻했다. 나는 한 톨의 씨알로 햇살의 가슴으로파고들었으나 그 투명한 살 속으론 숨을 곳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서 있는 나무 뒤에서 바람이 분다. 길을 떠나야 한다고 바람이 등을 떠밀었으나 나는, 좁고 음습한 물웅덩이로 떨어져 서서히 젖어가고 있었다 바람은 나를 하늘로 띄우지 못하리. 이미 무거워져 있으므로 흙 속은 따뜻했다. 나는 참 편안하게 잠이 들었던가, 아무 것도 보려하지 않고 안전하게 숨어 있었던가, 스멀스멀 곁을 기어가는 음지 벌레들을 따라서 모르는 어딘가로 기어가고 있었던가 영원하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하나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살이 터지는 자리마다 푸른 멍이 돋았다. 까맣게 잊었던 햇살에대한 기억으로 온몸이 간지러웠다. 날아오를 수 있을까, 희망은 時限의 환상을 심어준다. 굳게 다물었던 소리들이 수런거리고,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 눈을 뜰 수 없어.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바람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길을 떠나야 한다고. 나는 바람의 손을 잡고 발돋음을 했다. 안간힘을 쓸수록 뿌리는, 흙과 더욱단단히 엉키고 있었으므로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2001년 제1회 은상 수상작> 샤갈의 마을에는 푸른눈이 내릴까? 정 소 라 무표정한 지붕위로 푸른 눈이 내려와 조급증에 떠는 심장을 파랗게 덮어 주었다 캔버스 위엔 온통 시린 빛이 가득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칠해 둔 마을엔 그녀는 없었다 작업중인 시간에 곁에서 차를 내어놓고 물감에 찌든 붓을 정리하던 가냘픈 손은 하늘이 쪼개진 가슴을 쏟아내던 날 먼 여행을 떠났다 기나긴 머리카락 몇 가닥과 몇 줄의 메모만을 남긴 채 영원의 마을로 조용히 떠나갔다 그 날부터 이렇게 캔버스 위에선 푸른 눈이 내린다 눈에 쌓인 마을 어디쯤 그녀가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끊일 줄 모르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그녀의 작은 발자국 마저 푸르름 속에 지워버리고 있었다 배롱나무에게 정 주 랑 지기 시작하는것은 꽃잎뿐이 아닙니다/ 삶의 한자락도 언젠가는 고인물이 마르듯/ 무심히 놓여나게 되는 겁니다/ 유난히 긴 마른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푸른 잎들은 더 우거지고/ 꽃잎들은 물이 오른채 불타는것 같습니다/ 햇빛 짱짱한 도심속에서/ 짙푸른 자태로 하얀 몸을 드러내며 웃는/ 분홍빛 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많은 꽃나무중 유독 여름이면 더욱 빛나는 목백일홍/ 어떤날은 갓 결혼한 새색시마냥/ 핑크빛으로 물들어 어쩔줄 몰라하고/ 어떤날은 분을 삭이지 못해 바르르 떠는/ 독오른 계집아이같은 꽃/ 그 다른 이름은 박꽃같이 소담한 "배롱나무"입니다/ 팝콘처럼 터지며 피어나는 분홍꽃잎들이 얼마나 이뻐던지/ 내나이 열하나/ 처음으로 배롱나무를 보았습니다/ 우리 가족만을 위한 처음 가진 우리집/ 그 집 정원에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포도송이처럼 늘어뜨리며 맺혀지던 그 하나하나의 꽃봉오리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배롱나무를 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같은 것이었을까요/ 스물을 한참 넘긴 서른을 눈앞에 둔 때였습니다/ 중환자실너머로 보여지던 그 환하디 환한 분홍꽃잎/ 꽃잎들이 다 지기도 전에/ 아버지는 쉽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쓰잘데 없는 자식 셋을 그냥 버려둔채로/ 어떻게 눈이 감기셨을까요/ 여러해 여름이 가고 다시 여름속에 서 있습니다/ 가로수가 분홍으로 깔린 산길을 달리고 있는 제모습이 보입니다/ 제 옆에는 막 잠든 세살박이 아이가 있고요/ 자신이 자신을 지탱하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이/ 당연히 힘든줄을 모르고 살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힘들줄은 몰랐나 봅니다/ 뜨거운 사막위에 놓여진것처럼/ 버둥발치며 오아시스를 찾고 있으니/ 올여름은 유난히 길고 덥습니다/ 그 여름을 먹고 배롱나무는 더 풍성하기만 하고/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분홍에 숨이 막히고 답답합니다/ 짓눌려 뭉쳐졌다 널부러진 내 마음이 보입니다/ 소나기라도 맹렬이 뿌려 얄미운 그 꽃잎을 떨구고/ 온통 시퍼런 잎사귀에 싸인 배롱나무를 보고 싶습니다/ 심술궂다고요/ 온통 분홍색천지에 마술처럼 푸른색 여유가 찾아온다면/ 내마음속의 눈물같은 아버지와/ 불쌍한 허깨비같은 제 자신을/ 조금은 감싸안을수 있을까 싶어 그럽니다/ 살아간다는게 항상 엎치락 뒤치락이라 두서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배롱나무를 사랑합니다/ 더운 여름을 아름답게 지내는 당신을 부러워합니다/ 꽃잎이 지고 난 뒤의 싱싱함도 사랑합니다/ 꽃 피었을때의 아름다움과 낙화뒤의 미련없는 깨끗함/ 앞도 뒤도 없는 인간사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여름이 갈 모양입니다/ 오늘밤은 매미소리도 없이 조금씩 찬바람이 들어오는군요/ 가을이 소리없이 우리에게 오고 있나 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에서 가볍게 놓여날 수 있도록/ <2001년 제1회 동상 수상작> 천마도 송 옥 선 박물관 깊숙히 갇혀있는 천마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날지도 못하고 굳어버릴 것만 같았던 누군가의 날개가 생각난다 그 사람은 마음이 유리같아서 바닥까지 환히 보였는데 살짝 눈만 흘겨도 쨍그랑 소리를 낼 것같아 늘 시선을 조심해야했는데 어느날 가만히 눈여겨 보았더니 고귀하고 기품있는 그 날개가 눈에 띠는 것이었다. 거친 바람에 찢길까 겁을 내며 제 눈과 제 귀를 한사코 막으며 날개를 접고 또 접는 것이었다 천년의 침묵을 깨고 박차를 가하라 백화수피 올을 뽑아 푸른 혈맥 새겨넣고 종횡으로 천공을 누비며 시공을 넘어온 빛이여 결 고운 갈기 휘날리며 선조의 넋을 입고 승천하라 어두움을 헤쳐 면벽을 일깨우라. 둥근 어깨 더듬으면 욕망의 푸른 돌기 날아라 창문을 열고 날아라 제 귀와 제 눈과 제 날개를 스스로 퇴화 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달은 것이었을까 날마다 한 개의 세포와 한 개의 마디를 열기 위해 주술을 걸었다 제 몸에 아픔의 씨앗을 심었다. 매번 겁을 먹고 돌아 서던 그 문안에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것이 살고있다고 믿었는데 마음 약한 것이 살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귀띰해 주었다. 맘 약한 것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한방울 두방울 피를 흘리며 날개를 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이 아픔의 핵이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해망동 1번지 이 지 연 -연- 부엌 찬장 같은 해망동 1번지 차곡차곡 집들이 개어져 있는 산꼭대기 별무리 같던 작은 방들이 가슴을 열면 머리가 하얀 시인들이 박꽃처럼 살고 있었다 담배꽁초의 달콤함 같은 하루를 벌어보기 위해 아내들은 소쿠리 하나씩 끼고 햇빛의 그림자 아래서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렸다 나무들이 자꾸만 땅에 붙어 굽실거리며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내민 앙상한 손 하나, 구름만 가득했다 가난 속에 행복했던 해망동 1번지 빈손으로 돌아와도 하늘 조각 하나쯤은 품고 갈 수 있어서 좋았던, 그 꿈의 마을은 오늘도 작은 섬이 된다 누이의 지갑 아 창 호 학교 도서관에서 지갑을 잃었다고 허둥지둥 집에 돌아온 누이는 가방을 뒤지다가, 1시간 전 발자국들을 찾아 떠났다. 잃어버린 지갑만큼 되돌아간 누이가 잃은 지갑 속 지폐처럼 파랗게 질려 다시 귀가했을 때, 지갑 속에 찰랑거리던 동전들이 반짝 누이의 눈가에서 투명한 액체로 허공에 뿌려졌었다고, 미세 입자가 되어 분해되고 다시 결합하여 별 모양의 발광체로 어둔 하늘에서 빛나더라고, 자꾸만 누이의 어깨가 끄덕거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가을꽃으로 시드는 누이가 안타까워 누이의 이불에다 내 위로와 다정함을 묻었을 때, 누이는 뺨을 비옥하게 만들며 내 가슴으로 들어와 누웠다. 살다보면, 우리가 잃는 것이 어디 지갑뿐이랴. 잃었다고 만원 권 지폐 다발 같은 침대에 누워, 마음을 촉촉이 적시던 지갑 속 같은 공허한 하루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도 모르게 어긋난 기억들을 조합한다고 온 밤을 불면증에 걸린 꽃처럼 울어도 언제나 하늘에는 달이 뜨고 지기를 반복한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이다. 누이는 다시 돌아온 시간 위에서 잃은 만큼 성숙해진 표정으로 잠들었다. 출산 주 숙 경 발등이 불을 얹은 듯 뜨겁다. 울컥 무엇인가 쏟아지고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축축함 이른 새벽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듯 정갈하게 몸 씻고 새생명 기다린다 독한 그리움이다 모진 고통은 그칠 줄 모르고 천형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고 여름 한 낮 폭염 속에 지쳐가듯 손가락 힘마저 하낱도 남김없이 빠져나가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창을 타고 오르는 희붐한 새벽기운 유난히 부셔오는 창을 보며 분명 아기가 나오리란 예감 한다 드디어 지상의 문이 열린다 천상의 어느별 전설 안고 왔을까 작은 우주가 운다 손가락 다섯 개, 발가락 다섯 개 목에 탯줄을 한바퀴 휘감고 온 소우주에 입맞춤한다 괴목 차 강 석 1 향기로운 똥냄새가 났다 나는 내 자식을 생각하며 약하지만 강한 촉수로 무서운 응집력의 바위를 뚫었다 드디어 맛있는 똥에 닿아서 블랙홀 같은 흡입력으로 똥을 심장이 터지도록 저장했다 저장한 똥을 내 자식을 위해 조금씩 조금씩 뱉어내어 자식에게 억지로 먹였다 내 자식의 푸르른 모습과 알찬 열매를 보며 보람을 느꼈다 할 일을 끝마쳤다고 생각한 나는 황량하고 쓸쓸한 땅 속에서 하데스를 맞이하기 위해 깊고 깊은 잠을 청했다 2 낯선 사람이 오더니 안락하고 편안하게 잠든 나를 깨웠다 그는 나를 어둡고 음습한 동굴 속에 던져 놓고 긴 시간을 방치했다 잠을 자지 못한 나는 서서히 물기가 없어지며 비쩍 말라갔다 오랜 시간 후 그가 돌아 와 늙은 내 몸의 옷을 벗기더니 광폭하게 강간하기 시작했다 그의 성기가 내 몸에 들어오고 구석구석을 거칠게 상처를 냈을 때 치욕스러움과 아픔으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우유처럼 부드럽고 밀가루처럼 섬세하게 내 몸에 난 상처들을 샅샅이 다듬고 보듬어 주었을 때 내 몸은 淨化되는 듯 했다 음침한 동굴 틈으로 내 몸에 빛이 닿을 때마다 죽은 줄 알았던 내 몸은 나도 모르게 전율을 느끼며 본능을 찾아갔다 마침내 어둡고 침침한 동굴을 빠져나와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맞이하는 순간, 난 진정한 나를 찾았다 그는 내게 새 옷을 입혔다 맑고 밝은 투명한 옷을 드디어 고치가 허물을 벗고 오색의 아름다운 호랑나비가 되 듯 나는 서러운 신선함을 되찾았다 *'괴목'이란 비, 바람, 곤충 등에 의해 꺾이고 부러져 생명을 잃은 나무 뿌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을 가리킨다 <심사평> 제1회 국민카드 사이버문학상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하유상입니다. 현 한국문인협회장이신 시인 신세훈님과 펜클럽 협회장인 수필가 조경희 님등 국내 최고의 연륜을 가진 여덟분의 문인들과 함께 본 상을 심사하게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약 34,532여편의 응모작이 출품된 가운데 치러진 본 행사의 심사는 본인과 탐미문학, 작가네트의 젊은 작가 10여분이 1차 심사를 진행하여 엄선한 900편의 작품을 본심 심사위원 1분당 각 100편씩을 심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각자가 읽은 100편의 응모작 중 <금상 후보 3%> <입상후보 7%> <입선 후보 10%> 등 총 20편의 후보작을 선정하여, 9월1일 오후 11시부터 6시간동안 본 행사의 주관사인 밀레21 사무실에 모여 각 부문마다 3분의 심사위원이 토론을 하여 영예의 당선작과 입선작을 선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선된 작품들 중, 전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본 응모작 중 가장 탁월한 작품인 <시 - 사라진 향원사>를 전 부분을 망라한 대상으로 선정 할 수 있었습니다. 본 행사는 참가작의 규모면에서나 그 수준면에서 여타의 문학상 행사를 상회하는 수준이었다는 전체 심사위원단의 의견으로 심사총평을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장 탐미문학 발행인 하 유 상 <2002년 제2회 금상 수상작>-대상은 소설이 차지함- 팽 이 배 영 민 그렇게 처도 돌지않았던 팽이 지금은 왜이리 빨리 도는지 소용돌이 어지러움증이 타고 넘는 목젖이 블랙홀이다. 팽이를 만든다고 나무를 깎다 배인 손에 곱게 미여져 나오던 여명의 피가 팽이에 스미고 상처난 손을 보신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쇠구슬 박힌 팽이는 아픔도 마취시켰다. 쩡- 쩡- 방죽의 신음 소리에 어머니의 한숨이 잦아들던 날 건너 방 할머니는 왜바람 타고 떠났고 결빙된 방죽에서 팽이는 돌기 시작했다. 맞아야 돌고 돌아야 설 줄 알았던 팽이 쇠구슬은 귀에 딱지가 붙도록 일러주시던 아버지의 세상이었고 중심 축이었다. 나무 나이테로 그려진 색상들이 경계선을 지키며 세상을 돌리던 청보리 단풍들던 계절에도 지구는 돌고 돌고있는 팽이에 채칙은 중심 흔들리는 파괴였다. 철없이 반항했던 젊은 시절의 가출이었다. 벌건 아픔에 벌건 아픔을 아파야 피워낼 수 있는 파란불꽃 불꽃속에서 흔들거리며 팽이가 춤을 춘다. 맞아야 돌줄 아는 팽이 아들의 팽이는 채찍이 필요 없는 스프링식이어서 아버지의 쇠구슬은 필요없었다. 세월의 길이만큼 짧아지고 낡아버린 채찍과 팽이 파란 불꽃 핀 하늘에서 조심스럽게 구름으로 흘러간다. <2002년 제2회 은상 수상작> 결혼기념일 박 옥 경 나는 가끔 아내의 화장품 상자 안으로 들어간다 향기롭고 평화로운 자극을 위해 언제나 뚜껑이 닫혀있던 향수병이 오늘은 열려 있다 신혼 첫 날 맡았던 냄새 가지런하게 루즈는 누워 있지만 아내는 그것을 일으켜 세운 적이 거의 없다 입술은 원죄의 시작 나는 붉은 그녀의 입술이 때로는 분홍이라든가 주황으로 반짝였으면 좋겠다 갈치의 비릿한 비늘이었으면 좋겠다 마스카라는 눈을 속인다 깊고 상냥한 눈을 호수처럼 품고 아내는 삼 년 넘게 벌이 못하는 내게 억새처럼 서걱거린다 마주보기만하면 베어져 피를 철철 흘리지만 아내의 눈은 여전히 호수처럼 깊다 빛의 방향에 따라 변하는 오팔 결혼반지를 아내는 끼지 않는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걸리적거린다고 나는 다이아로 그녀의 손가락을 무겁게 해주고 싶다 눈부신 만큼 무거운 것을 그녀는 알까 오늘은 별사탕 모양 귀고리를 하고 나갔다 직장생활 십 년 째인 아내의 귀는 늘 반짝인다 세상에 밝은 그녀 갑자기 방안이 환해진다 아내는 언제부터 내 허리를 안고 있었을까 케익 위 초가 녹고 있다 향수 냄새 신혼 첫 밤의 그녀 냄새 아내의 귀에서 수 없이 별이 부딪친다 그 반짝임이 향수에 섞여 소용돌이처럼 나를 잡아당기더니 퉁탕,팟, 나는 폭죽으로 밤하늘에 터진다 <2003년 제2회 동상 수상작> 나무들이 공중에서 독방을 짊어지고 있다 장 인 자 나무들이 공중에서 독방을 짊어지고 있다. 플라스틱 작은 독방에서 뿌리와 가지가 공중으로 오른다 여름이면 수많은 매미들이 화려한 불꽃에 몸을 날려 짧은 생이 마감되고 매미 는 몰랐을 거다 더 높은 공중에 나무들이 매달려 살고 있다는 것을 벌과 나비 들은 날개를 달고도 공중으로 오르지 않는다 공중엔 여린 나무와 독방 견고 한 창의 경계로 아픔만 있을 뿐이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가끔 창 밖으로 밑을 보며 번지점프를 생각하며 자장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오 후 2시 나는 공중에 매달려 TV를 본다. 드라마 속 여 주인공이 독방에 갇혀 울고 있다. 오후 3시 기계덩이와 마주보고 알까기를 했다. 수만 리 떨어져 사 는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남자가 누군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옆집 남자일지도 아랫집이나 윗집 남자일지도. 얼굴 없는 수천 갈래의 길이 한꺼번에 나를 따라 붙는다. 나무들이 일제히 공중에서 뛰어 내리고 있다. 나 도 같이 떨어진다. 땅은 어디쯤 있을까??? 어!! 내 가족들은 모두 어디 갔지. 함께 공중에 매달려 있던 낙동강 청둥오리 겨울이 다 지났는데도 검은 모래벌만 뒤적인다. 성덤성덤 남은 갈대 지난 여름내 제 안으로 물퍼 올리던 수관 잿빛으로 남아 떠나지 못한 천둥오리 한 마리 붙들고 마른 집을 짓는다. 15층 옥상에서 떨어 진 혜미 엄마 마른 갈대집으로 들어가고 땅 팔아 도개온천 옆 손국수집 차 려 식당하던 정환이 엄마 우울증 걸려 친정 갔다는 소문만 배냄이 마을 안개 처럼 깔리는데 정환이 엄마 쓸개즙 같은 사십 년의 생을 망태기로 얽어매고 태초에 곰이 마늘로 배를 채우던 토굴 속에 들어 앉는다. 도개 온천이 반쯤 갉아먹은 배냄이 얕은 산허리 갈라진 틈새 뚫고 고속 전철 왕지네 되어 내 발 등을 기어 오른다. <심사평> 대체로 이번에 응모한 작품의 수준이 고르고 높은 편이다. 대부분의 응모자가 일상적 생활에서 착상한 작품들이 많았고, 지나친 형식적 기교와 실험성이 강했다. 그리고 어떤 스토리를 꾸며보려는 의도성이 너무 강하고 언어적 기교가 지나친 것이 흠이었다. (작품의 깊이가 부족하고 언어의 해이성이 흠이다) 금상에 입상한 “팽이”에서 팽이라는 물상을 통하여 인생의 새로움을 엿보려는 표현이 좋았다. 중간쯤에 다소 무리한 표현이 드러나있지만 전체적으로 구성이 좋았다. 은상의 “황태 덕장”, “결혼 기념일”에서 일상의 문제를 각도의 여러 측면에서 시적 감성을 잘 들추어내고 있다. 동상의 “세탁기~”, “그의 바다는 아직 살아있다.”, ”나무들이 공중에서 독방을 짊어지고 있다.”에서도 다소 현실적인 측면을 일상의 사물에서 엿보는 각도가 좋았다. 앞으로 시의 함축성과 문제의 핵심은 물론 주제가 뚜렷이 나타나는 작품쓰기에 유념해 주기를 부탁한다. 시 부문 심사위원 (본심) 신세훈 , 조병무 , 김지향 (예심) 서창원, 조극래, 박지웅, 김시림, 최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