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요] 주제-이 시에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머리말이 붙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세가 이 시를 쓰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아직도 모세가 이 시를 썼다는 확신은 변함이 없다. 이스라엘이 지나온 광야에서의 상황이 각 절마다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말투나 표현, 단어들이 오경의 것들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 비평가들이 제시하는 몇몇 난점들은 모세의 저작을 뒷받침하는 내적 증거에 비하면 마치 공기처럼 미미하다. 모세는 행위뿐 아니라 말에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믿기에, 본시편은 그의 비중 있는 말씀 가운데 하나로서, 신명기에 기록된 그의 영광스런 가르침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높다. 모세는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충만했으며, 하나님에 의해 높임받고, 이스라엘 집 가운데 가장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시편은 기도라 불린다. 마지막 부분의 간구가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절들은 이 간구를 위한 예비적 묵상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 기도의 사람이다. 이 시편은 모세의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호렙산의 선견자가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갈망하며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 애원하던 중보 기도의 한 표본이다. 이 시편은 가장 오래된 시편으로서, 두 권의 시편 사이에 위치하는데, 위엄 있는 문체와 그 오랜 역사로 독특함을 발하고 있다. 열려진 무덤가에서 애곡하는 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시편을 들으며 마음에 위로를 얻곤 하였다. 이 시편이 본래 광야의 이스라엘에 관한 탄원이었음을 저들이 깨닫지 못했다 할지라도, 또 세상을 떠난 신자들이 현재 가 있는 더 높은 곳을 저들이 기억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러하였다.
구성-모세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현저히 대비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생명의 단촉성을 탄식하면서, 이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동정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 굳이 본문을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다.
1-11절 명상. 12-17절 기도.
그러나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잘 유지되고 있으므로 반드시 나누어야 할 필요는 없다.
[강 해] 1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7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절.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우리는 모든 시편이 사막에 거하는 족속을 위해 쓰여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각 절의 일차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모세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우리가 황량한 사막에서 유리 방황하고 있지만, 우리 선조가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서 장막 생활을 하던 때에 그러하였듯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우리 집을 발견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 자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거처요 안식처가 되신다. 그는 모든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위로하시며 보존하시고 감싸신다. 여우는 굴에 거하고 공중의 새는 둥지에 거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 성도들은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다. 우리는 성막이나 성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한다. 세상에 교회가 생겨난 이후 우리는 늘 그래 왔다. 우리는 우리 거처를 바꾸지 않았다. 왕의 궁궐들은 시간의 무지막지한 손아귀 아래서 사라져 갔다. 그것들은 불에 타기도 하고 흙더미 속에 묻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늘 황궁의 주인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에 가서 로마 황제들이 지은 궁궐의 잔해들을 둘러보라. 저들은 거기서 왕권을 마음껏 호령하고 저희가 다스리는 모든 나라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지만, 지금은 그 궁궐과 함께 모두 잊혀지고 없다. 반면에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곳에는 신자들의 영원한 거처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 그 집은 결코 쇠락하거나 좀이 쓸지 않는다. 거기에 우리 선조들이 거하였고, 이후 수백 세대가 거하였으며, 우리가 지금 거하고 있다. 신약의 성도들에 대하여 성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요일 3:24). 주님은 친히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고,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4, 5)라고 덧붙이셨다. 모세처럼 주님께 "주님, 주는 우리의 거처이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보다 복된 일은 없다. 그리고 친히 낮아지사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긍휼을 모색한다면, 이는 지혜로운 일이 될 것이다. 실제로 시편 기자는 다음 시편에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의 안전에 관해 언급한다.
2절. "산이 생기기 전." 그 늙은 거인들이 처음으로 자연의 태를 헤집고 나오기 전부터, 주님은 영광 가운데 자존하고 계셨다. 산들은 비록 흰 만년설을 머리에 쓰고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제 갓 태어난 아기에 불과하다.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여기도 탄생에 대한 암시가 나온다. 지구는 엊그제 태어났으며, 굳은 땅은 방금 전에 홍수로부터 분만되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당신은 계셨습니다. 하나님." 다른 것이 전혀 없었을 때, 하나님은 계셨다. 땅이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을 때, 산이 아직 솟아오르기 전, 천지의 세대가 아직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계셨다. 이 영원하신 자 안에, 대대로 이어지는 인간의 안전한 거처가 있다. 만약 하나님이 어제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필멸의 인간에게 적합한 안식처가 되지 못하실 것이다. 만약 그가 변하고 하나님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면, 그는 그 백성들의 확실한 거처가 되지 못하실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실존이 인간 삶의 단촉함과 대비되어 언급되고 있다.
3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인간의 육체는 풀어져 원소들로 되돌아간다. 마치 분쇄되어 가루가 되는 것과 유사하다.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즉, 취함을 입었던 흙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씀이다. 부숴지기 쉬운 인간의 특성이 강력한 어조로 표현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흙으로 창조되었고, 창조주의 명령에 따라 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분해하시면 인간은 분해된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파괴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이 얼마나 높이 인정되는지 유의하라. 인간은 운명의 칙령이나 불가피한 법칙에 의해 죽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님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하나님의 손이 인생을 되돌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말씀하신다. 이들이 없으면 우리는 죽지 않는다. 이 세상과 지옥의 어떠한 힘도 우리를 죽일 수 없다.
천사의 팔이 나를 무덤에서 건질 수 없고 수많은 천군들이 나를 무덤에 가둘 수 없네.
4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천 년이라면 얼마나 오랜 세월인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제국들이 일어났다 넘어지고, 왕조가 영광과 쇠퇴를 거듭하며, 인간 철학의 심오한 체계들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역사가들이 다 기록할 수 없는 수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개인과 집안에 일어난다. 그러나 현대 역사의 한계라 불릴 수도 있는 이 긴 세월이 주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같다. 장차 올 시간이 "지나간 어제" 같다는 말은 너무 짧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영원에 비하면 천 년은 그러하다. 영원과 비교하면, 아무리 긴 시간도 하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두 가지는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금방 왔다가 사라지는 순간 같다는 뜻이다. 천 년은 천사들이 시계를 고칠 충분한 시간조차 되지 않는다. 천 년에 걸친 그들의 봉사는 시계의 시간을 새로 고칠 때처럼 금새 지나간다. 우리는 밤새 오랫동안 꿈을 꾸지만, 하나님은 계속 깨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에게는 천 년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밤과 낮이 모여 천 년을 이루지만, 하나님께는 그 시간 간격이 하룻밤도 채 못되는 짧은 기간이다. 만약 천 년이 하나님께 하룻밤과 같다면, 영원하신 분의 생애는 얼마나 길까!
5절.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급류가 강바닥을 휘저으면서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가듯이, 주님도 죽음을 통해 인간들을 대대로 쓸어가신다. 태풍이 하늘에서 구름을 쓸어가듯이, 시간은 인간의 자녀들을 사라지게 만든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마치 밤중의 꿈이나 환상처럼 비실제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계획이나 모략이 다 잠과 같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러하다. '우리는 꿈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푸르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린다. 이처럼 인간도 건강하다가 금방 쇠약해진다. 우리는 백향목이나 참나무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풀이다. 봄에는 왕성하지만 여름 내내 지속되지 못한다. 우리보다 연약한 것이 지구상에 또 어디 있으랴!
6절.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아침 이슬이 아직 초원에 덮여 있을 동안 풀들은 풍만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황금 시대를 구가한다. 이처럼 인간도 젊을 때에는 꽃 피는 영광의 나날을 보낸다.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낫은 들풀의 번성함을 끝내고, 밤 이슬은 저들의 퇴락을 슬퍼한다. 여기에 풀의 역사가 있다. 씨가 뿌려지고, 자라고, 꽃 피우다가, 베어져서 사라진다. 인간도 이와 같다. 때가 되면 자연적 쇠퇴가 인간에게나 풀에게나 똑같이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만 년의 삶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 그의 낫과 함께 와서 한창 일 때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에 얼마나 변화가 많은지! 아침에는 번성하다가 저녁에는 시들고 만다.
7절.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이 필멸성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본성의 기원상, 죽음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죄가 주님의 진노를 촉발하는 바람에 우리가 죽게 된 것이다. 죽음은 베는 낫이요, 시들게 하는 뜨거운 열기이다. 광야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경우가 더욱 여실하였다. 그들은 완악함으로 인해 공의의 심판을 받았고 일찍이 생명이 베임을 당하였다. 저들은 자연적 노쇠로 죽은 것이 아니라 마땅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온 나라가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보는 모세의 심정은 지극히 애통스러웠을 것이다.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남자들은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생명이 하나님의 은총이듯이,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이다. 풀이 화로 안에서 자랄 수 없듯이, 인간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면서 번성할 수 없다.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느낌이 저들을 심히 낙담케 하였다. 그리하여 저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살아갔다. 이는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제는 생명과 불멸성이 복음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고, 죽음이 그 측면을 바꾸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사형 심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여움과 진노는 죽음의 가시이지만, 신자들에게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랑과 자비가 무덤의 길을 통해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글을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에서 낭송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본다. 이 시편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히 3:17)들과는 다르다. 율법 시대에 백성들이 특별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 지도자가 쓴 시를 예수님 안에서 잠든 자들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이 시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는 있지만, 이를 우리 자신에게 잘못 적용하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은 자들이요, 반면에 본시편에 언급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결코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진노 중에 맹세하신 자들이다. 그러나 죄 의식 가운데 있는 영혼에게는 이 시편의 말씀이 적합하게 들릴 것이요, 마음을 더욱 낙담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처럼 무섭게 타오르는 불은 없으며, 그의 진노처럼 마음을 괴롭게 하는 번민은 없다. 사랑스러운 우리의 대속주를 찬양하라.
그는 우리가 결코 질 수 없는 짐을 지셨으니, 곧 그의 아버지의 공의로운 분노라.
8절.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그러므로 이렇게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에 의해 목격된 죄는 반드시 죽음을 낳는다. 대속의 피로 이를 덮을 때에만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광야에서 엎으실 때, 저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있었다. 따라서 저들은 혹독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저들의 불법이 앞에 있는 한 저들을 치시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인간의 감추인 것들을 파내사 빛 가운데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얼굴빛보다 더 밝은 빛은 세상에 없다. 그 강한 빛 가운데서, 주님은 이스라엘의 숨은 죄들을 내어 놓으신다. 태양빛도 태양을 만드신 이의 빛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 그리하여 기록되기를,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빛이 그의 사랑과 은총을 의미한다면, 죄의 가증함이 이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히 선하고 은혜로우신 분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는 죄가 여실히 드러나고 말기 때문이다. 공의의 빛에 대한 반역은 어둠이다. 그러나 사랑의 빛에 대한 반역은 사악함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을 슬프게 해드릴 수 있으랴! 이스라엘 자손들은 높으신 손에 의해 출애굽하였고, 광야에서 넉넉하신 손에 의해 배불리 먹었으며, 자상하신 손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는데, 저들의 죄는 특별히 흉악하였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넘치는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우리도 만약 하나님을 버린다면 그런 죄를 짓는 셈이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할까? 은밀한 죄를 깨끗이 씻기 위해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주님 뒤로 던져지고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기쁨이 샘솟듯 넘친다. 죄악이 도말되고 사형 선고가 취하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났다.
9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반역하는 이스라엘 족속의 날 수는 공의로 인해 단축되었다. 저들이 잠깐 머무는 곳마다 공동묘지가 되었다. 저들은 뒤에 남겨지는 무덤으로 행진의 표를 삼았다. 사형 선고로 인하여 저들의 날은 말라 버렸고, 저들의 삶은 헛되이 소진되었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혹은 "우리의 연한이 (입으로) 말해지는 이야기같이 지나가나이다." 그들의 '날'뿐 아니라 그들의 '해'까지도 생각처럼 저들을 스쳐 날아갔으며, 묵상처럼 빠르게, 잡담처럼 헛되이 달아나 버렸다. 죄는 모든 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죽어가는 방랑자의 삶을 더욱 헛되고 단촉하게 만들었다. 본절의 첫 문장은 설사 신자들에게 적용될 수는 있을지라도 신자들이 인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날들은 다윗이 시 23편에서 말하였듯이 하나님의 자애로움 가운데 지나가기 때문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시 23:6). 둘째 문장에서도, 은혜로운 사람의 삶은 이야기꾼의 이야기처럼 비실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 살며,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을 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삶은 실제이며 삶은 열렬하다.' 물론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좋다:거룩한 삶은, 마치 이야기꾼이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내듯 섭리자의 명령에 따라 쉽게 움직일 수 있으므로, 매우 흥미진진하며 놀라움과 여러 가지 변화로 가득차 있다. 우리의 삶은 하늘의 좋은 것들을 보여주는 실례이며,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한 비유요, 신성한 사상으로 넘치는 시요, 무한한 사랑의 기록서이다. 이런 이야기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10절.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모세 자신은 이보다 훨씬 오래 살았지만, 그의 년수는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그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우리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였다. 이 수명은 그 이전 사람들의 수명에 비하면 매우 짧은 것이며, 영원과 비교하면 무(無)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수명은 덕과 경건을 쌓기에 충분한 기간이며, 악과 참람함을 위해서는 너무나 긴 기간이다. 원문을 보면 여기서 모세는 앞뒤가 맞지 않는 방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 마치 그는 인간의 촉박한 존재가 완전히 무의미함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우리 생애의 햇수여! 칠십 년이라."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일 것이다:"우리 삶의 햇수? 그게 무엇인가? 그것이 언급할 가치가 있는가? 그 이야기는 완전히 무의미하다. 다 이야기해 봤자 겨우 70년이다."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70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범한 힘이 노인을 떠밀어 넣는 곳은 피곤과 염려가 가득한 곳이다. 노년의 힘, 그 자랑과 내세울 만한 것이 수고와 슬픔뿐일진대, 그 약함은 오죽하랴! 숨이 얼마나 가쁘며, 움직이기가 얼마나 힘든가! 감각 기능은 떨어지고, 나약하기 그지없다. 악한 날이 임하며, '나는 살아도 전혀 기쁨이 없다'고 외칠 날이 왔다. 메뚜기도 짐이 되고, 모든 소욕은 끊어진다. 이것이 노년이다. 그러나 거룩한 체험으로 원숙해지고 불멸의 소망으로 위로를 얻는 신자들의 노년은 결코 가련하지 않다. 해는 지고 낮의 열기가 사라지면, 고요하고 평화롭게 감미로운 황혼이 찾아온다. 해맑은 날은 사라졌지만, 무섭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영광스럽고 고통 없는 영원한 날이 밝아오는 것이다. 필멸의 몸은 사라지고 불멸의 존재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노인은 잠들었다가 영원한 젊음의 장소에서 깨어난다.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밧줄은 풀리고 배는 영원의 바다 위를 항해한다. 사슬은 끊어지고 독수리는 구름 위 하늘 본향으로 솟구친다. 모세는 이렇게 노래하며 사람들을 위해 애곡한다. 모든 그의 친구들이 그의 옆에 묻혀 있으므로 그랬을 것이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그가 우리를 빨리 몰아가시니, 우리가 날아서 사라지도다." 마치 메추리들이 강한 서풍에 휩쓸려 날아가듯이, 인간들은 죽음의 폭풍에 떠밀려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에게는 그 바람이 좋은 바람이다. 제비들이 강풍을 타고 겨울 지역을 벗어나 따뜻한 땅으로 가듯, 우리도 그리한다. 그 땅은,
영원토록 봄이 거하는 곳이요, 결코 꽃이 시들지 않는 곳이다.
누가 이런 곳을 바라지 않으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머뭇거리랴! 이 초라한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더 얻을 것이 있어 해변에서 지체하고 있으랴! 가세, 가세! 이곳은 우리의 쉴 곳이 아니니, 하늘을 향해 가세. 우리가 그렇게 예정되었다면, 주님의 바람이 우리를 실어가게 하세. 저들은 우리를 좀더 빨리 주님께 데려가고 우리의 사랑스런 본향으로 인도하리라.
11절.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모세는 그의 주변에서 사람들이 허다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장례식 속에서 살았으며, 하나님이 노하신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는 아무도 주의 진노의 힘을 측량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의인들은 그 진노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결코 그 공포만큼 크지 않다. 반면에 악인들도 하나님의 진노를 느낄 때 두려움에 엎드러지지만, 하나님의 벌은 저들이 두려워하는 만큼보다 훨씬 더 크다. 분노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빠져드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다.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할 때 결코 과장법을 쓰지 않는다. 이를 더 과장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두려움과 거룩한 떨림을 느낄 때 온유한 마음은 지극히 큰 감동을 받는다. 강력하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분노에 관한 위대한 진리는 우리 마음으로 하여금 엄숙하고도 마땅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지옥에서 타오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힘이 어떠한지, 또 만약 하나님의 자비로 감해지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타오를 진노의 힘이 어떠할지, 살아있는 인간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현대 사상가들은 밀턴이나 단테, 번연, 백스터 같은 이들이 너무 끔찍한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하여 이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실은 그 어떠한 시인의 무서운 환상이나 거룩한 예언자의 혹독한 꾸짖음도 하나님의 진노의 힘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다가올 진노는 어두운 인간의 상상력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다. 지옥에서 몸이 갈갈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결코 하나님을 잊지 말라.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나서시는 하나님은 무시무시하시다. 소돔과 고모라를 기억하라! 고라와 그 무리들을 기억하라! 광야에 남겨진 탐욕의 무덤들을 기억하라! 아니, 차라리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처참한 장소를 생각하라. 이 공의로운 하나님의 진노 앞에 누가 감히 설 수 있으랴? 누가 그의 쇠 박힌 채찍 맛을 보려고 달려들겠으며, 누가 그의 날카로운 검을 시험하려 덤비겠는가? 하나님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를 흙으로 돌아가라 명하실 수 있고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다.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14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16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12절.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우리에게 시간을 귀히 여기는 법을 가르치소서.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행하며 흘려보낸 과거 시간을 슬퍼하게 하시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부지런히 사용하게 하소서. 그리고 장래에 놓여 있는 시간의 불확실성을 깨닫지 못하여 은혜의 사역과 기도에 게으름 피우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소서. 수를 헤아리는 일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기초적인 수학이다. 그러나 날 수를 올바로 헤아리기 위해서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날 수를 헤아리기보다 별 수를 헤아리는 데 더 열심이다. 그러나 전자가 훨씬 더 실질적이다.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인간은 자기 생애의 단촉함을 깨달을 때 영원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곧 무덤에 들어가야 함을 깨달을 때 겸손해지며, 저들의 열정은 필멸성 앞에서 차분해진다. 이때 저들은 결코 오류가 없는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이는 주님 자신이 선생님이 되실 때에만 그러하다. 주님만이 참되고 영원한 유익이 무엇인지 가르치실 수 있다. 그리하여 모세는 공의를 베푸시는 일이 자비 안에서 인침받도록 기도한다. 주님께서 친히 율법으로 말씀하실 때,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될 수 있다(갈 3:24). 이제 곧 두근거림을 멈추게 될 마음이 아직 살아 움직일 동안 지혜의 가르침을 받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다. 짧은 생애는 지혜롭게 쓰여져야 한다. 우리는 단 10분이라도 함부로 낭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지 못하다. 또한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우물쭈물 낭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삶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마음이 지혜롭다면, 이를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머리로만 지혜롭다면, 올바른 길을 갈 수 없다.
13절.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자비로 우리에게 다시 임하소서. 우리를 파멸에 버려 두지 마소서. 우리 삶이 짧고도 괴롭게 하지 마소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돌아오라, 너희 인간의 자손들아" 하셨사오니, 이제 우리가 주님께 겸손히 부르짖나이다. "돌아오소서, 인간의 보호자시여." 당신의 임재하심만이 우리를 이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에서 건지실 수 있나이다. 우리에게 돌이키소서. 죄가 하나님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듯이, 회개의 외침은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돌이키게 한다. 징계를 받는 사람은 탄원을 하면서 하나님께 "언제까지니이까?"라고 물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범하는 잘못 중 하나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서지 못하고 탄원하는 일을 너무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이처럼 모세는 이스라엘 족속을 아직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범죄하였지만, 완전히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를 갖고 있었다. 모세는 이 의무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어떤 사람이 그의 종을 아끼지 않겠는가? 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셨지만, 저들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주님이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저들을 긍휼히 여기시도록 간구한다. 설사 저들이 약속의 땅을 못본다 할지라도, 도중에 부디 주님이 자비롭게 저들을 위로하시고 주님의 찌푸린 얼굴을 미소로 바꾸시도록 간구한다. 이 기도는 이스라엘을 위해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탄원하는 온유한 율법 수여자의 다른 기도들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이 기도는 모세답다. 여기서 그는 마치 친구와 대화하듯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
14절.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저들은 곧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 형제들에게 한시 바삐 은총을 내리시도록 간구한다. 의인들은 지극히 캄캄한 시험을 당할 때 이를 은혜의 보좌 앞에 가지고 나가 논할 줄을 안다. 기도의 마음만을 가진 사람은 기도할 때 탄원을 빼놓지 않는다. 주의 백성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음식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 모세는 하나님께, 마치 아침에 만나를 보내시듯이 곧 만족스런 은총을 보내사 짧은 인생의 날 동안 내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열심히 간구한다. 우리가 곧 죽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주님,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굶주리지 않게 하소서. 주님께 기도하오니, 곧 우리를 만족하게 하소서. 우리의 날은 짧고 밤은 가까우니, 주님, 우리 생애의 이른 아침에 주의 은총으로 배부르게 하사 짧은 인생 동안 내내 우리를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찰 때,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은 즐거운 축제가 될 것이요, 이 기쁨은 마지막까지 지속될 것이다. 주님이 함께하심으로써 우리를 기쁘게 하시면, 어느 누구도 그 즐거움을 빼앗아갈 수 없다. 빠른 죽음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함께하시는 은총을 누리는 사람은 괴롭지 않다. 밤이 오는 것을 알아도, 저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승리하는 가운데 미래를 그의 자애로운 손에 맡기고, 사는 동안 열심히 살아간다. 애굽에서 나온 모든 세대는 광야에서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으므로, 저들은 자연히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저들의 위대한 지도자는 무엇보다 더 저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축복, 곧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을 간구하고 있다.
15절.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아무도 주님처럼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셨듯이 우리를 기쁘게 해주소서. 저울의 다른 쪽 접시도 채우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처분을 공평하게 하소서. 주님이 우리에게 쓴 풀을 먹이셨으니, 이제는 어린 양을 보내소서. 우리의 낮이 우리의 밤만큼 길게 하소서. 이 기도는 원초적이고 순진하며 충만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간구는 어느 정도 섭리적 의의 대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 원칙에 따라 선과 악을 반반씩 세상에 들여오셨다. 큰 시험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특별한 은총의 전령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조치는 저울에 따라 이루어진다. 작은 삶에서는 모든 것이 작다. 한편 큰 역사들은 큰 슬픔과 큰 행복을 모두 담고 있다. 높은 언덕이 있는 곳에는 깊은 골짜기도 있다. 하나님은 고래를 위한 바다도 마련하시고 피라미를 위한 연못도 마련하신다. 바다에서는 모든 것이 거대한 물고기에 맞게 조정되어 있으며, 작은 시내에서는 모든 것이 작은 물고기에 맞게 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넘치는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당당히 이를 요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징계하실 때 공의가 크신 만큼 축복하실 때 자비가 크시다. 그는 늘 크신 분이시다. 우리는 주저 없는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가 호소하자.
16절.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그가 얼마나 "종"이란 말에서 맴돌고 있는지 주의해 보라. 율법이 갈 수 있는 한계는 여기이다. 모세는 자신에게 허용된 한계까지 다 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친구라 부르셨다. 만약 우리가 지혜롭다면, 훨씬 더 많은 우리의 자유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그의 능력과 섭리를 백성들 앞에 명백히 드러내 보이사 저들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백성들은 허물 많은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는 위안을 얻을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역사에서 평안을 얻고자 한다.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라고 있는 자손들에게 약속된 영광의 발현을 몇 가지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저들의 후손이 언약으로 주어진 땅을 언젠가 물려받을 것인데, 그 다가올 경사에 대한 어떤 표적, 곧 밝아오는 새날을 알리는 새벽 노을 같은 것을 저들은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의인들은 그 자손을 위해 열심히 간구한다. 그들은 만약 자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확실히 보고 이를 통해 주님을 섬기게만 된다면 어떠한 개인적 고난도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다. 우리도 만약 자녀들이 우리의 당하는 일을 통해 영광을 볼 수만 있다면 어떤 경우든 만족한다:저들이 거둘 수 있다면 우리는 즐거이 씨를 뿌리리라.
17절.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가나안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목격하지 못한 우리에게도 임하게 하소서. 만약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 성품 안에 반영된다면, 그리고 우리 모든 진(陣) 위에 주 하나님의 존귀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실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만족하겠나이다. 성화는 우리의 매일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우리의 행하는 일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이 되게 하시며, 우리가 무덤에 들어간 뒤에까지 계속 남을 수 있게 하소서. 현재 세대의 사역이 나라를 영원히 견고히 세우는 데 이바지하게 하소서. 의인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자신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잘 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자신의 수고가 열납되기를 바라며, 자신의 도모가 성취되기를 구한다. 전체적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손잡고 일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만한 크고 영원한 일을 이루시길 원한다. 우리는 왔다 가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영원히 남는다. 예수님이 사시고 그의 왕국이 성장한다면, 우리는 죽어도 만족한다. 주님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존재하시므로, 우리는 우리 일을 그에게 맡긴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 일이라기보다 주님의 일이므로, 주님이 이를 영원히 지켜 주실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풀같이 시들어 버릴지라도, 우리의 거룩한 사역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이 불 속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본시편의 기자를 모세라고 밝힌 제목의 정확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확증될 수 있다:이 시편의 특이한 단순성과 위엄성, 시대 및 환경과의 부합됨, 죄와 죽음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율법과의 흡사성, 인용이나 모방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오경 가운데 있는 시가들과의 문체적 유사성, 다윗이나 그 후대에 쓰여진 시편들과의 현저한 차이, 마지막으로, 이 시편을 다른 시대나 저자의 것이라고 정당하게 말하기 어렵다는 명백한 사실 등이다. -알렉산더.
머리말. "모세의 기도." 모세는 최초의 신앙적 찬송시 작가로 간주될 수 있다. -사무엘 버더.
머리말. 이 시편에는 "기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아미랄두스(Amyraldus)가 지적하였듯이, 이 제목은 본시편의 주제가 후반부에 있음을 보여 준다. 전반부는 후반부를 위한 길을 예비하고 그 기초를 닦는 부분이다. -헹스텐버그.
머리말. "모세의 기도." 모세는 늙고 심히 지친 사람이었지만, 오랜 경험을 통하여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즉, 우주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화들 가운데서 적어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신 분의 신실하심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을 할 때 모세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과거를 보고 있는 것일까? 불 붙은 관목, 애굽의 극렬한 풀무, 홍해, 전차를 탄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행진,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뒤에 있었다. 이 모든 일 속에서 그는 하나님은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심을 깨달았다(신 32:4). 그러나 모세가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 32:7)고 말할 때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은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또 그가 본시편에서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말할 때도, 그보다 더 오래 전을 바라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 그는 지금 마음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과 노아와 모든 선조들의 피난처가 되셨는지를 상기하고 있다. 모세는 천 년 이상의 역사를 돌아보며 그 말씀의 진실성을 확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할 수 있다. 현재 나는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의 시대를 비롯하여,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시대와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의 시대를 되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천 년의 역사가 모세의 말을 뒷받침하였듯이, 삼천 년의 역사가 나의 말을 뒷받침한다:주님은 대대로 그를 의뢰하는 자들의 거처가 되셨다. 그렇다. 그리고 모세와 아브라함의 피난처가 되셨던 그분께, 나도 역시 환난 날에 내 손을 들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삼천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를 동안 수많은 우주의 변화 가운데서 여전히 변함없이 오늘날까지 남아 계신 위대한 존재가 나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톨룩(F. A. G. Tholuck, Hours of Christian Devotion, 1870).
시 90편 전체. 비록 약간의 난점은 있지만, 이 시편이 모세의 저작임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이 시편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왔다. 그리고 제롬(Jerome)에서 시작하여 헹스텐버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성경 학자들이 이를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로 보는데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시가 중의 하나이다. 이에 비하면, 호머나 핀다로스(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서정 시인)는 현대요, 다윗 왕까지도 근세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이 최고의 시편에 비하면 다른 시편들은, 마치 테니슨과 롱펠로우가 초서에 비해 현대이듯이, 훨씬 더 현대에 속한다. 어느 경우든 양자 사이에는 거의 500년에 가까운 시간 간격이 있다. -제임스 해밀턴(James Hamilton).
시 90편 전체. 시편 90편은 인간이 지은 시가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감정의 깊이나 신학적 개념의 높이, 상상력의 크기 면에서 비할 수 없이 탁월한 작품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본시편의 언급은 사실이다. 즉, 삶은 고난투성이요, 순간적이요, 죄악되다. 그리고 영원하신 분에 대한 언급도 사실이다. 즉, 하나님은 주권자시요 재판장이시며, 어떠한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도 그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피난처요 소망이시다. 저들은 확고한 믿음 가운데 마치 머지않은 장래에 기쁨의 계절이 도래할 것을 예언이라도 하는 듯 이를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다. 또한 이 시편에는 먼 계시의 날까지 신비에 싸여 계실 불멸자에 관한 교리도 담겨 있다. 인생의 짧음을 탄식하고 그 짧은 날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음을 한하는 가운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대조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순종적 경건의 자세는 계속 유지된다. 여기서 작게 싹트고 있는 영생의 개념을 엿볼 수 있다. 이 시편에서는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냄이나 교만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고뇌에 몸부림치는 자들의 입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에 대한 악의에 찬 항의나 반발 따위도 찾아볼 수 없다. 괴롭고 쓰라린 고통의 때를 직접 겪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참상을 곁에서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본시편 전체에 흐르는 믿음과 소망에 찬 분위기와는 전혀 반대되는 격한 감정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이 시편은, 히브리 율법 수여자의 저작으로 보든 보지 않든, 먼 고대의 작품이라는 증거가 확실히 드러난다. 그 문체가 장중한 단순성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후기에 나타나는 복잡하고 정교한 사상적 특징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후기에 사람들은 지성과 도덕 면에서 방향을 상실해 버린다. 틀림없이 이 시편은 유대인들이 자기네 심성과는 결코 조화될 수 없는 헬라 철학에 귀를 기울이던 시기보다는 수세기 전에 쓰여졌다. 이 하나의 시편만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히브리 시가의 정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히 말해달라고 요청한다면, 우리는 그 대답의 요약을 이 시편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장엄한 시가는 단지 작가의 정신적 자질에 관해서 뿐 아니라, 작가 당시 사람들, 곧 청중들과 독자들의 취향과 성격에 관해서도 알려준다. 이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시적 언어의 자유롭고 일상적인 구사와 쉬운 비유적 표현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든, 그 소재가 가까운 데 있으므로 사용이 용이하다. 그 다음에는 감정의 깊이를 꼽을 수 있다. 이 시편에는 애통과 상념과 소망과 신뢰의 느낌들이 깊게 나타나고 있다. 시에서 이런 것들이 빠지면 게으른 호사가들의 허영심만을 만족시켜 주는 다른 장식적 예술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그 외에도, 이 시편에는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심오한 철학적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사상이 없으면, 시는 경박해지고 인간 삶의 진지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이 시편은 플라톤이나 소포클레스에 의해 쓰여졌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다만 저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학을 마음에 소유하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그러하다. -아이작 테일러(Isaac Taylor).
1절. "주여." 이 시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이 바뀌고 있음에 유의하라. 모세는 처음에 위엄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이름("아도나이")을 선포함으로써 노래를 시작하지만, 13절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자비와 은혜를 나타내는 이름인 여호와를 부름으로써 기도를 시작한다. 그리고 17절에서는 모든 것을 합하여 "주 우리 하나님"("여호와, 엘로힘")의 아름다움("노아스", s[n)을 나타내시도록 간구한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1절.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듯이 보이는데, 그의 보호하심을 받지는 못한다. 그들은 오직 폭풍 속에서만 도우심을 구하며, 다른 모든 수단과 피난처가 실패했을 때에만 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유지해야 한다. 그는 이따금씩 하나님께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1절. 서론에 해당되는 본절에서는 생명이 숨을 쉬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날개짓을 하고 있다. 모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거처라 부른다. 좀더 명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뜻이다. 그에게로 도피할 때, 우리는 안전함을 얻을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면, 하나님은 생명이시요 우리는 그 안에 거하는 자이므로, 당연히 우리는 생명 안에 거하게 되고 또 영원히 살게 된다······누가 하나님을 죽은 자의 거처라고 부르겠는가? 누가 그를 무덤으로 여기겠는가? 그는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거처로 삼는 자들도 그의 생명을 누린다. 이처럼, 모세는 본 서론에서 우리에게 암암리에 이르기를, 무서운 천둥 번개가 치기 전에 산 자의 거처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그에게 기도하며 그를 의지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을 "거처"라 부르는 것은 특이한 표현으로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성경 다른 부분에서는 정반대로 말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된다고 말한다. 바울은 말한다:"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모세는 이를 뒤집어, 우리가 이 집의 거주자요 주인이라고 확증한다. 히브리어 "마온"(@w[m)은 본래 거처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시 76:2)라는 말씀에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러나 집은 안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결국 이 단어는 피난처 혹은 피신처를 의미하게 된다. 모세는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 안에 가장 든든하게 놓여져 있음을 세심하게 일러주고자 한다. 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헛수고를 하거나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피난처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거처가 되시니, 저들이 영원토록 안전할 것이다. 바울도 골로새 교인들에게 거의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한다:"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하나님이 신자들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신자들이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것이 좀더 명확하고 알기 쉬운 표현이다. 그는 가시적으로 시온에 거하셨지만, 그 장소가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신자들은 자리를 옮기거나 이동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거처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본 절에서 우리에게 가장 확고한 생활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거처는 이 땅도 아니요 하늘도 아니요 낙원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만약 그대가 이러한 방식으로 본시편을 이해해 나간다면, 본시편은 더없이 감미롭고 유익한 시가 될 것이다. 수도사인 나로서는 예전에 이 시편을 읽을 때 부담이 되어 책을 덮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나의 깨달음이 부족한 소치였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본시편에서 모세는 지극히 완악하고 교만한 군중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노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도 않았다. 저들은 재앙 앞에서 겸허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죽음을 보면서도 그러하였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절.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이 첫부분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느 때나 어느 시대에나 그의 성도들과 종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푸사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음을 인정하고 있다. "거처", 곧 맨션 하우스라는 이름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도움과 위안, 즉 보호와 부양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은 비바람이나 추위를 막아 줄 뿐 아니라, 벽과 지붕 안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사람이 편안히 거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안에서 사람은 다른 필요한 것들을 좀더 넉넉히 넣어두기도 하고, 이웃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나운 짐승이나 대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는 좀더 직접적이고도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세상의 나머지 백성들은 이 땅에 뿌리를 둔 거처와 맨션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유한 국가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에 거하고 있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집도 가정도 없는 신세였다. 그들은 가장 초라하고 처량한 백성처럼 보였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살던 그의 본향과 아비 집에는 틀림없이 좋은 건물과 넓은 정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부르셔서 객지에서 낯선 야만인들 가운데 나그네처럼 살게 하셨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장막과 초막에 거하면서 어떤 곳에서도 안주하여 평안한 삶을 살아갈 소망을 갖지 못하였다. 그 후손들도 이와 유사한 방식의 삶을 살았다. 이삭과 야곱과 열두 족장들은 가나안 땅 이곳 저곳을 유랑하며 살았다. 그후 거기서 떠나 애굽 땅으로 들어가 정착 생활을 하였지만, 속박당하는 노예 생활이었으므로, 차라리 집과 가정이 없느니만 못하였다. 출애굽 후에도 저들은 거의 사십 년 간이나(이 시편은 이때쯤 쓰여졌을 것이다) 황량한 사막을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미로 속을 헤매듯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까지 순례자나 추방된 사람들처럼 집도 가정도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특별한 섭리를 통하여 여러 시대에 걸쳐 저들을 보호하시고 저들의 거처가 되어 주셨다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 저들이 이 세상의 일반적 평안을 박탈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은 더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특별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으로 공급해 주셨다는 뜻이다. 이 점을 올바로 상고하면, 인간의 일반적 필멸성이나 아니면 특별히 사랑하고 의지하던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완전히 낙심하거나 좌절에 빠진 사람들은 큰 기쁨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브래드쇼(William Bradshaw, 1621).
1절. "우리의 거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땅은 짐승의 거처로, 바다는 고기의 거처로, 공중은 새의 거처로, 하늘은 천사와 별들의 거처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이외에는 거처로 삼을 곳이 없다. -지오바니 델라 미란돌라 피코(Giovanni della Mirandola Pico, 1463-1494).
1, 2절. 신자들은 이 짧은 생의 비참함을 겪지 않는다. 이는 복되신 삼위일체께서 택함받은 자들을 위해 세우신 영원한 구속의 언약에 따른 것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마련된 그 언약에 의하면, 성육신하실 말씀께서 그 택함받은 자들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은 택함받은 백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는 말씀과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말씀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주님은 그의 백성을 향한 사랑과 목적에 있어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세주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는 면에 있어서도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실 것이다. -데이비드 딕슨.
1, 2절. 만약 인간이 하루살이와 같다면,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제임스 해밀턴.
1-6절.
주님, 당신은 우리의 집이시니, 우리가 당신께 날아갑니다. 당신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늘 계십니다. 언덕이 눈에 띄기도 전에, 땅이 그 모양을 이루기 전부터, 한 분 하나님 당신은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것입니다. 천 년도 당신에 비하면 단지 지나간 어제와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으니, 그 오고 감을 잠 자는 자들이 알지 못함 같습니다.
당신은 인간을 파도로 휩쓸어 가시며, 그 높은 인간의 생각을 다 몰아가십니다. 인생은 한낱 헛된 꿈같이 사라지고, 눈을 뜨면 곧 날아가 버립니다. 들판의 풀이 그러하듯이, 다시 올 여름까지 견디지 못합니다.
아침에는 들판을 푸르게 뒤덮다가 저녁에는 베어져 눕습니다. 설사 풀 베는 자가 호의를 베풀어 남겨 두더라도 날씨가 가만 두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우리 삶을 가느다란 실에 매다시고, 실이 우리 죄를 감당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알리시나이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2절. "땅과 세계." 여기서 "땅"이란 단어는 하늘(창 1:1)이나 바다(창 1:10)와 구별되는 세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원문에서 "세계"는 생물이 거하는 혹은 거할 수 있는 땅을 가리키는 데 보통 사용된다. -알버트 반스.
2절.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영원성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말씀일 뿐 아니라, 그의 섭리에 관한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섭리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이 영원토록 존재하심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영원히 통치하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 -존 칼빈.
2절. 말씀 한마디로 만물을 창조하시는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모시고 있으며, 이러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러한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온 세상이 분노한다 할지라도 떨 필요가 어디 있으랴! 그가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면, 하늘 나라에 이를 때까지 파선하지 않고 안전히 항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에게는 온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능력은 너무나 크셔서 그의 말씀만으로 우주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너무나 연약해서 일개 왕이나 심지어 이웃이 노를 발하기만 해도 심히 떨며 낙담하고 만다. 왕 되신 하나님과 비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입김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가벼운 먼지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기술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시험과 위험 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는 영혼은 이 말씀을 보고 위로를 얻어야 할 것이다. -마르틴 루터.
3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KJV에는 "티끌"이 "파멸"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선지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여긴다. 그는 흙을 모아 진흙을 만드시고, 이를 그릇 모양으로 빚으신 후 말리신다. 그러다가 1분이나 한 시간이 채 안 되어서, 이를 다시 조각조각 부수어 흙으로 되돌리신다. "너는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의 의미가 이것이다. 여기서 "티끌" 혹은 "파멸"로 번역된 단어는 어떤 물건을 깨고 갈고 두드려서 가루로 만드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선지자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 3장을 상기시켜 준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주님, 주님은 인간을 땅의 흙으로 지으시고 또 그를 다시 깨뜨리사 흙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주께서 말씀만으로 인간을 만드셨듯이, 말씀만으로 갑자기 저를 깨뜨리사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니, 마치 인간이 흙으로 어떤 물건을 지었다가 금새 뭉개뜨리는 경우와 같습니다······하나님은 말씀으로 일을 행하시는데, 그 누구도 이를 거역할 수 없다. 일단 말씀이 그의 입에서 나오면, 세상의 어떠한 음식이나 의술이나 간호나 기도도 그 생명을 구할 수 없다. 그리고 주님은 이 일을 눈깜짝할 사이에 갑자기 행하신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우리 삶을 사랑한다면, 그를 두려워해야 하며, 그를 분노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는 아무리 강한 사람도 말씀 한마디로 흙으로 되돌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윌리엄 브래드쇼.
3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본 절에는 "사람"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단어 "에노쉬"(vwna)는 가련하고 매우 나약한 불쌍한 인간을 나타낸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단어 "아담"(!da)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인간의 본질이 아담, 곧 흙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작은 진흙 덩어리이다. 인간은 깨어지고 부서지기 쉬울 뿐 아니라, 동시에 가련한 존재이다. 인간의 영혼은 붉은 흙으로 만들어진 푸석푸석한 거푸집 안에 잠시 동안 살다가, 그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흙에서 온 육체도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만약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입증해 줄 성경이 없다 할지라도, 매일 우리 눈 앞에서 일어나는 체험으로 볼 때, 모든 인간들은,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힘세고 가장 위대한 임금들조차도 붉은 흙에서 와서 금방 티끌로 돌아가는 가련한 인생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무엘 스미스(Samuel Smith, Moses his Prayer, 1656).
3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어거스틴은 우리 인간이 위험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고 말하였다. 만약 우리가 유리병이라면, 오히려 위험을 덜 느낄지도 모른다. 유리병보다 더 깨어지기 쉬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병은 잘만 보존하면 수백년 간 존속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리병보다 더 연약하고 깨어지기 쉽다. -르 블랑.
3절.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어떤 사람이 인생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 없는 대답을 하였다. 그는 금방 뒤로 돌아 그의 길을 갔던 것이다. -존 트랩.
4절.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억만장자에게는 일만금이 한푼 동전처럼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처럼 여겨진다. -요한 알브레히트 벵겔(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
4절. 성령께서는 무한히 긴 시간적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방식에 따라 우리 수용 능력에 맞는 비유를 사용하신다. 만약 천 년이 하나님 생애에서 하루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의 일 년은 인간 편에서 볼 때 36만 5천 년이 되며, 하나님의 70년은 인간 편에서 볼 때 2555만 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영원과 시간 사이에는 전혀 비례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너머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날과 연대는 다만 창조된 사물의 지속을 나타내는 단위로서, 해와 달 같은 천체의 움직임에 예속되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존재만을 측량할 뿐이다. -스티븐 차녹.
4절.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모세는 엄청난 축약을 통해 앞 구절의 내용을 보정한다. 그는 이르기를, 설사 인간의 생애가 매우 길어 천 년에 이른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미 지나간 하루에 불과할 뿐 아니라 하룻밤의 사분의 일에도 못미치는 기간이라고 역설한다. 예전에는 하룻밤을 네 등분하였는데, 각 부분은 세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밤"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삶이 많은 어두움과 실수와 위험과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차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몰레루스.
4절. "밤의 한 경점." 밤은 낮보다 더 짧아보이고, 더 빨리 지나가는듯이 보인다. 이는, 유티미우스(Euthymius)에 의하면, 사람들이 잠을 자느라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두움으로 인해 밤은 인식이 덜 된다. 그리고 시간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길어 보이고, 일을 마친 사람에게는 짧아 보인다. -로리누스.
4절. "밤의 한 경점." 존 샤르댕 경이 이 구절에 관해 언급한 말을 보면, 동방 사람들은 시계가 없기 때문에, 총 여덟 개로 나누어져 있는 밤과 낮의 각 경점을 특별한 신호로 사람들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인도의 대도시에서는, 밤의 각 경점을 여러 가지 악기로 알려준다. 밤 사경이 지나면, 야경꾼들은 고함과 작은 북을 치며 새날이 왔음을 알린다. 이제 그 소리를 듣고 잠을 깬 사람들에게는 밤의 각 경점들이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린 듯이 보인다. -Harmer's Observations.
4절. 여러 시대와 세대, 아담에게 주신 약속, 노아와의 언약,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 모세와의 언약, 이 모든 것들은 다만 경점들에 불과하다. 이것들을 통해 인간의 자녀들은 피조된 사물의 어두움 가운데서 내내 창조되지 않은 사물들의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 왔다. 이제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다"(롬 13:12). -A Plain Commentary.
5절.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제람탐"(!tmrz), 즉, "당신이 저들을 홍수지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홍수로 인간의 날들을 급히 쓸어 버리시고, 저들을 물처럼 흐르게 하시나니,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리이다." -Bythner's Lyre of David.
5절.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우리의 삶은 마치 급류처럼 지나가며 우리를 휩쓸고 내려간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은 마치 수영을 못하는 이가 커다란 강에 빠진 경우와 같다. 강에 휩쓸려 내려가는 동안 그는 가끔 머리를 내밀고 손을 흔들어 도움을 청하거나 이것 저것 잡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이요,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만다. 그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잠시뿐이다. 그를 몰아가는 홍수가 곧 그를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도 찬찬히 생각해 보면 격류에 휩쓸려 내려가는 사람의 생명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삶의 모든 행위와 움직임은 급류 속의 사람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병원에 다니고, 운동하는 모든 행위들이 마치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의 몸짓과 비슷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다 하고 나면, 우리는 이 홍수에 빠져 죽어야 한다. -윌리엄 브래드쇼.
5절.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헬라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다:"인간은 거품이다." 이와 같은 취지 아래 루키아누스(Lucian)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모든 세상은 폭풍이요, 인간은 여러 세대에 걸쳐 물거품처럼 일어난다. 이 가운데 일부는 태어나자마자 그 첫부모인 홍수 속으로 다시 가라앉아 물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들은 태어나서 죽는 것 이외에는 세상에서 아무 일도 못하고 가는 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물 위에 떠서 두세 바퀴 쯤 돌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물 위에 가장 오래 떠 있는 이들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움직이다가, 구름에서 큰 빗방울들이 떨어지면 마침내 거품은 터지고 물 속으로 사라진다. 그 변화는 별로 크지 않다. 거품이 예전의 본래 모습보다 더 큰 것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5절 상반절. 고대에는 짧은 시간 간격을 잴 때 병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헬라와 로마의 클렙시드라, 곧 물시계이다. 한편 오비디우스(Ovid)는 시간의 흐름을 강물의 흐름에 비유하였다. -스티븐 스트리트(Stephen Street).
5절.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잠 자면서 환상을 볼 때, 우리는 보지 않으면서도 보는 것 같고, 듣지 않아도 듣는 것 같으며, 만지거나 맛보지 않아도 만지거나 맛보는 것 같으며, 말하지 않아도 말하는 것 같고, 걷지 않아도 걷는 것 같다. 운동이나 몸짓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저들이 존재하는 양 마음이 헛되이 상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깨어 있는 자들의 상상도 꿈과 매우 비슷하다. 상상은 우리 마음에 왔다가는 사라진다. 언뜻 나타나는가 싶으면 곧 도망가 버린다. 우리가 잡기도 전에 저들은 사라지고 만다. -필로(Philo).
5절.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우리 인생은 네 가지 측면에서 잠에 비유할 수 있다. (1) 짧다는 면에서. (2) 깨어나기 쉽다는 면에서. (3) 이를 요동케 하고 불편케 하는 여러 수단이 있다는 면에서. (4) 그 가운데 많은 실수가 있다는 면에서. 처음 세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잠은 짧다. 그리고 잠이 달콤하면 할수록, 더 짧게 여겨진다. 그리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충분히 잠을 잔다 할지라도 잠 자체가 짧기 때문에, 아무리 곤한 잠도 곧 깨고 만다. 조그만 노크 소리와 나지막히 부르는 소리에도 잠은 깬다. 잠을 방해하고 사람을 깨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다. 사람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긴 삶도 짧기 그지없다. 삶의 내용이 충실하고 감미로울수록 인생은 더 짧지 않은가? 그리고 인생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가? 우리 삶을 끝내는 방법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방법만큼이나 많다. 이제 네번째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잠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는가? 감옥에 갇힌 자는 잠을 자면서 자유자가 되는 꿈을 여러 번 꾼다. 또 자유로운 사람이 감옥에 갇힌 꿈을 꾸기도 한다. 배고픈 사람이 배불리 먹는 꿈을 꾸기도 한다. 궁핍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고, 부자가 가난뱅이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한다. 수많은 경우에, 잠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늘 되고자 하던 자가 되기도 하고, 갖고자 하던 바를 얻기도 한다. 그래서 막 그 즐거움을 누리려는 순간, 혹은 그 즐거움의 한가운데서, 홀연히 잠이 깨고 만다. 그러면 모든 황금빛 환상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슬픔과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삶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윌리엄 브래드쇼.
5절. "저희는······풀 같으니이다." 이 마지막 비유에서, 선지자는 인간을 풀에 견주고 있다. 풀은 자라는 때와 시드는 때가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여기서 모세는 아침을 인생의 전반기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서른 세살 이전까지는 풀이 자라는 시기에 해당되는데, 사람의 힘과 연륜이 점점 자라 최고조에 달하는 기간이다. 자연적 과정에 따르면, 이 나이 즈음에 사람은 풀이 자라듯 융성해진다. 이 때는 인간의 가장 으뜸되고 번성하는 자산을 갖는 시기이다. 그러나 "저녁에는," 즉 다 자라 베일 때가 되면 풀은 "말라버린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힘이 왕성하고 번성하지만 그 시기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인간은 금방 쇠퇴하여 마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노년이 되면 그는 죽음의 낫에 잘리고 만다. 이제 모세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지를 보이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들을 사용하는데, 인생의 연약함과 헛됨과 짧음은 너무나 심해서 그 비유들을 통해서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죽음은 "홍수"처럼 격렬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우리는 잠과 같으며 풀과 같다. 우리의 삶은 꿈과 같으며, 우리가 사는 날은 이야기꾼의 이야기 같다(9절). 이 시편에서 그 많은 비유를 사용하면서도, 모세는 인생의 헛됨과 연약함과 단촉함을 나타내기에는 그 단어와 예들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사무엘 스미스.
6절. "아침에." 이 구절은 일부 랍비들이 설명하듯이 "어린 시절에"를 의미할 수는 없다. 엄격히 말해서, 이 말은 비유의 일부이다("저희는······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비유를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말이다. 동방에서는 하룻밤의 비가 마치 마술과 같은 변화를 일으킨다. 저녁에는 들판이 누렇게 타고 사막처럼 건조해진다. 아침에는 풀잎이 파릇파릇하게 서다가, 낮에 타는 듯한 열풍이 그 위에 불면(약 1:11) 저녁이 오기 전에 다시 시들어버린다. -퍼론.
6절. "벤 바 되어."
오늘은 당당하고 강하지만, 내일은 진흙으로 변하리.
오늘은 꽃 안에 있지만 내일은 무덤 안에 있으리.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미리 회색의 전령을 보내 그가 다가올 것을 때맞춰 경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는 예고 없이 다가와 낫을 높이 쳐들고는 교만한 인생을 내리친다. 배의 갑판에서 널빤대 하나만 건너면(해적이 포로를 죽일 때 쓰는 방식-역자 주) 우리는 죽음과 만나게 된다. 말등에서는 한 번만 떨어져도 죽는다. 우리가 길을 걸을 때, 죽음은 지붕의 각 기와장에서부터 그 무서운 손가락을 펼치고 달려든다. "대저 사망이 우리 창문에 올라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와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렘 9:21). 우리의 삶은 한 뼘보다도 짧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무덤에 미끌어져 들어가는가! -톨룩.
7절.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이는 철학자들이 많이 논의하는 문제점이다. 그들은 죽음의 원인을 찾고 있다. 자연내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불멸성의 증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이에 대해 답하기를, 죽음의 주된 원인은 체액의 결함이나 자연적 열의 부족 등 물질적인 측면에서 찾으면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죄로 인해 진노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음을 비롯한 각종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이런 파멸을 가져오는 일차적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당신의 진노 안에서 우리가 사라지나이다." -몰레루스.
7절.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여기서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점을 살펴봐야 한다. 즉, 광야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네 처지와 다른 나라 및 다른 민족의 처지를 비교할 때 자기네 처지가 저들보다 훨씬 더 나쁨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다른 민족은 이따금씩 하나 둘 죽어 점차 쇠퇴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창궐하는 역병과 괴질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죽어가 그야말로 빠르게 소멸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네 처지가 대적들의 처지보다 나쁘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수치스런 일이었다. 모세는 이런 사실을 통해 저들을 겸손케 하고 회개시켜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대적들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삶이 매우 짧지만, 설상가상으로 이교도들보다도 더 상황이 나쁘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의 노에 갑자기 소멸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수들보다 자기 교회를 더 심하게 대하실 때, 예컨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나라에는 전쟁을 보내시고 반기독교 국가에는 평화를 보내실 때, 그의 교회에는 기근을 보내시고 대적에게는 풍요를 보내실 때, 그의 교회에는 역병과 질고를 보내시고 악한 자들에게는 건강과 번영을 보내실 때, 이는 그야말로 굴욕적이고 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대적들이 교회보다 더 나은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은 각성하지 않을 수 없고 마음 깊이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다. -사무엘 스미스.
7절. "주의 분 내심에 놀라나이다." 여기서 모세가 사용하는 단어는 단순히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강력한 어감을 갖는다. 이는 완전히 잘리고 파괴되는 것을 암시하는 말로서, 압도적 공포를 나타낸다. -헨리 카울스(Henry Cowles, The Psalms; with Notes ).
8절.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분별하시기 위해 그의 얼굴빛을 사용하시며, 그 외의 빛은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 빛은 가장 깊은 장소에까지도 깊숙이 침투한다. 그 빛은 만물을 다 밝히며 감추인 것을 다 드러낸다. 그러므로 아무리 깊은 어두움 속에서 저질러진 범죄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대낮에 저질러진 일처럼 다 환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짓기를 심히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그를 보지 못하지만 그는 우리를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두움 속에 숨었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의 얼굴빛은 우리를 비추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저지르는 순간에도 우리를 보고 계시지만, 그 행위가 끝나고 거의 잊혀진 후에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를 기억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죄 짓기를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의 죄는 범해질 당시에 주님의 눈에 뜨일 뿐 아니라, 지나간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놓여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 죄악으로 인해 심히 마음 상하고 아파하셔서 특별한 방식으로 이를 계속 기억하신다는 뜻이다. 매우 잘못된 일을 당한 사람은 이를 마음에 담고 기록하여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심히 마음 상해 하신다는 표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죽음이나 질병, 혹은 친구들의 외면 등의 심판을 통해 분노를 나타내실 때, 우리는 이를 깊이 숙고해 봐야 한다. 특별히 주님이 우리 가까이 오셔서 우리 죄를 그 앞에 놓고 보실 때, 우리는 회개를 통해 그 죄를 없애주시도록 주님께 간구하기 전까지는 결코 쉼을 얻을 수 없다. 실로,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 죄를 다 기억해 내야 한다. 우리가 죄를 기억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이를 잊어버리신다. 우리가 죄를 잊어버리면 잊어버릴수록, 하나님은 이를 더 기억하신다. 우리가 죄를 더 목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 거기서 눈을 돌리신다. -윌리엄 브래드쇼.
8절. 우리가 잘 알다시피, 물체의 모양이나 이것들을 통해 얻는 생각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비치는 빛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멀리 있는 물체들은 실제 크기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같은 물체라도 어떤 매체를 통해 보느냐에 따라 종종 모양이 달라진다. 촛불이나 별빛은 태양이 없을 때는 밝아 보인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면, 저들의 밝음은 완전히 무색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사물에 관해 갖고 있는 생각도 외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두 사람이 동일한 빛 가운데서 보거나 아니면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그들이 하나의 사물에 대해 완전히 똑같은 견해를 갖기는 무척 어렵다. 이 사실을 우리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탄식한다:"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즉, 우리의 공공연한 불법과 범죄, 또 우리의 비밀스런 죄와 마음의 악들이 하나님 면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채 놓여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를 직접 그의 거룩하심과 영광의 순수하고 맑은 빛을 통해 들여다 보신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죄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려면 우리의 눈으로 이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우리 죄의 모든 수효와 어두움과 잔혹성과 완악함과 참담함을 제대로 알려면, 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의 눈으로 봐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죄를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치는 범주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주님의 모든 무한하신 완전성이 명백히 드러나고, 그의 엄하신 위엄이 나타나며, 그의 집중적인 영광이 불타면서 말할 수 없이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생각부터 우리의 어둡고 죄악된 세상을 떠나야 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거의 잊혀져 볼 수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거역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이 거하는 하늘까지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을 그의 행위나 이차적 원인의 베일에 감추지 아니하시고, 순전한 얼굴빛을 보이시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독자들이여, 그대의 죄를 원래 색깔 그대로 보고 싶은가? 그 수효를 온전히 헤아리고, 그 크기와 잔혹함을 올바로 깨닫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들을 거룩한 장소로 들고 오라. 그곳에는 흠 없는 성결의 밝은 빛과 창조되지 않은 영광의 광채만이 존재한다. 거기서는 태양도 어두운 점처럼 보일 것이다. 거기서, 곧 지고한 지성의 영역 안에서, 그 얼굴빛을 그대 주변에 퍼부으시는 무한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그대의 삶을 회상해 보고, 그대의 범과를 묵상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보일는지 생각해 보라. 그대 앞에 계신 하나님은 죄를 용납치 않으시는 분이요, 영원한 법을 주신 분이시다. 그대는 이 분에 대해 죄를 지은 것이다. -에드워드 페이슨(Edward Payson).
9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파누", '뒤로 물러나다)." 지금까지 모세는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만든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이제 본 절에서는 그 결과에 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우선, 우리의 날이 그분의 분노 안에서 그야말로 뒤로 물러나 버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가도록 생명을 주셨지만, 우리는 뒤로 물러나는, 다시 말하면 죽음과 무로 뒷걸음질치는 존재에 불과하다. 마치 나그네가 도중에 갑자기 붙들려 평안이 기다리는 집으로 다시 옮겨지는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 왔던 곳으로 다시 뒷걸음질하며 모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모든 아담의 자손들은, 그들이 존재하여 살게 되자마자, 먼 길을 옮겨오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며 오래오래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처음부터 죽음과 무를 향해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시편의 서두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요지이다:"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3절). 모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즉, 주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는데, 만드시자마자 인간이 주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바람에 인간을 다시 파괴하사 못쓰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날은 뒤로 물러서고, 우리는 우리가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윌리엄 브래드쇼.
9절. 나는 삼사 년 전에 이집트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모세 자신이 보았고 또 이스라엘 자손들도 틀림없이 보았을 광경을 목격하였다. 즉, 군중들이 전문적인 이야기꾼 주위에 둘러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 가면서 청중들의 정신을 홀딱 빼앗곤 하였다. 이것은 동방의 풍습 가운데 하나이다. 이 풍습은 책이 거의 없는 백성들 가운데 자연스럽게 싹이 텄다. 설사 책이 있어도 글을 읽을 수 없는 군중들은 전통적 설화나 대중적 전설들을 운문조나 산문조로 읊어주는 사람들을 통해 흥미로운 정보와 지식을 얻곤 하였다. 내가 장담하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머뭇거릴 동안 이런 이야기꾼들이 많이 나와서 백성들의 무료함을 달래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 관습에 의거하여 우리는 다음의 본문 말씀을 설명할 수 있다:"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혹은 "우리의 연한이 들은 이야기같이 지나가나이다." 이야기를 듣노라면 흥미로운 느낌이 금방 일어났다가는 빨리 사라진다. 이야기는 희미한 인상을 남기는데, 후에 이를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머리에 뚜렷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요즘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책자에 인쇄되어 담겨진다. 어떤 이야기는 서너 권의 책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 책을 다 읽고나서 돌이켜 보면, 그 이야기가 너무 짧아 보이고 이를 읽는 데 걸린 시간도 너무 짧아 보인다. 만약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라면, 때때로 이를 기억하는 데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식의 말로 마무리를 짓곤 한다:'모든 일이 그렇게 끝났어.' 그런데 '들은' 이야기인 경우에는 이런 느낌이 더 심하다. 이야기는 단 한번만 들려지며, 하루 저녁에 혹은 한 시간에 서너 개의 이야기가 들려질 수도 있다. 이야기가 끝나면, 그 이야기가 너무나 짧고 그 듣는 시간도 너무 짧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깨닫는 순간, 놀라움과 아쉬움 같은 것이 생긴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토머스 빈니(Thomas Binney).
9절. "일식간에." (KJV에는 "일식간에"가 "이야기같이"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야기의 특징은 짧다는 데 있다. -존 트랩.
9절.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갈대아 역본에서는 이렇게 번역한다:"겨울날의 우리 입김처럼." -다니엘 크레스웰.
9절.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 가운데 38년의 기간은 거룩한 역사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출애굽 후 2년째 되는 해부터 40년째 되는 해까지 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간은 완전히 허송되어, 역사가 되지 못하고 다만 '이야기' 정도의 가치만 갖게 되었다. 이야기는 그저 소일거리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처음 세대가 다 소멸되고 다음 세대가 자라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우리의 날을 보내는 것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과거의 해는 이미 말해진 이야기와 같다. 우리 날의 일부는 즐거운 이야기요, 일부는 슬픈 이야기이다. 대부분은 희비가 섞여 있지만, 짧고 덧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긴 시간 동안에 행해진 일도 짧은 시간에 이야기될 수 있다. -매튜 헨리.
9절.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KJV에는 "우리의 연한이 들은 이야기같이 지나가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혹은 "묵상처럼"(어떤 이들은 이렇게 번역한다) 빠르고 순식간에 지나가나이다. 이야기는 입에서 나오든 마음에서 나오든 빨리 사라진다. 그 가운데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더 재빨리 가버린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은 태양보다 훨씬 더 빠르다. 우리의 생각에 비하면 태양은 달팽이만큼이나 느리다. 인간의 생각은 일순간에 온 세계를 일주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생각으로는 순식간에 세상 끝까지 갔다 올 수 있다. -조셉 캐릴.
9절.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이 말은 필연적 사실과 탄식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연한의 빠른 소멸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그 기간을 별 가치 없이 사소한 일에 소모해 버린다면 아쉽기 그지없다. 이를 생각할 때마다 죄의식과 자책감으로 가득차게 된다. -존 포스터(John Foster, 1768-1843).
9절. "일식간에." (KJV에는 "이야기같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히브리어로 이는 "케모 헤게"(hghAwmk, 묵상처럼)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해는 마치 이 세상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인간의 많은 시간은 이런 종류의 헛된 묵상으로 소비된다. 어떻게 하면 남을 속이고, 어떻게 하면 빨리 혹은 느리게 굴어서 이득을 챙길까? 이사야 59:13에 있는 대로 죄악을 꾸미고, 마음으로 거짓말을 생각하며, 누가복음 12:17에 나오는 탐욕스런 사람처럼 재물 쌓을 생각만 한다. 또 시편 2:1-3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의 법과 거룩한 계율을 범할 생각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