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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고개-(0.8km)-중계탑/365.9봉-(1.95km)-248봉만남의광장-(1.35km)-611봉/불웅령-(1.3km)-백양산641.5봉-(0.2km)-애진봉-(4.1km)-삼각봉-개화초등학교-(0.2km)-개금고개-(2.4km)-엄광산/503.9봉-(1.6km)-구덕령/꽃마을 |
8. 산행 일정
[1] 산행지 이동
기상(05:00) ∼ 아침식사(05:40/06:10) ∼ 만덕고개(06:35)
[2] 산행코스 및 시간
만덕고개(06:44)→산불초소,전망대(07:51)→만남의광장(07:11)→불웅령(08:08/08:17)→백양산(08:36/08:47)→삼각봉(09:19/09:31)→갓봉(09:50)→286.8m철탑봉(10:03)→개금고개(개금역,10:43)→백병원(10:54/11:40)→엄광산(12:36/12:51)→구덕령/꽃마을(13:08) ※ 산악대장 제공 자료 |
[3] 산행 후
구덕령(15:00) ∼ 만덕고개(차량회수) ∼ 만덕터널 ∼ 대구부산, 경부고속 ∼ 동수원(19:30)
9. 탈출로 및 편의사항
○ 신라해장국(055-388-3878)
○ 부산콜택시(051-200-2000)
○ 동부식육식당(돼지국밥, 055-352-0023)
○ 행랑채(055-352-8927)
○ 밀양콩나물해장국집(055-356-3604)
10. 산 행 기
[1] 산행 전
어제 산행 뒤풀이가 다소 진했던 모양이다. TV소리가 귓전에 들리는데도 눈이 좀처럼 떠지지를 않는다. 겨우 눈을 떠보니 대장은 배낭을 챙겨 식당으로 갔고 박사장도 출발 준비를 다 해놓고 있다. 급한 마음에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어제 입었던 옷이며 오늘 산행에 쓰지 않을 물건은 모두 보조 가방에 넣고 모델 근처에 있는 식당(가정식 백반 집)으로 갔다. 입안이 깔깔하여 밥맛이 없었지만 산행을 생각하여 억지로 밥 한 공기를 비우고 밖으로 나와 보조 가방을 대장 차에 두고 배낭만 챙겨 대기하고 있는 차(짐엔콜)에 올라『만덕고개』로 출발을 했다.
[2] 만덕고개 전망대
06 : 40분경, 굽이진 만덕 고개 길을 돌고 돌아 만덕고개에 도착, 스틱을 조절하고 배낭을 다시 한 번 점검한 후 가파른 계단을 약 7, 8분 힘겹게 올랐다. 산불 감시 초소와 북부전력 송신소(KBS만덕 TVR 중계소), 망원경이 설치되어있는 전망대가 있는 峰(쇠미산 초입)에 올랐다. 산 아래로 市街地가 한 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3] 쇠미산과 한국산개구리 보호지역
송신소를 지나 우측으로 내려서니 南平文公 묘가 나오고 넓은 등산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여 송림 숲을 이룬 안부에 도착을 했다. 이곳은 『쇠미산』중턱쯤 되는 곳이다.
『쇠미산』은 부산진구 초읍동과 동래구 사직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일명 『새미산』 또는 『쇠미산(釗尾山), 금용산(金湧山)』이라고 하며, 한자식 지명으로 이 산에 쇳물이 많이 나왔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산 정상 바로 밑에는 80여평 규모의 덕석바위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임진왜란 당시 여인들이 피난해서 軍布를 짜서 전장에 나가있는 낭군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배틀굴"이 있다.
<출처>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111319
쇠미산은 1944년에 미군들이 일본군의 군사기지로 착각하고 폭격을 하는 바람에 민둥산이 되었는데 사직동 주민들이 부지런히 나무를 심어 오늘날에는 나무가 우거져 송림공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화전민들의 도가리논(지극히 작은 크기의 논)이었는데 지금은 습지로 변해 다양한 식물과 「韓國 山 개구리(=아무르산 개구리)」가 번식을 하는 곳이라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 아무르 산개구리서식지를 아시나요.
부산 동래구 사직2동 산 7의 1, 산 91의 6 일원 쇠미산 중턱 습지. 이곳은 '아무르 산 개구리 생태' 현장이다.
11월 중순을 넘어 초겨울 태양을 바라보며 초읍동에 위치한 어린이대공원으로 진입하여 백양산 서북쪽 만남의 광장길을 택해 10여 분 올라가면 삼단같은 삼나무가 빼곡히 하늘을 가리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조금 오르면 동서남북 네 갈레 길이 나온다. 여기서 남쪽으로 오르면 백양산 정상이요, 바로 넘으면 신만덕이다. 동북쪽으로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다리도 뻐근하고 숨 쉬기도 제법 힘들다.
이 길을 따라가면 쇠미산을 거쳐 만덕터널 위를 지나고 산성마을을 좌측에 두고 동문을 거쳐 금정산 정상 고당봉이 나온다. 아무르 산개구리서식지는 바로 쇠미산(408m) 중턱 구릉습지이다. 아무르 산개구리는 진한 갈색이고, 2~4Cm의 크기로 뒷다리에는 흑색 띠 모양의 무늬가 가늘게 여러 개가 있는데 넓적다리에는 7~8줄, 정강이에는 6~8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고막에서 코밑까지 검은 줄이 있으며 항문까지 나란히 뻗어 있다.자세히 보지 않으면 산개구리로 착각할 수 있으나 크기가 작고 몸이 날씬하여 금방 아무르 산개구리로 알아볼 수 있다. 생태는 우리나라 양서류 중 번식기가 가장 빨라 2월 하순부터 물 고인 논이나 구릉습지에서 알을 낳은 후 서식지로 떠난다.
아무르는 러시아에 있는 지역명이며 아무르 산개구리는 1887년 러시아 아무르지방에서 처음 채집 하였고 한국 서식 사실은 1928년 일본 오카다가 확인했다. 이곳 쇠미산 일대에 서식이 확인된 것은 2000년 3월이다.아무르 산개구리는 한국의 고유 아종이자 감소 추세 종으로 학술상 귀중한 자료이며 보호가치가 매우 큰 것이다. 수명은 약 3년.쇠미산 혹은 새미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한자식 지명이며 이산에 쇳물이 많이 나온 데서 이름지어 졌다. 금정산의 연맥이 남쪽으로 단층곡이 되어 동으로는 화지산, 서로는 백양산으로 이어지는데 지금은 금용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상 바로 아래 넓이가 80여 평이나 되는 특이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덕석(멍석) 바위라고 한다.
쇠미산에는 전장에 나간 남자들의 군포를 짰다는 배틀 굴이 있고 아무르 산개구리서식지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등산로는 그리 어렵지 않은 코스로, 주말 가족과 도시락을 준비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의 아무르 산개구리의 생태도 살펴보고 주위 경관을 둘러보면 좋은 산 학습이 될 것이다.
<출처> 국제신문(2006.11.17 기사)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code=8800&gbn=v&key=20061117.88001080644
[4] 만남의 광장
안부를 뒤로하고 넓은 길을 따라 여유를 부리며 진행, 금정봉 분기봉과 산불감시 초소가 있는 284m봉을 지나 송림 숲을 이룬 안부4거리에 도착을 했다. 돌담(성곽?)이 있고 이정표(백양산3.0km), 벤치 등을 설치 해 놓았다.『만남의 광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만덕고개를 출발(06 : 45분경)하여 쉼 없이 걸은 터라 다리도 뻐근하고 宿醉로 갈증이 나서 의자에 배낭을 내리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한다. 늘 그렇듯 잠시 쉰다 싶으면 출발(07 : 12분경)이다.
[5] 부태고개 (佛態嶺)
『만남의 광장』을 뒤로하고 숨을 몰아쉬며 된 비알 바위지대를 빡시게 올랐다. 정상에는 산불 감시초소와 이정표(백양산1.6km, 만덕고개3.3km)가 있고 돌탑도 쌓아 놓았다. 땀을 뻘뻘 흘린 보답인가? 동으로는 부산시내, 남으로는 부산앞 바다, 서쪽에는 낙동강, 북으로는 어제 지나온 금정산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생각 같으면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조망을 즐기고 싶었지만 더 높은 봉에 또 하나의 돌탑이 있어 쉼 없이 오르기를 7, 8분. 「嶺」자만 남겨진 깨진 정상석을 돌탑위에 올려놓은 峰에 도착 했다. 지도에 돌탑, 611봉, 『불웅령(佛熊嶺)』이라 표시되어 있다. 누군가「嶺」자만 남기고「佛熊」응 깨뜨려 없애 버린 모양이다. 참 고약한 사람도 다 있다 생각하고 611봉의 돌탑을 한바퀴 돌아 삼거리에서 좌측 내림 길로 들어섰다.
산행 후 인터넷에서 『불웅령(佛熊嶺)』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니 『佛態嶺』의「態」를「熊」으로 잘못 읽어『불웅령(佛熊嶺)』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釜山市史에도 “『불태령(佛態嶺)』은 해발 284m로 상계봉과 백양산에 있는 고개다. 만덕고개에서 남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하며 북서쪽은 북구의 구포동, 만덕동, 덕천동으로 이어지고 남동쪽은 성지곡과 통한다. 이 고개는 옛날 서면 방면에서 구포 방면의 덕천동이나 만덕동으로 넘어가던 통로로, 만덕동이 동래군 서면에 속했을 때는 치소와의 왕래가 잦았던 고개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등산로로 이용될 뿐이다.”
<출처> 부산광역시 홈 / 부산의 역사 / 향토사 도서관 / 부산시사
http://tour.busan.go.kr/kor/cyberart/CyberartAction.do?cmd=LibraryMgr
그리고 위치 표시도 혼돈스러운데 『만남의 광장』직전의 4거리 이정표에는 누군가 매직으로 『불태령』라 써 놓았고 이곳 돌탑에는「嶺」자만 남은 표지석이 있고 삼거리 이정표(백양산1.30km, 만남의 숲1.35km, 주지봉) 기둥에는「불응령」이라는 글자가 지워져 있는데 이 역시 혼란스럽다. 釜山市史와 다음 글로 미루어 보면 명칭은『불웅령(佛熊嶺)』이 아니라 『불태령(佛態嶺』이고 위치는『만남의 광장』직전의 4거리가 아닌가 싶다.
[참고자료] 부태고개 (佛態嶺)
조선시대 행정구역이 서면(西面)에 속했던 만덕리에서 서면 면사무소나 부산진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초읍 성지곡 쪽으로 넘어가야 했는데 이 고개가 바로 불태령(佛態嶺)이다. 지도의 기록에 나오는 불태령을 만덕 주민들은 「부태고개」라 불렀다. 만덕 중리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부태고갯길을 오르면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배가 불룩한 봉우리를 넘게 된다. 이 봉우리가 함박봉이다. 그래서 부태고개를 함박고개라고 부르기도 했다.일제강점기에는 초읍 성지곡의 계곡물과 조림된 나무를 베어가지 못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입산금지령을 내리고 산지기를 배치하여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만덕사람들은 사직동 뒷산인 금용산, 일명 쇠미산 쪽으로 둘러서 부산으로 나들이를 하였다. 그때 생겨난 이름이 쇠미고개이다.
불태령은 과거 구포읍 지도에 나오는 고개로서 만덕에서 초읍 성지곡 쪽으로 넘던 고개임에 틀림없으며 지명의 유래도 옛날 성지곡 골짜기를 명당으로 판정한 성지도사가 이곳 고개에 올라서서 만덕사가 있던 곳을 쳐다보면서 부처님(佛) 모습(姿態)이 보인다고 불태령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동네사람들은 불(佛)을 부처님으로부르듯 불태고개를 부태고개로 불러온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이 곳 고개에서 백양산 쪽 가파른 오르막 길을 올라서 만나게 되는 611m 봉우리를 불태령이라고 잘못 지적해놓는 사례들이 있다. 언론의 산행안내도에도 고개가 아닌 봉우리에다 고개 이름을 붙여놓고 있다. 그것도 불태령(佛態嶺)이 아닌 불웅령(佛熊嶺)으로 표시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태(態)와 닮은 웅(熊)을 잘못 표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면 불태령, 즉 부태고개는 어디를 말하는가. 만덕3단지에서 함박봉을 거쳐 초읍 성지곡 쪽으로 넘어 가는 곳에 만남의 광장이라고 지칭하는 이곳이 바로 해발 284m의 불태령 고갯마루인 것이다. 하루속히 잘못된 산행안 내판과 신문사의 산행안내지도를 고쳐야 할 것이다. <퍼온 글>
[6] 백양산(白楊山)
611봉 내림 길로 들어서서 전면을 바라보니 수목이 없는 산 능선을 따라 넓은 길이 뻗어 있고 능선의 끝 지점에 제법 높은 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오늘 산행 구간의 白眉라 할 수 있는 『백양산』인 모양 이다.
611봉 돌탑을 뒤로한지 10여분, 넓은 공터를 이룬 안부를 지나 백양산을 오르기 위해 다리에 힘을 불끈 줘 본다. 완만한 능선 오름 길을 따라 오르기를 12,3분, 돌탑과 통신시설, 그리고 이정표가 있는 정상에 도착을 했다.『백양산(641.5m)』정상이다. 돌탑 상단부에 정상석을 세워 놓은 것이 특이하고 조망 또한 일품으로 부산 시내의 모습이 통째로 눈에 들어오고 김해의 넓은 평야가 막힘없이 펼쳐져 가슴이 뻥 뚫린다.
『백양산(白楊山)』은 해발 641m로 부산의 도심 중심부인 부산진구와 북구, 사상구의 경계부분에 솟아있는 산이다. 이 산은 북쪽으로는 금정산과 이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실낱같은 능선이 주례에서 숨을 죽이며 엄광산으로 맥을 이어가는 낙동정맥 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부산사람들에게 심장과 같은 중요한 산이다.
『백양산(白楊山)』이란 명칭은 버드나무 일종인 백양(白楊·사시나무)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백양산은 주변 고을에 따라 산의 이름을 달리하여 각각 불리웠다. 즉, 남쪽은 당감동 뒷산의 천년고찰 선암사에 의해 「선암산」으로 불렸고, 그 반대편 서쪽에서는 모라 운수사의 이름을 본따 「운수산(雲水山)」으로 명명됐다.
조선시대 「좌수영지(左水營誌) 병고조(兵庫條)」에는 운수산을 봉산(封山)으로 정해 놓고 수군의 병선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나무를 반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만큼 당시 백양산에는 수목이 울창했음을 살펴보게 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1740년에 작성된 동래부지에는 백양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백양사라는 사찰 이름이 나오는데 “백양사는 금용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양산은 이후 금용산에서 분리되면서 불리워진 이름으로 백양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백양산은 구포의 주산인 주지봉(蛛蜘峰/일명 낙타봉)과 이어진다. 산 정상이 마치 거미가 웅크린 모습의 암봉이 연이어 솟아 있어 낙타봉으로도 불리며, 이 길은 백양산에서는 가장 옹골찬 산길로 시랑골과 음정골이 흘러내린다. 시랑골 골짜기에는 차디찬 샘터가 있어 찾는 이가 많이 있다.
초읍의 성지곡 수원지에는 어린이 대공원이 있으며 이는 1909년에 축조된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수원지이다. 주변에는 일제시대 때부터 조림한 편백나무가 장관으로 삼림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백양산 정상일대의 분지에서 화랑도가 훈련을 했고 선암사의 유래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백양산 산행은 일반적으로 초읍 어린이대공원 정문 앞에서 시작하여 성지곡 수원지 위의 만남의 광장→불태령→백양산→애진봉→삼각산→주례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이용되며, 산행시간은 약 5시간이 소요된다.
대체적으로 백양산은 부산도심의 산답게 다양한 등산로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개인의 능력에 맞는 산행을 할 수가 있다.
출처 :<출처> 한국철도연구회 산길나그네 사랑방
http://cafe.daum.net/psg7788/
[7] 愛鎭峰
『백양산』정상에서 눈이 시리도록 眺望을 하고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넓은 헬기장이 나오고 헬기장 끝머리에 『愛鎭峰』표지석을 세워 놓았는데 표지석 뒷면에
「보라 발아래 펼쳐진 눈부신 우리의 삶터
자랑스런 내사랑 부산진
칠 백리 낙동강의 도도함과
짙푸른 태평양의 망망함을
백양, 황령, 엄광의 명산에 천년세월 보듬고
우리여기 두 손 모아 뜨겁게 갈구하나니
하늘과 땅에 가득한 천지신명의 은총이
천세만대 이어져 자자손손 풍요로운 영광을 누리며
늘 따뜻한 이웃으로 모여 더 큰 축복 받게 하소서
1998년 1월 1일 세움.」라고 「釜山鎭을 사랑한다.」는 시 한 수를 새겨 놓았다.
[8] 유두봉과 삼각봉
(1) 유두봉
『愛鎭峰』표지석을 뒤로하고 이정표를 세워 놓은 4거리 안부를 지나 작은 봉에 올랐다.
「낙동정맥 / 유두봉 / 589.1m」라 새긴 표지석을 세워놓았는데 표지석 뒷면에 「사단법인 대한산악연맹 부산광역시 연맹 / 산용산악회」라 되어 있고 기단에 건립 연월일(2009. 7. 26)이 새겨져 있다.
(2) 삼각봉
『유두봉』표지석을 확인하고 쉼 없이 진행, 돌탑봉, 철탑(7번)을 지나 약 2분여를 더 가니 바위지대를 이룬 곳에 사상산악회에서 세운『삼각봉(454m)』정상석이 나온다. 휴식을 취하며 주변 경관을 살펴보니 이곳 역시 조망이 빼어난 곳으로 김해평야와 공항 활주로, 그리고 S자 형태의 건물 두개가 포개진 신라대학도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 산행은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 넉넉한 휴식을 가진 후 바위지대를 조심을 하며 내려오니 이정표가 세우져 있는데 「주례2동 / 백양산2.2km / 주례1동」이라고 방향 표시와 백양산까지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3) 부산 사상구 주례동
부산 사상구의 지명 유래에 따르면 「주례동」은 예로부터 아래쪽 큰 동네인 주례본동과 고갯길 쪽의 작은 동네인 냉정마을로 형성되어 왔다.조선시대 기록으로 1740년에 편찬한 동래부지에는 사천면 상단 주례리로 나와있고 1872년 제작한 경상도 지도에는 사상면 주례촌과 냉정촌이 나와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제방을 쌓았던 기록에는 주례의 하천인 동천과 남천, 그리고 사목포 나루터가 기재되어 있다.주례의 본 동네 앞에 물길이 합쳐지는 곳을 <냇바닥>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강물이 들어와서 나루터가 있었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솔밭이라고 했으며, 주례마을의 중심지는 <골새>였고 <동녘>에도 인가가 있었다. 주례동에서 널리 알려진 곳은 고갯길 중턱에 있던 <냉정>의 약수였다.1714년에 편찬된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조선 13도의 물 중에서 이름난 약수로서 냉정의 물을 꼽고 있다. 주례동 지명의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사상지역에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주례는 옛날 한 마을의 농사를 동네사람들이 힘을 합쳐 농악을 울리면서 일을 해내었던 공동체로서의 <두레>를 한자로 표기하여 <주례>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주례가 지형적인 동평현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는 곳으로서 <두루>라는 어원과 낙동강변의 변두리로서 <두리>와 동평현에서 주례로 나와야 앞이 트인 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드르>를 들고 있는데 우리의 토속어인 <두레, 두루, 두리, 드르>등에서 주례가 되었다는 풀이를 하고 있다. 주례동은 이처럼 낙동강변에서 동평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요지였기 때문에 냉정 산 위쪽으로 있던 성터는 학장동의 학성과 연결된 목장성인데 방어성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성터는 해방이후까지 학장동에서 냉정, 개금을 거쳐 가야공원까지 남아 있었는데 6·25때 미군이 하야리아 부대를 조성하면서 성벽의 돌을 옮겨가 버려 성터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이 성터로 난 길을 따라 가야, 개금, 주례사람들이 냉정 뒤쪽 호랑이굴이 있었다는 오지봉의 구덕재를 넘어 대신동으로 내왕했다. 그런데 주례에 있던 사목포나루터는 가축을 취급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으로서 목장과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주례동의 산기슭에는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고 그 철로를 따라 구도로가 있었는데 냉정 고갯길 쪽으로 새도로가 나면서 지난날 부산에서 서부 경남으로 나아가는 국도가 되었던 것이다. 옛 성터가 있던 산중턱에는 현재 동서대학교와 경남정보대학이 들어서서 대학촌을 이루고 있다.
<출처> 사상구 지명 유래
[9] 갓봉
이정표를 세워 놓은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진행, 참호가 있는 능선을 지나 암봉에 도착을 했다. 『갓봉(405.6m)』이다. 巖峰이 갓처럼 뾰족하게 생겨 붙여진 이름인 모양이다.
[10] 개금고개
『갓봉』에서 좌측 급 내림 길을 약 8분여 내려와 산불 감시 초소와 넓은 안부를 지나 직진하여 오르니 헬기장이 나온다.
윤사장과 뒤 처져 잠시 휴식을 갖고 우측으로 진행, 앞서간 대원들을 따라 잡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12번 철탑이 있는 『286.8봉』에서 우측으로 난 희미한 길을 따라 내려가 넓은 임도를 가로질러 참호를 지나니 14번 철탑이 나온다. 잠시 후 또 하나의 철탑(15번)을 통과하니 바위 지대가 나오고 LG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개금고개』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바위지대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밭 사이에 있는 16번 철탑을 지나 텃밭을 조성해 놓은 곳을 통과하여 시멘트 급 내림 길로 들어서서 약 10여 m를 내려가 철문 돌아 나가니「개화초등학교」정문이다.
「개화초등학교」정문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 LG아파트 입구, 개금3동 주민센터와 지구대를 지나 큰길 고개마루에 설치된 육교를 통과하게 되는데 이곳이『개금고개』란다. 첫날 산행 계획의 종착점이 되는 곳이다.
『만덕고개』를 출발하여 개금 지하철역이 있는『개금고개』까지 꼬박 4시간이 걸렸고 백양산을 빡시게 오른 데다 백양산 이 후 암릉 길도 만만치 않는데 야간 산행까지 했어야 할 처지였으니 된 고생을 할 뻔 했다. 어제 만덕고개에서 산행을 종료한 한 것이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의 생각인가 ---?
『개금동(開琴洞)』의 조선시대 행정명은 「와요리(瓦要里)」라 칭하다가 1904년 「개금리」라 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야리와 상대하여 경부철도 건너 북쪽에 있는 마을을 개금동이라 하였다.
이곳 故老들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의 모양이 꼭 거문고가 길게 늘어져 있는 형상이라 하여 개금이라 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토착지를 등지고 하염없이 피난길을 헤매던 어느 날 푸른 산림이 우거지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아늑한 계곡이 뻗어 있는 이곳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가야금 소리를 듣고, 바로 이곳이 장차 평화의 뿌리가 뻗어날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되어 전란의 시름을 달래면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거문고로 한 곡조를 타고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문고를 말미암아 이곳에 살게 되었으므로 개금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최씨, 배씨, 송씨 등이 오랫동안 거주했으며, 가장 오래된 경주 최씨도 18~19대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개금동의 명칭이 1900년 이전의 읍지에는 나타나지 않고『동래군지(1937)』에 개금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일제시대부터 개금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1959년 가야동에 흡수되었다가, 1963년 가야동에서 분동되었고, 1975년 인구의 증가로 개금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6년 개금1동에서 개금3동이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 중국집 예향
개금고개 육교와 철길 위 다리인「개금과선교」를 건너 개금지하철역 2번 지하도로 진입, 3번 출구로 나와 백병원 방향 오르막길을 따라 진행하여 백병원 앞에 도착(11 : 50분경)을 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山中이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중국집「예향」에 자리를 잡았다.
짬뽕과 짬뽕 밥으로 식사를 주문하고 약 20여분을 기다리니 기다리던 짬뽕을 내 온다. 양도 푸짐하고 해물도 듬뿍 넣었는데 출출하던 참이라 입맛이 절로난다.
[12] 엄광산(嚴光山)
만족한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으로 입을 가신 후 식당을 나와 고원아파트 앞을 지나 골목길을 잠깐 진행, 아파트 놀이터를 지나 우측 대동아파트 담장 사이를 빠져 나가니 정맥 표시기가 매달려 있고 드디어 시내를 벗어나 산길로 오르게 된다. 점심 식사 후 바로 출발을 한 때문인지 걸음에 속도가 붙지 않고 숨 쉬는 것도 거북하다.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가면서 약 15분여를 진행하니 성터 흔적으로 보이는 돌담이 나온다. 성터를 지나 약 2분여를 더 진행하여 비포장 임도를 가로지르면 좁은 산 길 급 오름 길로 이어진다. 嚴光山 오름 길이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라 생각하고 다리에 힘을 모으고 스틱으로 버티며 오르기를 20여 분, 비로소 전망이 툭 트이는 능선마루(嚴光山 東峰)에 올라섰다. 사방이 툭 터져 조망이 좋았지만 앞에 그리 멀지않은 거리에 또 하나의 峰이 있어 넓은 길을 따라 계속 진행, 헬기장이 지척에 있는 봉 정상에 도착을 했다. 정상에는 嚴光山, 504m, 1995. 4. 5라 쓴 표지석과 정자(無心亭)가 있고 사람들로 붐볐다.
『엄광산(嚴光山)』은 고도 504m로 서구 동대신동과 부산진구 개금동, 그리고 동구 좌천동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東萊府誌(1740) 산천조에 보면 “엄광산은 東萊府 남방 30리에 있으며 위에 구봉이 있고 아래에 모두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산은 북쪽으로 백양산과 마주하며, 남쪽으로 구덕산과 이어지고, 동남으로 구봉산에 이어져 있다.
옛날에는 ‘高遠見山’이라 했으며, ‘高遠見山’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은 이 산의 頂上에 올라서면 대한해협을 지나 멀리 일본의 쓰시마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東萊府誌의 산천조에 ‘高遠見山’이라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 때 사용된 일본식 지명으로 ‘高遠見山’은 신하가 되어 일본에게 엎드려 절을 한다는 뜻의 민족정기 말살이라는 식민풍수에서 나온 말로 최근(1995)이는 우리지명 바로 찾기 운동에 따라 산의 이름을 ‘高遠見山’에서 ‘嚴光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 정상에 서면 부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구, 서구, 사하구, 사상구, 해운대구 일부도 한눈에 들어와 부산의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진다.
엄광산은 안산임질의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산정이 대체로 평탄하며, 산정 부근에는 잔 자갈들로 된 애추가 발달되어 있고 산록은 비교적 가파른 편이다.
<출처> http://kjjpc.kr/zbxe/?document_srl=14751&mid=info3
[참고자료] 嚴光山 地名 考
동대신동의 북쪽에 위치하여 서구와 부산진구(개금동), 동구(좌천동)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엄광산은 1995년 그 이름을 되찾기 전까지는 고원견산(高遠見山)으로 불려졌다. 고원견산이란 명칭은 일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시기는 일본 막부(幕府)말기인 18세기 초ㆍ중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산의 명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일본 에도(江戶)막부시대 말기 외교사절의 일원으로 조선을 다녀간 우삼방주(雨森芳州)가 귀국 후 저술한 교린제성(交隣提醒)에 원견악(遠見嶽)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高遠見山으로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 1938년 간행)에서 확인된다.이 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대한해협을 지나 멀리 일본의 쓰시마 까지 바라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은 아닌가 싶다. 한국측 자료중 『東萊府誌』나『東萊郡誌』등을 검토한 결과 고원견산의 이전 명칭은 엄광산(嚴光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엄광산의 이전 명칭으로 불려진 고원견산은 18세기 초ㆍ중엽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원견악이 고원견산이란 명칭으로 정리되어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부산 서구청 문화관광 홈 / 서구의 명산
http://culture.bsseogu.go.kr/content/?hnum=NDRjx2MFZgh1&s_code=bjOjw1qP9IL3&w_code=enhMz2wAVIC4&subcnt=3
[13] 구덕령과 꽃마을
엄광산 정상에서의 휴식과 조망을 끝내고 가파른 내림 길로 들어섰다. 약 10여분을 급하게 내려와 안부(묘지 있는 곳)에서 우측 斜面 길로 들어서서 농장 울타리를 따라 내려서니 아스팔트 도로가 나온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 『구덕령/꽃마을』이다.
『구덕령(해발 220m)』은 엄광산과 구덕산 사이의 고개(현재의 꽃마을에 소재)로 옛날에는 부산에서 구포ㆍ양산ㆍ밀양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구덕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개라고 한다.
옛날 이 곳에는 조그마한 주막집이 몇 채 있었는데, 6.25동란 전후 피란민이 몰려와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여 당시 마을 주민 대부분이 꽃재배를 생업으로 삼고 국화ㆍ카네이션 등을 시내 꽃가게에 내다 팔거나 학교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 학교 앞에서 직접 팔아서 생활을 영위하면서부터 『꽃마을(현재 서구 서대신4동 10통ㆍ11통 지역으로 서대신4동과 사상구를 연결하는 해발 220m의 고개에 소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구의 발전 잠재력을 지닌 꽃마을은 2003년 마을 진입도로가 확장되고 현대식 건물들이 새로 들어서면서 현재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특히, 최근에는 구덕산자락 꽃마을 주변에 조성중인 「구덕골청소년수련원」 등 이 일대는 지역주민과 청소년을 위한 문화요람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된 수목원과 함께 2004년 11월에 개관한 「교육역사관」과 「민속생활관」에 이어 2005년에는 「목석원예관」과 「민속박물관」이 개관 되었으며 「구덕야영장」 인근에는 「구덕청소년수련관」의 개관(2005. 5월말)으로 서 부산권 청소년들의 심신수련 및 체험활동의 장으로써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1981년 서구청에서 설치하여 직영하는 2,000여평 규모의 양묘장이 있고, 서구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내원정사(內院精寺)」가 있다. 현재 472세대 1,344명이 거주하는 꽃마을은 꽃재배를 하는 주민은 거의 없고 공휴일이면 외래에서 구덕산과 승학산을 찾는 많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닭과 오리고기, 그리고 막걸리와 시래기 해장국 등을 파는 음식점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라고 부산 서구청 문화관광 홈에『구덕령』과 『꽃마을』에 대해 소개를 해 놓았다.
[14] 산행 후
오늘은 만덕고개를 출발하여 백양산을 넘고 개금동 시내 길(개금고개)을 통과하여 모처럼 따끈따끈한 짬뽕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엄광산을 빡시게 올라 부산의 모습을 통째로 눈에 담고 낙동정맥을 한 구간 앞둔 구덕령 꽃마을까지 13.9km(약 7시간 20분 소요)를 가벼운 마음으로 완주를 했다. 원 계획대로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함께한 대원들 모두가 함께 산행을 마치게 되어 한결 마음이 가볍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치랴. 길모퉁이 음식점에 들려 막걸리 한 사발에 두부 김치 한 접시 시켜 잔을 부딪치며 오늘 산행의 고단한 발품을 푸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했다.
201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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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산행이 끝나고나면 잊고 있다가 회장님 글 읽면 다시 새록새록 되짚어집니다. 도심 속에서 숲의 소리보다 도심의 소리가 쟁쟁대던 산행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생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