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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곡선, 마치 천상의 가교 같은…그들 스스로 아치를 그리며 봄을 묻는다 … (제자: 一思 석용진)
화사한 봄 날. 개나리. 노란 꽃들이 기분 좋다. 한창 피어오르는 그 기운. 정녕 이게 봄이다. 워즈워스는 그의 '시집'에서 "봄날의 숲 속에서 솟아나는 힘은 인간에게 도덕상의 악과 선에 대하여 어떠한 현자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비록 숲이랄 것도 없지만. 이웃의 밭둑이나 담벼락 혹은 냇가에서 노랗게 물든 개나리 꽃. 그 꽃 더미서도 생동하는 봄의 기운은 숲 속 못지않다. 그 생동으로 우리들 역시 '악과 선'의 구별법을 배울 수 있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울 텐데. 월든 호반에서 수년간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생활한 끝에 '숲 속의 생활'을 썼던 소로는 "참으로 선한 것은 모두 염가이며, 유해한 것은 모두 고가"라고 했다. 대체 선은 그 값이 헐하고 악은 그 값이 비싼 이유는 뭘까. 그 답이 지금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박연차 리스트나 장자연 문건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재수 없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재수 없는 현실. 여하튼 우리들은 지금 재수가 없다. 그 소리들 속에서 살고 있으니.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괜한 억울함. 이 또한 우리들 모두가 선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다. 죽은 사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라는 중국인들의 격언에 그저 위안을 찾을 수밖에. 기가 차는 4월의 현실. 잔인한 현실. 이럴 때. 그들의 리스트나 문건으로 기분이 착잡할 때. 활짝 핀 개나리꽃은 휴식을 준다. 호메로스의 말대로 "너무 긴 휴식은 고통"이지만 개나리꽃에서 느끼는 휴식은 그렇지 않다. 신천의 개나리꽃들이 그렇고, 양지 바른 아파트 단지의 담장에서 웃고 있는 개나리꽃들이 그렇고, 앞산순환도로 곁의 그들이 그렇고, 대구고교 담장에 늘어진 개나리꽃들이 그렇다. 경주 보문단지 입구를 적신 노란 개나리꽃들이 그렇고, 대구박물관서 범물동 가는 길에도 그렇다. 노란 꽃. 한참을 물끄러미 그 꽃들을 바라보면 한서(漢書)에 보이는 '완대(緩帶)' 혹은 '청한지연(淸閒之燕)'의 의미가 달리 있을 리 없다. 어딜 가나 개나리꽃이 한창이다. 개나리는 토속적인 우리의 꽃나무라는 점에서도 정감이 가지만 불행히도 아직 자생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봄날이 요즘처럼 변덕이 심해도 개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운다. 순식간에. 어저께까지만 해도 움이 트는가 싶더니 어느새 노란 색이 봄바람에 물결을 이룬다. 종알종알 매달린 그 모습이 마치 튀밥 같아서 일까. 튀밥꽃으로도 불린다. 수수하지만 여럿이 함께 꽃을 피워 더없이 아름답다. 해마다 이맘 때 꽃 사태를 이루는 개나리. 필 때는 쑥쑥 하늘로 향하더니만 사태를 이루면 꽃 무게가 제법이다. 그래서 가지들은 아래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휜다. 늘어뜨린 가지들은 서로 얼켜 부둥켜안고 둥그스럼 빚은 모습. 그럴 때 그들이 지어내는 선, 노란 곡선은 마치 천상의 가교 같은 느낌. 그들 스스로 아치를 그리며 봄을 묻는다. 기형도는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고 그의 시 '나리 나리 개나리'에서 꽃망울을 터뜨리듯 절규했다.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 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 없이 꺾어 갔던 그 투명한 /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 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 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 어느 방향에서도 개나리는 눈에 잘 띈다. 노란색 때문이다. 밝은 그 색. 노랑. 노란색은 모두 115가지가 있다고 에바 헬러는 그의 '색의 유혹'이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노랑은 낙관과 질투, 즐거움, 가장 모순된 색이라고 정의했다. 개나리는 물론 카나리아, 해바라기. 같은 노란색이라도 전부 다르다. 노랑을 너무 좋아했던 반 고흐. 그의 집도 노랑 일색이다. 그런 노랑을 반 고흐는 크롬노랑으로 칠했다. 에곤 쉴레의 작품 '누워 있는 금발여인'에서도 노랑은 농익은 여인의 체취를 물씬거리게 한다. 환하게 웃은 스마일버튼의 노란색은 전형적인 낙관주의. 그렇지만 황금의 노랑과 유황의 노랑은 왜 그리 엄청난 큰 간격을 두는지. 그런 간격이 세상을 지탱해 주는 것일까. 노란 손수건. 그 물결. 한 때 풍미했던 물결이다. 그렇지만 노란색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화의 색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구두쇠나 노랭이를 노란색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옛날 사람들은 흔히 화가 담즙에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은 담즙에 이상이 쉽게 찾아와 피부나 얼굴색이 노랗게 된다고 했다. 담로가 경직되면서 담즙이 장을 통해 배출되지 않고 핏속으로 스며들어 그렇다는 것. 물론 손수건에는 담즙이 있을 리 없다. 한 때의 영광이 지금은 무시무시한 노란 얼굴돼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지는 않을까. 도연명이 관직을 과감히 벗어 던진 후 전원으로 돌아가면서 "쌀 다섯 말을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不爲五斗米折腰)"고 말 한 뜻이 아름다울 뿐이다. 그렇지만 개나리꽃이야 어디 화가 난 끝에 핀 꽃이랴. 지난 겨울이 화났으면 몰라도. 세상이 오늘처럼 어지러우면 야구로, 김연아로 열광하는 것도 좋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금 만개한 개나리꽃을 완상하는 것도 좋을 듯. 곡선의 줄기를 타고 흐드러진 그 노란 개나리꽃. 중용에 "나라에 도가 없으면 침묵하여 화를 피한다(國無道 其默足以容)"고 했는데 '침묵'이야 쉽지 않을 터. 개나리꽃으로 그 '침묵'을 대신하면 어떨까. 잠시나마! 협찬:대구예술대학교 |
첫댓글 너무 일찍 죽어 안타까운 내가 좋아하는 천재 시인"기형도"의 詩 서늘한 가슴의 진동으로 음미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