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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탈퇴한 대륙조선사카페에 2009년2월경에 올린 글 입니다.)
고려/조선의 강역이 어디였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사시고 계실 줄로 압니다. 전문가라고 하는 력사학자들에게 조차도 이것은 매우 난해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전을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면 묶여진 실타래를 풀 만한 사료들이 보입니다. 오늘은 제가 발견한 몇 가지 그 사료를 들고 유주지방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유주(幽州)는 시대별로 ,발해·대군·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동군·요서군·현도군·낙랑군 등으로 불리웠으며 요동지방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있는 곳입니다. 고구려의 수도는 초기는 아시다시피 졸본/국내성/불내성, 후기는 평양/호경/유경/장안입니다.
일단 25사 내에서의 고구려를 찾아보면
◉ 三國志/魏書/東夷烈傳/高句麗
諱 於 其 國 , 遣 員 外 散 騎 侍 郎 李 敖 拜 璉 為 都 督 遼 海 諸 軍 事 、 征 東 將 軍 、 領 護 東 夷 中 郎 將 、 遼 東 郡 開 國 公 、 高 句 麗 王 . 敖 至 其 所 居 平 壤 城
◉ 明史/ 列傳/ 朝鮮
漢 末 , 有 扶 餘 人 高 氏 據 其 地 , 改 國 號 曰 高 麗 , 又 曰 高 句 麗 , 居 平 壤 , 即 樂 浪 也 . 已 , 為 唐 所 破 , 東 徙 . 後 唐 時 , 王 建 代 高 氏 , 兼 併 新 羅 、 百 濟 地 , 徙 居 松 岳 , 曰 東 京 , 而 以 平 壤 為 西 京 . 其 國 北 鄰 契 丹 , 西 則 女 直
※ 이 사료를 근거로 하는 반도사관에 의하면 조선 즉 고구려는 오늘날의 요령성의 遼河를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가 나뉘어지며 북평/북경/연경은 요서에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의 하북성과 요령성 일대가 幽州일까요? 그런데 명사에 황당한 기사가 나옵니다.
◉ 明史/ 本紀第二 太祖二/洪武四年 ..
是 月 , 徙 山 後 民 三 萬 五 千 戶 於 內 地 , 又 徙 沙 漠 遺 民 三 萬 二 千 戶 屯 田 北 平 .
번역 : 명사/본기/태조/ 홍무 4년: 이번 달에 산후민(山後民) 삼만오천호를 내지로 보냈는데, 또 사막(沙漠)으로 삼만 이천호를 보내 북평(北平)을 개간/둔전하게 하였다. 즉 북평에 사막지형이 있다는 말입니다.<명승(明昇)이 귀순한 그 달>
※ 이와 같은 황당한 기사가 나옵니다. 근대의 하북성,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북경에 사막지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북경/북평지역은 본시의 북평이 아닌 고의적으로 지명이 이동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원 북평은 사막지형이 존재하는있는 곳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기루인 계문연수가 북경/연경에 보입니다. (계문연수는 대대로 북경의 8경중의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사서에서 북경에 사막이 있다는 기사는 연행록에 다수 있습니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경자년(1720, 숙종 46) 하
<일부발췌>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
◉연행기사(燕行記事) 상 정유년(1777, 정조 1) 12월 25일
<일부발췌>
별산점(鱉山店) 30리를 가서 한낮에 왕씨(王氏)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쉬고 또 5리쯤 갔다. 멀리 바라보니 서남간에 긴 수풀이 끝없이 내다보인다. 연무(煙霧)가 반 이상을 덮었는데, 은해(銀海)가 출렁여 숲 사이의 인가(人家)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위로는 나무 끝에 가리어 희미하게 구름 사이로 출몰한다. 이것은 대개 시야가 아득하고 들 빛이 희미하며, 해협(海峽)이 가깝고 아지랑이가 은은히 비쳐 신기루(蜃氣樓) 같은 현상이지만, 가까이 가 보면 보이는 것이 점점 없어진다. 참으로 1개의 기관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이것을 매양 ‘북경팔경(北京八景)’으로 치는 것인데 소위 ‘계문연수(薊門煙樹)’라는 것이다. 《제경경물지(帝京景物志)》에서는, 연성(燕城) 서북 모퉁이 고계문(古薊門) 토부(土阜) 옆에 있는 임목(林木)을 경사 팔경(京師八景) 중의 연수(煙樹)로 치고 있고, 명 나라 김유자(金幼孜)의 제영(題咏)에도 분명히 지적한 것인데, 우리 사람들이 근거도 없이 잘못된 인습을 가지고 와전한 것 중에 이런 것들이 많다.
저 수백 리 밖에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 경치를 가지고 경사(京師)의 승경(勝景)이라고 혼란스럽게 말하는 것이 어찌 합당할까? 대개 관외(關外)에 있어서는 십삼산(十三山)으로부터 이대자(二臺子)까지는 일소대(一所臺) 이동(以東)과 난니보(爛泥堡)로부터 요동(遼東) 등지까지의 넓은 들과 해변 지방에 모두 연수(煙樹)가 있다. 크고 작은 것은 같지 않으나 모두 구경할 만하였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경자년(1720, 숙종 46) 7월 8
<일부발췌>
송가성(宋家城) 별산점(鼈山店)을 지나서 서남쪽 사이를 바라다보니, 연기와 안개 속에 한 줄기 장림(長林)이 수백 리 밖에 은은히 비쳐 보인다. 이것은 곧 이른바 ‘계문연수(薊門煙樹)’라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뚜렷이 운수(雲樹)와 같다가 바싹 가서 살펴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마치 신기루가 일어났다가 공중에서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다. 이것이 연도 팔경(燕都八景)의 하나이다.
계주(薊州)는 본래 진(秦), 한(漢) 때 어양군(漁陽郡)이니, 팽총(彭寵)과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킨 곳이 모두 이곳이다.
※ 윗기사 대로 신기루 즉 계문연수가 북경에 자주 나타납니다. 계문연수는는 사막에서 매우 잘 나타납니다. 하지만 현 북경에는 아시다 시피 신기루/계문연수가 없습니다. 이 계문연수는 북경의 薊지방의 연수(煙樹)라는 뜻으로 이 신기루는 중국대륙 돈황에서 투르판/하미와 사하라 사막 등지에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대륙측의 사진자료와 일반 여행자들의 기행문의 일부를 발췌해보았습니다.
◉丝路流沙——35天的西游记(敦煌篇二)
비단길유사(丝路流沙)- 35일의 서유기 돈황편 2
9月7日(周5)
住乌鲁木齐(白桦林青年旅馆, 140元/晚)
雅丹魔鬼城、玉门关、汉长城、阳关,晚飞乌市
우루무치(乌鲁木齐)방면
아단마귀성(雅丹魔鬼城),옥문관(玉门关),한장성(汉长城),양관(阳关), 만비우시(晚飞乌市)
我们首先到达的是玉门关,玉门关俗称小方盘城,在去阳关的路上我们看到了海市蜃楼——远处的戈壁上突然出现一大片瀑布和湖泊,湖泊上还有小岛和岛屿的倒影。胡师傅说这种景象在夏天正午的戈壁上很常见,有时还会出现建筑和人,车子开近后就什么都没了,我赶快拿出长焦镜头把这一自然奇观拍了下来。
번역: 우리는 제일먼저 옥문관에 도착하였고 옥문관골짜기는 작은 방반성(小方盘城) 이라 불린다. 양관을 가는 길에 우리는 신기루를 보았는데 먼 곳에 있는 사막에서 갑자기 폭포와 호수가 보였고 , 호수군에는 작은 섬과 도서들이 거꾸로 투영되는 장면이 있었다. 중략)........
이번에는 하미(哈密)에서 봤다는 신기루 입니다. 먼 발치에 신기루가 보입니다.
海市蜃楼 (신기루)
출처: http://travel.21cn.com/mytrip/news/2006/06/21/2622562_1.shtml
< 图片日记5.26:进军哈密 "快看,海市蜃楼">
이 자료를 보면 북경/계지방은 투르판/하미로 나옵니다. 북경은 예로부터 북방의 요지이며, 새외의 호인들을 관리하던 곳으로 사막지형과 초원지역이 동시에 나타나는 지역입니다. 북경은 유주지역에 속하는 곳으로 유주의 지역적 특성을 알면 북경의 위치에 대해 더 감을 잡을 수가 있으리라 봅니다.
◉ 幽州를 史記에서 찾아보면
❶ 集 解 孔 安 國 曰 : 「 北 稱 幽 都 , 謂 所 聚 也 . 」 索 隱 山 海 經 曰 「 北 海 之 內 有 山 名 幽 都 」 , 蓋 是 也 . 正 義 案 : 北 方 幽 州 , 陰 聚 之 地 , 命 和 叔 居 理 之 .
해석: 집해 공안국 왈 북쪽을 幽都라 칭한다. 사람이 사는 곳을 말한다. 색은 산해경 왈 北海의 안에 幽都山이 있다. 정의에서는 북방을 幽州라며, 음이 모여있는 곳이다. (북쪽이라는 뜻) 명(命)과 숙(叔) 이 거하면서 다스렸다.
❷ 集 解 馬 融 曰 : 「 禹 平 水 土 , 置 九 州 . 舜 以 冀 州 之 北 廣 大 , 分 置 并 州 . 燕 、 齊 遼 遠 , 分 燕 置 幽 州 , 分 齊 為 營 州 . 於 是 為 十 二 州 也 . 」
해 석: 집해 마융 왈 禹가 치수를 하고, 九州를 정한 곳이다. 舜이 기주를 북쪽이 너무 넓어서 병주를 나누어서 설치하였다. 燕나라와 齊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어 연으로 나누고 유주를 설치했고 제에 營州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십이주가 되었다.
❸ 括 地 志 云 : 「 燕 山 在 幽 州 漁 陽 縣 東 南 六 十 里 . 徐 才 宗 國 都 城 記 云 周 武 王 封 召 公 奭 於燕 , 地 在 燕 山 之 野 , 故 國 取 名 焉 . 」 按 : 周 封 以 五 等 之 爵 , 薊 、 燕 二 國 俱 武 王 立 ,因 燕 山 、 薊 丘 為 名 , 其 地 足 自 立 國 . 薊 微 燕 盛 , 乃 并 薊 居 之 , 薊 名 遂 絕 焉 . 今 幽 州薊 縣 , 古 燕 國 也 .
해 석: 괄지지 운 燕山이 유주 漁陽縣 동남 육십리에 있다. 서재종 국도성기에 이르길 주무왕이 소공 석석을 연에 봉하였다. 땅은 연산의 들판에 있다. 나라의 이름은 그 산의 이름을 취한것이다. 주가 오등의 작을 내려 薊, 燕 두 나라가 무왕에 의해 세워졌다. 연산과 계구를 그 이름으로 삼아 각자 나라로 자립하였는데 계는 약하고 연은 강성하였다. 그리하여 계를 병합하고 멸망시켰다. 지금의 유주 薊縣이며, 옛날의 燕이다.
❹ 集 解 鄭 玄 曰 : 「 地 理 志 都 野 在 武 威 , 名 曰 休 屠 澤 . 」 正 義 原 隰 , 幽 州 地 也 . 按 : 原 , 高 平 地 也 . 隰 , 低 下 地 也 . 言 從 渭 州 致 功 , 西 北 至 涼 州 都 野 ﹑ 沙 州 三 危 山 也 . 括 地 志 云 : 「 都 野 澤 在 涼 州 姑 臧 縣 東 北 二 百 八 十 里 . 」
번역: 집해 정현 왈 : 지리지에 都野가 武威에 있다. 그 이름을 休屠澤이라 한다. 정의에는 原隰, 幽州라고 한다. 원은 高平이다. 隰은 低下이다. 말하기를 渭州에서 功에 닿고, 서북으로는 涼州, 都野澤, 사주 三危山에 달한다. 괄지지에 운 도야택이 량주 姑藏縣 동북 이백 팔십리에 있다.
※제가 번역한 이 글들은 모두 사기 주석본의 내용들인데 참으로 현재의 사관과는 알 수 없는 내용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幽州를 말하는데 涼州와 渭州, 都野澤, 沙州를 들고 있는데 특히 사주는 오늘날의 돈황(敦煌)을 말합니다. 이미 손을 댄 사기에서 조차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현재의 사가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사서를 일부로 안보는 것인지, 해석할 줄을 모르는 것인지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위 글에 나온 지역의 위치를 사기를 통하여 고찰하여 보겠습니다.
◉ 史記 夏本紀
黑 水 西 河 惟 雍 州 :弱 水 既 西 ,涇 屬 渭 汭 .漆 ﹑ 沮 卽 從 ,灃 水 所 同.荊 ﹑ 岐 已 旅 ,終 南 ﹑ 敦 物 至 于 鳥 鼠 .原 隰 厎 績 , 至 于 都 野 .三 危 既 度,三 苗 大 序 . 其 土 黃 壤 .田 上 上 , 賦 中 下 .貢 璆 ﹑ 琳 ﹑ 琅 玕.浮 于 積 石 , 至于 龍 門 西 河 ,會 于 渭 汭 .織 皮 昆 侖 ﹑ 析 支 ﹑ 渠 搜 ,西 戎 即 序 .
번역 : 흑수(黑水)가 서쪽에 있고 하(河)는 오직 옹주(雍州)에 있다. : 약수(弱水)는 곧 서쪽에 있고, 涇水는 위예{(渭汭)위수의 물굽이}에 속한다고 되어있으며, 칠수(漆水). 저수(沮水)는 곧 그곳에 속한다. 풍수(豊水)는 같은 곳에 있다. 형(荊) 기(岐)에서 잠시 머물다가 종남(終南), 돈물(敦物)에서 조서(鳥鼠)에 다다른다. 원습지적(原隰厎績)에서 도야(都野)에 까지 다다른다. 삼위(三危)를 바로 건너면 삼묘(三苗)가 있다. 그곳의 흙은 노랗고 곱다. 땅은 많은데 세금은 적다. 공물로는 옥(璆), 푸른옥(琳), 낭간(琅玕)이 있다. 적석(積石)에 있으며 용문(龍門)의 서쪽 하(河)에 이르면서 위수(渭水)의 물굽이에 모인다. 곤륜(崑崙), 석지(析支), 거수(渠搜)에서 가죽을 짠다. 서융(西戎)이 있다.
※위에 원습지적(原隰厎績)이 있습니다. 원습지적은 유주(幽州)에 있는데 기록에 의거하여 보면 渭水系에 있습니다. 지금의 서안(西安)을 지나는 위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또한 형산(荊山)과 기산(岐山)이 보이고 조서(鳥鼠)라는 지명이 보입니다. 조서는 조서동혈산(鳥鼠同穴山)을 말함으로 산해경의 서산경에 있는 지명입니다 (천산지역)
◉ 集 解 孔 安 國 曰 : 「 西 距 黑 水 , 東 據 河. 龍 門 之 河 在 冀 州 西 」 索 隱地 理 志 益 州 滇 池 有 黑 水 祠 . 鄭 玄 引 地 說 云 「 三 危 山 ,黑 水 出 其 南 」 . 山 海 經 「 黑 水 出 崑 崙 墟 西 北 隅 」也 .
번역: 집해 공안국(孔 安 國)왈: 서쪽에는 흑수(黑 水) , 동으로는 하수(河)에의지하였으며, 용문하(龍 門河)가 기주(冀 州)의 서쪽에 있다. 색은 지리지에 익주진지(益州滇池) 에는 흑수사 (黑水祠)가 있다고 한다. 정현(鄭玄)이 설문(說文)을 인용하여 말하길 삼위산(三危山)은 흑수(黑水)가 나와서 그 남쪽으로 흐른다. 산해경(山海經)에는 흑수(黑水)가 곤륜허(崑崙虛)의 서북 모퉁이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 윗 기록을 보면 黑水는 冀州의 서쪽에 있으며 삼위산(三危山)은 곤륜허(崑崙虛)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주(冀州)는 곤륜산의 근처에 있어야 마땅합니다. 유주는 이 冀州의 북쪽에 있는 지역이며, 또한 黑水는 숙신/말갈이 있는 곳입니다. 이 흑수가 삼위산에서 나온다는 것은 삼위태백을 말함이며, 백두산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지역에 약수(弱水)가 흐르는데 사기 원문의 黑水西河惟雍州 :弱水既西 문장흐름으로 보아 약수가 곧 흑수로 판단되어 집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弱水가 부여와 말갈에 흐르는 강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三國志/魏書/卷三十 魏書三十/東夷/ 夫餘
夫 餘 在 長 城 之 北 , 去 玄 菟 千 里 , 南 與 高 句 麗 , 東 與 挹 婁 , 西 與 鮮 卑 接 , 北 有 弱 水 , 方 可 二 千 里
번역 : (삼국지 위서 동이 열전에) 부여는 장성의 북쪽으로 현토에서 천리를 가야하며, 남으로는 고구려 동으로는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하며 북으로는 약수(弱水)가 있고 사방 이천리이다.
이 내용은 철저하게 반도로 끼워 맞추기 위해 사서를 재편할 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약수는 동북삼성의 아무르 강으로 반도사관에서 설명되어져 있는데 본시 아무하이며, 숙신의 흑수지역과 가까운 지역입니다. 이 숙신(肅愼), 말갈(靺鞨), 여진(女眞)의 지역을 보면 사막지형이 존재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48권 정평도호부
옛 장성(長城) 고려 때 쌓은 것으로 서쪽으로는 큰 고개를 넘고, 동쪽으로는 도련포(都連浦)와 연접해 있는데, 세 겹으로 참호(塹壕)를 둘러서 여진(女眞)을 막았으니,…….
◎정추(鄭樞)의 시에, “정주 관문 밖엔 풀이 마냥 무성한데, 사막에는 인기척 없고 해는 서쪽으로 향해 가네. 비린내 나는 바닷바람이 전사자의 백골(白骨)에 부는데, 흰 느릅나무 많은 곳에서 말 울음소리 자주 들려오네.”
이러한 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시는 시일 뿐 비유를 대서 말한 것일 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지 보겠습니다.
◎남곤(南袞)이 절도사(節度使) 이장곤(李長坤)을 보내는 부(賦)에, “등주(登州) 남쪽과 연성(連城) 북녘에 큰 산들이 깎아지른 듯 하늘로 치솟으니, 그 산세가 국토를 가로질렀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를 박고 뻗어나가 남으로 수천 리를 달려와서 넓게 모였다. 그 길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당시에는 다만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이 보일 뿐이라, 우공(愚公)은 머뭇거리다가 도로 물러가고, 거령(巨靈)도 손바닥만 어루만지다가 피해 갔다네. 인가와는 서로 막혀 통하지 않았고, 풍기(風氣)조차도 다른 구역과 막혀 있었으리. 도무지 알 수 없는 일 어느 연대(年代)에 있었는지. 새[鳥]나 넘는 이 길을 찾아 뚫었단 말인가.
처음엔 실 같은 외줄기 숲 밖으로 빙빙 돌더니, 점점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암석 사이로 서리었다네. 인마(人馬)가 이미 통하게 됨에 따라 평탄한 큰 길을 개척하였고, 고려(高麗) 때엔 이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불렀다네.
아, 슬프다, 백이(百二) 험한 요새지에서 몇 왕대(王代)의 분쟁을 겪었던고, 나는 상상하건대, 윤관(尹瓘)이 북정(北征)할 때 예왕(睿王) 같은 영명한 임금을 만나 누대(累代)에 쌓였던 분한(憤恨)을 일거에 소탕(掃蕩) 숙청(肅淸)하려고 생각하였다네. 위봉(威鳳)이 절월(節鉞)을 받고 장춘(長春 땅 이름)에 군사를 주둔하고는, 10만 대군을 몰아 천리 밖에 원정할 적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군사를 쓰던 효릉(峭陵)을 흘겨보고 한신(韓信)이 행군하였던 정형(井陘)을 밟아 들어가니, 원수(元帥)가 관문(關門)을 떠나기도 전에 그 위엄이 이미 오랑캐 땅에 떨치었는지라, 달아나는 적병을 추격하여 파지(巴只 땅 이름)까지 나가고, 땅을 개척하여 아홉 개의 성(城)을 쌓음에 이르렀다. ……..중략.)
성인이 풍패(豐沛)에 서 일어나시니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케 하는 큰 뜻을 두시었네. 철관(鐵關) 서쪽에 살기(殺氣)가 가득한지라 잔악한 무리들을 제거하여 동한(東韓)의 안녕을 되찾았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고 산하를 다 차지하였으니, 옛날의 외적들 있던 곳이 이제는 지경 안에 있게 되었다. 누가 동봉(東封)의 일환(一丸)을 빌려 관방(關防)을 헐어버리고 다시기찰(譏察)함이 없이 다만 지나가는 길손들의 한가로운 모습만 보게 하였나. ......중략)
긴 칼 빼어들고 휘파람 불어 이별에 어지러운 이 마음을 끊었노라. 어찌하면 그대와 더불어 꽁무니를 수레로 삼아 신마(神馬)를 몰아서 큰 사막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바다에 임하여 푸른 물결을 잔질하여 가슴 가운데에 불평을 씻고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징초(徵招)의 악장(樂章)을 연주하며 돌아와 호월일가(胡越一家)의 가사(歌詞)를 임에게 바쳐볼까.” 하였다.
※ 이 내용을 보면 백두산의 너머에 사막이 있고, 여진이 있으며 그곳에 윤관의 공적비가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반도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곳이라고 봅니다. 또한 박원영이 지은 시가 같은 책 안변도호부 편에 있는데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박원형(朴元亨)이 시에, “절부(節符)를 가지고 순행하다가 옛 고을 누대에 올라, 감회로 술 마시며 시 짓고 잠시 머물렀다. 구름은 패택(沛澤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고향. 여기서는 이 태조의 고향 함흥을 말함)으로 뻗친 길 가운데서 일어나고, 강물은 기산(岐山)골짜기로 흘러 들어가는구나. 요동(遼東)의 학(鶴)이 간 후에도 성곽은 예와 같은데, 순(舜) 임금이 갈던 밭에는 보리가 가을을 이루었네
※ 고전번역원에서는 태조 고황제 이성계의 고향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성계의 고향이 함흥이니 이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닐진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한 고조의 고향이라고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자기 조상도 구분 못하는 요즘 말로 벨도 없는? 사람들이라서? 남의 나라 시조의 고향을 함경도 안변이라고 한 것일까요? 원 자료에 내용을 보충하였다는 것은 양자가 무엇인가 개연성이 있고 관련이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함경도 안변도호부에다 조선의 대학자들이 지은 시를 첨가하여 놓은 것임은 자명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책의 이름도 『신증 동국여지승람』입니다
내용중에 특히 폐택(肺澤) 이 漢 高祖(한고조)의 고향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岐山과 료동(遼東)을 거론하며, 순임금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함경도 안변도호부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함경도 안변도호부가 풍패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즉 함경도가 幽州요, 涿鹿이며, 舜이 있었던 곳으로 자고로 여러 제왕이 태어났던 곳이기에 풍폐가 후대에 와서는 일반명사화가 되어버린 것일 뿐이며, 따라서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유주땅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 신증에 무수히 등장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흥부> 정묘년에 예천(醴泉) 권공(權公) 맹손(孟孫)이 형조 판서로서 특별히 이 명을 받고 이미 부임하여 일을 보면서 말하기를
○“풍패(豐沛 제왕의 고향을 말함)의 고장인 이곳 인민의 부로(父老)들은 선왕의 창조하신 유적을 직접 보았고, 또 모두 선왕의 인후하신 은택을 입었으니, 그 읊은 가사를 듣고 기뻐하고 감동하여 사모함이 과연 어떻겠는가.”
○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여섯 용(龍)이 날아서 해동(海東) 하늘에 임하시니, 만물이 그 우로(雨露)의 혜택을 입었도다. 쌓고 쌓은 인(仁)의 공은 백대(百代)의 제왕에 뛰어나시고, 높고 높은 덕업은 천년의 운수에 응했도다. 찬양한 악장(樂章)을 풍패(豐沛)에 내리시니, 노래하는 새 가사를 관현(管絃)에 올리네. 선대의 성명(聖明)을 이어받아 만물의 화육(化育)을 돈독히 하시니, 태평 시대의 풍아(風雅)가 길이 흘러 전하리라.”
○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울긋불긋 단청한 누각이 하늘을 찌를 듯, 여덟 창문으로 펼쳐지는 경치 아득히 끝이 없구나. 한(漢) 나라의 풍패는 천고(千古)를 지났고, 주(周) 나라의 기(岐)ㆍ빈(豳)은 만년(萬年)이나 내려갔도다. 술취한 속에 맑은 담론은 왕연(王衍)의 주미(麈尾)요, 흥취는 한가한 가운데 아름다운 백아(伯牙 거문고 잘 타는 사람)의 거문고로다
※내용을 정리하면 풍폐는 주나라가 일어난 기(岐)ㆍ빈(豳)이 고 이후 유주(幽州)가 되며, 근대조선에서는 함경도이며 주무왕/한 고조/ 태조 리성계가 이곳에서 태어나 군대를 일으켜서 조종을 창업한 곳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한 고조가 풍폐에서 일어날 때에 한일인데 사기와 포박자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史記 高祖本紀第八
乃 立 季 為 沛 公. 祠 黃 帝 , 祭 蚩 尤 於 沛 庭
번역 : 폐공이라 하고 황제와 치우에게 폐정에서 제사를 지냈다.
抱朴子(포박자)
劉 邦 起 兵 於 豊 沛, 則 祀 蚩 尤 氏.
번역: 유방이 풍패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치우씨에게 제사를 모셨다.
이 치우(蚩尤)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史記는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史記/五帝本紀/註解
孔 安 國 曰 「 九 黎 君 號 蚩 尤 」 是 也
번역: 공안국이 말하길 치우는 구려 군주의 이름이다.
사기「집해(集解)」
蚩 尤 古 天 子 之 號
번역: 치우는 옛날 천자의 호라고 하였다.
※ 전설에 치우(蚩尤)가 黃帝와 涿鹿에 싸웠다고 한 고사는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한 고조가 풍패, 즉 유주, 탁록 지방에서 군대를 일으키면서 왜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냐는 것입니다. 치우는 구려의 군주인데 말입니다. 이 문제가 여러 번 거론 된 것을 본인이 보았지만, 치우는 東夷고, 황제는 華夏인데 치우가 이겼으므로 치우가 군신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냈다는 해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 족보를 따져 보면 치우나 황제나 같은 집안입니다. 이들이 나중에 화하로 갈라졌다고 대다수의 학자는 추측성으로 동이와 화하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고조 유방이 출전을 하기 전에 제사를 치우에게 지낸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을 자신들의 고조라고 칭송하는 조선의 선비들의 시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설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는지요? 군대를 이끌고 출전을 하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남의 나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시겠습니까? 이를 테면 여러분들이 지휘관이 되어 북에 침투하는 특수임무를 맡았다고 합시다. 출전하기 전에 조상께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는데 일본 천황한테 제가 지내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조상님께 지내겠습니다. 만약 일본 천황에게 제사를 지낸다면,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정신나간 행동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입니다.그런 미친 사람이 과연 한 고조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미치지 않았던 그 한 고조가 치우에게 풍폐의 땅에서 제사를 지낸 것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바로 한고조의 조상이 치우씨라는 것을 말해주며 한고조의 나라는 구려이며, 한 고조 유방은 구려의 후예였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한고조의 풍폐는 주나라의 豳/岐 같은 지역입니다. 그러니 함경도 조에서 그 시를 넣은 것이지요. 또한 사기에도 구려의 군주는 치우씨라고 했습니다. 치우는 옛 천자입니다 그럼 한 고조나, 주무왕이 칭제를 할 때 옛 천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지사 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탁록은 풍폐의 땅이요, 豳/岐이며 구려의 본거지이기 때문이고 치우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천자를 하고 싶은 한 고조는 치우씨(즉 역대 구려의 천자들)의 종묘에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이 九黎는 句麗입니다. 이 구려의 시조는 치우이고 다른 말로 주몽(朱蒙)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구려의 왕조의 고조들을 주몽이요 치우라 했던 것입니다. 이 주몽이 일어난 곳이 졸본(卒本)입니다. 따라서 풍폐는 졸본이고 탁록이며, 북경이고, 함경도이며, 유주이고, 주나라의 빈/기 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함경도를 설명하면서 주나라 빈/기와 풍폐의 땅을 읇은 시를 실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치우의 구려를 계승한, 하/은/주/진/한/수/당/송/원/명/청은 치우씨 황제 소호금천의 후예이자 전욱고양의 후손이었으며, 그들의 국호는 구려, 고려였던 것입니다. 역사조작세력은 이러한 사실을 잘라버리고 삼국사기의 내용을 삭제하고 삼국을 한말에 일어난 국가로 만들었으며 단군을 신화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단군의 연대는 기원전 2333년이 아닌 그보다 1500년 전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즉 치우씨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帝釋/上帝/檀帝/檀君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강역으로 돌아와서 이 유주의 특성을 보면, 첫째 사막이 있는 지역으로 북해와 근접하여 있으며 둘째 음산과 불함산이 있고 곤륜허가 있으며 셋째 산해경의 대황이 있는 지역입니다. 즉 신강성의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유주가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찾으려면 숙신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숙신은 약수와 흑수에 있었으므로 약수의 이 위치에 관한 사료를 인용하겠습니다.
◉史記夏本記/正義/索隱
正 義 姚 丞 云:大 荒 西 經 云 崑 崙 之 丘,其 外 有 炎 火 之 山,投 物 輒 然.括 地志 云:弱 水 有 二 原,俱 出 女 國 北 阿 耨 達 山,南 流 會 于 國 北,又 南 歷 國 北,東 去 一 里,深 丈 餘,闊 六 十 步,非 乘 舟 不 可 濟,流 入 海.阿 耨 達 山 一 名 崑 崙 山,其 山 為 天 柱 在 雍 州 西 南 一 萬 五 千 三 百 七 十 里 又 云:「弱 水在 甘 州 張 掖 縣 南 山 下 也.
번역: (사기) 정의 요승 운:대황서경(大荒西經) 운(云) 곤륜지구는 (崑崙之丘)그 바깥에 염화지산(炎火之山)이 있는데 물건을 던지면 타버린다.괄지지(括地志) 운(云):약수(弱水)는 2개의 근원이 있는데,여국 북쪽의 아누달산에서 함께 나와 남쪽으로 흘러 우국 북쪽에서 모이며,,또 남쪽으로 나라의 북쪽을 지난다. 동쪽으로 1리의 거리며 깊이는 1장여,넓이는60보로 배를 타고 건너지 못할 정도는 아니며, 해(海)로 흘러들어간다.아누달산은 일명 곤륜산(一名崑崙山)인데,그산은 천주(天柱)가 되고 옹주(雍州) 서남쪽 일만오천삼백칠십리에 있다.」또 운(云):「약수(弱水)는 감주 장액현 남산아래에 있다.
※위의 서남쪽 일만오천삼백칠십리를 현 위치의 옹주에서 서북쪽으로 일만오천삼백칠십리를 역으로 가면 본시의 옹주위치라고 봅니다. 왜나하면 지명의 지리적 이동과 조작이 이와 같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위와 거리가 동시에 조작되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동이열전이나 사서 중의 해당지역의 거리를 보실 때 이것을 참고하면 그 위치 고증에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索 隱 按:水 經 云 : 弱 水 出 張 掖 刪 丹 縣 西 北,至 酒 泉 會 水 縣 入 合 黎 山 腹.山 海 經 云「弱 水 出 崑 崙 墟 西 南 隅」也.
번역: 색은 안(按):수경(水經) 운(云) : 약수(弱水)는 장액 산단현 서북쪽을 나와,주천 회수현에 이르러 합려산 앞으로 들어간다.
❶정현 왈:모든강이「중수(眾水) 모두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것 하나만 서쪽으로 흐른다
❷산해경 운 약수는 곤륜허 서남쪽 구석을 나온다
❸약수는 곤륜허 서남쪽 구석을 나온다(弱水出崑崙墟西南隅)
◉晉書/紀/高祖宣帝懿
正 始 元 年 春 正 月 ,東 倭 重 譯 納 貢 , 焉 耆 、 危 須 諸 國 , 弱 水 以 南 , 鮮 卑 名 王 , 皆 遣 使 來 獻 . 天 子 歸 美 宰 輔 , 又 增 帝 封 邑
번역: 진서/고조/선제 정시 원년 봄 정월 동왜(東倭)와, 언기(焉耆), 위수(危須諸國)이 조공하였고, 약수(弱水)이남에 선비명왕(鮮卑名王)이 있는데 모두 사자를 보내 조종하였다. 천자가 재상을 칭찬하고 식읍을 주었다.
◉明史/地理三/陝西/陝西行都指揮使司
西 南 有 祁 連 山 . 西 北 有 合 黎 山 . 東 北 有 人 祖 山 , 山 口 有 關 , 曰 山 南 , 嘉 靖 二 十 七 年置 . 又 東 北 有 居 延 海 西 有 弱 水 , 出 西 南 山 谷 中 , 下 流 入 焉 . 又 有 張 掖 河 , 流 合 弱 水, 其 支 流 曰 黑 水 河 , 仍 合 於 張 掖 河 . 又 東 南 有 盧 水 , 亦 曰 沮 渠 川 .
번 역 : 명사/지리지/섬서/섬서생도지위사사: 섬서(陝西)의 서남에는 기련산(祁連山)이 있고 서북에는 합려산(合黎山), 동북에는 인조산(人祖山), 산입구에는 관문이 있고, 남산(南山)이라고 하며 가정(嘉靖) 이십칠년(1548)년에 설치하였으며 동으로 거연해(居延海)가 있다고 하며, 서쪽으로 약수(弱水)가 있고 서남산의 계곡에서 나와 흘러 들어간다. 또한 장액하가 있는데 약수에 합하여 흐르며 그것의 지류를 黑水하라 부른다. 장액하와 합한다. 또한 동안에 로수(盧水)가 있고 일명 저거천(沮渠川)이라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본문 141쪽 태백산
太白山卽水經注之白石山也. 在陝西 眉縣縣南. 接洋縣界. 亦曰太一(太壹). 太白山. 去長安三百里. 不知其高機何. 俗云武功太白. 去天三百. 山下軍行不得鼓角. 鼓角卽疾風雨至. 冬夏積雪. 望之晧然. 洞天記以此爲第十一洞天. 山有大太白. 二太白. 三太白三池. 海天旱. 秦人多禱雨於此. 太白者四方神名也. 參看太一山條. 在甘肅慶陽縣北一百五十里. 黑水原於此
번역: 태백산은 수경주설에 의하면 白石山이다. 섬서성 미현 남쪽과 양현과의 접경지대이다. 太一이라 한다. 太一은 太白山이며, 長安 즉 西安에서 3백 리이다. 그 산 높이는 얼마인지 잘 알지 못한다.속언에 의하면 무공을 세웠다는 뜻으로 太白山이라 했다. 태백산은 높이가 3백이다. 산 아래에서 군인이 행군한다면 언제 병을 얻을지 알 수 없다. 비바람 때문에 질병이 생기게 된다.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흰 눈이 쌓여 있다.산을 바라보면 정말 호연지기가 있는 기상이다. 깊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깊고 깊은 제11 동굴에서 바라보는 하늘같다. 산이 커서 太白이다. 그곳은 세 곳의 못이 있어 하늘이 항상 가물다. 진(秦)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太白은 四方에 있으며, 神의 이름이다. 太一山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太白山은 감숙성(甘肅省) 경양현(慶陽縣) 북쪽 1백5십 리이다. 이곳은 흑수(黑水)가 처음으로 발원하는 곳이다.
※ 위 내용을 간략히 종합해 보면, 약수가 곤륜허를 지나갑니다. 이 약수의 남쪽에는 선비가 있고 서역국 들이 있으며 강(羌)이 있습니다. 이 약수와 흑수가 있는 곳이 바로 물길/말갈/ 여진의 근원지인 장백산이 있는 곳으로 장백산은 곤륜허의 한 부분으로 곤륜허란 산맥 즉 장백산맥이고 백두산이며, 천산(天山), 음산(陰山)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감숙성이고 섬서성과 경계지역이며, 유주와 붙어 있습니다. 오늘날 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주에 사막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함경도 또한 마찬가지 인데 함경도는 여진이 사는 곳입니다, 이 곳역시 사막지형이 존재하고 백두산을 넘어야 하며, 통칭 동북면이라 하는데, 이 동북면이 함정입니다. 서북면이라고 고쳐야 합니다. 만약 하북성이나 함경도에 사막지역, 즉 대막이 있으면, 동북면이 맞으나 사막은 대륙이나, 중앙아시아나 서북, 서쪽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서북면이라고 해야 지리적 모순이 풀어집니다. 즉 이 북해의 지역의 아래와 산해경의 서산경의 지대 즉 천산지역의 이서에 여진이니, 거란이니, 흉노니 하는 북방민족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 이 들은 북노라기 보다는 서융(西戎)이 맞다고 봅니다. 날조사에서 지명이동을 위해 현 몽고와 동북삼성으로 흉노/말갈을 이동시켰기 때문에 말갈/선비는 동호(東胡)가 아니고 서융(西戎이 되며, 흉노/철륵/돌궐또한 같은 종족입니다. 결국은 이들이 강족이고 저족이 됩니다.
조선의 강역에서 물론 북쪽에도 사람이 살았겠지만, 조선과 많은 전쟁을 치른 타타르, 여진, 흉노, 말갈, 선비, 철륵, 돌궐 등등은 천산을 넘어 서쪽지역에서 장사를 하던 소그드지역 사람들입니다. 야만족이 아닙니다. 일부 유목을 하는 집단들도 있었겠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은 대대로 장사를 잘하여 부를 많이 축적하였고 그것을 발판삼아 중앙조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또한 명마의 산지로 유명하며 훌륭한 문화를 꽃 피웠던 곳입니다. 이 유주의 지역은 또한 거란과 선비 돌궐등 호인들과 많이 등장하여 전쟁을 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遼史/卷一 本紀/第一 太祖上
❶ 明 年 秋 七 月 , 以 兵 四 十 萬 伐 河 東 代 北 ,攻 下 九 郡 , 獲 生 口 九 萬 五 千 , 駝 、 馬 、 牛 、 羊 不 可 勝 紀 . 九 月 , 城 龍 化 州 于 潢 河 之 南 , 始 建 開 教 寺 .
번역: 遼 태조 2년 병 사십만(四十萬)으로 하동(河東)과 북(北)을 정벌, 九郡을 공격했는데 낙타, 말 ,양, 소, 양을 구만오천이나 포획하였다. 구월에 潢河의 남쪽에 룡화주를 설치하고 開敎寺를 지었다.
❷西 踰 松 漠 , 北 抵 潢 水 , 凡 五 部 , 咸 入 版 籍 .
번역: 서로는 송막(松幕)을 넘고 , 북으로는 황수(潢水) 에 달했고 , 대개 五部인데, 그 호구를 기록하였다.
※요 태조의 시절에 거란의 강역을 서로는 송막을 넘고, 북으로는 황수(潢水=시라무렌강) 라고 요사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 송막에는 연산(燕山)이 있고 냉산(冷山)이 있습니다. 그리고 흉노들이 회맹을 하는 곳이며 그곳에 龍城이 있습니다. 이 서남방에 북방오군이 있으며 朔方君, 雲中君, 上郡, 隴西군이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다음은 구당서 본기 내용중 안록산에 관한 내용입니다.
◉舊唐書 本記
❶ 六 月 , 范 陽 節 度 使 安 祿 山 賜 實 封 及 鐵 券
번역 : 유월 범양절도사 안록산에게 실봉과 철권을 하사하였다. .
❷ 二 月 丁 巳 , 安 祿 山 兼 雲 中 太 守 、 河 東 節 度 使 .
번역: 이월 정사, 안록산이 운중태수와 하동절도사를 겸하였다.
❸ 三 月 , 朔 方 節 度 副 使 、 奉 信 王 阿 布 思 與 安 祿 山 同 討 契 丹 , 布 思 與 祿 山 不 協 , 乃 率 其 部 下 叛 歸 漠 北
번역: 삼월, 삭방절도부사, 봉신왕 아포사와 안록산이 같이 거란을 쳤는데 록산과 불화가 생겨, 그 군대를 이끌고 막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유주지역 삭방지역에 사막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위서본기를 보면,
◉魏書/本記
二 月 癸 丑 ,征 西 大 將 軍 、 常 山 王 遵 等 至 安 定 之 高 平 , 木 易 于 率 數 千 騎 與 纫 辰 、 屈 丐 棄 國 遁 走 ,追 至 隴 西 瓦 亭 , 不 及 而 還 . 獲 其 輜 重 庫 藏 , 馬 四 萬 餘 匹 , 駱 駝 、 氂 牛 三 千 餘 頭 , 牛、 羊 九 萬 餘 口 .
번 역: 이월 계축, 정서대장군, 상산왕 준등이 안정(安定)의 고평(高平), 목양(木陽)에서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인진, 굴개섭국을 쫒아 롱서(隴西) 瓦停까지 갔는데 잡지 못해서 돌아왔다. 그 짐 수레와 창고를 빼앗고, 말 사십만여필, 낙타(駱駝), 얼룩소(氂牛) 삼천여두, 소,양 구만여구를 포획했다.
이 기사는 북위(北魏)때의 기록인데 상산(常山)은 유주(幽州)이고 안정은 감숙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군대가 같이 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감숙과 하북성 지역이 바로 붙어있어야 하며, 그렇기에 이 두 지역의 군대가 연합작전을 많이 시도 합니다. 또한 롱서까지 추격하여 낙타와 말을 포획하는데 그 주위에 사막지형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반증입니다. 이 북위는 유연과 정령/철륵/선비와 전쟁을 많이 하였으며, 본시 선비족 출신입니다. 이 정령의 후예 철륵은 고려에 복속되어 부용 되는데, 철륵은 본시 카스피해와 아랄해 일대 에서 활동한 부족으로 바로 중앙아시아 지역이며, 이곳은 고려의 양계와 조선의 함경도 최서단 지역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종적으로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한해/북해는 발하슈호 일대/카자흐스탄지역이 되겠으며, 유주는 신강성 투르판,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천산을 넘어서 카자흐와 우즈베키스탄의 소그드/ 부하라 일대까지 감숙은 바로 그 아래지역 즉 우즈벡과 아프칸 일대 즉 흉노 돌궐의 지역이 활동한 지역이라고 라고 생각되며 지금의 사마르칸트를 롱서로 추정합니다. 이 사마르 칸트 즉 페르가나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유주와 감숙성이 붙어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천산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토크막/千泉이 중원과 통하는 관문이 되겠습니다.
조선 강역의 세세한 연구는 차차 진행해 나갈 계획입니다. 현재로서는 그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기본적인 위치에 대해서 말하자면, 백두산(白頭山)와 三危, 陰山, 大興安嶺이 현재의 신강성과 우즈벡의 천산산맥이고 흑수/약수는 아무하, 황하는 시르하, 하수는 여러곳을 섞어 놓은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탑리목하 이며, 어떨 때는 아무하나 시르하를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천산일대와 천산이동이 요동이며, 이곳에 장안/평양이 있으며 태백산, 태행산, 화산, 숭산, 려산, 수양산은 천산의 신강성과 우즈벡 일대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유주는 주무왕과, 한고조, 주몽, 리성계가 일어난 풍폐의 땅이므로 주나라는 한나라는 구려/키타이가 확실하며 따라서 周/漢 은 구려(句麗)의 조대명이며, 나머지 중원의 왕조들 또한 신라와 고구려가 번갈아 가면서 차지하였으며, 이것을 은폐하기 위해 역사조작세력은 중화의 개념을 왜곡하고 민족주의를 만들었으며 사서를 조작하여 세계사를 재편하였고, 조선의 연대를 낮추어 단군을 신화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그들의 노력?으로 우리들은 여태까지 세뇌 당했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2년전 사관이니 지금은 많이 변했지요. 특히 러시아사와 몽골사에 관심을 두면서 조선의 강역을 더 서쪽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되며, 한문사료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사료접근을 했으면 합니다.
방대한 자료 감사합니다. 대륙조선사연구회 카페에서 탈퇴하셨군요.
저도 동의 합니다. 고구려의영역을 서쪽으로 확장시켜 지금의 터키 동쪽의 카자흐스탄, 키리크리스탄 지역도 관심을 가져 봄직도 합니다. 다만 추정일뿐이죠.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의 열정에 감탄합니다. 오늘 이 순간까지 본인이 서지학적으로 객관적 입증이 가능한 "고구려"의 서쪽 영토 한계는 신강성 소륵까지입니다. 정황상으로는 흑해 연안까지는 무난한 것이나, 정황은 어디까지나 정황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모자라는 것으로 기록을 찾아야 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찾다보면, 어디까지가 조선의 영토였을까 기대됩니다. 여러분!감사합니다.
유주는 북해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참고하시구요. 북해의 서남쪽에 대륙의 북방오군이 있었다는 사기 주석을 참고하신다면 조선의 영토한계는 아마도 흑해까지 연장되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