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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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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의 발자취 스크랩 고려사절요4 광종 대성대왕(光宗大成大王)
박중영 추천 0 조회 58 13.11.19 12: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 고려사절요, 민족문화추진회

 

 

 

 

광종 대성대왕(光宗大成大王)

 

 

휘는 소(昭)요, 자는 일화(日華)이니, 정종의 동모제(同母弟)로 태조 8년 을유(925)에 태어났다. 신하에게 예를 갖추어 대우하고 송사를 처리하는 데 현명하였으며, 빈민을 구휼하고 유학을 중히 여기며,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거의 태평의 정치를 이루었는데, 중세 이후로는 참소를 믿어 사람을 많이 죽이고, 불법(佛法)을 지나치게 좋아하며 절도가 없이 사치스러웠다. 왕위에 있은 지는 26년이요, 수(壽)는 51세였다.

 

 

 

 

 

 

경술 원년(950), 후한 건우 3년ㆍ요 천록 4년

 

○ 봄 정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혔다. 왕이 재앙을 물리치는 방법을 묻자, 사천대(司天臺 천문 관측을 맡은 관서)가, “무엇보다 덕을 닦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였는데, 이로부터 항상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었다.
○ 장청진(長靑鎭 평북 영변(寧邊))에 성을 쌓았다.
○ 가을에 위화진(威化鎭 평북 운산(雲山))에 성을 쌓았다.

 

 

 

 

신해 2년(951), 후주 태조 광순(廣順) 원년ㆍ요 목종(穆宗) 응력 원년

 

○ 대봉은사(大奉恩寺)를 도성 남쪽에 세워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또 불일사(佛日寺)를 동쪽 교외에 세워 선비(先?) 유씨(劉氏)의 원당으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서경 중흥사(重興寺) 구층탑에 불이 났다.
○ 12월에 비로소 후주(後周)의 연호를 시행하였다.

 

 

 

 

임자 3년(952), 후주 광순 2년ㆍ요 응력(應曆) 2년

 

○ 봄에 안삭진(安朔鎭 평북 운산(雲山))에 성을 쌓았다.
○ 이해에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봉(徐逢)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계축 4년(953), 후주 광순 3년ㆍ요 응력 3년

 

○ 후주가 위위경(衛尉卿) 왕연(王演)과 장작소감(將作少監) 여계빈(呂繼贇)을 보내와 왕을 책봉하여 특진 검교태보사 지절 현도 주도독 충 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州都督充大義軍使兼御史大夫高麗國王)으로 삼았다.
○ 겨울 10월에 경주(慶州) 황룡사(皇龍寺) 구층탑에 불이 났다.

 

 

 

갑인 5년(954), 후주 세종(世宗) 현덕(顯德) 원년ㆍ요 응력 4년

 

○ 봄에 숭선사(崇善寺)를 세워 선비(先?)의 명복을 빌었다.

 

 

 

 

을묘 6년(955), 후주 현덕 2년ㆍ요 응력 5년

 

○ 대상(大相) 왕융(王融)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광평시랑 순질(荀質)을 보내어 즉위한 것을 경하하였다.

 

 

 

병진 7년(956), 후주 현덕 3년ㆍ요 응력 5년

 

○ 임진현(臨津縣 경기 파주(坡州))에서 흰 꿩을 바쳤다.
○ 후주가 장작감(將作監) 설문우(薛文遇)를 보내와 왕을 올려 책봉하여 개부의 동삼사검교태사(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로 삼고, 이어 백관의 의관을 중국 제도에 따르도록 하였다. 전 절도순관 대리평사(前節度巡官大理評事) 쌍기(雙冀)가 설문우를 따라왔다가 병이 나서 머물러 있었는데, 병이 낫자 왕이 불러보니 그가 응대하는 것이 왕의 뜻에 맞았다. 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후주에 표문(表文)을 올려 쌍기를 요속(僚屬)으로 삼도록 청하고, 드디어 올려 써서 한 해도 지나기 전에 문병(文柄)을 맡기니 당시의 의론이 불만스러워 하였다.
○ 노비를 조사하여 시비를 살펴 분별하도록 명하자, 그 주인을 배반한 노비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윗사람을 능멸하는 기풍이 크게 유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고 원망하였는데, 왕비가 간절히 간하여도 듣지 않았다.

 

 

 

정사 8년(957), 후주 현덕 4년ㆍ요 응력 7년

 

○ 봄 정월에 왕이 구정(毬庭)에서 활 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무오 9년(958), 후주 현덕 5년ㆍ요 응력 8년

 

○ 여름 5월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쌍기에게 명하여 공거(貢擧 과거(科學))를 맡도록 하여 시(詩)ㆍ부(賦)ㆍ송(頌) 및 시무책(時務策)을 시험하여 진사(進士)를 뽑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방(榜)을 발표하고, 갑과(甲科)의 최섬(崔暹) 등 2명, 명경(明經) 3명, 복업(卜業)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쌍기의 건의를 채용하여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했는데 이로부터 문풍이 비로소 흥성하였다.
○ 검은 학이 함덕전(含德殿)에 모여들었다.
○ 이해에 후주가 상서 수부원외랑(尙書水部員外郞) 한언경(韓彦卿)과 상연봉어(尙輦奉御) 김언영(金彦英)을 보내 비단 수천 필을 싸가지고 와서 구리를 사가지고 갔다.

 

 

 

기미 10년(959), 후주 현덕 6년ㆍ요 응력 9년

 

○ 봄에 좌승(佐丞) 왕긍(王兢)과 좌윤(佐尹) 황보위광(皇甫魏光)을 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 가을에 사신을 후주에 보내었다.
○ 후주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대교(戴交)를 보내왔다.
○ 겨울에 사신을 후주에 보내어 구리와 수정을 공물로 바쳤다.
○ 후주의 시어 청주수(侍御淸州守) 쌍철(雙哲)이 오자, 좌승으로 임명하였다. 쌍철은 쌍기의 아버지인데, 쌍기가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왕긍을 따라왔다.

 

 

경신 11년(960), 송(宋)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ㆍ요 응력 10년

 

○ 봄 3월에 최광범(崔光範) 등 7명과 명경 1명, 의업 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다. 원윤(元尹) 이상은 자삼(紫衫)으로,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단삼(丹衫)으로, 도항경(都航卿) 이상은 비삼(緋衫)으로, 소주부(小主簿) 이상은 녹삼((綠衫)으로 하였다.
○ 개경을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을 서도(西都)라 하였다.
○ 습홀(濕忽)에 성을 쌓고 가주(嘉州 평북 박천(博川))로 승격시키고, 송성(松城)에 성을 쌓고 척주(拓州)로 승격시켰다.
○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과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참소하니, 이들을 폄출시켰다. 이로부터 참소하는 간신이 세력을 잡아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을 무함하고, 종은 그 주인을 고소하며, 자식은 그 부모를 참소하여 감옥이 늘 꽉 찼으므로 따로 임시 감옥을 두었고, 죄없이 죽음을 당한 자가 잇달았다. 왕이 시기가 날로 심해지니, 종족(宗族)들도 몸을 보전하지 못하는 이가 많았으며, 비록 하나뿐인 아들 주(?)까지도 의심하여 멀리하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니,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감히 두 사람이 짝지어 이야기하는 이가 없었다.

 

 

신유 12년(961), 송 건륭 2년ㆍ요 응력 11년

 

○ 여름 4월에 큰 물이 져서 인가를 떠내려보냈고 물이 붉은 빛깔로 변하였다.
○ 이해에 수영궁궐도감(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하고 정광(正匡) 왕육(王育)의 집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 왕거(王擧)등 7명과 명경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임술 13년(962), 송 건륭 3년ㆍ요 응력 12년

 

○ 겨울에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를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계해 14년(963), 송 건덕(乾德) 원년ㆍ요 응력 13년

 

○ 여름 6월에 궁궐에 돌아와 거처하고, 조(詔)하기를, “오랫동안 이궁(離宮)에 있으면서 백관이 아뢰는 일을 친히 듣지 않은 것이 많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에 혹시 의심하여 멀리함이 있을까 염려된다. 이제는 궁궐의 수리가 끝났으므로 정사를 들을 곳이 있으니 모든 너희 백관들은 각기 너희의 일을 공경하여 그전대로 나와 아뢰어서,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하여 서로 막힘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귀법사(歸法寺)를 세우고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였다.
○ 겨울 12월에 비로소 송의 연호를 시행하였다.
○ 송이 책명사(冊命使) 시찬(時贊)을 보내왔다. 시찬 등이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90명이나 물에 빠져 죽었는데, 시찬만이 홀로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왕이 특별히 후대하고 위로하였다.

 

 

 

갑자 15년(964), 송 건덕 2년ㆍ요 응력 14년

 

○ 봄 3월에 김책(金策)과 명경ㆍ복업 각 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거둥하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김책에게 갈옷을 벗고[釋褐] 공복(公服)을 내려주어 잔치에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 가을 8월에 사도(司徒) 박수경(朴守卿)이 졸하였다. 수경은 성품이 용감하고 굳세며 임기응변의 지혜가 많았는데, 태조를 섬겨 원윤(元尹)이 되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자주 침략하니, 태조가 수경에게 가서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는데, 견훤의 두 번째 침략에 수경이 갑자기 기이한 계책을 써서 이를 격퇴하였다. 조물군(曹物郡)의 싸움에서 태조가 삼군(三軍)을 나누어 대상(大相) 제궁(帝弓)을 상군(上軍)으로, 원윤 왕충(王忠)을 중군(中軍)으로, 수경과 은녕(殷寧)을 하군(下軍)으로 삼았다. 싸움이 시작되자, 상군과 중군은 이기지 못하고 수경의 군사만이 이겼다. 태조가 기뻐하여 원보(元甫)로 승진시키자, 수경이 아뢰기를, “신의 형 수문(守文)이 현재 원윤인데, 신이 그 위의 벼슬을 하게 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드디어 모두 원보로 삼았다. 발성(勃城)의 싸움에서 태조가 포위를 당했는데, 수경이 힘을 다하여 싸운 덕에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경자년에 전제를 정할 때에 수경에게 특별히 밭 2백 결을 주었다. 정종(定宗)이 즉위한 초기에 내란을 평정한 것은 대부분 수경의 공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아들 승위(承位)ㆍ승경(承景)ㆍ승례(承禮)가 참소를 입어 옥에 갇히니, 수경이 근심하고 분노하여 졸하였다.

 

 

 

을축 16년(965), 송 건덕 3년ㆍ요 응력 15년

 

○ 봄 2월에 아들 주(?)에게 관례(冠禮)를 시켜 정윤내사 제군사 내의령(正胤內史諸軍事內議令)으로 삼고, 신하들을 장생전(長生殿)에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 대승 내봉령(大丞內奉令) 왕노(王輅)를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자, 황제가 왕노에게 상서 좌복야 식실봉 3백호(尙書左僕射食實封三百戶)를 내렸다.
○ 가을 7월에 내의령(內議令) 서필(徐弼)이 졸하였다. 서필은 이천(利川) 사람으로 천성이 통달하고 민첩하여 처음에는 사무에 능하였으므로 등용되었다. 왕이 일찍이 재신(宰臣) 왕함민(王咸敏)ㆍ황보광겸(皇甫光謙)과 서필에게 금으로 만든 술그릇을 내려주었는데, 서필만은 받지 않으면서, “신이 외람되이 재상의 자리에 있어 이미 은총을 많이 받았는데, 금그릇까지 내려주시니 더욱 분수에 넘쳐 두렵습니다. 또, 복식(服飾)과 기용(器用)은 등차를 밝히고, 사치와 검소는 치란에 관계되니, 신하가 금그릇을 쓰게 되면 주상께서는 장차 무엇을 쓰시렵니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경은 덕을 보배로 여기고 보배를 보배로 여기지 않으니 나는 마땅히 경의 말을 보배로 삼아야 되겠다." 하였다. 후에 인하여 나아가 왕을 뵙고 아뢰기를, “주상께서는 공이 없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지 마시고 공이 있는 사람을 잊지 마소서." 하니, 왕이 말이 없었다. 그 이튿날 근신을 보내어 공이 있는 사람과 공이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 물으니 서필이 대답하기를, “공이 있는 사람은 원보(元甫) 식회(式會)이고, 공이 없는 사람은 저 같은 무리이니, 이 말을 왕에게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이때 왕이 귀화해 온 중국 사람에게 예를 갖추어 후대하여 신하들의 집과 딸들을 골라 그들에게 주었다. 어느날 서필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거처하는 집이 조금 크니,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지금 귀화해 온 중국 사람은 관직을 가려서 벼슬하고 집을 골라 거처하는데, 세신(世臣)ㆍ고가(故家)들은 도리어 대부분 살 곳을 잃고 있습니다. 신이 진실로 자손을 위하여 생각해 보니, 재상이 거처하던 집은 저들이 능히 소유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신이 살아 있을 적에 이를 가져가소서. 신은 녹봉의 나머지를 가지고 다시 작은 집을 지어 자손들에게 준다면 거의 후회가 없을까 합니다." 하였다. 왕이 노했으나 후에 깊이 느끼고 깨달아 그의 선함을 칭찬하고, 이후로 다시는 신하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 내구(內?)의 말이 죽자, 왕이 주관하는 사람을 죄주려고 하였다. 서필이, '공자가 마구간에 불이 나자 사람이 상했는가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는 내용을 인용하여 간하니, 말을 주관하는 사람이 죄를 면하였다. 그가 거리낌없이 곧은 말을 함이 이와 같았다. 정민(貞敏)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왕의 묘에 배향되었다.

 

 

 

병인 17년(966), 송 건덕 4년ㆍ요 응력 16년

 

○ 최거업(崔居業) 등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정묘 18년(967), 송 건덕 5년ㆍ요 응력 17년

 

○ 낙릉군(樂陵郡 평북 박천(博川))에 성을 쌓았다.

 

 

무진 19년(968), 송 개보(開寶) 원년ㆍ요 응력 18년

 

○ 여름 5월에 위화진(威化鎭 평북 운산(雲山))에 성을 쌓았다.
○ 이해에 홍화사(弘化寺)ㆍ유암사(遊巖寺)ㆍ삼귀사(三歸寺) 등 절을 세웠다. 왕이 참소를 믿어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마음속으로 의심과 두려움을 품어 죄업을 제거하고자 재회(齋會)를 널리 베푸니, 무뢰배들이 거짓으로 중이 되어 배불리 먹기를 구하고, 구걸하는 자가 모여들어 먹을 것을 찾으며, 더러 떡ㆍ미두(米豆)ㆍ시탄(柴炭)을 서울과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는데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방생소(放生所)를 벌여 두고 그 옆 가까운 절에 나아가 불경(佛經)을 개연(開演)하고 도살을 금지시키니, 내선(內膳)을 시전에서 사다가 올리게까지 되었다.

 

 

 

기사 20년(969), 송 개보 2년ㆍ요 경종(景宗) 보녕(保寧) 원년

 

○ 겨울 11월에 왕제(王弟) 욱(旭)이 졸하였다.
○ 영삭진(寧朔鎭 평북 태천(泰川))에 성을 쌓았다.

 

 

 

 

경오 21년(970), 송 개보 3년ㆍ요 보녕 2년

 

○ 안삭진(安朔鎭 평북 운산(雲山))에 성을 쌓았다.
○ 귀법사(歸法寺)에 행차하였다.

 

 

 

 

신미 22년(971), 송 개보 4년ㆍ요 보녕 3년

 

○ 겨울 12월 임인일에 지진이 있었다.

 

 

 

 

임신 23년(972), 송 개보 5년ㆍ요 보녕 4년

 

○ 봄 2월에 지진이 있었다.
○ 가을 8월에 사면령을 내렸다.
○ 이해에 양연(楊演) 등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내의시랑(內議侍郞) 서희(徐熙)를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제(制)하여 왕에게 식읍을 더 주고 추성 순화 수절 보의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의 칭호를 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 병부상서부사 내봉경(檢校兵部尙書副使內奉卿)을, 최업(崔業)에게는 검교 사농경 겸 어사대부 판관광평시랑(檢校司農卿兼御史大夫判官廣評侍郞)을, 강례(康禮)에게는 검교 소부소감 녹사 광평원외랑(檢校少府少監錄事廣評員外郞)을, 유은(劉隱)에게는 검교상서 금부낭중(檢校尙書金部郞中)을 주었다.

 

 

 

계유 24년(973), 송 개보 6년ㆍ요 보녕 5년

 

○ 봄 2월에 백사유(白思柔) 등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이해에 장평진(長平鎭 함남 영흥(永興))ㆍ박평진(博平鎭 함남 영흥(永興)) 두 곳과 고주(高州 함남 고원(高原))에 성을 쌓고, 또 신도성(信都城 평북 박천(博川))을 수축하였다.

 

 

 

갑술 25년(974), 송 개보 7년ㆍ요 보녕 6년

 

○ 봄 3월에 한인경(韓藺卿) 등 2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이해에 서경의 거사(居士) 연가(緣可)가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을 받았다.

 

 

 

 

 

을해 26년(975), 송 개보 8년ㆍ요 보녕 7년

 

○ 여름 5월에 왕이 병환이 나서 갑오일에 정침(正寢)에서 훙하였다. 대성(大成)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는 광종(光宗)이라 하며, 헌릉(憲陵 경기 개풍군(開?郡) 영남면(嶺南面) 심천리(深川里)에 있음)에 장사지냈다. 태자가 즉위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려서 귀양간 사람을 돌아오게 하고 옥에 갇힌 사람을 놓아 보내며, 죄적(罪籍)을 씻어 주고 벼슬길이 막혀 있던 사람을 탁용(擢用)하며,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흠채(欠債)를 면제해 주며, 조(租)ㆍ조(調)를 감면해 주고 임시감옥을 헐어 버리며 참서(讒書)를 불살라 버리니, 서울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이제현이 찬(贊)하기를, “광종(光宗)이 쌍기(雙冀)를 임용한 것은 현인을 탁용함에 한계를 두지 않은 것이라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쌍기가 과연 어질었다면 어찌 임금에게 선한 도리에 대해 말씀을 드려 왕이 참소를 믿고 형벌을 지나치게 행하지 않도록 할 수 없었던가. 그러나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일은, 광종이 본래 문(文)을 가지고 풍속을 변화시키려 했던 뜻을 보고서 쌍기 역시 그 뜻을 받들어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니,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부화(浮華)한 글을 먼저 창도하였으므로 후세에 와서 그 폐단을 감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정승 김부(金傅)에게 벼슬을 높여 상보 도성령 식읍 1만호(尙父都省令食邑一萬戶)로 삼았다.
○ 육대(六代)의 존호를 더하여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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