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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속에 나타난 고요의 여러 형태와 평론의 눈
채 천 수
시란 강력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고요한 가운데 회상되는
감정에서부터 솟아난다. -워즈워드
1.고요에 대한 나의 독백
-왜 고요인가?
고요는 만물의 중심을 세운다. 고요는 길이 끝나는 곳에서의 산, 산이 끝나는 곳에서의 길 떠남과 만남의 사이, 슬픔과 아름다움의 사이, 그대 사랑과 내 그리움의 사이, 사유(思惟)의 단정한 거리 어디쯤에 고요는 시라는 반가사유상으로 앉아있기 때문이다.
-고요의 뿌리
시 속에서 고요는 가치 판단을 넘어 늘 또 다른 하나의 징후이다. 즉 삶의 露呈에 따른 나름의 인식을 요구하는 세계와 자아 사이에서 겪는 인생문장부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고요는 대상에 따른 작자의 예술적 고뇌를 수용하고 변용하여 그에 따른 심리적 정서를 언어의 그물망으로 드러낸다.
-고요의 모습
오랜 노력으로 맞이하는 고요의 깊이는 시작 태도를 바꾼다. 이것은 대상에 골몰하는 시인의 경험과 상상의 깊이를 반영하는 구체성으로 시의 씨앗이 되거나 거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 작품에서 온전히 묻어나는 고요의 빛깔에는 감정의 정교성과 구조적 미학이 필연적으로 발견된다.
2. 남성성의 고요
- 세밀
남도민요/ 한 가락에/ 녹아 흐른 강나루는// 몇 구비/ 단애를 돌아/ 어린 시절 들려준다// 갓 눈 뜬/ 실버들 가지/ 휘어잡고 오는 봄.// 아련히 / 떠오르는/ 고향의 강나루엔// 잔잔히 흐른/ 봄 노래가/ 한창 메아리 칠게다// 연초록/ 마음 한 오리/ 강둑 따라 굽어 돌고. -정재익의 〈봄,강나루〉전문
*산업화 이전에 牧歌的 농촌에서 청춘을 보낸 현대시조 1세대들의 전형적인 선경후정의 작법으로 섬세한 봄의 공감각적 표현이 뚜렷하다.
-선비
°수신
저 건너 한길에는 금빛 수레 부시던 날/ 나는 오직 너 보듬고 봄볕 마중 서둘렀네/ 묵정밭 갈고 일구며 노래로도 목청 쉬며// 한 줄기 오는 봄비 못자리로 물꼬 트면/ 뿌린 씨 알알마다 눈을 뜨고 꿈이 트고/ 낙낙히 솟구쳐 올라 구름 가는〔耕〕종달새여// 한세상 쪼는 부리 탁목조로 사는 뜻은/ 사시절 이울잖은 하늘 동산 그 아닌가/ 이 밖에 생애의 뿌리 심을 땅이 또 있을까
.-하영필의 〈園丁의 노래〉전문
* 이 시도 현대시조 1세대의 시로 園丁은 정원사를 말함인데 시 전편에 흐르는 安貧樂道의 정서에는 선비의 爲己之學 정신이 배어있다.
°마디(節)
맥없이 크지 않고/ 매듭 분명 짓고 산다.// 속을 비워 굳은 의지/ 때를 봐선 휘어진다.// 모두들/ 떠나간 계절/ 홀로 지킨 퍼런 눈빛. -김몽선의〈 대나무〉전문
*나무가 안으로 그려지는 나이테로 제 철학을 기록하듯 대나무는 자기 매듭으로 자존을 새기는 것, 인생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게 한다.
°향반적(鄕班的) 소시민성
청빈으로 살아 왔다/짓밟힌 질경이처럼//험한 풍랑 눈 귀 막고/ 숨죽이며 살아 왔다.//새 시대/이끼 걷힌 날/꽃향처럼 살고 싶다//물풀도 되감기듯/허리 못 편 이 고뇌//살을 에는 동천에도/목숨 지켜 살았는데//갯바위/사슬을 풀고/훌훌 털고 가고 싶다.//하얀 물새 남빛 바다/조여 오는 삶의 무게//더러는 굴레 쓰고/노을 털고 일어나듯//이 번뇌/가을꽃처럼/바람결에 날고 있다.
-장식환의〈갯바위〉전문
*
갯바위는 고착된 운명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시인 자신의 단단한 결의로도 읽힌다. 짓밟힌 질경이는 살아온 세월, 살을 에는 동천은 외부적 환경으로 읽힌다. 이런 상황의 극복 방법으로 자신의 내부절제를 담보로 하는 청빈으로 삶의 균형을 잡는 모습이 선연하다.
°응대(應對)
푸른 하늘 가로지르는/ 큰 말씀 녹이고도// 솔바람도 몇 마디쯤/ 녹여서 앉은 맵시// 귓속 말/ 내 줄 것 같아/ 무릎걸음 다가선다 -신후식의 〈청화백자〉전문
-관계
°懷疑1(사람)
내 오늘 서울에 와/ 만평(萬坪) 적막(寂寞)을 산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보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名銜).-서벌의〈서울1〉전문
*바닥난 호주머니에 마지막 한 명의 벗까지 명함으로 남아 있는 인간관계
°懷疑2(사물)
휴대폰의 설명서를 읽는다/100쪽 넘는 깨알 같은 글씨/설명은 설명 이상으로 난해하고/나는 자꾸 밖으로 밀려난다/이것도 눌러보고 저것도 눌러보고/기계 앞에 조롱당한다// 무엇 때문에 이 봄날/ 부질없는 짓에 얽매이는가/이러다간 나도 끝내/ 누구에게도 해독되지 못할 암호로 남아/설명서로도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낯선 기계가 되어/그들도 나도, 더 깊이 절망한다 -송진환의 〈조롱당하다〉전문
*아날로그 세대가 디지털의 세계를 낯설어하는 고통이 반영
°인연
채워도 차지 않는/ 목마른 계절에 와// 업보도 나눠지며/ 가난도 기워 놓고// 밤이슬 눈물로 젖던/ 가을은/ 가을이 게 하라.// 몰래 담아 숨겨 보며/ 걸어둔 낮달 하나// 고이 접은 갈피마다/ 그리움은 물이 들고// 석류꽃 속살로 익던/ 가을은/ 가을이게 하라.// 언제나 그 가슴은/ 감꽃 냄새가 난다.// 연 깊어 맺은 목숨/ 하늘 보며 별을 따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 가을은 가을이게 하라.
-김세환의 〈가을은 가을이게 하라〉전문
* ꡒ가을은 가을이게 하라ꡓ는 단순 반복이 오히려 깊은 사유를 불러오는 것은 왜 일까? 성숙한 삶은 무엇인가?
-명암
심인고등 운동장에서/ 무심히 바라본 벽// 그것이 영대병원/ 영안실 경계란 걸// 한 개비 담배를 물고/ 돌아서서 느꼈다.// 문으로 가려 놓은/ 이승과 저승의 두께// 앞발은 빛을 밟고/ 뒷발은 죽음에 묻혀// 그대로 눈을 감는다./ 사는 것이 이런 건가.// 우리가 악수를 나눠/ 서로 잔을 주고받는// 이 작은 몸짓으로도/ 달랠 수 없는 말을// 감추고 떠나고 나면/ 억새풀만 흔들릴까.-류상덕의 〈그리고 별리別離〉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자연의 순환 어둠에서 빛을 바라보는 빛에서 어둠을 바라보는 明轉과 暗轉은 만남과 별리의 연속인 것
- 성찰(省察)
°개인1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 발자국이여/상처를 꿰매고 요오드를 바르는/가파른 생의 기록을 너는 새겨놓았구나//서투른 보행으로 걸려 넘어지고/스스로 힘겨워 무릎을 꿇기도 했던/지금은 추억으로만 다가오는 이름 이름들.//망각이 결코 미덕만은 아니다/칠흑이 비춰주는 별빛의 형형함으로/새로운 행로를 위해/나는 너를 읽고 있다
-이우걸의 〈흉터〉전문
*몸에 난 상처(흉터)를 칠흑이 비춰주는 별빛으로 환치
°개인2
낙엽 지는 가을밤에 쪽마루에 나와 앉아 에세 한 개비 불붙여 피워 물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서쪽으로 흐릅니다. 가을이 막 왔을 적에 모질게 불던 태풍도 그래요 담배 연기가 흐르는 방향으로 몸부림 거칠게 치면서 다 뒤엎고 갔습니다.//
늘 보던 솔가지 처참하게 찢어져서 허연 속살 드러낸 채 신음소리 높이는데 저 상처 아물기도 전에 가을은 벌써 등을 돌립니다. 햇살이 내리고 더러 달빛도 내릴 테지만 찢긴 솔가지 위로 매우 서리도 내리겠죠. 그 아픔 몸서리쳐져 담뱃불 비벼 끕니다. //
나는 그냥 섰는데 얄궂게 얄궂게도 바람이 다친 가지 쓰다듬고 있습니다. 나무가 바람에 입은 상처를 바람 불러 다독이는 거죠. 내게로 친 바람에도 나무가 일러주네요 아프다는 소릴랑 끝끝내 아껴놓고 살아서 얻은 상처는 살아가며 달래라고…
-문무학의 〈나무-바람에 입은 상처 바람 불러 다독이는〉전문
*ꡒ나무가 일러준다.ꡓ는 말은 시인의 몸속에 나무가 들어오면서부터 그도 나무가 되어 스스로 중얼거리는 것
°개인3
1 고강도 콘크리트 황색 점자블록/흰 지팡이 끝으로 돌출된 길을 따라//넉 줄의/방향표시용 블록/더디게 긁고 간다.//지금쯤 적색불이 깜빡거리고 있을 게다/더는 나아갈 수 없는 서른 여섯 개의 원//몇 개쯤 발바닥에 밟혀/멈칫거리며 선다.//2 길은 누군가에 의해 유도되는 것이다/흰 지팡이 끝으로 더듬더듬 더듬어 갈 때//불현 듯/멈춰 설 자리/일러 주는 것이다.
-김세진의 〈점자블록 혹은 유도블록〉전문
*빛을 잃어버린 어둠속 성찰은 더듬더듬 감각이다 방향을 잡고 길을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마치 잘 풀리지 않는 시 쓰기의 내면적 행위로 읽힌다.
°역사
저기 저 산동네의 적요(寂寥)를 / 찰방찰방 짚어 가는/ 한 줄기 맑은 눈물 같은 의미의 실개천의/ 투명한 저 자유의 몸짓은 피를 먹고 사는가/ 마른 억새 꽃대 끝 잘 영근 씨알에게/청옥빛 하늘을 닮은 풀벌레의 시린 목청에/ 물으며 또 물어보며 산을 내려옵니다.
-이강룡의〈다부동에서 쓰는 편지〉중 일부
-집중과 승화
솔은 누구를 위해/ 먼 강을 거느리며/오월 남천南天의 종달새는/어느 가문을 따르는지/단 하나 지상에 남아/지켜보자던/ 그 까막눈.//좌절이 꽃처럼 피던/왕조의 땅을 지나/아무도 볼 수 없는/세월 밖에 화폭을 펴고/단계연 먹물에 잠긴/별을 지키던 사람.//듬듬히 그저 듬듬히/ 두 눈을 모두 바치고/잔마다 넘쳐흐르던/ 그 단장斷腸의 밤도 바치고/비로소 매화 빈가지/신의 미소를 얻는다.
-민병도의 〈오원 吾園의 눈〉전문
*文字香 書卷氣가 진정 무엇인가?
-적(寂)
。안(內)
아내가 꽂아 놓은/달맞이꽃/곁에 두고//법정 수상록을/염주 헤듯/ 읽는 저녁//하나 둘/ 꽃잎이 열리며/ 내려놓는/적막의 화음和音
-조동화의 〈적막을 듣다〉전문
*달맞이꽃과 법정 수상록을 보고 읽는 작자 자신의 내적 정서의 고요
。밖(外)
작은 등불 밝히고, 일주문 밖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전화를 거는 젊은 여승(女僧)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녁부터 시작한 산사(山寺)의 눈 공양은 새벽이 와도 그치지 않고/ 고요한 절 마당 위로 더욱 적요(寂寥)한 눈만 덮여 법(法)도 말씀도/ 동백나무들의 뿌리마저 추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몰래 마음 문 열고 나와, 끊어진 세상의 길에 줄 이으며/ 파르스름하게 떨리는 목덜미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 누가 볼까, 눈발은 소리 없이 굵어졌지만/ 문 안에서 따라나온 긴 발자국들도 이내 숨어버렸지만
-정일근의 〈적(寂)〉전문
*적(寂)이란 대상에 대한 인간의 내외적 정서이지 홀로 독립하여 있지 않다.
-洞察
° 응시凝視 →응시 鷹視(밤의 고요)
나는 달의 문하門下다/달은 높이 떠 있으므로//차면 기우나니,/따라잡지 못할 강론//한 번도 강림한 적 없으되/늘 내 곁에 가득한 달// 진흙 수레를 끌고/홀로 가는 구만리장천// 오직 달빛만이/가르침의 전부인 것//물속에 잠겼다고 보는가, /그마저도 중천인 것// 초사흘달이 초나흘 달을 위해 초이레 달이 초여드레 달을 위해//조금씩 베어 먹던/그늘을 남겨 두느니,//건너간 하늘 길섶에/ 먹물 장삼 한 벌
-박기섭의〈 달의 문하門下〉전문
*시인은 달을 보고(凝視) 있지만 실상은 자신의 내면을 鷹視하고 있는 것
필자는 이 시를 ꡐ전통의 창조적 변형ꡑ이란 주제로 시조월드2008상반기호에서 논한 적이 있다. 까닭은 달을 다루는 기존의 완상 기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수용의 깊이를 보이기 때문이다.(채천수)
*자기응시를 전제로 가장 눈부신 자기가치를 드러낸다는 뜻에서 시는‘自尊’이다. 자존이 무너지는 곳에 아부와 사이비가 싹트고, 혼란과 무질서가 생겨난다.
시는 내게 고뇌의 발톱이다. 자라면 영락없이 살을 파고든다. 아픔을 참으며 애써 잘라내도 이내 되자라 살을 파고든다. 끝내는 이 발톱을 다 깎지 못하고 가는 것이 삶의 길인 줄은 알지만, 목숨이 있는 날까지 비굴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만은 늘 무성하다. 그 무성함이 때로 내 의식의 처소에 서늘한 안식의 그늘을 드리우기도 한다.
- 박기섭의〈묵언집〉산문 중
°각도
유모차를/천천히 밀며/길을 가는/할머니//기울어진 몸이 점점, 땅에 가까워져서//
종내는/ 저 언덕에 기대어/흙이 되어/갈 것이다-이정환의 「예각에 대하여」전문
* 고요에 각도가 있다고? 누구에게나 그림자처럼 붙어오는 삶의 비극적 방향성(기울기)은 물론 있지. 경건한 곳이나 자기 삶에 절을 하고 모두 굽히지 않는가? 죽음이 없는 곳에 예술이 존재하지 않듯이 인간의 육신은 순환구조를 갖는다 (체온→火, 몸→水,호흡→風,뼈→土)
° 향념(向念)
한 그루 한 그루가 줄을 서준 힘이다/이렇게 붙박여서 제 그늘을 드리우며/나무와 나무 사이는 /푸른 길이 되었다//더러 비 오는 날 /약속한 나무에서/한 개의 우산은 접고/ 한 개의 우산은 편 채/단둘이 마주해봄은 또 얼마나 싱그럽나.//2열종대로 선 메타세콰이어 /조붓한 길을 걸으면/서로가 서로에게 멋진 길이 되어보자는/저물녘 짙은 대사를 /이 나무들이 몇 줄 준다.
- 채천수의〈189그루 메타세콰이어 길〉전문
* 별 말이 필요 없는 공간이 있다. 그냥 둘이 한마음으로 걷고 싶은, 나무도 길을 내는데 하물며 사람과 사람 사이야 더 무슨 말이 필요하나.
° 해학(낮의 고요)
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간다/
우주의 넓이가 문득, 궁금했던 모양이다//봄날도 환한 봄날 자벌레 한 마리가 호연정 대청마루를 자질하며 건너가다 돌아온다/
그런데, 왜 돌아오나/아마 다시 재나보다
-이종문의 〈봄날도 환한 봄날〉전문
*벌레활동에 대한 인간의 해석으로 그 해석은 자신의 평소 수양하는 바를 반영한다.
3.여성성의 고요
-그리움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이영도〈모란〉전문
그리움과 고독은 동전의 앞뒤 같은 것. 모란이 여심을 물고 동경하는 하늘은 멀다. 그리운 상대가 아득하게 멀수록 고독은 깊어지는 법.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어디 바람만 옷자락을 흩는 것이겠는가? 옷자락보다 먼저 그리움이 가득한 마음이 자꾸 흔들리면서 모란은 고독으로 지쳐가는 것.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다림이 있다. 그래서 삶은 본질적으로 고독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거룩한 모성성 안에는 이 기다림의 고독이 8할이 넘는지 모른다.
-종교
°은총
봄 오면 고맙더라/ 눈물나게 고맙더라// 천천히 몸 일으키는/ 앞산을 보는 것도// 꽃보다 먼저 찾아와/ 햇살 푸는 새떼들도// 새 속잎 갈아입고/ 떡잎 슬쩍 밀어내듯// 하늘 아직 나직해도/ 맑은 소리 높이 뜨고// 한때는 버리고 싶었던/ 세월까지 고맙더라.
- 정표년의 〈봄 오면〉전문
*자기 혼자만 봄을 가지는 것도 아닌데 고맙다고 한다. 얼마나 기도가 깊으면 여기까지 올까? ꡒ한때는 버리고 싶었던/ 세월까지 고맙더라ꡓ에 오면 이 글을 읽는 사람 몸은 종처럼 우는 것
°상호텍스트성
제 안의 부처님을 보이시는 돌멩이/ 제 안의 환한 날개 펼치시는 애벌레/ 내 안의 나를 발견하는 이는 그러나 바로 당신//그대 내게 오셨기에 돌을 벗고 허물 벗고/날아가는 연푸른 샤갈의 옷자락처럼/내 안에 영혼이란 것도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일연의 「나를 발견하는 이」전문
역설이 있다. 초․중장에는 자신이 자신을 발견하지만 종장에는 ꡒ내 안의 나를 발견하는 이는 그러나 당신ꡓ이라고 한다. 인간만이 가능한 범신론적인 사유의 체계다.
-骨氣
한라의 흰 눈썹이 꿈틀 용을 쓰면/태산쯤 황하쯤은 완당 阮堂에 둔다는 듯/기꺼운 조선의 붓들 그 문전에 졸卒하다//한 채 선을 앉히면 난바다가 이끌리고/한 채 점을 얹으면 산이 와 엎드리고/ 팔 아래 거느린 세상 만 획이 일획이니// 인적 없는 적소에 적 笛이 스친 듯한/갈필 그 자취마다 만상이 서성일 때/세한이 깊고 깊어서 사위가 죄다 먹이다//하여 다시 온 바람을 붓 끝에 부리느니/비우고 비운 뒤에 혼의 집을 짓느니/일획이 만 획을 품고 한 세계가 졸 拙하다
-정수자의 「혼의 집, 세한도를 엿보다」전문
*자식 위해, 나라 위해, 만획이 일획이고 일획이 만획인 붓을 위해 세운 고요의 뼈대여! 네 거느린 산이며 강이며 난바다여 붓 안에 있고 또 붓 바깥에 있구나.
-思慕
눈자위가 찔끔거려 사정없이 깎아 드리고/웃자란 상처들 여남은 개는 솎아내도/서늘한/ 그 사랑까진/잘라내지 못했습니다.
-조명선의 〈벌초〉일부
*살아서 더는 갈 수 곳에서 그 분의 묘를 벌초합니다. 여자 분이 오래 손을 보지 못한 묘의 처지를 ꡐ사정없이 깎아 드리ꡑ지만 ꡐ그 사랑까진 잘라내지ꡑ못한답니다. 그래요. 먼저 간 분을 사모하는 마음이 한적한 묘 앞에서는 더욱 진하게 온몸을 감쌉니다.
-彼岸處
동남쪽 바라다 뵈는 산비탈 동굴에서/한 석 달 꿈도 없는 겨울잠 자고 싶다/동굴은 너무 깊어서/몇 번이나 구부러지고// 눈 먼 딱정벌레 투명한 잔등 위로/멋모르고 굴러온 가랑잎 잘 마른 온기/겨울은 동굴 밖 이야기/내 잠도 구부러지고//잡목 숲 지나다닐 때 긁히고 찢긴 상처 찬바람에 덧나서 터져버린 나의 겨울/입춘이 되기도 전에/새살 올라 환할 테지// 서울 역 깊은 동굴 거대한 방 귀퉁이/신문지에 둘둘 말린 잠들이 모여 있다/그 위를 더듬거리는 딱정벌레 몇 마리도
-강현덕의 「동굴에서의 잠」전문
* 사는 게 참 피로하고 힘이 드나 봅니다. 미로 같은 세상은 거대한 동굴입니다. 그곳은 생의 슬픔이 잠으로 위로 되는 곳
피안처의 환경이 녹녹하지 못함을 은유하면서 동시에 동굴은 세상 모두를 받아주는 여성의 양수 같은 역할을 꿈꿉니다. 삶의 진정한 안식처는 어떻게 처신하며 사는 것인지 자꾸 묻게 합니다.
- 覺性
가속도로 내달리는 신천대로 가장자리/ 이제 와서 직진이란 허락되지 않는 건지 낯선 길을 감당하기엔 갈 길이 너무 멀다 저만치 당도할 길은 눈 부릅뜨고 다가오는데 점멸등 바라보며 잠시 술렁댄다. 길은 길을 열어놓아 무수히 넘나들며 막무가내 밟아대던 저린 발 주춤거리다 이게 아닌데 사는 것이 이슬 같은 길섶에서……/과감히 U턴하는 여자, 길은 다시 반전이다.
-박희정의 「U턴하는 여자」전문
* 방향성을 잃은 삶의 속도 또 갈 길이 막힌 숱한 상황들이 인생 운전대 앞에 급박하게 다가 옵니다. 그래서 ꡐ길은 다시 반전ꡑ이라며 핸들 급히 돌립니다.
-한 송이 들꽃
문명도 비껴가는 철거민 젖은 골목/맨몸으로 옮겨 앉아 스물 셋 그가 젖네/그는 오. 다만 젖을 뿐 젖기만 할 뿐인데 //그대 한 걸음 옮겨 앉은 그 자리에 /이제 막 벙글어 오르는 한 송이 붉은 꽃과 /더러는 좀 누워서도 피어나고 피어오르는//그가 있네 우리 뜰에 곧추서서 내려앉는/우리 있네 그의 뜰에 무시로 내려앉는/안은 듯 꼭 껴안은 듯 이승보다 더운 몸
-윤채영의〈He was beautiful-제정구〉전문
*ꡒ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ꡓ라는 노래가 있지요. 그런데 이승의 아름다운 길은 무시당하고 상처 받고 그렇게 핍박받아 아프고 눈물나지만 누군가 그 길을 가는 이 있어 아름다움은 용기라는 향기였습니다.
-고백
백련사 동백림은/ 하늘이 간 곳 없다// 굽은 가지 하나하나/ 토하는 붉은 열망// 흰 눈도 지우지 못해/ 제가 먼저 스러진다.
-오영환의 〈백련사〉전문
*동백꽃의 낙화를 보며 나는 사랑의 순교자를 한때 생각했네. 흰 무명천에 각혈을 하는 몸의 고백, 그것은 신앙에도 닿는 것
-촉수
° 수용1
꽃 피는 소리를 숨기며 오나 보다/우수 지나며/ 내리는 빗소리 뒤따라/봄빛도/지우고 떠난 /그대의 낮은 숨결이듯//맨발로 건너오는 겨울강 하구에서/밤새 자라난/별자리 한 축 옮기며/잎맥을/더 멀리 뻗어가는/ 우주의 첫 호흡
-이경임의〈우수를 지나며〉
*봄빛도 별자리 한 축도 아무나 가질 수는 없는 것. 가고 난 것을 아쉬워하는 감정에 앞서 오는 절기에 대한 수용의 감각은 예상과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수용2
실실이 뼈대에 감기는/민무늬 사월 한낮//함초롬히 풀빛 내린/산뜰 지나 지평선 너머//바람이 굴리며 가는/햇살 두른 굴렁쇠-이숙경의 〈시나브로〉전문
*바람이나 풀빛, 햇살을 수용하는 감각의 예민성이 읽힌다. 모시올 에 바람 받듯 젊은 시인의 싱싱한 촉수에 시조의 앞날을 기대한다.
4. 평론의 눈으로 작품을 읽고 쓰기
가. 장경각에 붐비는 시를 보며
밤이면 장경각이 심해의 어장처럼/금빛 고기 떼들이 무리 져 다니더니/ 바다만 알몸으로 와서 짐승마냥 눕는다.
-김정휴의 〈장경각〉전문
해인사 장경각이/날 모시고 받든다만 //네 안에 내 있어?/네 안에 내 없으면//너와 난 /고깃덩어리/그저 나무 판때기
-채천수의 〈고깃덩어리와 나무 판때기〉전문
겨울 비운/ 장경각 /고즈넉한 내 뜨락에 //한 줄의 경전 같은 자목련이 피고 있다 //만행을 /떠났던 봄빛이/밀밭 건너오고 있다
-오영민의 〈자목련〉전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각을 소재로 한 작품 중 김정휴 스님이 1970년대 시조 단수의 한 극점을 보여준「장경각」〈밤이면 장경각이 심해의 어장처럼/금빛 고기 떼들이 무리 져 다니더니/ 바다만 알몸으로 와서 짐승마냥 눕는다〉와 오영민의「자목련」〈겨울 비운/장경각/고즈넉한 내 뜨락에/한 줄의 경전 같은 자목련이 피고 있다/ 만행을 떠났던 봄빛이/밀밭 건너오고 있다〉를 좀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이 있어 몇 자 보탠다.
정휴 스님은 구도자요 시인으로서 그의 가슴이 장경각이다. 그는 가슴에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 사천의 목판 말씀을'금빛 고기 떼들'이란 역동적인 언어로 살려냈고'알몸'의'바다'에 오며 장경각은 비로소 광대무변한 진리의 바다로 출렁인다. 이 詩가 구도자의 정신적 위의(威儀)와 집중의 시학으로 눈부시다면 오영민의 현재 위치는 시련을 상징하는‘겨울 비운 장경각’인가 싶다가도 그 주위‘뜨락’이다. 잘 잡은 위치를 통한 확산적 사고는 기어이 '만행을 떠났던 봄빛'으로 와 '한 줄 경전 같은 자목련'을 물어 올리고 있다. 시조를 수행의 방법으로 삼는 그의 글에 늘 새로운 春信이 붐비길 기대한다.
둘째 작품으로 심어 놓은 졸작은 신앙의 소통 문제를 다루는 생활 종교를 생각하고 쓴 것에 다름 아니다.
나. 몇 가지 눈의 모습
-조화(상생)
땅의 부끄러움을 이미 다 보았거니/ 굳이 남은 것들을 들추어 무엇하리/하늘이 무명옷 한 벌 밤새 지어 입힌다.//지상에 은성 殷盛하는 어둠보다 더 큰 사랑/한없이 다독이며 안아 주는 용서 앞에서/아기의 젖니가 돋듯 태어나는 세상이여.//달과 별이 숨었어도 스스로 차는 밝음/나무들 하나같이 뿔은 고운 순록이 되어/한잠 든 마을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조동화의 〈눈 내리는 밤〉전문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공광규의 〈폭설〉전문
한 줄로도/내 약력은/ 너무 길고 사치스럽다.//사십여 년/용쓰며 쓴 내 시도 마찬가지//지나온/발자취를 지우듯/오늘/함박눈/내린다.
-박시교의 「눈 내리는 날 」전문
-불화(상극)
신축 /공사장의/모닥불에 내리는 눈//그것이 불인 줄을 꿈에도 모른 채로,//무심코 내린다는 게/그만 거기/내리는/눈.// 신축 /공사장의/ 모닥불에 내리는 눈//그것이 불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어, 어, 어, 하는 사이에/피치 못해/내리는/눈
-이종문의〈눈〉전문
이종문의〈눈〉에서는 눈이 내리는 곳의 불운한 위치(첫수)와 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기의 흐름(사회 구조에 끌려가는 상황)에 의해 불행한 운명이 되는 냉엄한 현실(둘째 수)이 이 시의 엄혹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아름답기까지 한 겨울 서경과 진술 방법에서 온다는 데 이 시의 맛이 깊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 수 공히 종장 첫구가 탄생 자체의 우연의 비극과 내몰림의 비애를 잘 상징하는〈무심코〉,〈어, 어, 어〉가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수 모두 초장이 똑같은 표현이다. 그런데 중장에 와서 하나는 우연이요 하나는 알고도 내몰리는 능청스런 표현이 그만의 진술을 돋보이게 한다.
無家可歸한 가련한 눈(소외된 자)이 만나는 생의 비극성이 天地不和의 상황 속에서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한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우회하여 독자 스스로 현상을 파악하게 하는 여백을 준다. 즉 이것은 오행(木火土金水)의 만남 중 순수한 눈(水)과 火(타자의 폭압이나 그런 상황) 의 만남은 직접 감각할 수 있는 形而下者의 氣현상으로 서로 不好의 卦를 낳는 形而上者의 원리나 법칙까지 숨겨놓는 미적 안목의 구조는 실로 놀랍다.
-비화(比和)-水水. 火火현상
사람을 묻고 와도 밥은 먹어야 사는/살 속 깊은 비루함이/뼈 속 저린 사무침이/ 파도도 겨울 파도로 와 부딪히며 혼자 운다.//바다에 눈이 온다, 무연히 시선을 잡는. /낙화하는 송이송이 바람의 길을 따라/저렇듯 나래를 접고 수면 아래 갈앉는다.//저자의 더운 술을 눈 맞은 외투째로/폐허가 된 시린 속에 쏟아 붓고 기댄다만/바다에 내리는 눈이여, 길을 잃은 사랑이여!
-채천수의 「바다에 내리는 눈」전문
다. 배행의 형식 실험 읽기
①그랬다 홍수이고 싶었다 너를 확 덮치는②덮쳐서 거센 물살 그 물살로 휩쓸며③부수고 또 부서지면서 범람하고 싶었다.
③부수고 또 부서지면서 범람하고 싶었다 ②덮쳐서 거센 물살 그 물살로 휩쓸며①그랬다 홍수이고 싶었다 너를 확 덮치는-문무학,「홍수」전문
[해설] 단시조 한 수를 뒤집어 엮어 두 수로 변용하여 범람하는 감정의 물살 이미지를 더욱 강화한다.
다섯 살의 행진
채 천 수
①애들이 조선 천지에 ②밥만 먹고 어디 커나
③나무 타는 다람쥐처럼 ④어미 속을 들랑날랑
⑤하루에 수십 번도 더 ⑥눈 뺏길 때 좀 많아
⑥귀 아플 일은 또 어떻고⑤ 하루에도 수십 번 더
②웬걸 밥만 먹고 있나 애들이 ①조선 천지에
③참나무 딱따구리처럼 ④어미 속을 다 파먹지
⑤낮잠은 벼슬이야 ⑥발 갈 곳은 묻지도 마
④어미 속에 풍덩풍덩 ③어디로 뛸 개구린지
①애들이 조선 천지에② 밥만 먹고 그냥 사나.
5.시조 분석의 구체적 사안들
가. 구와 구 맛을 평가할 때 기준이 될 수 있는 내용들
1) 내용상 두 마디(음보)씩 전․후구가 구성되었는가?-형식미
2) 전구를 보아 쉽게 예측되는 후구의 표현을 넘는 표현인가?-인식의 깊이
3) 한 구가 가지고 있는 표현력과 전․ 후구 어울림에 참신성이 있는가?-창의성
4) 낭송시로서 문제점은 없는가?-운율성
5) 전구를 받는 후구의 표현능력이 뛰어난가?(사실, 비유, 상징)-상상력
6) 구의 흐름이 강약, 고저, 장단, 명암, 완급, 경중, 경험과 상상, 음양, 선후, 빈부, 상하, 좌우, 정오, 상생과 상극, 선악, 다소, 냉온, 차고 비고, 曲直, 遠 近,열고 닫고 등의 상황과 견주어 적당한지 봄.
나. 장과 장 맛을 평가할 때 기준이 될 수 있는 내용들
1) 중 ․ 종장에 표현된 내용 구성이 초 ․ 중장의 종적인 흐름에 기여하는가?-사실, 비유, 상징의 구성이 적절한가?
2) 장과 장 사이에 생략된 내용과 이미지를 독자들이 떠올릴 수 있게 표현되었나? 즉 장과 장의 연결성과 간격이 적절한가?
3) 삼장의 각 장 내용과 위치가 지금보다 더 나은 표현이나 위치는 없는가?
다. 수와 수 맛을 평가할 때 기준이 될 수 있는 내용
1) 일단 주어진 작품을 읽고 수를 줄이면 좋은 경우와 늘이면 좋은 경우 생각하기 아니면 현 상태가 좋은지
2) 삼장 한 수가 하나의 주제(소주제)를 물고 있는가?
3) 각 수에서 시적 대상에 대한 표현 변용 그 자체가 전체적으로 어울리며 각 수의 독립성이 유지되는 유기성을 보이는가?
라. 제목과 내용
1) 제목이 내용을 살리는가?
2) 낭송할 때 호감을 주는가?
3) 너무 생경하거나 진부하지는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