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6년 2월 20일 개최 예정인 좋은교사 컨퍼런스에 제출한 원고 내용이다.
교사독립선언
정성식
그림이 열어준 말문
원고 제출도 한두 번 기한을 넘기더니 이제 만성이 되어버렸다. 기어이 마감 시한을 넘기고서야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마음과 달리 몸은 자꾸 가라앉는다. 좋은교사 컨퍼런스에 초대를 받고 원고를 내야 하는데 출강, 총회 등으로 나다니느라 내 몸은 진득하게 책상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몸을 다잡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글이란 게 참 그렇다. 한참 잘 나갈 때는 숨 고를 틈도 없이 써지다가 막힐 때는 하루 이틀이 지나도 한 줄이 나가지 않는다.
이 원고를 쓰기 전까지도 그랬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 어쩔 수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커서만 깜빡거릴 뿐 한두 문장만 썼다 지웠다 되풀이하고 있었다. 생각이 정리 되어야 글로 담는데 아직도 내 머릿속은 학기 초 정리 안 된 교실의 케이블 마냥 뒤죽박죽 엉켜있었다.
이런 상태로 글을 써봐야 헛일이다. 쓰던 글을 멈추고 페이스북과 밴드에 올라온 모임 후기를 찬찬히 읽었다. 한 분 한 분의 사연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댓글을 올리던 중 총회에 참석했던 새내기 교사가 모임 참가 후기를 쓰고 거기에 직접 그린 그림 하나를 덧붙였는데 이 그림이 내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사연도 감동이었지만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컸다. 한참 그림을 보고 있자니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에서 후배교사는 우리 모임에 거는 기대와 희망을 담았다. 이제 갓 태동하는 우리 모임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기대를 담았지만 머지않아 이렇게 될 거라는 대책 없는 내 마음과도 참 닮아있었다.
“실천교육교사모임이 뭐 하는 곳이냐?”
최근에 가장 많이 듣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실천교육교사모임, 이 모임 이름으로 ‘교사가 만들어가는 교육 이야기’ 마당을 두 번 개최하고 나니 만나는 이들마다 이렇게 물어온다. 이 모임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호감도 있지만 경계의 눈초리도 있다. 상황에 따라 답변을 가려서 하지만 얼렁뚱땅 이 모임의 대표를 맡게 된 나도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임의 진행 상황을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분명한 대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대답하는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독자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날짜를 잡고 저자를 강제소환(?)하여 갖게 된 <학교라는 괴물> 북콘서트가 이 모임의 시작이었다. 온라인에서 소식을 주고받던 이들이 갖게 된 이 모임이 있고나서 한 번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다시 온라인 그룹을 만들고, 여기서 마구 쏟아진 의견들을 모아 ‘교사가 만들어가는 교육 이야기’ 마당을 열었다. 기획, 강사 섭외, 장소 선정 등의 굵직한 준비 외에도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실무들이 있었지만 이 모든 일들은 뚜렷한 조직 체계도 없는 이들이 서로 하겠다고 나서며 스스로 하고 있다.
기존의 교원연수의 틀을 거부하며 히피족처럼 떠돌며 세종과 익산 두 번의 대중교사모임을 갖더니 힘에 부쳤는지 익산 모임을 갖고 나서는 형식상의 조직 체계를 갖추었지만 여전히 느슨하다. 이러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이 과정을 담아 『교사독립선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한 권의 책을 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사가 교육의 주체로 서고자 하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았다. 우리는 이 책의 저자와 페이스북 그룹에 우리 모임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현장과 동떨어진 교육정책, 고담준론만 일삼는 교육학에 소외받던 교사들이 모여서 만들었다. 교육학을 실천하는 교사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대상이기를 거부하고 교육정책과 교육학의 능동적인 생산자이자 주체임을 선언한다.
이 모임을 통해 우리는 교사들의 교육 실천과 연구를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 전문성의 함양을 지원하며, 아울러 실천교육학을 발전시키며, 각종 교육 및 학술 자료를 개발하고 공유할 것이다.“
창립총회와 정기총회, 두 번의 공식 회의를 갖고 법인으로 보는 임의단체를 만들었지만 그간의 과정이 SNS를 통해 상세하게 소개되어 다시 설명할 것도 없다. 온라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심심할 무렵이면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어내는데 기획도 엉성하다. 짜여진 틀에 맞추기보다 참가자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도록 방치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이런 모임에 20대에서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가한다. 20~30대 젊은 교사들이 많이 참여하다 보니 모임의 기운도 싱싱하다. 속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기존의 굵직한 교원단체인 교총, 전교조, 좋은교사운동본부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저 사람이 좋아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뚜렷하게 정해진 노선도 강력한 지도부도 없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행사인 ‘교사가 만들어가는 교육 이야기’ 마당도 이 모임에 처음 참가한 이들을 포함하여 젊은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기획하도록 한다. 모임 안에서 번역, 현장연구 등의 공동 작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모임의 연구, 실천의 성과를 특정인이 가져가지도 않고 다시 모임으로 되돌려준다.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을 즐긴다. 전국단위 모임을 몇 차례 가지더니 지역의 교사 공부모임을 만들려고 꿈틀대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 글을 쓰는 내가 이 모임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서 이런 움직임을 추동해내는지 궁금해서 글을 쓰다 말고 우리 모임의 온라인 소통 공간인 페이스북과 밴드에 우리 모임에 있고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정체를 확인하는데 있고 없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으니 말이다. 잠깐 사이에 많은 답글이 달렸다. 이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 우리 모임에 있는 것은?
수평적인 대화, 환대, 경청, 공감, 웃음, 젊은이, 생각 있는 생각, 다양성과 이의 수용, 사이다, 격려, 희망, 발전, 배움의 욕구, 지속적인 성찰, 상당한 연구, 민폐를 끼칠만한 열정, 좌우지간 자발성, 각종 의분, 꺼내놓는 용기, 혁신 에너지, 평등한 소통, 항시 존중과 배려, 배우고 나누려고 경청, 넘치는 개그 본능, 자발성과 활기, 나, 나이 고하를 불문한 상대에 대한 존중, 재미, 교육, 친구, 동료, 다른 사람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상호존중과 믹스된 감시(특정인에게 권한이나 의미가 과도하게 부여되지 않도록), 구성원 모두가 자신만의 색깔 보유(+할 수 있는 분위기), 교사 전문성, 나 자신, 자존감, 민주, 주관, 사람, 노래와 소맥 그리고 열정, 가입탈퇴가 자유롭다는 밀당, 공감과 격려, 수용적인 갑론을박, 반성적 사고, 예술과 풍류, 친목, 참이슬(남음, 재고 있음), 싸이키(35,000), 사투리, 유머, 새로운 시도, 긍정적 부담, 검은 머리카락 …
○ 우리 모임에 없는 것은?
눈치 보기, 권위주의, 꼰대, 생각 없는 생각, 경직된 위계, 노답, 강요, 무시, 타성, 강요, 부담, 위아래, 안정성과 체계성은 아직..., 저들, 운동성이 필요, 노잼, 강요, 억압, 부담, 승진컨설팅, 독선, 다툼, 성리학적 유교질서(?), 교육이 아닌 것, 질투, 독재, 개, 노래방과 양주 그리고 호객행위, 서열, 틈, 압박, 무시, 잠, 맥주(마심), 싸이, 서울말씨(없다기보다 적음), 깝, 답습, 이념, 독선 …
더도 덜도 없다. 딱히 내세울 것도 없고 감추는 것도 없다. 이것이 딱 이 모임의 실체다. 이렇게 거침없는 의견을 내놓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교사가 교육의 주체로 서겠다는 강한 열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열망이 『교사독립선언』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모임의 정체성 못지않게 이 모임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중요하다. 총회 자리에서는 추상적인 구호에서부터 시급하고 절실한 요구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되었다. 연구회, 노동조합, 교원단체 등 형식적인 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원하는 이상을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필요하다며 만들어 가는 모임을 제안하기도 했다. 모임 참가 동기, 상황 인식 등이 다양하니 구체적인 위상을 확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조직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다음의 원칙을 바탕으로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 가는 모임을 만들자는 것이다.
- 조직과 개인의 관계가 의무가 아닌 기회가 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 조직의 구성원들이 주체성을 갖도록 의사결정 과정에 깊은 민주주의 방식을 운용한다.
교사, 교육의 주체로 서자!
우리 모임은 주목 받을 만큼 특별한 모임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사들이 갖고 있는 열망을 풀어내기 위해 그저 교사들이 ‘모이고 떠들고 꿈꾸자’는 소박한 움직임일 뿐이다. 움직임은 소박하지만 여기에는 교사가 교육의 주체로 서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담겨있다. 이를 우리는 교사독립선언이라 부른다.
이 선언은 교육과정을 포함한 교육정책을 독점해 온 정치권력, 교육학자, 교육관료들에게 더 이상 교사들이 맹목적으로 휘둘리기 싫다는 저항의 의지를 담고 있다. 교육을 가로막는 부당한 제도와 관행을 수용하기보다 이에 맞서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담고 있다. 이렇게 살기 위하여 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로서의 삶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교육학의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생산자가 되자는 학구열을 담고 있다.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모임을 소개하느라 귀한 지면에 넋두리를 했다. 결론은 내가 그렇듯이 이 모임에 참가하는 이들 또한 이 모임이 어디로, 어떻게 갈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모임의 취약점이다. 그러나 작금의 교육운동 현실에 비추어 보면 교사가 교육의 주체로 서기 위한 가장 강력한 포지션이기도 하다. 진검승부는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