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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소슬한 바람이라고 생각하고 옛길을 걸어보러 왔었다.
먼지 쌓인 그 분교에는 여전히 고요함만이 감돌고 내가 느낀 소슬한 바람은 찾는이 없는 분교의 주인처럼 서글픈 미소만을 머금고 언제가는 찾아올 몇십년된 코흘리개들을 기다리며 조용히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기다리면 언젠가 .. 누군가는 찾아 주겠지..
나는 내일 다시 못오겠지만 누군가는 또 나처럼 왔다가 헐어져가는 옛 빈집을 돌아보고는 쓸쓸히 돌아 서겠지..그도 누군가가 다시 찾아 올거라는 허전한 마음과 막연한 그리움을 되새기며........
나도 모르게 귀밑의 머리는 하얗게 변해지고 나는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겨 보지만 어쩔수 없이 흐르는 시간을 막지 못해 이제는 세월의 모퉁이에서 정해진 갈길을 보며 허한 미소를 지어 본다네.......
이하 글을 끝까지 읽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작은 가슴으로 큰 족적을 남긴 藝人
‘내 죽거든 앞이 툭 트인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33 나이에. 그는 갔지만…….
김정호 1951-1985년 본명 조 용호
1972년<이름 모를 소녀>를 부르며 김정호란 예명을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를 이해함에 그의 집안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의 재능은 외탁인 듯하다.
서편제의 큰 줄기이자 창작판소리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던 외할아버지 박 동실은 판소리 소리꾼이자 <김유신 장군가> 등의 시조를 작곡했고 한 혜순 과 김 소희 명창이 그를 사사했던 국악계의 중요 인물이었지만 한국동란 때 월북해서 남한의 국악계에서 묻혀 졌던 인물이다.
월북으로 인해 그의 존재는 판소리사에서 한때 묻혀 있었지만 김정호의 어머니인 박 숙자 여사와 함께 ‘아성극단’을 만들어 만주나 상하이 등지로 공연을 다니기도 했던 ‘명인’이었다.
김정호는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의 모친 박 숙자 가 국악공연을 하는 과정을 보고자라며 자연스럽게 국악적 감수성을 몸에 익힌 사람이지만 국악에 대한 천대를 견디지 못한 모친은 그가 6살 때 집안에 있던 국악기를 모두 내다버렸다.
음악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가야금 줄까지 모두 끊어버렸다. 그 힘들고 고된 악극단 생활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도 국악을 못하게 했다.
그러한 기억이 잡힐 듯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김정호는 운명처럼 ‘금지된 길’을 걷는다.
중학교 때 삼촌으로부터 선물 받은 기타로 음악가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노래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은 대동 상업 고등학교 때에 밴드부에 가입해 악기를 다루면서 부터이다.
졸업 후엔 기타를 둘러멘 채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종로 낙원상가 주변을 배회했으며, 심지어는 잠자리조차 없어 거리에 내놓은 이삿짐 속 캐비닛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
잠시 미 8군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얼마 안 돼 또다시 떠돌이가 되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것은 ‘음악’보다 먼저 ‘배고픔’이었다.
당시 한 그릇에 5원하던 노동자 합숙소의 국수, 한 대접에 10원이었다던 남대문 시장의 수제비 등으로 허기를 채우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후배 임창제가 결성한 그룹 어니언스의 앨범에 작곡자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임 창제에게 <사랑의 진실> <작은 새>를 주게 된다. 그룹의 인기와 더불어 그의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1973년 <쉘부르> 등의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시작한 그는 그룹 4월과 5월에서 잠깐 머물다가 TBC방송 신광철 PD에 의해 패티 킴의 스페셜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미 전국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가수왕으로 등극하며 솔로데뷔를 꿈꾸던 조용필과 함께 김정호의 동반 게스트 초청은 파격이었다.
폭발적인 반응 속에 두 사람은 대중들 속으로 탄탄한 첫발을 내딛었다. 한때 가수 백순진씨와 함께 ‘4월과 5월’의 멤버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어니언스가 그의 곡인 ‘작은 새’를 히트시키기에 이르자 음악성을 주목받으면서 작곡자에서 가수로 변신, 무대에 선다.
통기타를 멘 채 눈을 지그시 감고 꿈꾸듯이 노래하는 그의 독특한 모습.
자신의 자작곡인 '이름 모를 소녀'로 데뷔한다.
<이름 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회한을 담은 노래.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은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점찍어 오랜 세월을 홀로 애태웠던 평생의 반려자였다.
자신의 일상적인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도 수차례 보내고 용기를 내 집으로 찾아갔지만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가 미덥지 못했다.
그러나 순수한 심성의 사촌오빠 후배가 싫지 않았던 이영희는 74년 늦봄 쉘브르 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타났다.
폐결핵 환자라는 소문이 돌던 시기에, 그는 1975년 마약 사범으로 잡혀 들어간다. 그는 이 대마초파동으로 구금되어 정신병원까지 가야 했으며 이후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깊어지는 병마와 싸웠다.
그는 76년 3월,
자신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날, 부인 이영희 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3년간의 열애 후 77년 반포의 17평 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을 얻었다.
12번씩이나 이사를 거듭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하나 이 축복도 잠시였다.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방 공연하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방위 소집에 응하지 못해 결국 탈영병으로 군 영창에 갇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군복무를 마치게 되지만 가정은 이미 어려워져 매번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심해지는 병은 그를 파산으로 몰고 갔으며 변변치 않던 작곡비로 연명하던 그는 단칸방을 전전해야 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는 그의 부인은 자신에게 ‘늘 따뜻한 사람이었다. 고 털어놓았다.
1973년, 사슴처럼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의 자그마한 청년이 등장 한다. 유난히 눈이 크고 하얀 이가 가지런했던 소년 같은 청년. 그가 바로 포크계열의 천재로 불리던 하얀 나비 김정호다.
자신이 작사, 작곡한 '이름 모를 소녀'로 1973년 가요계에 데뷔한다. 이미 1년 전 듀엣 '어니언스'가 부른 '작은 새'의 작곡가로 소개된 뒤였다.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그는 무명시절 함께 연습하며 뒹굴던 임창제 듀엣 어니언스에게 '작은 새', '사랑의 진실', '저 별과 달을', '외기러기', '잊으리라' 같은 곡들을 주었던 뛰어난 재능의 싱어 송 라이터였다.
이름 모를 소녀 의 반향은 대단했는데 "이름 모를 소녀"를 녹음하고 지방으로 여행 중이었는데 이름 모를 소녀가 방송을 타고 난리(?)가 났었고 소속사에서 부랴부랴 김정호를 찾아오고 양복 두벌을 맞춰주어 방송출연을 했다.
74년 7월부터 10월까지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는 최고의 인기 가요로써 군림했고…….
<버들잎 따다가/연못 위에 띄워놓고/쓸쓸히 바라보는/이름 모를 소녀/밤은 깊어가고/산새들도 잠들어…>
달빛같이 창백한 얼굴로 불렀던 이 노래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크게 인기를 얻었다.
당시 건설의 망치소리로 떠들썩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약한 노래'로 점 찍혀 방송 등에서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노래는 김정호라는 이름 석 자를 팬들의 가슴에 새겨놓는데 충분했다.
우이동시절부터 김정호의 음악성을 인정해온 기독교방송 김 진성 PD는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를 듣고 '한국의 모차르트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인기정상의 가수였건만 존경하던 신중현과의 첫 만남에 감격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순수했던 김정호.
영화 '이름 모를 소녀' 를 연출한 김 수형 감독은 연출부 출신으로 1973년 '바람아 구름 아로 데뷔를 한 후, 이름 모를 소녀1974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이름을 알린 감독이다
이름 모를 소녀' 의 판권은 1974년 당시 가수 <김정호>에게 30만원을 주고 구입하였으며 그 금액은 <김정호>의 특별출연료까지 포함된 금액이라고 한다. 요즈음 톱 가수들의 출연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이 영화에는 김정호'뿐만 아니라 석찬' 홍 민' 정 종숙'박 헌용' 들개들'등의 통기타 가수들이 우정출연을 하기도 하였다
이 영화를 찍고 몇 년이 지난 후 김정호의 타계소식을 접했을 때 가슴이 아팠다고 하면서 김 감독은 그때를 회상했다…….이름 모를 소녀'는 여배우 정소녀의 데뷔작이며 그의 예명 <소녀>도 이 영화의 제목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남자주인공으로는 신영일'이 등장하며 고 영수' 허 장강' 김남일'등의 배우들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청춘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전형적인 청춘멜로물이지만 당시의 평론가들에게 아주 잘 만든 영화로 평가받았다.
이후 정상에 오른 그는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꽃잎' '날이 갈수록‘등의 히트곡을 쏟아 부으며 인기를 이어 나갔고 최고의 포크가수로 자리 매김 한다.
병마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1976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하얀 나비'를 발표한다.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을/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임인데/꽃잎은 시들어도/슬퍼하진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걸/서러워 말아요.>
1974년 6월에 첫 번째 음반을 발표한 이후 1974년 8월2일에 MBC-TV의 인기순위프로그램인 [금주의 인기가요]에서 <이름 모를 소녀>가 4위에 오르는 빠른 성장을 하게 된다.
이어 TBC-TV 선정 '74년도 월별 인기가수 베스트 12' 중 <이름 모를 소녀>로 10월의 가수에 선정되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74년 12월 20일과 21일 이대강당에서 리사이틀을 열고 이후 1975년 말까지 <하얀 나비> <날 이갈수록> <나그네> 등을 계속 히트시키며 통기타음악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7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마초는 자신의 노래 '작은 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견디기 힘든 고행 길을 걷게 했다.
80년, 5년 만에 대마초 망령에서 벗어나 재기앨범 <인생>을 발표했지만 해금의 달콤함도 잠깐. 오랜 정신적 고통과의 싸움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심신 때문에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한다.
"과거의 화려했던 때는 흥미가 없다. 인기보다는 마음에 있는 좋은 노래를 불러 남기고 싶다"던 김정호.
일 년 이상 치료를 해야 했건만 결핵균보다 더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은 4개월 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오게 했다.
초기증세 때 약을 건네주면 먹지 않고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인천 요양소에서 6개월이면 완치될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도 그는 도중에 뛰쳐나오곤 했는데 월수입이 2백만 원 선 (현재 화폐가치)이었으나 창작곡을 만든다고 거의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에 묻혀 지낸 탓으로 실제 수익은 형편없었다. 그만큼 노래에 모든 것 걸었다.
돈도 건강도 팽개친 채……. “ 라고 김정호의 전 매니저 이 상기 씨가 회고했다. 김정호가 데뷔해서 숨을 거둘 때까지 매니저로 함께 했고 그가 떠난 뒤 헌정음반을 제작하는가하면, 1986년에 세워진 노래비 제작에도 앞장섰던 이상 기 씨는 이런 기억을 갖고 있다. 순수한 김정호모습 그가 오늘도…….내일도…….우린 .그립습니다.…….
그 당시 김정호는 대부분의 가수들처럼 방송과 쉘부르 같은 생음악 업소에도 출연하고 있었다. 당시 셀부르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던 코아 님의 김정호에 대한 기억
“전에 명동 쉘부르는 엘칸토 지하에 있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끝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그 당시엔, 손님이 아닌 사람들이 자주 쉘부르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손님도 아닌 친구가 떡하니 일을 보고 있더라고요. 등치도 조그마한 게 만만해 뵈어 " 당신 손님도 아니면서 왜 쉬를 하고 그래 에~~!!!!..." 뒤로 돌아 보더니…….씩 웃데요? 어쭈구리? 별 싱거운 놈이 다 있네.…….하고는……"어~여~~!!! 볼 일 보고 가쇼." 그랬죠.……저녁시간에 공연을 하는데……아~글쎄 그 친구가 무대에 올라가 떡하니 노래를 하더라고요……처음 김정호 실물을 봤을 땐데…….몰라 본거죠…….으~미……창피 한 거……김정호가 기타를 옆에 들고 앉아서 노래를 부르면……손님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칩니다.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어요.……온 정성을 다 해서……영혼을 끄집어내듯이 땀을 삘삘 흘리며 부르는데…….어떻게 앉아서 박수를 쳐요?......그때도……그랬습니다.……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안쓰러워……너무도 안쓰러워……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면….여기저기서 수건을 들고 쫓아 올라 갑니다.……땀을 닦아 줄려고요……몸이 안 좋다는 것은 얘기를 알고 있었거든요……. 후에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너무 슬픈 노래만 불러서…….마치 영혼을 끄집어 내는듯한 애절한 창법이 김정호를 데리고 갔다고 말이죠.”
76년 10월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 무성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통기타 업소 레스토랑을 맡겼다.
무교동 골목은 당시 ‘낙지골목’으로 유명했다. 그는 꽃잎이라는 카페를 운영했고 무교동 꽃잎은 지금의 라이브 레스토랑이었는데 어두운 조명 아래 호프집처럼 꾸며 놓고 양식과 생맥주를 팔았으며 낮에는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주고 저녁 에는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었다.
카페를 운영하며 강 은철, 김 학래, 임하룡, 남궁옥분 등과 함께 무대에 섰으며 자주 국악 공연을 관람하며 소울 풀한 음색에 토속적인 맛을 입혔다.
당시 편지를 부른 임 창제가 메인 DJ를 봤고 당시 무명이었던 임하룡 씨가 가수를 소개하며 사회를 봤다.
83년 재개발로 헐 릴 때까지 꽃잎은 그의 유일한 음악무대였다
이해에 김정호는 좌절 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 달 중에 이십여 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 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 혼에 불을 지폈다.
타고난 재주에 비해서 왜 그리도 가난에 허덕였는지 궁금하다.
77년 방위소집으로 군복무를 마칠 무렵 호되게 걸린 감기는 지병을 재발시켰다. 함께 활동이 금지된 하 남석은 이 당시 둘도 없던 음악친구.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은 물론 국악리듬에 어쿼스틱 기타와 신디사이저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을 함께 구상하기도 했다.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있던 뚜아에 무아 출신 이 필원과 가까워지며 신디사이저로 창출하는 환상적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음악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오산의 금식기도원과 삼각산 산상기도에 매달리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님,83년11월>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배여 있는 눈물겨운 음반이다.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아쟁, 가야금, 꽹과리를 직접 두들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했다.
부인 이영희는 “신보제작은 뒷전이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다니며 1시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그 한스런 탄식의 이미지를 담은 노래가 <님>이다.
그것은 죽음을 예견한 상여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이었다. 머리가 쭈삣 서는 듯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님>은 그야말로 온몸을 불사른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부인이 그가 건강이 나빠져 공기 좋은 곳으로 가자면 그렇게 했고, 친구 곁으로 가자면 또 그렇게 했다.
경제적으로 정 버틸 수 없어 어머니 곁으로 가야겠다고 말하면 또 그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80년, 끈질긴 투병과 부인의 보살핌으로 완전히 나았다던 결핵은 재발되고 급기야 각혈이 시작되자 결국 인천요양소에 격리되어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공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했다.
비록 그 시기에 대중들 앞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스스로는 늘 음악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그는 많은 곡을 만들었고 악기소리를 연구했으며 음반 또한 취입했다.
폐결핵이 심해지면서 김정호는 가요계 일선을 떠났다. 8년 가까이 작곡으로 소일하며 병마와 싸웠다.
좌절 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 달 중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 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 혼에 불을 지폈다.
그동안 12번이나 이삿짐을 싸는 등 가계는 말이 아니었지만 노래를 하고 싶은 욕망은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1983년 말 김정호는 수척해진 얼굴로 재기 음반을 냈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끊어 녹음한 끝에 마지막 앨범을 낸 김정호는 병원의 환자에게서 요양원 시절 송도해변을 걷는 여인에게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영감을 얻은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로 재기에 성공하지만 '임' 등 이때 발표한 그의 노래는 이미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었다.
이 앨범은 숨쉬기조차 힘들어 5개월의 최장시간 녹음을 해야만 했던 그의 유작앨범이다.
숨겨진 미담도 많다.
남달리 정이 많았던 그는 전성기 때 어려운 후배들에게 용돈을 나눠주기 일쑤였고 딱한 친구에겐 오토바이를 사줘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원로가수 B씨가 어렵다는 얘길 전해 듣고 쌀 3 가마니를 B씨도 모르게 사준 일도 있었다.
“업소 출연료 50만원 받아 줬다. 지금 가치로 계산하면 천만 원 정도가 되는 큰돈이다. 헌데 며칠 후에 차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를 드렸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확인을 해봤다. 역시 아니었다. 남몰래 다시 알아봤더니 친구들을 도와준 것으로 밝혀졌다.
오토바이를 한 대 사면 살아갈 수 있다는 친구에게 얼마. 다른 친구에게도 얼마.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신세를 진 사람에게는 꼭 갚아야 했고 어려운 친구나 사람을 보면 참지 못했다”
그의 ‘인기 가수를 둔 친구들’은 거의 매일 밤 그의 출연업소에서 기다리다 차비 명목의 용돈을 가져가 빈털터리가 된 적도 여러 번 이었다. 고 회상하며 김정호가 건강을 해친 이유들 얘기해주었는데 ”그는 술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 는 매우 소박 소탈했다.
멋을 낸다거나 팬을 의식한다거나 그런 모습과 생각은 그의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직 음악과 소리, 작곡과 영혼, 무대와 사랑, 인간, 진실……이런 것들로만 향하는 하나의 뜨거운 블루스, 빛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농담도 없었고, 일상적인 대화도 없었다. 늘 기타만 가슴에 안고 노래만했다.
그의 두 눈은 물기가 어려서 번쩍이는 안광을 지녔다.
두 눈은 커다랗고 수척해 보였지만 어딘가 단단한 정신력이 그의 모습을 크게 보이게 했다.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 담당의사는 그에게 경고했다.
최소한 6개월에서 3년 정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고. 심지어 ‘노래를 다시 부르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 고 까지 경고했다. 결핵환자에게 노래는 호흡기관에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되레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병보다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음악에 대한 열병을 또 그렇게 앓고 있었다.
“꽹배기(꽹과리)소리에 미쳐 삽니다.” 인터뷰 당시 그는 자신의 생활을 이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했다.
우리만의 것, 우리만의 맛, 우리만의 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무엇인지 이제야 비로소 찾은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때문에 그 무렵 뜻 맞는 친구들과 사물놀이 패를 조직하기도 했고 또 항시 꽹과리를 들고 다녔다.
병이 악화돼 병원에 다시 실려 갈 때도 꽹과리를 병실에 까지 가지고 들어가 담당의사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남은 열정을 모두 국악에 바치겠다.’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의지를 내보이던 김정호, 오늘 그가 새삼 그립다.
1985년 11월29일 정오 33세의 천재음악가 김정호는 50여곡의 주옥같은 곡을 남긴 채 주위의 안타까움을 뿌리치고 서울대 병원에서 하얀 나비가 되어 세상을 등지고 날아갔다.
폐결핵으로…….참으로 아까운 천재를 잃은 것이다. 부인 이영희 씨와 당시 여덟 살 난 쌍둥이 딸이 곁에 있었다.
한숨 한번 쉬기도 힘들었을 임종 3개월 전, 어린 딸에게 자신이 인기가수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TV에 출연했고 이것이 마지막 그의 모습이 되었다.
TV에 출연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보았을 달님. 칼바람 불어대는 우이동 골방에서 각혈을 하며 바라보았을 달님.
1985년 겨울 이종환의 디스크 쇼, 그의 죽음을 전하던 비통한 이 종환 목소리 뒤로 들려오던 달님.
달님
고운 빛, 고운 빛깔로
하늘에 올라 저기 머물면
살랑 부는 바람 나를 찾아와
낮은 목소리로 노래 불러주네
* 고운 밤, 고운 이 밤도
달님이 지면 모두 사라지네.
밤이 가기 전에, 달이 지기 전에
나는 일어나 노래 불러야지
달을 따라가는 구름 사이로 보이던 임
달도 지고님도 가면 울고 싶은 마음
아~~ 꽃은 다시 피고
지는 달은 다시 떠오르네. *
너무도 사랑했던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라는 애틋한 유언만을 남긴 그는
흰 눈이 내리던 날 경기 고양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잠들었다. 33세의 아까운 나이로.
86년 10월 동료들에 의해 세워진 무덤 앞 노래비에 새겨진 <하얀 나비>의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라는 노래구절처럼 인생을 구슬프게 노래한 그의 영혼은 <하얀 나비>같이 그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의 곁에서 영원히 순백색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그가 사망하자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 크쇼>에서는 추모 방송을 연일 내보냈고 1986년에는 홍 민, 김 수희, 김 학래, 하 남석, 윤 시내, 김 범룡, 이정선, 신 형원, 윤 승태, 한마음, 전 영록, 김 현식, 서 수남, 하청일, 송 창식, 이태원, 강 은철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힘을 합친 트리뷰트 음반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생을 영화화한 <님>이 개봉되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음악적 열정을 불태워 행복했던 진정한 대중음악가.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헌정음반과 편집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다른 이야기
문학에 이상(李箱)이 있다면, 가요에는 김정호가 있었다. 대중가요계의 모차르트이다. 라고 그 당시 음악 평론가들은 말하지만 사실 김정호의 음악성이 그리 대단하다고 말 하지는 못하겠지만 좋아 하는 국내 뮤지션을 꼽으라면 김정호를 단연 열손까락에 안에 꼽을 수 있다.
음악에 있어 음악성이 다가 아니지 않은가! 멋, 낭만, 김정호에게는 그런 게 느껴진다.
어떤 이는 김정호를 가르쳐 한(恨)의 가수라더라…….
한이라 함은 우리 민족의 서민적인 고유 정서가 아닌 가……그래서 일까 김정호의 노래를 분해 해 보면 국악이라는 장르가 튀어 나온다. 너무나도 잘 녹아들어 표가 잘 나지 않는 국악적 정서는 그의 가족사에서 그 근원을 찾아 볼 수 있지만 …….
아무튼 김정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어니언스1집 음반의 작곡가로 이름을 알려 50여곡의 노래로 한국 가요 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는 것만 기억하자…….
아! 또 하나 김정호의 기타 연주 실력! 기타리스트로서의 김정호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음반에서의 연주나 자료로 남아 있는 연주를 들어볼 때 이미 그의 기타 연주 실력은 최정상급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노래는 사람의 심연을 훑는다. 짧은 인생을 살다 갔다는 선입견 때문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와 노래에서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신비한 호흡을 느낄 수 있기 때문. 그의 매력은 끊길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면서도 내면의 힘을 쏟아내는 창법,
인생의 단면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관통하는 시적 정서이다. 이것은 종종 한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김정호를 알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를 앗아간 것은 병이 아니라 그 한의 노래"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포크계열로 분류되지만 우리 전통가요의 맥락에서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정호의 음악은 포크를 바탕으로 장르의 구애됨이 없는 자유로움을 보여주었다.
국악가적인 외가 쪽 피를 이어받은 듯 국악에 큰 관심을 보였고 전형적인 포크 스타일의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윤심덕의 '사의 찬미', 현 인의 '꿈속의 사랑'같은 옛 노래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뛰어난 기타 테크닉과 몰아의 경지로 보여주는 혼신의 연주는 많은 후배들에게 통기타의 고전으로 귀감이 된다.
그의 음악은 포크로 분류되지만 독특한 음색에서 품어져 나오는 혼의 목소리는 소울과 블루스의 어느 지점에서 머물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꽹과리를 들고 우리의 소리에 심취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또 다른 원천은 국악임을 알 수 있다.
음악적 특징은 김정호의 음반도 대부분 안건마가 편곡했고 편곡방식은 어니언스 음반에서와 거의 같다.
따라서 같은 김정호의 곡을 어니언스가 부를 때와 김정호가 부를 때의 차이점은 보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어니언스가 스탠더드 팝 적인 편곡에도 불구하고 통기타음악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것은 그들의 보컬이 성인음악의 꺾는 목이나 심한 바이브레이션을 갖지 않는 통 기타 음악적 보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호의 경우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바이브레이션도 가지고 있고 거친 듯 하면서도 깊은 느낌을 주는 보컬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특이한 보컬은 그의 어릴 적 판소리의 경험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판소리의 창법은 정말 세계에 자랑할 만한 특이한 보컬이다.
모든 음악양식은 그 양식이 태어났던 공간적 시간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쇳소리에 가까운 탁성은 자연 친화성, 농경문화, 노동의 정서를 온몸에 가진 사람이 저절로 표현해 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비록 우수한 전래문화의 유산이지만 이런 생활환경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맛을 제대로 내기도 어렵고 자신의 공간적 시간적 경험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신의 감정을 진실 되게 표현해 주는 보컬이라고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새로운 공간적 시간적 경험을 가진 사람이 새롭게 해석해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호는 자신이 어린 시절 경험한 판소리라는 국악과, 성인이 되어 미8군 무대에 서면서 경험한 미국음악을 잘 조화시켜 자신의 특이한 보컬로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즉 전통음악의 유산이 새로운 공간적 시간적 경험을 한 사람의 몸속에서 자연스럽게 융합되어서 새롭지만 전통음악의 숨결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현대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포크' 라는 개념을 포함하는 통기타음악의 중요 개념 중 한 가지는 '자국의 민속음악의 현대화' 라는 점에서 중요한 과제 한 가지를 달성했으며 그것 때문에 김정호는 통기타음악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대중' 이라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문제가 달라진다.
당시의 대중인 청년들이 김정호의 보컬을 듣고 '전통음악의 현대화' 라는 생각을 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오히려 그의 음악이 안건마의 스탠다드 팝 적인 편곡을 사용함으로써 팝 계열(어떤 신문기사에서는 통기타 계열이라고도 기록한다)에 가까운 음악으로 이해했다고 본다.
따라서 김정호의 음악은 통기타음악이 스탠다드 팝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가장 스탠다드 팝에 가까이 간 음악으로 볼 수 있고 논자에 따라 스탠더드팝음악에 포함시킬 수도 있는 중간영역의 음악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종환씨
“김정호는 1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적 싱어 송 라이터다. 한국적인 음악 양식을 꾸준히 탐구했고, 풍부한 감성은<눈동자>(김희갑 작곡)를 들어보면 더욱 잘 알게 된다.
인생 후반부에 국악과 사물놀이의 접목을 시도한 점도 높게 평가되어 야 한다.
한마디로 비운의 천재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씨
“당시 명동에 있던 음악 감상실 르시랑스는 음악 평론가 이백천이 운영하던 곳으로 실내분위가 독특하다. 홀 안을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바닥에 카펫을 깔아 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음악 감상을 하고 누워있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 때 이곳에서 한 무명가수가 매일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렇다고 업소에서 출연료를 따로 주는 것도 아닌데 그는 매일 같은자리에 앉아 누가 보든 말든 양반다리를 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심각하게 노래하던 친구가 김정호이다“
요절에 가슴 아파
석양이 수놓은 벅찬 노을
숲 속 소나무에 기대어서서
그의 소리들을 가슴에 담아본다.
나는 이곳에 섰지만
그는 저편에 서서
아무리 손을 휘저어 달려 봐도
맞닿을 수없는 안타까움으로
언제나 이별보다 더한
가슴앓이를 한다.
내가 남고 네가 가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눈물로 붉어진 하늘에는
한 마리 외기러기
그를 생각할 때마다 무너지는 핏빛 가슴에는 두견이 소리로 가득 차 버린다.
" 간다 간─ 다─아─정든 님 떠나간다."
내 처진 어깨위에
핏줄만 남은 목에
파랗게 타 들어가는 입술에
밀랍으로 세워 높인 콧잔등에
시들어 가는 눈동자에
헝클어진 머리, 머리에
솟아난 각혈로 남아있는 당신
이 밤이 지나
네 무엇으로 남으려나.
어둠 나라 들어가서
가슴헤쳐
입 맞추고 교접하고
영혼의 핑크빛으로 남아 잇는
음울한 백혈병의 그대여!
아─듀
피리소리 만 건곤.
그를 생각하며……
그의 노래는 사계절 자연, 어느 계절에 들어도 운치가 있고 정감이 있습니다.
특히 여름날에 듣는 이름 모를 소녀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결코 느껴볼 수 없는 슬픈 낭만과 그리움이 가슴 깊숙이 배어 있는 노래입니다. 아니, 노래라기보다는 한편의 시입니다.
이름 모를 소녀를 들으면 내 나이 지천명을 바라보고 있지만 나는 사춘기 시절의 순진한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그리움이 배어 있는 목소리 김정호.
그는 아직도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정호,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람
아직도 내 가슴 깊숙이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정호입니다.
내가 김정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74년 여름이었습니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놓고 쓸쓸히 바라보는 이름 모를 소녀”하며 가슴을 송두리째 파고들며 휘어잡는 처연하고 가슴 아픈 노래, 난 이 노래를 듣는 순간 김정호가 너무 좋아졌습니다.
당시에 이장희, 어니언스, 송 창식, 김 세환 등이 있었지만 그러나 내 가슴을 앞도 하는 노래는 김정호의 노래와 그 사람이었습니다.
김정호를 알기 전 어니언스의 편지라는 노래가 1974년 봄에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편지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전주가 그렇게 마음에 심금을 울리는데, 가사 또한 한 편의 시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노랫말이 아니라 시였습니다.
그런데 나를 놀랍게 한 것은 그 어니언스가 부른 편지가 김정호가 만든 노래였다는 것을 알고 아! 그래서 편지 노래가 그렇게 서정적이며 시적이며 가슴을 울렸었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내 청춘의 방황이 계속되던 1985년의 늦가을과 초겨울의 서 있던 계절이었습니다.
늘 밤이 되면 당시 M. B. C F. M 밤 10시부터 12시 자정까지 방송했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 크쇼”였습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는 젊은 날의 외로움과 방황을 위로해 주는 프로였습니다.
1985년 11월 29일자로 기억되는 그날,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에서 이 종환은 김정호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가슴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날 이종환의 멘트는 나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했습니다. 그 멘트는 김정호님에게 정말 어울리는 멘트였습니다. 그 멘트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종환님이 울먹이며 김정호, 왜, 그렇게 슬픈 노래만 불렀습니까? 라고.
사춘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의 가슴의 사랑과 인생, 고독을 가르쳐 주었던 김정호의 노래, 나의 젊은 시절, 유독 방황하며 외로워했던 젊은 시절 김정호의 노래는 나의 시였습니다.
그의 노래를 가슴으로 처음 들었던 내가 살던 곳은 김정호님에 대한 추억이 지금도 내 마음에 묻어있습니다.
그가 보고 싶으면 내가 사춘기시절 살던, 그 노래를 듣던 그곳으로 여행을 갑니다.
그에 대한 나의 추억을 함께 느끼고 싶어 소망과 추억의 향수를 주고파 김정호에 대한 추억을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생의 전부를 걸어 음악에 몰입했고. 여운이 긴 애상적인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했던 김정호,
노래들이 유독 슬프게 들렸던 것은 그가 노래 속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은 혹 아니었을까.
정말 끝까지 읽은 사람이 있다면 대단한 사람이지만 멍청한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