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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안에 답변 불가능한 오류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2)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불일치
7)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것도 성경의 불일치는 아니지만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이고, 마태복음에서 가장 난해하고, 더구나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과연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은 인성을 갖고 계셨고 스스로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알지 못한다고 시인하셨으므로(마24:36), 마치 바울이 자기 생애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예수님도 재림이 곧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날드 해그너는 이 견해에 대해 이런 평을 했습니다.
"이 절의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라는 강점을 갖고 있는 첫 번째 가능성이(인자의 재림-참조. 단7:13-14을 인용하는 24:30) 보통 선호될 것이다. 이 경우 예수님은 재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신학적으로는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즉 하나님의 나라의 여명은 종말의 새로운 근접을 내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고 아마 마태의 독자들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그릇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제 언급될 대안적인 견해들이 결국 불만족스럽게 여겨진다면 이 첫 번째 가능성은 예수의 완전한 인성과 자신의 재림 시기에 대해 스스로 고백한 무지를 참작하여(24:36) 가장 매력적인 견해로 남을 수도 있다."
어떻습니까? 충분히 일리가 있고 매력적이지요. 우리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역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오히려 정답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존 스토트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파루시아'(parousia, '오심')가 동시대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에 이 말씀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올 날을 자기도 모른다고 고백하셨기 때문에 재림이 언제일지 가르치셨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예수님의 긴급한 예언에서 의도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권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때가 언제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에게 긴장감을 심어주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동일한 이유 즉 예수님이 재림의 시기를 몰랐고 따라서 재림의 시기에 대해 가르치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에 착안해서 이 구절이나 이와 유사한 구절(마16:28)에 나오는 '오리라'는 말이 재림이 아니라 다른 것을 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예루살렘의 멸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A. B. 브루스는 『열두 제자 훈련』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10:23)' 이 암시적인 예언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대 민족의 분산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멸망이 오기 전에 제자들이 모든 땅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사악한 세대의 멸망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구원하라고 경고할 시간을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이 메시지를 듣고서도 거부한다면 어떤 지역에서도 지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은 똑같이 귀중한 것이다."
저는 본래 이런 해석을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예수님의 오심을 뜻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WBC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런 글을 읽었고 그것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가장 훌륭한 가능성은 이 구절이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심판에 인자의 오심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결론에 찬성하여 세 가지 중요한 점이 논증된다:
(1) 예루살렘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을 예시하며 예표론적으로 최후의 심판과 관계가 있다(24절의 주석을 보라).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인자의 역사로 볼 수 있다(참조. 24:27-31):
(2)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며, 따라서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들로의 구원사의 변화 즉 유대인들이 우선권을 상실한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3) 주후 70년(이후뿐만 아니라) 이전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23절 b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된다. 구원사에 있어 이방인들과 비교하여 유대인들의 우선권을 반영한 열두 제자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 독점적인 전도는 예루살렘의 심판 시에 인자가 오심으로 인해 중단될 때까지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제가 가장 공감이 되었던 것은 (1)번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을 예시하고 있기 때문에 인자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자가 오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24장은 이중예언이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수님은 재림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을 말씀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수님의 오심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해석에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구절은 반드시 이 의미다'라고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F. F. 브루스는 『IVP 성경난제주석』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복음화가 인자의 강림과 함께 오는 현 시대의 종말 전에는 완수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 곧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방인 신자의 총수가 충만한 채워진 뒤의 후속사건이고,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실' 그때에 절정에 이른다(롬11:25-27)."
비록 이 구절이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라서 앞의 해석이 더 맞는 것 같고 저는 그 해석을 지지하지만, 이 해석이 맞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앞에서 설명한 4가지 해석 중의 하나를 자기 견해로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제가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성경에 오류라고만 보여지는 구절들에 전혀 생각지 못한 합리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오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8)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이것도 불일치 난해구는 아닙니다. 그러나 매우 난해하고 또 복잡하고 요한계시록 해석의 기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뤄보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3: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이 구절이 재림을 가리킨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난해구입니다. 예수님이 한 세대 안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단언하셨다면 이 예언은 명백히 빗나간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틀리다니 생각할 수나 있는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어떻게 절대적인 진리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원자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예언이 빗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 "이 세대"를 '지금 살아 있는 이 세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언급하는 그 시점에 살아 있을 세대'를 의미한다고 받아들입니다. 그 경우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 지상에 있을 세대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까지 지상에 있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그 한 세대 안에 일어날 것이다."
그럴듯하지요! 하지만 "과연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청중들이 그렇게 이해했을까요?" 예수님의 청중들은 '이 모든 일'(새변역)이 자신들의 세대 안에 일어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란 어구 자체가 항상 '지금 살아 있는 세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세대는 불신앙과 무반응 때문에 "악한 세대"(눅11:29),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막8:38)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1:32). 더구나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세대 즉 "이 세대"는 선조들의 악을 넘어섰기 때문에 선조들의 악에 대한 벌까지 담당할 세대였습니다.
누가복음 11:50-51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이처럼 '이 세대'라는 어구는 그 당시의 세대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난데없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만약 종말 때의 세대를 의도했다면 '이 세대'보다는 '그 세대'가 훨씬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므로 '이 세대'는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그 세대를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어날 "이 모든 일"(새번역)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네 제자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답하신 것의 일부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온 제자들은 헤롯성전의 장엄함을 보고 압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중 하나가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나이까?" 감탄하며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13:1-4)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제자들의 질문에 나타나는 "이 모든 일"을 성전 파괴와 그때 일어날 일들입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대답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헤롯 성전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40년도 되지 않은 주후 70년 8월 로마 황제의 아들 티투스(Titus)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그 모든 일이 실제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이런 의미인데, 왜 사람들은 '이 세대' 안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마가복음 13장 4-30절에 나오는 강론에 주후 70년에 대한 예측과 종말에 대한 예측이 한데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거기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와서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예고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막13:26-27).
일부 학자들은 이 부분을 예루살렘 함락으로 실현된 신적 심판에 대한 비유적인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곳과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4장 29-31절에 묘사된 사건들이 '이 세대 안에' 일어날 것이 명백히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34절)에 근거하여, 이 구절들이 재림이 아니라 '성전 파괴' 사건에 대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 재림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이는 29-31절의 묵시적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들은 프란스의 해석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먼저, 29절의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그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세들이 흔들릴 것이다"라는 것은 이사야 13장 10절과 34장 4절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31절의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의 구약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사27:13, 슥2:6). 이 구절에서는 그 모여드는 자들이 '그의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성전 파괴를 통해 인자의 심판자로서의 권위가 확인됨으로써,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퍼져나갈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은다'는 개념이 한 장소에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도록 초청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기발하고 놀라운 해석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해도 이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왜냐고요?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양용의 교수님은 이 해석이 옳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마태복음 24장 34절을 제시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양용의 교수님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34절은 '이 모든 일들'(곧, 15-33절, 특히 29-31절에서 예언된 일들)이 일어나는 시한을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으로 명백히 해준다. 이제 우리가 29-33절까지를 위와 같이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첫째, 만일 우리가 29-31절을 '세상 끝'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할 경우, 본 절에서 제시된 예수님의 예견은 거짓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29-31절을 성전 파괴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할 경우, 예수님의 예견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 성취되었다(예수님의 예언을 들었던 '이 세대' 중 많은 이들이 실제로 이 사건을 목격했을 것이다.)"
얼핏 들으면 이것이 결정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벌써 1년도 훨씬 더 된 일입니다. 우연히 수양관에서 성경을 보다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흔히들 "이 모든 일" 안에 재림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음이 확연히 보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32-34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분명히 예수님은 34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다"가 무엇입니까? 문맥에 의하면 그것은 33절에 나오는 "이 모든 일"에 해당합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33절에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그러니 "이 모든 일" 안에 예수님의 재림이 포함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순간 저는 어떻게 탁월한 신학자들이 이 단순한 것을 착각할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것을 지적하는 신학자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똑같은 지적을 하는 학자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BECNT 마태복음 주석을 쓴 데이비드 터너 교수입니다. 그분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 해석
24장 34절에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용어가 설명되어야 한다.
첫째, '이 일이 다'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표현은 예수님이 오는 것을 예상하는 예비적 징조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오는 것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용한 비유적 이미지로부터 분명히 나타난다. 만일 '이 일이 다'(비유적으로 무화과나무가 봄에 잎사귀를 내는 것)가 예수님이 오는 것(비유적으로 여름)을 포함한다면, 24장 33절은 '너희가 예수님이 오는 것을 볼 때, 너희는 예수님이 가까이 온 줄을 알 것이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유의어 반복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이 다'가 예비적 징조들만을 가리킨다면 이 진술이 이해가 되는 것은 그 징조들이 예수님이 오는 것이 가까이 왔음을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 중요한 용어는 '이 세대'다. 몇몇 미래주의자들은 이 단어가 이스라엘 민족 또는 예수님이 올 때 살아 있는 종말론적 세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하지만(예, Toussaint 1980: 279-280, Walvoord 1974: 192-193),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동시대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11:16, 12:39, 41-42, 45, 16:4, 17:17, 23:36). '이 세대'에 대한 이해를 마태의 분명한 용법과 반대되는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은 예수님이 오는 것이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으로부터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단지 자신이 오는 것의 전조가 되는 징조들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실수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다만 자신의 동시대 사람들의 주후 70년 로마에 의한 성전 파괴를 포함하여 그러한 징조들을 보게 될 것임을 예언할 뿐이다."
이제, 프란스이 해석을 우리가 믿어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덤으로 무화과나무의 비유까지 깔끔히 풀렸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과거 유행했던 종말론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화과나무는 늦은 봄이 되어서야 잎사귀를 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에 사는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나오는 것을 보고서 여름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2-33)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는 것"은 "이 모든 일" 즉 재림의 전조들을 의미하고 "여름"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33). 이 외에 무화과나무비유 안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프란스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우선, 14절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는데 과연 성전 파괴 전에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까? 아니지요.
또, 30절의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를 이스라엘 모든 지파로 보는 것도 성경과 분명히 다릅니다.
또, 29절에는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고 했습니다. 문맥에 의하면 "환난 후"란 성전 파괴 자체를 가리키는 "큰 환란"(21-22절)을 의미합니다. WBC 주석에서 도날드 해그너도 이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환난 후에 일어날 일을 묘사한 29절의 나머지 표현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묵시적 표현일 수 있겠습니까? 단추를 잘못 끼운 것입니다.
또한, 성전 파괴 후 31절의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에서 주님은 증인들이 아니라 천사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에게는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벧전1:12). 복음 전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에서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마13: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끝에 일어나는 추수는 복음 전파가 아니라 알곡을 천국에 데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3장에도 선전 파괴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지만 그 예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3:37-39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즉 이런 해석에 부합되는 예언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전 파괴와 더불어 그런 추수나 부흥이 일어났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추측이요 상상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란스도 제자들의 질문이 성전 파괴와 주님 오심과 세상 끝 두 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24:3). 그래서 35절까지는 전자에 대한 답변이고 36절부터는 후자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 끝에 대한 표현들이 36절 전에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뿐 아니라 제자들의 질문에 나오는 "주의 임하심"에 대한 표현은 전방위적으로 두루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4: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태복음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태복음 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태복음 24: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그런데 35절까지는 성전 파괴에 대한 것이고 36절부터는 재림에 대한 것이라고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이 해석이 '예언의 은사'를 인정하지 않는 혹은 좋아하지 않는 신학자들의 지적이고 종교적인 성향에서 나온 오류라고 봅니다. 요한계시록을 과거적으로만 해석하는 학자들에게서도 같은 성향에 의한 오류가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석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예언의 진짜 의미일까요? 이제 그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4-5년 전에 썼습니다. 한 예로, 양용의 교수님은 『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를 이렇게 썼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작 연대와 관련해서는 ... 일반적으로는 60-70년 사이에 저작되었으리라는 데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마가복음은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저작되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며(참조. 13:14), 아마도 60년대 중반에, 로마-유대 전쟁이 발발하기 얼마 전(65년) 또는 그 직후(67년)에 저작되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을 쓸 때, 성전 파괴와 예수님의 재림은 둘 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였습니다. 또 이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지 따로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마가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미래의 사건의 시기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 즉 재림에 대한 말씀을 같은 문맥 속에 보존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구절이 가리키는 날이나 시간은 과연 언제일까요?
마가복음 13:32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성전함락의 날이나 시간은 분명히 아닙니다. 마가복음 13장 30절의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라는 말씀뿐 아니라 문맥 전체가 그 사건이 가깝고 분명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 외에는 누구도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는 그 사건은, 마가복음 13장 26절에 묘사된 인자의 오심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마가와 달리 마태는 성전이 파괴되고 난 직후에 마태복음을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양용의 교수님은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마태복음의 저작 연대에 대해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주후 70-100년 사이의 연대를 제안한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함락 후지요. 그래서 마태는 예루살렘 함락과 예수님의 재림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당연히 마가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마태의 시점에서 전자의 사건은 이미 일어났던 반면에 후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께 던진 제자들의 질문을 다듬어 별개의 명확한 두 사건을 가리키게 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이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예고하시자 제자들은 마태복음에서 "우리에게 이르소서. (1)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2)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마24:3). 이후 예언의 끄트머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24:34) (2) 재림 및 "세상 끝"과 관련해서는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입니다(마24:36).
그런데 마태복음 24장 전체를 읽어보면 두 사건에 대한 예언이 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뚜렷하게 서로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이 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것은 이 예언이 이중예언이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예표(성전 파괴)이고 하나는 실체(재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예언을 통해 예루살렘 함락과 재림 두 가지를 모두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전체 내용 중 일부는 34절(1세기)에 어떤 것들은 36절(종말)에 들어맞습니다. 이는 마치 에스겔 28장의 두로 왕에 대한 예언이 두로 왕과 사탄 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두로 왕에게, 어떤 부분은 사탄에게, 어떤 부분은 둘 다에게 적용되는 것과도 유사합니다. 또 요엘 2장 28절 이하의 예언이 이른 비와 늦은 비 성령에 대한 예언이 맞다면, 어떤 부분은 성령감림절인 오순절에, 어떤 것은 마지막 때 일어날 성령의 부어주심과 들어맞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이중예언이기 때문에 즉 두 사건 다 전체 예언과 관련 있는 것처럼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혼란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중예언은 한 예언을 통해서 두 가지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맥을 초월하여 어떤 구절은 가깝게 일어날 첫 번째에 해당이 되고, 어떤 구절은 먼 훗날 일어날 두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이중예언입니다. 때문에 문맥만 보고 해석하려고 하면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두 예언이 서로 뒤엉켜 있어서 전후 사건에 대한 문맥도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맥이 아니라 제자들이 던진 두 가지 질문을 기억하고 어떤 것이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이고, 어떤 것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인지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전체를 읽어나갈 때 비로소 예수님이 무엇을 예언하고 계신지 깔끔하게 정리가 되고 이해가 되게 됩니다.
여러분, 이제 의문이 풀리시지요!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 안에 다 이루리라는 예수님의 예언은 결코 빗나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류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