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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18년 겨울호
김남주홀 건립을 기다리며
맹문재
1.
2018년 8월 6일 광주 비행장에서 택시를 타고 전남대학교 인문대 2호관으로 향했다. 이틀 전 제주 평생교육장학진흥원에서 문해교육 교사들을 상대로 강의를 한 뒤 제주 시인들과 많이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결단을 내렸다. 12시에 있을 김남주홀 건립 전문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김남주 선생님을 뵐 낯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전남대 인문대 앞에서 회의 장소를 찾느라고 헤매는 나를 김은진 선생이 마중을 나와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미리 참석한 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김태완, 나희경, 최창근, 윤영일 등의 전남대 교수, 임동확 한신대 교수, 임홍배 서울대 교수, 송광룡 문학들 대표 등이었다.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농업생명과학대학 쪽을 지나가니 <여서도>라는 음식점이 나왔다. 민어탕을 마련해주었는데, 더위를 식힐 만큼 맛이 있었다. 김남주 선생님께서 차려주신 음식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기상 관측이 국내에서 시작된 이래 가장 더운 날씨가 지속된다고 연일 언론들이 보도하듯이 광주의 날씨도 굉장히 더웠다. 한 달 내내 비가 한 차례도 오지 않고 찜통더위가 계속되어 걸어 다니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학교로 돌아오니 김남주홀 건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고 있는 김양현 인문대학장 겸 집행위원장께서 외부 행사를 마치고 우리를 반겨주셨다. 학장님은 곧바로 김남주홀이 세워질 인문대 1호관 1층 113호 강의실로 우리를 데리고 가 이러저러한 구상들을 소개해주셨다. 공간이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위치에 있고 크기도 괜찮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김남주 선생님을 모실 기념관을 둘러본 뒤 우리는 인문대 2호관 교수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회의를 했다. 우선 설계도 및 조감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70평의 강의실을 1층 다목적 기념 강의실로, 복층에는 기념 공간으로 리모델링한다고 소개했다. 실용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의견들이 오고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김남주홀은 기념관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미래의 세대들이 즐겁게 찾아올 수 있는 장소가 되도록 설계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김남주홀의 설계도에 대한 의견들을 나눈 뒤 기념관에 배치할 김남주 시인의 시작품, 산문작품, 평론 글 선정 작업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시작품은 임동확 시인이, 평론 글은 임홍배 평론가가, 산문작품은 내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김남주 시인 연보는 나와 송광룡 시인이 맡기로 업무를 분담했다.
회의를 마칠 즈음에는 김양현 학장님으로부터 ‘김남주 기념홀 건립계획 보고회’ 안내를 받았다. 일시는 9월 7일 오후 4시∼6시이고, 장소는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1호관 113호였다. 행사의 주요 내용은 건립계획 보고와 설계도 발표였다. 학장님은 김남주 기념홀 건립사업의 발전 기금에 대한 안내도 했다. 5억 원의 건립 기금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해 나도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2차 전문가 모임을 10월 5일에 갖기로 정하고 회의를 마쳤다.
2.
남광주시장 안에 있는 칼국수 집으로 임동확 선배님을 따라갔다. 김준태 선생님을 비롯한 나종영, 조진태, 김완, 박관서, 박노식, 송광룡, 이동순 등 광주의 시인들이 반갑게 반겨주었다. 김완 선배님이 가지고 온 민어를 서희자 주인이 요리해주었는데, 별미였다. 우리는 술잔을 부딪치며 시를 읽었고, 관심을 두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 한 식구처럼 어울릴 수 있는 데는 김남주 시인의 정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김남주 시인의 산문 한 편을 읽어본다.
1970년으로 기억됩니다. 『창작과비평』에 실린 김준태 시인의 「보리밥」이란 시를 읽고 저는 ‘나도 한번 시를 써볼까. 이런 것이 시라면 나라도 쓰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뜨끈뜨끈하고도 달착지근한 보리밥이다
남도 끝의 툇마루에 놓인 보리밥이다
금이 가고 이빠진 황토빛 툭사발을
끼니마다 가득 채운 넉넉한 보리밥이다
파리 떼 날아와 빨기도 하지만
흙 묻은 입속으로 들어가는 보리밥이다
누가 부러워하고 먹으려 하지 않은
노랗디노오란 꺼끌꺼끌한 보리밥이다
누룽지만도 못하다고 상하로 천대를 받는
푸른 하늘 밑의 서러운 보리밥이 아닌가
개새끼야 에그 후라이를 먹는 개새끼야
물결치는 청보리밭 너머 폐허를 가려면
나를 먹어다오 혁대를 풀어제쳐
땀나게 맛있게 많이 씹어다오
노을녘 한참때나 눈치채어 삼키려는
저 엉큼한 놈들의 무변(無邊)의 혓바닥을 눌러 앉아
하늘 보고 땅을 보며 억세게 울고 싶은데
이 시는 그 당시 저에게 통쾌한 맛과 재미를 주었습니다. 저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완전한 까막눈이신 제 어머니에게 이 시를 읽어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저보다 더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영락없이 꼭 우리 밥 먹고 사는 꼬락서니다” 하며 천연덕스럽게 웃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 시와 같은 시를 흉내내어 시라는 것을 처음 쓰게 되었는데, 나중에 주로 “보리밥은커녕 보리죽도 제때에 먹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판국에 버젓이”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에그 후라이를 먹는 자들을 골려주고 저주하고 마침내 때려눕히는 데 문학적으로 일조”하고자 의도적으로 시를 써왔습니다. 20여 년 전 김준태 시인의 시 「보리밥」을 내가 읽어드릴 때 그것을 귀담아 들으시고 좋아하셨던 제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 새삼 떠오릅니다.
문학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들입니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잠시도 없어서는 아니 될 밥이라든가 김치라든가 된장국 같은 것이고, 옷이며 집 같은 것도 당연히 거기에 포함되어야겠지요. 그리고 우리 인간에 게 생활의 이런 요소들을 제공해주는 자연과 노동도 문학의 주요한 관심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학의 한 갈래로서 시에 대한 저의 생각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 시의 기반은 삶의 터전이고 노동의 대상인 인간의 대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 시의 일차적인 관심은 우리 인간에게 먹고 입고 사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의 요소들을 마련해주는 농부의 괭이와 낫과 호미이고, 어부의 배와 그물이고, 노동자들의 대패와 망치, 광부들의 다이너마이트 등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시인이 노동의 대상이고 삶의 터전인 인간의 대지에서 떨어져 있으면 그가 쓴 시는 아마, 아니 틀림없이 어떤 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문학이 노동과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것은 깃털 하나 들어 올릴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 김남주, 「보리밥과 에그 후라이」 부분
삶의 터전을 시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김남주 시인의 정신은 어느덧 육체노동으로부터 멀어진 생활을 하는 내가 새겨야 할 나침반이다. 그리하여 김남주 선생님과의 인연을 떠올려보았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제5회 전태일문학상 시상식장에서였다. 내가 응모한 작품을 신경림, 김남주 두 분이 심사를 맡으신 것이었다. 시상식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전태일재단의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 1993년 2월 20일이었고, 장소는 민예총 강당이었다. 시상식에 오신 선생님께서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해주셨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따스한 미소를 지으신 모습은 선명하다. 그 뒤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행사장에서 뵐 때도 항상 같은 미소로 맞아주셨다.
그렇지만 그러한 시간이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췌장암 선고를 받았다는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몰랐다. 그 소식을 들은 뒤 정인화 선배님과 선생님께서 입원하고 있는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에 찾아가 뵈었는데, 바싹 마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개의치 않고 우리를 따스한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을 돌보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와 박윤규 시인과 내가 교대로 돌보아드리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는 학교생활 등으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 바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박윤규 선배님이 선생님을 끝까지 모셨다. 나는 지금까지 그 일을 늘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
1994년 2월 13일 김남주 선생님께서 별세하였다. 2월 16일 ‘민족시인 고 김남주 선생 민주사회장’ 영결식이 경기대 민주광장에서 거행된다는 것을 언론의 기사를 보고 알았다. 나는 충격을 받아 외출조차 하지 않고 있었는데, 중앙대 신문사에서 선생님을 기리는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 왔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추모의 글을 썼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제 눈을 의심하며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몇 번이 뒤적였습니다.
‘김남주 시인 타계…… 16일 민주사회장’이라는 신문기사 앞에서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고려병원에 찾아가 뵌 지 불과 보름쯤 되었는데…… 민족작가회의 사무실에서 후배들의 시 합평회가 열릴 때마다 참석하시어 싱긋싱긋 웃으며 바라보셨는데…… 요즘 건강이 어떠시냐고 여쭈면 그저 농담하는 것처럼 안 좋아, 하고 대답하셨는데……
해맑은 그 얼굴에 『진혼가』『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사랑의 무기』『솔직히 말하자』『사상의 거처』『이 좋은 세상에』 그리고 옥중시 묶음인 『저 창살에 햇살이』 등의 선생님 시집이 떠오릅니다. 옥살이를 하실 때 우유갑이나 빵 봉지 또는 밑씨개용 종이 따위에 시를 써서 묶은 이 시집들.
선생님의 전사다운 힘은 해맑은 웃음, 그 순진무구함에서 솟은 것입니다. 그 순진무구함으로 말미암아 이 사회의 모순과 타락을 가만히 보지 않았고, 그리하여 48년이란 짧은 인생 속에서 ‘9년 10개월’이라는 세월을 차디찬 콘크리트 감방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는 상황의 산물이며 나의 모든 시는 피의 학살과 저항의 연대에 대응한 것”이라는 확고한 사상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철창 안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자유의 햇살을 5년 남짓밖에 쬐지 못하고 선생님은 이제 떠나가셨습니다. 어찌 억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선생님, 당신의 큰 뜻을 이어받을 뜨겁고도 깨끗한 숨결의 의혈인들이 이 땅에는 많이 있습니다. 이 의혈인들은 결코 선생님의 웃음을 값싸게 하지도, 선생님께서 흘린 피를 묽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녀가시는 길 편히 가십시오. 이 세상에서 못다 쬔 자유의 햇살 속으로 부디 아픈 다리 바로 딛고, 동지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기쁘게 웃으며 가십시오.
― 맹문재, 「김남주 선생님 영전에― 뜨겁고 깨끗한 의혈인들을 대신하여」 전문
3.
나는 살아가는 일에 쫓기느라 김남주 선생님을 잊고 지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선생님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던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있는 남일당 건물 옥상에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이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경찰과 용역 직원들이 무리하게 진압을 시도하는 바람에 5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입은 그야말로 참사였다. 그리하여 무자비한 자본가 계급과 그들을 비호하는 정부에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 행동으로 분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용산 참사 현장에서 박광숙 선생님을 뵈었다. 나는 너무 놀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는 선생님께 조심스레 다가가 인사를 드리고 김남주 선생님을 돌보아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에 용서를 빌었다. 선생님께서는 나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더 말씀 드렸더니 기억하셨는데, 신경 쓰지 말라고 시원하게 말씀해주셨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뒤 한 해에 한두 번은 꼭 찾아뵈었는데, 올해는 아직까지 뵙지를 못했다.
2014년 김남주 선생님께서 타계한 지 20주기가 되어 이러저러한 행사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염무웅·임홍배 엮음으로 『김남주 시 전집』이 간행된 일이 가장 의미가 있다고 본다. 2015년 2월 13일, 선생님 타계 21주기 날짜에 맞추어 내가 엮은 『김남주 산문 전집』도 간행되었다. 박광숙 선생님께서 기회를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2014년 학교의 연구년이어서 미국의 대학에 방문연구원을 신청해놓은 상태였는데, 김남주 선생님의 산문집을 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원을 포기했다. 선생님께 대한 죄송함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1년 동안 최선을 다해 작업했다. 되돌아보면 김남주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전태일문학상을 주셨고, 산문 전집을 간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고, 또 당신의 기념관 건립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주셨다. 선생님과의 인연에 어떤 운명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저 감사할 뿐이다.
4.
2018년 10월 5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김남주 기념홀 건립을 위한 제2차 전문가 회의가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었다. 장소는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1호관 영문과 세미나실이었다. 워크숍의 사회는 나희경 전남대 영문학과 교수가 맡았다. 제1부에서는 김양현 전남대 인문대학장 겸 집행위원장께서 건립 계획과 진행 상황 전반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지난 9월 7일 행사한 ‘김남주 기념홀 건립계획 보고회’도 소개해주셨다. 자료집에 실린 김남주 기념홀 건립 추진 취지는 다음과 같았다.
2019년은 김남주 시인이 타계한 지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들에게 먼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만, 시인의 정신과 삶의 태도, 그리고 문학적 유산은 우리가 길이길이 보존할 귀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에 시인의 생전에 가까이 지낸 모든 분들과 그 친구들, 시인을 기리고자 하는 모든 분들의 뜻을 모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에 김남주 기념홀을 건립하여 시인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합니다.
―「김남주 기념홀 건립을 추진하며」 부분
제2부에서는 임동확 한신대 교수가 김남주 시인의 시작품 및 시 세계를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 다음으로는 내가 김남주 시인의 산문작품에 대해 발표했다. 그리고 임홍배 서울대 교수가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이메일로 보내온 김남주 시인의 작품 세계를 다룬 평론 글들에 대해 참석자들이 의견을 나누었다.
토론 시간에는 송광룡 시인이 김남주 기념홀의 건립 방향과 전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기념관이 김남주의 삶과 문학을 알지 못하는 대중들도 흥미를 느낄 수 있고, 단순한 관람의 공간을 넘어 체험의 공간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텍스트와 영상의 변용이 자유로운 멀티미디어의 활용을 제안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1) 옥외 벽에는 김남주의 아포리즘 문구가 흐르는 네온사인이나 현수막, (2) 옥내 강의실 입구 벽에는 김남주 생애와 문학을 설명하는 패널, (3) 강의실 내 기념홀에는 김남주 시인의 생전과 사후 동영상, 김남주 육성 시 낭송 및 김남주 시노래 음반, 김남주 관련 도서, 육필시, 교도소 독방 체험, 멀티 방명록 이벤트 등이었다.
나는 토론 시간에 두 가지 의견을 보탰다. 한 가지는 김남주 기념홀에 기록되는 글들은 친일문학상 수상자의 것은 가능한 한 배제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김남주 시인이 분단 극복과 민주화를 위해 반유신 투쟁과 남민전 운동으로 장장 10년이나 옥고를 치른 정신을 계승한다면 당연히 지켜야 할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김남주 시인의 모교에서 간행되는 교지인 『용봉』에 수록된 작품을 전시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남주 시인이 학창 시절에 가진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남주 산문전집』을 간행하면서 이승철 선배님의 도움으로 『용봉』에 발표된 작품을 다행히 발굴할 수 있었다.
날이 흐리고
바람만 불어도
두리번거리는 눈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술이라고 하지만
바람이 불고
진눈깨비만 흩어져도
우려하는 눈초리로
잽싸게 우산을 펼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술이라고 하지만
그러다가 당돌하게
우박이라도 떨어지면
늠름하던 친구들!
소스라치게 놀라 갑자기
성인군자가 되어
얌전하게 굴고 마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술이라고 하지만
얼어붙은 거리를
달리는 기술 달리면서
비칠대다가 거꾸러지는가 했더니
거꾸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가 했더니
부릅뜬 두 눈 한 입의 아우성으로
피와 함께 일어서고 마는
이것은 또한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술이 아니냐,
― 김남주, 「살아가는 기술」 전문
워크숍을 마친 뒤 김양현 학장님은 우리를 광주 동명동에 있는 <미미원>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해주셨다. 나를 전문위원으로 추천해준 임동확 선배님은 물론 김준태 선생님과 박석준 선배님도 함께했다. 나는 그곳에서 육전이라는 요리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광주 송정역에서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김남주 선생님께서 여전히 따스하게 웃으시며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학교 교수이다.
【사진 1 설명】
김남주홀 건립 전문가 회의를 마치고(2018년 8월 6일, 전남대 인문대 2호관)
위의 왼쪽부터 송광룡 최창근 맹문재 윤영일 안동환
아래의 왼쪽부터 나희경 임동확 김양현 임홍배
【사진 2 설명】
김남주홀이 들어설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