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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가 축복받은 이유
누가복음 19장 1-10절
< 물질주의를 경계하십시오 >
약 5년 전 미국의 멧칼프 부부는 6540만 달러(약 650억원)의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곧 이혼하고 남편은 2003년 음주운전과 법정다툼에 시달리다가 45세의 나이로 죽고, 아내는 작년 11월 23일 오하이오 강변의 대저택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외에 로또에 당첨된 후에 방탕하게 되고,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하고, 친구관계와 가족관계가 깨지고, 당첨금을 다 탕진한 후에 절도행각을 벌이다 잡히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약 10년 전에 4530만 달러(약 450억원)의 복권에 당첨됐던 톰 티히는 당첨 직후부터 외출할 때마다 경호원을 대동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친척과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돈을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 전화도 수시로 걸려왔습니다. 그래서 티히는 항상 무기를 소지한 채 살고 있고 우편물도 일일이 폭발물 검사를 한다고 합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거액 복권 당첨자들의 생활상을 추적했는데 그 중에서 90% 이상이 5년 만에 당첨 전보다 더 가난해져 있었고, 정신적으로 더 불행해졌다고 느끼게 되었고, 정신과 병원을 찾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돈이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1999년에 영국의 한 대학 연구팀이 54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방글라데시가 1위, 아제르바이잔이 2위, 나이지리아가 3위를 각각 차지했고 스위스, 독일, 캐나다, 일본, 미국 등은 40위권 밖으로 처졌으며 한국은 23위에 머물렀습니다. 요즘 캐나다와 스웨덴은 사회복지가 잘 갖춰진 선진국이지만 자살률도 세계 최고입니다. 이런 사실은 돈과 행복은 관계가 없음을 잘 말해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돈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돈이 건강을 주는 것 같지만 때로는 돈이 병을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대인의 많은 병은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잘 먹어서 생기는 병입니다. 돈이 친구를 주는 것 같지만 진짜 친구를 뺏고, 돈이 사랑을 주는 것 같지만 진짜 사랑을 뺏기도 합니다. 우리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이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삭개오가 축복받은 이유 >
오늘 본문은 삭개오가 구원받는 장면인데, 이 장면은 사람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돈은 많았지만 로마의 꼭두각시로 당시 사람들에게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구원받게 되는데 어떻게 삭개오가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1. 예수님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며칠 전에 여리고에 잠시 들리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모여들자 삭개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3-4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추구하는 열정이 느껴집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십니다.
사랑도 대개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람이 얻습니다. 밀양아리랑 가사 1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무 행동도 없이 보아달라고만 하면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2절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도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좋은 사람이 있는데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하면 어떻게 사랑을 얻습니까?
작년에 우리 선교연맹 회원인 이창영 목사님이 51살에 결혼했습니다. 이제 며칠 후에 곧 첫 딸을 낳는데 그분은 좋은 사람이 있어도 별로 액션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결혼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갑자기 시리아 선교사로 있던 지금 사모님을 만나서 전화 몇 번 주고받더니 시리아까지 날아가서 청혼했습니다.
사랑을 얻으려면 열정적으로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친구를 얻으려면 자주 찾고, 식사도 나누고, 선물도 주고, 대화도 해야 친구를 얻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기를 원하면 예배에 힘써 참석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믿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추구할 때 주님 이외의 것을 노리고 주님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해야지 예수님을 마치 물주처럼 생각하고 접근하고 사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핵심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소원성취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해야지 물질과 성공과 기적을 얻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역시 우리 선교연맹 회원인 정길진 목사님은 이번에 돌아가신 정 브리실라 사모님을 대단히 사랑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분은 사모님의 사심 없는 순수함이었습니다. 결혼 전에 목사님이 선을 볼 때 자신이 성문학원 이사장 장남이라는 것을 알고 선을 보아도 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오직 브리실라 사모님만 그런 마음이 없이 목사님을 순수하게 사랑해서 그것이 제일 맘에 들었다고 합니다.
순수한 사람은 순수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과 진정한 축복을 얻으려면 순수하게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축복과 기적과 성공을 염두에 두고 주님을 찾으면 진짜 축복은 없습니다. 주님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닙니다. 반면에 주님이 함께 하시면 지금은 실패 같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 잘 모릅니다. 그저 “요것만 해결되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해결되어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청년은 한 자매를 3년 동안 집요하게 따라다닌 끝에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할 때 환한 미소를 지으며 꿈을 이뤘다고 좋아하더니 단 1년 만에 갈라섰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 좋은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쁘게 되기도 하고,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이 좋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만약 다 들어주었더라면 저는 영영 몹쓸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무엇을 얻어서 몹쓸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 소원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보다 소원이 크게 보이면 안 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바라볼 때는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주님을 보려는 많은 사람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처럼 때로는 믿는 사람이 내 신앙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주님 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사람 보기를 포기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처럼 주님만 간절히 사모하면 반드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2. 체면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어떤 존재입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여리고 지역은 유다 땅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물품 통관세를 징수하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세관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공권력을 이용해 맘대로 세금을 부과하며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허가 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처럼 막강한 권력과 물질을 가진 삭개오는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리장인 것을 보아 나이도 상당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만나보기 위해서 모든 체면을 버리고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그처럼 체면을 버려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면 그의 키 작은 콤플렉스는 더 드러납니다. 그래도 그는 올라갔습니다. 그처럼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기를 원하면 자기 파괴의 아픈 시도가 필요합니다. 진리를 찾는데 체면이 걸림돌이 되면 안 됩니다. 진리는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외적으로 조금 성공했다고 마음이 높아지고 체면을 내세우면 하나님의 마음은 더 멀어지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엇을 내세울 수 있습니까? 내세울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를 버리고 내 모습 이대로 받아달라고 해야 합니다. 진리의 세계에 붙잡히려는 처절한 자기 파괴의 시도가 있어야 합니다. 로켓이 우주로 나갈 때 가장 힘든 일은 대기권을 탈출하는 일입니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로켓이 가진 전 에너지의 4분의 3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대기권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체면은 대기권과 같은 껍질입니다. 그 껍질을 깨는 일은 어렵지만 그래도 깨야 합니다. 진리와 구원은 체면보다 중요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면 주님 앞에서도 체면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체면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체면을 버릴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지난 16일 우리교회에서 목사고시가 있었습니다. 6명의 고시위원 목사님들이 모였는데, 마침 3번째 과목 시험 중에 한일 야구가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들은 고시보다 야구에 더 몰두했습니다. 점심식사 시간에는 이창영 목사님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야구에 이겨서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가 넘치게 하소서!”
결국 2대 1로 이겼습니다. 목사님들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야구 끝나자마자 김정효 전도사님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화기애애하게 인터뷰가 잘 끝났습니다. 목사님들이 기분이 좋으니까 점수도 후하게 주었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목사님들이 체면을 버리고 함께 어우러진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님들이 권위를 내세우는 모습보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보기가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가끔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희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장도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옷들을 잘 벗어야 합니다. 지식의 겉옷도 벗어야 합니다. 좀 배웠다고 아는 척 하면 신앙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많이 배우고 제대로 배운 분들은 겸손합니다.
또한 지위의 겉옷도 벗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지위가 올라갈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어떤 사단장 집사님은 주일이면 제일 먼저 교회에 와서 주보를 들고 교회입구에서 안내를 해서 부하 장병들이 큰 은혜와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감정의 겉옷과 자존심의 겉옷도 잘 벗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참고, 마음에 상처가 있어도 감정의 겉옷을 버리고 웃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구보다 위해주시고,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3. 주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주님께서 삭개오의 열정을 보고 “네 집에 유하겠다”고 하자 삭개오는 급히 뽕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구원의 믿음은 주님을 영접할 때 주어집니다. 주님을 보고 좋은 분이라고 바라만 보아서는 안 되고, 주님에 대해 열광을 하고 환호를 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도 안 되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내 집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항상 베다니의 삼남매, 즉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왜 좋은 집과 호텔에서 머물지 않고 그들 집에 머무셨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그렇게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왜 가룟 유다가 나중에 주님을 배반했습니까? 자기 사상에 몰입되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주님을 겉으로만 따랐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극단적인 유대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오면 유대인을 구원하고 지상 최대의 선민국가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까지 자기 사상대로 움직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자기 사상과 맞지 않다고 해서 결국 주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가룟 유다처럼 사상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은 시대가 지나면 변합니다. 우리는 내 생각과 사상과 자존심과 고집을 버리고 주님을 마음으로 겸손히 영접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날마다 우리와 동행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4. 성도답게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그 정도로 삭개오는 사람들의 따돌림의 대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정당한 이유를 내세워도 누군가를 따돌리려는 마음은 성령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그처럼 따돌림 받는 삭개오에게 주님은 찾아오시고 보란 듯이 그의 집에서 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그 주님의 사랑과 의도를 알고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 금액은 당시 율법에서 정하는 구제와 변상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이지만 새로운 삶을 결단하면서 과감히 자기의 물질을 주님 앞에 내놓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이 고백은 쉽지 않은 고백이지만 삭개오는 그런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런 결단을 요구합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의 축복도 준비되어 있지만 내 측면에서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받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더 나은 삶을 향한 헌신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더 나은 삶을 향한 몸부림이 없으면 구원은 받아도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받지 못합니다.
미국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16살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더 나은 삶을 향한 결단이 없었기에 삶에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살 때 사귀던 자매와 헤어지고 남미 여행을 하는데,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 식당에서 식사할 때 근처에 앉은 한 노부부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아! 좋다! 여태껏 안 먹고 안 쓰고 고생하다가 지금 이렇게 휴가를 누리니 고생 할만 해!”
그 말이 그에게는 그토록 어리석게 들렸습니다. “그토록 안 먹고 안 쓴 결과가 고작 코파카바나 해변의 고급 식당에서 저녁 한 끼 먹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방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제 인생에 더 나은 무엇인가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삶의 자각을 통해서 그 뒤로부터 변화된 삶을 추구해서 40대 초반에 미국 최대의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더 나은 것을 추구하려는 열정이 없으면 축복된 삶도 없습니다. 우리는 삭개오처럼 결단해야 합니다. 특별히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돈을 거의 신처럼 숭배하고 있습니다. 돈을 따라 직업을 선택하고, 돈을 따라 배우자를 선택하고, 돈을 따라 진로를 결정합니다. 또한 돈 때문에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사기를 치고, 강도질을 합니다. 그처럼 돈만 따라 살면 인간은 질이 나빠집니다.
결국 신앙은 돈과의 싸움입니다. 즉 내 마음 중심에 “돈을 모실 것인가? 하나님을 모실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에서 해방될 때 진정한 신앙이 가능합니다. 사실 바른 헌금 생활은 바른 신앙의 방향타가 됩니다.
< 사명감을 가지고 사십시오 >
청교도들은 “주머니의 회개가 없는 회개는 가짜다!”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회개 고백을 직접적인 말보다는 자신의 물질을 드리겠다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그 말에 담긴 의미와 진심을 알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을 보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주님의 최대 관심이고, 이 세상에서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가끔 주일 예배를 빠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빠질까요? 인격이 나빠서가 아니고, 성실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게을러서도 아닙니다. 그분들 중에 성실하게 사는 분들도 많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구원에 대한 절실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가 구원받은 존재인가에 대해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면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헌신을 결단해야 합니다.
특별히 선교와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나누기 위해서 번다는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물질을 잘 쓰는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은 물질을 못 쓰는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돈을 벌 때도 사명감을 가지고 벌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과 생각으로만 선교하지 말고 선교사님을 실질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이진구 목사님이 사역하는 중국 농아교회를 위한 건물을 구입하는데 10만 불 정도가 필요하다는 기도제목을 들었습니다. 우리 선교회가 그 일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힘써 동참해주십시오. 그 외에 여러 선교와 관련된 기도제목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새 신자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의 마음을 여는 매개체로 사랑매거진 사역을 하면서 ‘이한규의 사랑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벌써 책 한 권 분량이 넘었습니다. 이제 사랑칼럼이 책으로도 나와서 인터넷을 보지 않는 사람도 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책 한 권을 내려면 천만 원 가량 드는데 사랑매거진 사역은 교회사역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하기 때문에 책 발간에 관해 교회에서 재정적으로 돕기 힘듭니다. 사랑칼럼을 통해서 은혜 받고 사랑칼럼이 책으로 나올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항상 이런 꿈을 꿉니다. 이런 기도제목이 있을 때 선뜻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돈을 벌 때도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벌어야 합니다. 가난이 한이 되어 돈을 벌려고 하면 그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자신이 망가지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돈을 벌려고 하면 목적도 이루고 자신의 영혼도 소중하게 잘 지킬 수 있습니다.
록펠러는 젊었을 때 가난이 한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려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그렇게 뛰게 했습니다. 그러자 노동 착취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결국 그는 미국 최대의 부자가 되었지만 삶의 보람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몸은 다 망가졌고, 불안은 더 심해졌습니다. 결국 그는 53세에 노이로제, 불면증, 무력증 등 각종 질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활동을 하며 리버사이드 교회를 짓고, 교육활동을 하며 시카고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의 삶의 기초가 사랑이 되면서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98세까지 장수하며 살았습니다. 그처럼 믿는 사람답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건강과 은혜와 축복의 기초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자로서 선교와 구제에 힘씀으로 축복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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