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옆으로 축 늘어져 있는 제느의 커다란 두 날개가 투박한 돌 따위에 맞아 이리저리 휘청이는 걸 보면서 최대한 속도를 냈다. 저러다 또 다치면 접어 넣지도 못하고 한동한 고생할거다.
뒤를 흘끔 돌아다보니 내려오고 있는 일행이 보이고 뭔가가 계속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돌 조각들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더구나…어떻게 된 일인지 이 아래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미로처럼 굽이친 통로나 마루, 바닥도 보이지 않고 벽도 없었다. 주변에는 휭휭 지나가는 흉흉한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다.
"제느야!"
거꾸로 떨어지는 제느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늘어진 날개를 추스르며 한 팔로 껴안고 약간 더 속력을 내서 그녀가 놓친 창 끝을 잡았다. 5미터에 달하는 거창이 정말 깃털 하나만큼의 무게도 돼지 않는 것 같다. 더구나 창을 잡으니 그것이 내 팔을 휘감아들며 줄어들었다.
아, 이거 꼭 제느가 나한테 몸을 감아오는 것 같잖아?
위에서 떨어지는 돌을 피해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제느의 날개는 너무나도 커서 내 짧은 팔로 추스르기는 버거웠기 때문이다. 날기에는 딱 좋은 크기를 가지고 있는 날개지만 이렇게 주인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을 때는 거추장스런 짐이다. 그게 뭐 제느의 몸처럼 트럭에 받혀도 멀쩡한 튼튼한 거라면 모를까, 전에 그 일처럼 그냥 뚝뚝 부러지는 연약한 것이어서야 어디 걱정이 되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바로 잡았더니 이번엔 도저히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이봐요! 이리로 와요!"
흘러 내려가는 제느의 몸을 추스르고 벌써 멀리 떨어진 구멍 가까이에 있는 일행들을 부르니 다들 별 탈 없이 멀쩡한지 금방 내가 있는 쪽으로 찾아왔다. 뭐 기타 흙먼지나 오물로 약간 더러워져 있기는 했지만 몸만 멀쩡하면야 괜찮은거지.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르겠어요. 갑자기 정신을 잃어서. 그런데 여긴 대체 뭐 이렇게 생겨 먹은 거죠? 뭐 아는 거 없어요?"
"크로넬의 미궁 아래가 이렇게 커다란 공동이라는 건 처음 보는군요. 이런 곳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그렇단 말인가? 하긴 여기까지 내려올 만한 사람이 있었을런지도 모르니 할 수 없는 일이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 제느를 어디 눕힐만한 장소를 찾아봐야 하는데 사방이 다 깜깜해서 네프리스가 몸에 두르고 있는 마법진의 빛이 다다르는 벽 같은 것이 없다. 천장의 붕괴는 멈춘 듯 더 이상 돌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음도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 상상하기보다 더 넓은 것 같다. 설마 그 산맥만큼의 바닥이 다 이렇게 텅 비어있는 건 아니겠지?
"크리스. 라이트 좀 몇 개 띄워봐. 여신께서는 왜 갑자기?"
"몰라요. 그냥 정신을 잃었어요."
"으아아! 세상에!"
허억! 도대체 위에 있는 흙더미는 뭘로 받쳐지는 거야? 크리스가 널리 퍼트린 빛 구슬 몇 개가 비추는 것들은 희미하게 물결치고 있는 크기를 알 수 없는 지하호수와 빛 구슬이 바늘만큼으로 보여서야 빛이 닿는 벽, 지하에 만들어진 거대시설물이라고 믿어도 무색치 않을 정도로 커다란 공동이다.
"우리가 지나온 거리를 추정해볼 때 여기는 산맥의 밑이야. 인공적으로 판 듯해."
"인공적으로 파다니?"
"벽을 봐. 크리스. 라이트 움직여봐."
시야가 겨우겨우 닿을만한 멀리서 어둠을 밝히던 바늘 만한 빛 구슬이 크리스의 가리킨 손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니 그 빛에 따라서 벽을 이루고 있는 굴곡들이 보이는데 마치 커다란 갈퀴로 헤쳐낸 듯한 자국이 위에서 아래로 길게 나있다. 매끈하게 잘라낸 모습이 자연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모습이다.
"후우. 밑에 뭐 없어요?"
"중간에 바윗돌은 몇 개 떠있는 듯 하군요. 네프리스. 내려가자."
"응."
양옆으로 축 늘어진 제느의 날개 때문에 속도를 맞출 수가 없어서 일행과 거리가 자꾸 멀어진다. 바닥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 바윗돌로 가는 동안 제느를 흔들어서 깨워봤지만 뭐에 당했는지 상처는 보이지 않았는데 정신은 깨어나질 않았다. 전처럼 안으로 들어가서 깨워볼까 생각했지만 그때의 정신 없는 반응을 생각하면 좀 꺼림직 하다. 더구나 무엇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행동하는 건 안 좋지 않을까? 그보다 우선 이 날개부터 어찌해야겠다.
"저기야! 제법 평평한데?"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와서 네프리스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호들갑을 떠니 크리스가 그곳으로 빛 구슬들을 모았다. 밝혀진 빛에 파도가 잔잔히 치고 있는 모래사장과 그 가운데에 솟아있는 검은색의 평평한 돌 지대가 보였다.
"모래사장이라니, 원래 있던걸 넓힌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잠깐만 비켜줘요!"
검은색 암반 위에 내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을 소리쳐 비켜나게 한 다음 제느를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날개를 접어주고 안색을 살피니 그런데로 혈색이 괜찮은 것이 그렇게 몸에 이상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등에 메고 있던 총을 옆에 놓고 주위를 둘러보니 파도치는 소리말고는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없다. 이게 끝인가? 여기서 더 내려갈 수는 없는 거야?
"밑에서 뭐 느껴지는 것 없습니까?"
"별로요. 물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면야 가만히 있겠냐마는, 제느는 도대체 뭣 때문에 충격을 받은 걸까?
"제느야. 제느야."
그냥 잠에 빠진 듯한 제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툭툭 건들며 마음 속으로 불러보아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정말 잠에 빠진 걸까 싶어서 이마에 이마를 대고 강제로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려는 찰나,
주위가 삽시간에 어두워지고 조용해졌다.
"으윽! 모든 힘의 흐름이 멈췄어!"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는군. 공기가 얼어붙었어. 네프리스, 크리스, 준비하고 가운데로 모여."
어둠 속 어딘가에서 말하는 아리나의 목소리대로 방금 전까지 주위를 잔잔하게 채우고 있던 파도소리가 전연 들리지 않고 시계초침 소리가 요란하게 들릴만큼 조용하게 변했다. 더불어 이 공간 안에 있던 힘의 흐름이 완전히 얼어붙었는데, 그것이 네프리스와 크리스의 마법을 종료시킨 것 같다. 누구의 소행이지? 낌새는 못 느꼈는데? 내가 힘을 감추고 있어서 그런가?
"앗? 으앗!"
"왜, 왜 그래 크리스?!"
"아, 아무것도 아냐. 아하하…."
"어? 지금 뭘 밟은 거예요?!"
빛이 전혀 없는 곳이라 하나도 안 보이는 걸 손을 더듬어서 제느의 손을 잡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저러니 당연히 누워있는 사람 걱정이 갈 수밖에. 깜짝 놀라 얼른 제느의 여기저기를 만져보니 다행이 괜찮은 것 같기는 하다. 혹시 날개 밟은 거 아냐?
"아, 아니 저기 아무것도 안 밟았어요. 그냥 발을 헛디딜 뻔해서. 하하하."
"함부로 걸어다니지 말아요."
뚱하게 대답해주곤 한번 빛을 끌어 모아 보았다.
"어엇?!"
"어떻게 마법을?!"
아까는 분명히 되지 않았는데? 손안에 잡히는 빛 뭉치를 이리저리 주물럭거리다가 위로 휙 던져서 크게 만드니 주위가 확 밝아왔다. 다들 눈을 찡그리는 가운데 제느를 살펴보니 어디 이상한 곳은 없는데 저어기 접혀진 날개 관절 쪽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보인다. 아니?! 남의 소중한 아내 몸을 밟아놓고 시치미 떼었단 말이야?!
"…아하하. 저기 그러니까."
제느의 몸을 안아들고 우익하며 화를 내려는 순간 상당한 수준의 힘을 갖춘 존재가 굉장한 기세로 아래에서부터 이곳으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건 거의 제느의 힘에 근접, 아니 조금 더 넘어선다. 이곳을 만든게 저 녀석이었나?
"아리나! 네프리스! 크리스! 제느 옆에 있어요!"
이미 셋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만 다시 경고해줘서 나쁠 것은 없지. 눕혀놓은 제느의 주위로 일행이 모이는 것을 한번 돌아보며 확인한 후 제느의 총을 줏어 들고 바위섬 주변에 빛을 가득 띄웠다. 주변에 보이는 검은 물들은 죄다 시간이 멈춘 듯 자연스런 파도마저 일어나지 않고 그저 거울처럼 반짝거리기만 한다. 마치 지금 올라오는 녀석에게 겁을 먹은 것 같다.
그 순간의 조용함이 지나고…갑자기 발 밑이 불안하게 우르릉거리더니 섬에 만들어진 백사장 너머 내가 빛을 띄어놓은 수면이 폭발했다.
"허억! 크로넬의 페렌타인이야…!"
사방으로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와 함께 크리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신중하게 총을 조준하자, 눈앞에 물로 된 상반신을 드러낸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입을 연다.
쇠를 깎는 소리, 유리를 긁는 소리, 육신이 뭉개지는 소리, 망자의 비명, 산자의 단말마, 지옥이 토하는 포효 그 자체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정말로 끔찍한 목소리다. 고막이 터져 나갈 듯한 강력한 소리에 귀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려니 뒤에서 비명이 들린다.
"으아악!"
"아악!"
"아리나!"
신의 힘은 이다지도 강력했나? 바닥에 피를 토하며 나뒹굴고 있는 일행들에게 다가가 살펴보니 벌써 바닥을 긁어 손톱이 부러지고 온몸이 경련으로 뒤틀리고 눈, 코 입, 귀 등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대마법사에 100만이나 되는 동족의 생명을 힘으로 갖고 있는 엘프인데 전혀 어떤 저항도 무의미하게 당해 버린거다.
그런데 왜 난 아무렇지도 않지?
"크리스. 조금만 참아요."
일단 뒹굴고 있는 일행들에게 내 힘을 넣어 응급처치를 하고 출혈을 멎게 한 다음 다시 총을 다잡아 들고 바다에 떠 있는 그 역신이란 놈을 마주보았다.
<<네 놈은!>>
"누구냐 너! 아니, 네가 여길 만든 역신이냐?!"
<<설마! 이 빛은! 대 차원의 신인가!!>>
어? 어? 갑자기 이 녀석이 바다 위에 내가 띄워놓은 빛 덩어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보기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도망가려고 하는지 어딘 가로 문 비슷한 것이 열린다. 가만히 두고 볼 쏘냐!!
"어딜 도망가려고! 빚 좀 받아야겠어!"
<<으악!! 으아아악!!>>
최대한 힘을 풀어내어 도망가려고 하던 문을 강제로 막고 이 공동을 내 힘으로 꽉 메우니 내 몸에서부터 강렬한 빛이 퍼져나가며 공동 전체가 하얗게 대낮처럼 밝아졌다. 역신이 도망가려던 문은 힘을 일으키자마자 문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찌그러져 사라지고 모든 퇴로를 봉쇄하니 궁지에 몰린 녀석이 호수의 물로 나와있던 몸을 없애고는 원래 모습을 드러낸다. 형체를 잃고 쏟아지는 물이 상당한 파도를 만들어냈다.
"네가…."
뚜둑. 내 앞에 나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현신한 녀석을 바라보며 총을 뒤로 메고 손가락을 꺾었다. 분명히 겁먹고 있다. 아까는 단지 분노한 노성 한방으로 모두를 다운, HP 0으로 만들었던 녀석이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어대며 내가 다가가도 나무처럼 못 박힌 채 움직이지도 못한다.
"내 소중한 아내를 가지고 그 짓을 했냐?"
"윽, 으으윽. 그건…."
"나는 말야 누구 때리는 취미는 절대 없는데 우선 한대 맞고 부터 시작해야겠다. 제느가 아팠던 만큼 아파봐라."
이 곳이 내 성역화가 된 것인지, 녀석의 힘이 낱낱이 느껴진다. 개중 상당수를 싸잡아 봉인해버리자 완전히 죽을상이 된 얼굴을 우선 한방 날려주었다.
퍽!
"아악!"
으음, 조금 셌나? 몇 개인가 하얀 조각하고 피를 흩뿌리며 하얀 모래사장에 구르는 녀석에게 다가가 입고 있는 옷의 멱살을 잡아 쥐어 들어올렸다. 제느보다 약간 더 힘이 센지라 정말이지 이 녀석은 내 앞에서 완전히 얼어붙어서 빌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여자가 아무리 미녀라도 함부로 건들면 안되는 거야. 이런 백이 있으면 어쩌려구.
"나 지금 몹시 화가 나 있어. 이유는 알지? 맘 같아서는 확 어떻게 해버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당사자가 직접 폭력을 행사해야 기분이 풀릴 것 같거든?"
그래. 하여튼 동네에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다니던 깡패 녀석을 지나가던 여행자가 정말 온몸이 노골해 지도록 두들겨 패고 교화하는 셈치자. 아무리 그래도 힘의 격차가 너무나도 나니까 때릴 마음도 사라진다. 더불어 제느도 이렇게나 약했다니. 너무 불쌍하잖아. 우리 자기.
"으윽. 자기야아…."
"앗! 제느야!"
다시 한번 더 날리려던 차에 뒤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와 싹 돌아보니 제느가 몸을 일으키고 있다. 멱살 잡은 것을 놓아버리고 얼른 달려가 일어나는 걸 부축하니 제느가 잔뜩 맥빠진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다가 날개를 접어 거둬들였다.
"괜찮아? 어디 아픈데 없어?"
"자기야. 우리 아기, 우리 아기…."
"그래. 그래. 걱정마. 저 녀석 마저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가자."
"저 녀석?"
내가 가리킨 곳에 겨우 일어나고 있는 역신 녀석을 본 순간 제느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가 고개를 휘휘 가로 저었다. 그러고서 내 소매를 잡고 잡아끌었다.
"안 돼. 지금은 우리 아이가 우선이야. 지금 당장 가, 나 알 수 있어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아파하고 있단 말야. 빨리 가. 저런거 신경 쓸 틈 없어."
"아, 하지만…."
"괜찮아. 우리 아이만 찾으면 돼. 빨리 찾으러가. 나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제느야…."
"으아아앙!"
이런. 어쩔 수 없군. 급기야는 울어버린 제느를 끌어안고 토닥이며 우선 일행들부터 깨우기 위해 응급처치로 넣었던 힘을 풀으니 아리나, 네프리스, 크리스 순으로 다들 정신을 차리고 욕지기부터 하며 깨어났다. 그리고는 모래사장에서 벌벌 떨며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보더니 각자 감상을 토해낸다.
"페렌타인…!"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요. 제 발에 저려서 떨고 있는 거지."
제느의 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노려보니 다시 찔끔 놀라서는 고개를 90도로 푹 숙인다. 하여튼 저 녀석 처분은 나중에 하고…내 옷을 온통 적시고 있는 제느의 고개를 들게 하고 말했다.
"어디로 가야해?"
"으응. 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해. 지옥과 연결 돼 있는 통로에, 통로에 그 애가 있어."
"그래. 빨리 가자."
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제느는 제 발로 일어나더니 옷을 툭툭 털고서 단추를 제대로 잠그고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묶고 물가에 가서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는 군데 군데 얼룩이 남은 얼굴로 눈은 울면서 입은 웃었다.
"정신 차려야지. 내가 이러면 그 애도 겁먹을 거야."
"…."
정신을 잃은 게 아이 때문이었구나. 아이와 엄마는 연결돼 있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근데 이건 좀 차별인데? 분명히 나도 아버지인데 왜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거야? 제느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그렇게 강렬하면서….
하긴 그런데 이 나이에 아버지라니,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일단 내려가자. 야!"
"예, 옛!"
"너 밑으로 내려가는 길 알고 있지? 안 그럼 여기 다 부숴 버린다?"
"이, 이쪽으로…."
보는 사람이 불쌍하게 느낄 정도로 찔끔 놀란 그 역신 녀석이 섬 위의 검은 바윗돌로 걸어 올라가더니 검은 돌 바닥에서 뭔가를 더듬다가 눌렀다. 그러니 다시 잔잔하게 파도치던 호수의 물들이 흔들리며 바닥 아래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마치 안쪽에서 뭔가를 맷돌로 가는 듯한 소리다.
"저, 저쪽 섬으로 넘어가야 됩니다…."
정말 개미 기어가는 소리보다 더 작네. 내가 바라보자 완전히 겁을 집어먹어서는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아까 고함 지르던 사람은 어디 놀러갔나 생각될 정도였다. 하여간 이러니까 더 비겁한 녀석이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놓고선 자기보다 강한 사람 만나니까 고분고분해지는 것 봐. 지금 아이가 급한 게 아니었으면 정말 가만 안 놔둘텐데 말야.
"그 페렌타인이 이렇게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
그를 따라 다음 섬으로 가며 일부러 흘리는 듯한 아리나의 말이 들렸다. 아리나는 정말 정체가 뭐야? 그 100만의 생명을 받았다는 힘은 제외하고서라도 여기저기 누구누구 신들을 다 알고 있는데다가 이곳의 역신까지 알고 있는 듯한 말투라니, 느낌으론 그냥 엘프가 틀림없는데 혹시 엘프의 신이 아닐까?
"여긴가?"
"맞습니다. 성녀는…197층에…."
197층이라. 검은 바위에 하얀 모래사장이 얽혀있는 모양새가 비슷한 섬의 중간에는 검은 바윗돌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좁디좁은 길. 여기까지 적이 내려오면 어차피 뚫린거 좀 크게 만들어놓으면 어디 덧나나?
하여튼 이대로 제느가 목에 매달린 상태에서는 못 내려갈 것 같아 토닥여서 떼어놓았더니 표정이 이상야릇하다. 뭔가 잔뜩 울고 싶어서 목구멍까지 치미는데 입은 좋아서 헤죽헤죽 웃고 있다고 할까? 잔뜩 기대되고 설렌 모양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맞잡은 내 손은 절대로 놓지 않는다.
"왜 이렇게 좁게 만들어 놓은 거야 정말."
"죄, 죄송합니다!"
페렌타인을 앞장세우고 내려가니 어두운 입구와는 달리 갈수록 벽이 밝아진다. 아마도 조명이 없어서 이렇게 해 놓은 모양인데, 묘하게 인광 같이 느껴지는 푸른색이라서 기분이 이상하다.
"제느야. 조금만 참아."
"으응…."
못내 대답은 하지만 제느의 손은 계속 바르르 떨었다. 정말로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가 봐. 이렇게 자기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줄이야. 그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뭐기에 이렇게까지 동요를 하는 걸까? 제느가 잠깐 하늘로 갔을 때 느꼈던 그 상실감, 그리움만큼 큰 느낌일까?
좁다란 계단은 계속계속 밑으로 돌아나가 까딱 잘못하면 방향감각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아니, 제느를 만나기 전 평범한 상태였다면 벌써 얼마나 들어왔는지, 또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을 거다.
시계를 슬쩍 보니 2시간이 더 지나있었다.
"그런데, 아까 189층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응. 통곡의 방. 그런데 너 193층이라니 무슨 말이지?"
우와아, 무슨 목소리가 저렇게 바뀌지? 내 말에 대답할 때는 사근사근했던 목소리가 타겟을 역신으로 바꾸니 대번에 얼음바늘로 찌르는 듯 한기가 서린다. 그리고 역시나 앞에서 걸어가던 녀석의 목이 자라목처럼 움츠러들더니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93층이 맞습니다. 그게…그 방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방인지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방?"
"마, 맞습니다! 보안을 위해서 그렇게 설계를…."
"아니면 오늘 넌 끝장이다."
뚜두둑. 제느가 내 허리를 감은 손을 맞잡고 꺾자 표정이 완전히 애처롭기 그지없게 변했다. 그래도 전혀 안 불쌍해. 그런 짓을 해놓고 그런 표정 지으면 누가 봐줄 줄 알고?
"빨리 가라. 응?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페렌타인을 찌그러트리고 걷기를 또 다시 1시간. 직통으로 내려가는 계단인지 정말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복도가 그래도 좀 넓어져서 숨통이 트이기에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대는 제느를 업고 걷는데 어찌나 하품이 나오는지 지루해 죽을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짜증이 나서 목소리가 그렇게 나왔는지 앞서 가던 녀석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정말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을 하네? 그렇게 내가 무서운가? 겨우 한대 때린 것 가지고 진짜 설설 기네. 나는 제느한테 배 째지고 허리 잘려도 이날 이 때까지 꿋꿋한데 말야.
"다들 괜찮아요?"
"아, 괜찮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네프리스도 제느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의 등에 업혀서는 팔자 좋게 자고 있었다. 하긴 제느보다 더 먼저 업혔었지. 아리나는 강골인 듯 계단을 1시간 넘게 내려왔어도 피곤한 기색이 없다. 왠지 모르게 오히려 더 힘이 난 듯 눈빛이 굉장히 날카로웠다.
"자기야. 내려줘."
"어?"
자는 줄 알았던 제느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더니 내 등에서 다리를 빼내 내려와 페렌타인에게 걸어가더니 녀석의 멱살을 쥐어 잡으며 들어올렸다. 히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덕분에 일행들이 모두 멈췄다.
"그 방은 위치가 불확정 되어 있어. 그렇다면 공간 확률에 따라 바로 여기에 겹쳐 있을 수도 있지. 처음부터 이렇게 내려올 필요는 없었단 말이야. 네 녀석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 거냐."
"큭. 들켰나?"
후웅, 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과 함께 압력이 느껴진다 싶은 순간 제느가 멱살을 쥔 손을 놓고 재빨리 내 앞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앞을 향해 내미자 뭔가 힘이 걸린다.
"제느야!"
"이런 생 초보적인 수법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냐?"
"쳇."
구겨진 옷을 펴며 기분 나쁘다는 듯 툴툴대는 그 녀석의 표정에는 아까의 비굴한 뭔가는 어디 팔아먹었는지 비릿한 웃음이 맴돌았다. 이 자식, 다 연기였단 말이야? 하지만 믿을 구석 따윈 없어 보이는데, 뭔가가 또 있나?
"나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내 남편은."
"그건 알고 있…뭐하는 겁니까!"
제느가 갑자기 창을 빼내더니 옆의 벽을 내리쳤다. 암반으로 된 돌 벽에 커다란 창날이 박히더니 진흙 속을 파고들 듯 푹 파고들었다. 그리고 쭉 내리긋자 벽이 갈라지며 그은 자국 그대로 벽이 뚫려 바깥쪽으로 기울어지더니 떨어져 내린다. 뭐야, 암반 아니었어?
"허수공간? 지옥과 거래했냐? 아주 질 나쁜 녀석이로세?"
"상관없는 일입니다."
허수공간이라니 저게 뭔데?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하여튼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창을 들고 녀석과 대치하고 있는 제느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제느야, 어떻게 할거야?'
'저 안으로 들어가. 방의 위치는 저 안에서 불확정되어 있지만 금방 찾을 수 있어.'
'다른 사람들은?'
'같이 들어가면 돼. 자기 힘으로 보호해주고.'
음, 나름대로 대책은 다 서있구만. 뭐 제느가 믿는 구석 없이 저러지는 않겠지. 마누라 말 들어서 손해볼 거 없다. 그래, 전학 오자마자 중간고사 100점 만점 맞은 천재 말을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냐.
"어떻게 하면 돼?"
"내가 할게. 당신은 저 녀석 좀 어디 안 보이는 구석에 처 박아놔."
"어, 음. 알았어."
제느는 도대체 언제부터 내 힘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자기 것처럼 쓰게 된 거야? 전에는 꼭 어딘가 손을 잡던가 해서 쓰더니만 어느 순간부터 자기 맘대로 끌어다 쓴다. 지금도 어떤 수로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제느가 내 힘을 모아서 손바닥 위에 빛을 만들더니만 계단 밖 허공에 그걸 던지자 하얀빛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원반이 만들어져 뚫어놓은 입구에 걸쳤다.
"큭."
일단은 얼굴은 아무리 자신만만해도 내가 다 봉인해놓은 힘 때문에 페렌타인은 쉽게 잡혀서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제느에게서 괜찮은 밧줄을 받아 온 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괜찮은 밧줄이라 그냥 몸에 칭칭감기만 했는데 저절로 매듭을 짓고 쫄아 들더니 녀석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아, 아프단 말입니다!!"
"시꺼! 돌아왔을 때 여기 없으면 정말로 여기 다 날려버린다."
윽박지르곤 불안한 얼굴로 하얀 원반에 발을 딛는 일행을 따라 올랐다.
"으악!"
몸을 완전히 원반 위로 옮긴 순간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살을 에일 듯한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해서 앞을 막은 팔 사이로 슬쩍 보니 깎아지른 듯한 거산 준봉들이 거센 눈보라를 맞으며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이, 이게 뭐야?!"
귀청을 찢는 바람소리에 말소리도 제대로 안 들린다. 발이라도 떼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바람에 크리스와 네프리스가 주저앉아서 부둥켜안고 벌벌 떠는 것과는 달리 아리나와 제느는 그 길다란 머리카락들을 거칠게 펄럭이며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저거 사람 맞아?
"허수공간은 아무 곳이나 될 수 있는 공간이야! 아마 그 녀석이 이렇게 만들었을 거야! 우리 아기는 저기 있어!"
제느가 뒤를 돌아보더니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흐릿하게 보이는 거대한 산 정상을 가리켰다. 눈보라에 휩싸인 산봉우리는 정말 손가락을 데면 베일 듯 날카로워 보였다.
저기까지 도대체 무슨 수로 가?
"저기까지 어떻게 갈 건데?!"
"걸어갈 거야!"
아윽, 갑자기 뒷골이 땡기네. 그냥 주저앉고 싶다. 저기까지 걸어가려면 못해도 일주일은 걸릴 것 같은데? 안가면 안 돼?
"가자! 다들 일어나!"
제느가 호기롭게 외쳤지만 아리나를 빼고는 호응하는 사람이 없자 우선 나부터 타겟을 잡고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더니 그만 쫄아 버린 내가 할 수 없이 털고 일어나자 덜덜 떨고 있는 크리스와 네프리스를 뜯어냈다.
"당신은 말야, 이렇게 애타는 내 마음도 알지 못해? 저까짓 산 따위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면 식은 죽 먹기라는 근성도 없는 거야?"
"…."
"칫! 야! 너 거기 그대로 안 있으면 아주 끝장 낼 줄 알아!"
내가 대답을 안 하니 제느는 표정을 일그러트리곤 표적을 돌려 통로에 꽁꽁 묶인 채 입도 코도 눈도 뭔가 녹색 테이프로 발려진 녀석에게 귀가 꽝꽝 울리도록 소리를 쳤다. 그리곤 혼자라도 가겠다는 양 눈 덮인 산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 있을 거예요?"
"아닙니다. 다만…."
아리나가 나머지 일행을 보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긴 지금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지. 사실 네프리스와 크리스가 제느가 만든 원반 위에 엎어져 있어서 그렇지, 아리나와 내가 서 있는 눈은 꽤나 두께가 깊은 것 같다. 제느야 눈 위로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걸어가고 있지만 일행들이 발을 대면 순식간에 허리까지 빠질지도 모르지.
"기다려요."
우선 삐져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 제느에게 뛰어가 손을 잡았다. 그러니 그녀가 몸을 홱 돌리며 얼굴로 손이 날아오는 걸 잡아채고는 꼭 껴안았다.
후아, 무방비였으면 그냥 맞을 뻔했네.
"맘에 안 든다고 그럴거 없잖아. 지금 너무 흥분했어. 우리 아기 저기에서 어디 가지 않는 다구."
"이거 놔."
이거 잘못했나?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 겁이 덜컥 나서 껴안았던 팔을 풀고 몸을 떨어트리니 내가 잡지 않은 다른 손을 굳게 말아 쥐고 제느가 입을 꽉 다물고 예의 그 베일 듯한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만으로도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다.
"흥분하지 않았어. 한시라도 빨리 그 애를 보고 싶을 뿐이야. 너무나 오래 기다렸어.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해."
그러더니 다시 다가와서는 나를 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키며 심호흡을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가자. 저 굼벵이들 놔두고 갈 수는 없잖아."
"제느야."
"응?"
"사랑해."
잡은 손을 끌어당기며 볼에 살짝 뽀뽀하니 갑자기 불이 나는 거 아닌가 싶게 제느의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며 그녀가 밑으로 푹 빠지는 것 아닌가.
"으왁! 괜찮아?!"
"괘, 괜찮아…."
거의 가슴까지 빠진 제느를 황급히 끌어올려 안으니 그녀가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 하여튼 빨리 빨리 가야 될거 아냐! 당신은 우리 아이 궁금하지도 않아? 이름도 지어줘야 할 거 아냐!"
"아, 알았어!"
그렇게 해서 어찌어찌 다 같이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인간들, 한 나라의 대마법사 씩이나 된다는 사람들이 눈에 파묻히지 않고 위로 걸어갈 수 있게 해주었는데도 어디 박혀서 공부만 하고 운동은 하지도 않았나, 각자 마법을 쓰고 걷고 있는데도 한시간 쯤 걸어가자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다리 아프다며 슬슬 태클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꾸 그러면 여기 놔두고 갈 겁니다?"
"하다 못해 뭐라도 먹을 거 좀 먹여 줘. 한나절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반나절이에요."
배고픈거야 뭐 어쩔 수 있나. 먹어야 힘이 나지. 그런데 생각하고보니 새삼 배가 고프네? 제느는 배 안고프나?
"아리나, 괜찮아요?"
아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던 제느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뭔가 숙닥숙닥 거리기 시작했다. 제느는 처음에 잔뜩 띠껍다는 얼굴로 듣기만 하고 있더니 무슨 말을 들었는지 표정을 풀곤 굽신굽신거리는 아리나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 쪽으로 왔다.
우와, 신기하다아.
"여기서 30분만 더 가면 산정에 동굴이 하나 있어. 거기까지 간다."
"웬 동굴?"
"있어. 자기는 이리 와. 나 업어 줘."
하여튼 업히는 건 되게 좋아한단 말이야. 저러다 안짱다리 돼서 다리 미워지지. 등을 돌려 제느를 업고 일어나 앞장을 서니 귓가에 대고 주저리주저리 불만을 늘어놓는다.
"하여튼 근성이 없어 근성이. 겨우 이런 추위에 굴복한단 말이야?"
"충분히 추워. 너나 되니까 그런거지 정말 살 떨린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실력도 돼는 녀석들이 너무 엄살을 부리니까 그렇지. 설마 이날 이때가지 골방에 틀어박혀서 마법만 배운거 아냐? 태어난지 30년도 안돼서 저 정도 수준이면 그럴 만도 하겠는데?"
"설마 정말 골방에만 틀어 박혀 있었겠냐. 나름대로 험한 세상 구경도 하고 그랬겠지. 그나저나 아까는 왜 그랬던 거야?"
"언제?"
"아까, 방벽 깼을 때, 왜 기절했어?"
가슴을 더듬던 손이 슬쩍 멈추더니 이번엔 귀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 쪽으로 다가와 귓가를 간지럽힌다. 눈앞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눈보라가 심한데 손 시리지 않나?
"손 시려. 호 해줘."
"이따가 해줄게."
"피이. 하여튼 지금도 가슴이 아파. 잔뜩 괴어있는 호수의 물은 언젠가 터지면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다구. 너무 아팠어."
그런것도 그렇게 되는 거야? 하기사 거기서 제느가 그렇게 충격 받을 일은 없었잖아.
"빨리빨리 따라와! 얼마 안 남았어! 야이 굼벵이들아!"
제느가 찾아냈다는 동굴은 눈과 얼음 속에 감춰져 있었다. 바위가 군데군데 드러난 빙벽은 그 눈이 쌓인 세월만큼 두텁고 굉장히 단단해 보였고 그 안쪽에서 무언가의 힘에 보호받는 것처럼 신비하고 웅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으로, 얼음 위로 드러난 바윗돌만 아니라면 누가 칼로 뎅강 잘라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응? 들어가야지."
제느가 옆에서 그렇게 태연하게 말하더니 꺼내든 창을 등뒤로 휙 돌렸다가 빙벽을 향해 내리쳤다. 느낌 탓일까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그럴까, 쿵 하고 묵직하게 온 산을 울려대는 지진 같은 소리가 심장 속까지 떨리게 하는 듯 하다.
그런데 의외로 창날이 얼음을 파고들기는커녕 흠집도 내지 못했다.
우르르르르….
"으, 으아아아악!!!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너!!!"
"누, 누누누 눈사태다!!!"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이실…."
땅이 불안하게 울리며 산 정상에서부터 눈보라 속에서도 확연히 뭔가 허연 것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리는 것에 패닉에 빠져 다들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닌데 제느는 창을 박았던 빙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드러난 시커먼 동굴 입구로 정말 아무 일도 안한 사람처럼 걸어 들어갔다.
"응? 안 들어갈 거야? 뭐 눈 속이 참 시원하니까 걱정마. 옛날에 그렇게 파묻혀 본 적이 있었는데 되게 시원하더라."
"으아아악!"
"크리스! 네프리스 데리고 빨리 들어와!"
인재로 일어난 무시무시한 눈사태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왔더니 여기는 완전히 냉골이라서 당장에 크리스와 네프리스가 쓰러져버렸다. 더구나 눈으로 인해 순식간에 동굴 입구도 막혀버려서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되 버려 정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이 동굴에는 어떤 식물도 동물도 없고 그저 극한의 추위와 바윗돌, 눈만이 있을 뿐이다.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설픈 탐험가들한테나 어울리는 단어고. 나 너무 찝찝해. 목욕 좀 할래."
"목욕? 여기서 불 피웠다간 다 질식해 죽어."
"누가 불 피운데?"
라더니 내가 만들어 천장에 띄운 빛 구슬을 가리킨다. 저건 별로 열도 안 나는 건데?
"자기도 씻어. 그렇게 냄새나게 하고 다닐거야? 옆에 있는 사람 괴롭다고."
하고 찡긋 노려보곤 셔츠 단추를 풀더니 바로 휙 벗어버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가슴이 눈에 들어와 당황한 내가 고개를 돌리니 등에 뭉클한 감촉이 한가득 느껴진다.
"아아앙. 빨리. 나 등 밀어 줘."
"저, 저는 밖을 보고 오겠습니다."
그 짓에 아리나가 민망해 죽겠는지 길다란 귀 끝까지 새빨개져서 쌓인 눈에 터널을 뚫더니 밖으로 나갔다. 우와, 눈사태에 파묻힌 조난자답지 않게 정말 쉽게 뚫네? 아니 하여튼 그러니까 왜 날 안 구해주고 혼자 나가는 건데 아리나?!
"야, 저기 크리스랑 네프리스도 있잖아!"
"다 지쳐 쓰러진 놈들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야? 어서 벗어!"
마누라 등쌀에 견디는 남자는 없다고 결국 나를 다 벗기는데 성공한 제느는 꺼낸 창으로 동굴바닥 중 적당한 곳을 골라 잘라내더니 눈을 가져와 내가 만든 빛으로 녹이고는 어느 정도 채워지자 김은커녕 얼음처럼 차디찬 그 물 속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벌써 살얼음이 얼고 있잖아?
"아 시원해. 빨리 들어와."
으 이런. 저 살 떨리는 물에 들어가야 돼? 그러나 내가 머뭇거리며 서 있으니 제느의 눈초리가 가늘게 변한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쫄아 드는 것이 난 평생 쥐여 살 팔자인가 보다.
벌써 살얼음이 얼어붙은 물 속에 발을 들이미니 마치 유리조각에 잔뜩 찔리는 듯한 차가운 감촉이 온 몸을 엄습해왔다.
"흐흐응. 시원하지?"
"아, 아 그래. 심장이 멎을 정도로 시원하다."
도대체 어떻게 이 물 속에서 저렇게 여유스런 포즈로 들어가 있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손으로 몸을 훑으며 묻은 것들을 닦아낸 제느가 슬쩍 몸을 일으키더니 옆으로 다가와 앉아서는 내 팔을 껴안고 부비부비 몸을 부벼댄다.
하도 물이 차가워서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아 팔을 빼고 제느를 앞에 앉힌 다음 꼭 끌어안았다.
"이름 정한거 없어?"
"웅, 이것저것 생각한 건 있는데 딱 맘에 드는 게 없었어."
"몇 개나?"
"십만 개쯤?"
그런 천문학적인 숫자의 이름을 생각해놓고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니, 우린 둘 다 바보였던가. 절대로 만지고 싶어서가 아니고 손이 너무나 시려서 제느의 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더니 손가락 사이로 살얼음이 얼어 파고든다. 다리가 있는 쪽에는 벌써 상당한 두께의 얼음이 얼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 가슴이 좀 커진 느낌이다? 전에는 뭔가 이렇게 그…하여튼 이렇지 않았다.
"이름을 뭘로 하지? 가졌을 때부터 생각해왔는데 아직도 정하질 못했어."
"나중에 정하자. 얼음 얼잖아. 물 좀 데워."
자꾸 재촉하니 마지못했는지 물이 천천히 따뜻해진다. 정말 보통 사람 같았으면 시려워서 단 1분도 도저히 들어 앉아있지 못할 물인데 대단해요. 손가락 사이로 얼어들은 얼음들을 걷어내고 제느의 몸을 껴안으니 확실히…좀 커진 듯 하네.
"나중에 정하는 게 어디 있어? 그리고 좀 누르지 마. 아프단 말야."
"응? 아프다고?"
내 팔을 떼어낸 제느가 물 속에 들어가 한참을 멱을 감기 시작했다. 머리가 길기도 한참 길다보니 은색 머리카락이 온 곳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게 꼭 호러영화 같다. 대단도 하지, 어떻게 이렇게 긴 머리를 묶지도 않고 그냥 풀어헤치고 다니냐.
"아프다니 무슨 말이야?"
"나 요즘…."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겨 정리하더니,
"젖 나오려고 해."
한순간 말이 잘 이해가 안돼서 곱씹어 보았다. 젖? 설마 모유? 그런게 난데없이 왜 나오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젖 나온 다고. 젖. 아이한테 주는 젖. 모유."
제느가 답답한지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해를 못하겠다구. 애 가진 여자도 아니고 여태 괜찮다가 갑자기 젖이 나온다고 하면 누구라도 놀란단 말이야. 그리고 여신도 젖이 나온다고? 물론 제느의 가슴 위에 부풀어 있는 것이 장식품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안 믿긴단 말이야.
"여태 내 가슴은 자기 만지라고 만들어 놓은 장식품인줄 안 거야? 사랑의 여신님이 젖주는 거 못 봤어?"
"아니 그런거 아니지만 갑자기 왜 나오는데?"
"정말 몰라?"
제느가 슬쩍 삐진 말투가 되어서는, 내게 물을 툭툭 튕긴다. 정말 뭔가 야릇한 느낌이다. 우리 둘이 낳은 아이에다가 제느는 아이 낳은 산모처럼 가슴에서 젖 나온다고 하니 뭐라 말 할 수 없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야아."
하얀 몸을 끌어당겨 안으니 제느가 고개를 홱 돌리며 외면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왠지 기분이 좋네 이거.
"아니야. 그냥 신기해서 그런거야. 내가 정말 몰랐을까봐 그래? 우리 자기 그만 화 풀어."
"…이번만 봐준다. 담엔 어림도 없어."
잔뜩 선심쓴다고 자랑하는 목소리였지만 우리 사이에 뭐, 하여튼 되게 기분이 이상하네.
옷을 입고 크리스들을 깨워서 씻게하고 간단히 식사할 준비를 하는 동안 아리나가 돌아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길다란 머리카락과 옷자락 여기저기에 두껍게 얼음이 얼어있고 옷이 잘린 자국 밑의 흰 살결에는 뭔가에 베인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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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엄.....죄송합니다.
요즘 온라인 게임에 빠졌습니다 -┏
EVE 온라인인데요....외국게임인데 처음 해보고 반해서 벌써 결재까지....
다행이 19달러 밖에 안되는 군요 -_-;;;;
하여튼 그러하니..............................(돌 맞고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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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한 새글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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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랫만에...
ㅋㅋㅋ....EVE온라인...어느 종족에서 하시는지?..저는 아마르에서 하는데^^ 아뒤 알려주세요~ 한국채널에서는 자주 보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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