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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지털한자 원문보기 글쓴이: meetl
영화 ‘남한산성’ 평론
부제 : ‘병자호란’ 역사 왜곡
명절에 아이들과 고궁에도 가고 야구장에 가서 응원하며 즐기기도 한다. 아이들의 성장에 따라 그리고 취미에 따라 여러 가지 가족끼리 행사를 하게 된다. 추석에 용돈이 생기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내게는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 부모나 형제와 함께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극장이 몰려 있는 동성로에서 아침부터 영화를 보면. 3편을 볼 수가 있다.
당시에는 ‘십계’, ‘벤허’ 등을 비롯한 초호화 액션 스펙터클 대작들이 많이 상영을 했다. 개봉관에서 3시간 쯤 상영을 하는 긴 영화들이고, 총천연색(*컬러) 70mm 등의 말이 유혹을 했었다. 주로 미국 영화가 번쩍거리는 자막을 순식간에 바꾸어가는 어지러운 영화를 세 편을 보고나면, 나중에 어떤 영화에 어떤 주인공이 나왔는지 혼동이 되기도 하였었다.
세월이 흘러 미국 영화에 종속된 듯한 영화 시장도, 소재가 다양해지고 제작비도 많이 투자되었다. 우수한 연기자가 발굴되자 인상에 남을 만한 좋은 영화가 만들어져서 천만 관객이 감상을 하는 작품이 쏟아졌다. 일부 관객들은 영화 자체보다 선호하는 연기자의 연기를 보기 위하여 극장을 찾는다고 한다.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고 해서 연기자의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 음악, 미술, 건축 등이 총동원 되는데, 우수한 영화는 우수한 각본의 모태가 되는 소설을 각색한 작품들이 많다. 요즘은 원작이 만화인 경우도 있다. 미리 제목만 봐도 그 원작에 대한 독자층의 관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도 그만큼 많다. 원작은 평면적이면서 눈으로만 볼 수 있지만, 영화는 영상미와 음악을 함께 감상할 수가 있다. 그래서 주제곡이 더 인기를 얻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원작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독자는 자신의 감정과 일치시킬 수가 없어서 감흥이 떨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공일 텐데, 독자로서 상상해왔던 인물이상이 아니면 몰입도가 낮아진다. 관객이 바라는 연기자는 주인공과 일치된 상대역이다. 남자는 아름다운 미모, 여자는 남자다운 멋진 행동에 기본적인 요구를 하게 된다.
‘벤허’에서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아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에요.”
이런 대사는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에게 자기화가 되어 기억되는 언어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다 감안하고서 영화 ‘남한산성’을 감상해보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아들이 영화표를 먼저 예매하고 나서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내가 보인 반응은 “역사를 왜곡하는 영화는 안 본다.”였다. 아들이 “예매를 취소할까요?”라고 다시 물었을 때. ‘역사를 얼마나 깊게 왜곡하였는지?’ 알고 싶어졌다.
극장 안에서 관객들은 병자호란에 이어 10년 후에 다시 침략당한 ‘정묘호란’의 비참한 역사를 영화로 되새겨 보면서 아무도 웃지도 않고, 특별한 반전이 있지도 않아서 어떤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에 9 : 0으로 지는 참패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패배감이었다. 왕이 삼전도에서 삼두고배(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기)를 하며 항복한 사실은 별 것 아니다. 영화가 담지 못했던 50만 명의 백성이 포로로 추운 북쪽으로 끌려가서 학살당하고 노예가 된 가슴 도려내고 뼈가 꺾이는 아픈 역사를 반추하였을까?
영화는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의도가 있을 것이고 관객은 그 영화를 보면서 일어나는 감정이 있을 것이다. 영화가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는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필요는 없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소설처럼 허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원작이 소설인 경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화의 이야기를 실제 역사인 경우가 있다.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단순한 관객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남한산성’을 평론해 두어야 한다.
1. 선전포고
병자년 10월에 금한(金汗)에서 보낸 마부대(馬夫大)가 의주에 도착하니,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접견하였다.
마부대가 말하기를,
“내가 11월 26일에 군사를 일으켜 동으로 쳐들어올 것인데, 너희 나라에서 만일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맺고자 한다면, 비록 군사를 출동하는 도중이라도 마땅히 파하여 돌아갈 것이다. 또 우리나라가 황제라 칭하는 것은 남조(南朝 명나라)에서도 금하지 못한 바인데, 너희 나라가 금하고자 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11월에 역관 박인범(朴仁範)이 서신을 가지고 심양(瀋陽)에 도착하니, 한(汗)이 묻지도 않고 받지도 않았으나, 접대와 상격(賞格)은 전날과 똑같이 하여 별로 무례한 기색이 없었다. 다만 용골대와 마부대가 전날에 빼앗아 갔던 우리 임금의 서도에 내려 보낸 유지 및 각 아문의 문서를 첨부하여 내보이며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먼저 맹약을 어긴 것은 아니고 너희 나라가 맹약을 어긴 단서가 분명히 이 글에 있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 먼저 맹약을 깨뜨렸다고 하는가.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나가면 알 것이다.” 하였다.
용호(龍胡 :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부터라도 조선이 우리를 따라 함께 남조를 공격할 것을 도모하고 화친을 거절한 신하 및 왕자를 들여보내면 서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니, 그때 다시 화친을 정하겠다.” 하였다.
인범이 물리치니,
용호가 발끈하여 말하기를,
“왕자와 척화(斥和)한 신화를 들여보내면 비록 군사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즉시 정지하고 혼인을 맺고 영원히 서로 화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이 스스로 거느리고 나갈 것이니, 이미 군사도 정돈하였다.” 하자,
인범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본시 예의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니, 친구의 정이 두터워도 서로 혼인하지 않는 것이거늘, 하물며 두 나라가 맹약하여 형제가 되어 이미 10년이 지났는데, 이제 또 혼인을 요구하니 차마 들을 수 없다.” 하였다.
인범 등이 떠난 뒤에 용골대와 마부대와 두 오랑캐가 쫓아와서 말하기를,
“한의 말은 전날에 얻은 너희 나라 문서 가운데 화친을 거절하는 뜻이 많은 까닭에 혼인을 요구하는 말을 하여 서로 믿는 바탕을 삼으려고 한 것이니, 이것은 진담이 아니니, 그대들이 알고나 가라.” 하였다. 《일월록》
이때 한이 제왕(諸王)을 모아놓고 동침(東侵)할 일을 의논하였는데,
귀영개(貴永介)가 홀로 불가하다 하면서 말하기를,
“조선은 구구히 예의를 지키고 있는 쇠약한 나라이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고 서쪽(명나라) 일에만 전력하여 성공한다면 화살 하나 쏘는 힘을 들이지 않아도 그들은 자연히 신하로서 복종할 것이요, 또 우리가 비록 나라를 비우고 서쪽으로 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기력이 없어 반드시 감히 우리 뒤를 밟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병력으로써 유린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다만 조선에 산이 많고 들이 적어 도로가 몹시 험하고 또 포 쏘는 기술이 있어 혹시라도 우리의 군사와 말을 손실할까 염려되니, 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한이 그 계책을 그럴듯하게 여겼는데, 구왕 및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수가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고 한다. 《국당배어(菊堂俳語)》
무인년 겨울에 내가 서장관으로서 심양에 갔을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정묘년에 포로로 잡혀 귀영개의 가정(家丁)이 된 자가 매매의 일로써 관사에 와서 한이 만일 대왕(귀영개)의 말을 따랐다면 조선은 병난을 입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체찰사 영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오랑캐가 만일 깊이 쳐들어오면 도원수 및 양서(兩西)의 감사는 노륙(孥戮 처자를 함께 연좌하여 처벌하는 것)의 법으로 처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체찰사(김류)도 중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김류는 일찍이 척화를 주장하였는데, 이 하교를 받든 뒤에는 도리어 화친을 주장하여 최명길의 의논에 붙은 뒤에 비로소 소역(小譯)을 보내 오랑캐의 뜻을 탐지하게 하였다.
삼사가 함께 일어나 들여보내지 말자고 청하여 정론(停論)하기도 전에 임금이 특명으로 출발시켰다.
2. 공격 진로 예고
금한(金汗)이 소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만일 11월 25일 이전에 대신과 왕자를 들여보내어 다시 화친을 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마땅히 크게 군사를 일으켜 동정(東征)할 것이다.” 하였다.
그 답서에,
“귀국이 산성을 많이 쌓았지만 나는 마땅히 큰 길을 통해서 곧장 경성으로 향할 것인데, 산성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이지만 내가 만일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작은 섬으로써 나라가 되겠는가. 귀국에서 의논을 주장하는 자는 유신(儒臣)이니 그들이 붓을 들어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소역이 돌아와 그 말과 서신을 전하자 묘당에서 재신(宰臣)을 보내고자 하는데, 화친을 물리치는 의논이 바야흐로 준엄하여 감히 사신을 보내자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 박노(朴)를 보내자고 청하였다. 대간들이 또 극력 다투는지라 마지못해 지름길로 박로를 보냈으나, 이미 금한과 약속한 시기를 놓쳤다. 《병자록》
이때 이시백(李時白)이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가 되었는데, 시백의 아버지 이귀(李貴)가 항상 김류와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김류는 이시백이 남한산성의 수비를 청하는 모든 일에 대해 그 요청을 하나도 따르지 않고 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모두 영남군(嶺南軍)으로 배정하여, 만일 다급한 적의 경보가 있을지라도 영남에서 미처 올 수가 없었다.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요충지대에는 중진(重鎭)을 벌여두었는데, 김류가 도원수 김자점과 함께 건의하여 철폐하여
의주의 진(鎭)은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옮기고
평양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옮기고
황주(黃州)는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옮기고
평산(平山)은 장수산성(長水山城)으로 옮기게 하여 가까운 데는 큰 길까지의 거리가 3, 40리가 되고 먼 데는 하루 이틀이 걸리는 거리가 되니, 양서 일대의 큰 진이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김자점(金自點)이 피곤한 백성을 몰아쳐 정방성(正方城)을 쌓는데, 또 형벌과 매질로써 위엄을 세워 인심을 점점 더 잃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올 겨울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어떤 사람이 혹,
“적이 온다.”고 하면 바로 성을 내었다.
동방(冬防)이 이미 지났는데도 성을 지킬 군졸을 하나도 더 첨가하여 방비하지 않고, 의주 건너편에 있는 용골산(龍骨山)부터 봉화 불을 두어, 원수(元帥)가 있는 정방성에서 그치게 하였으니, 대개 이는 봉화가 만일 도성에 이르면 소란스러워질까 염려해서였다.
청주(淸主)가 황제라 칭하였을 때 사람을 보내어 우리나라에 통고하니, 우리나라에서 접대를 잘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회답사를 보냈기 때문에,
‘얼음이 얼어 강물이 합한 뒤에 나온다.’는 말로 협박하고서 곧바로 병마를 정비하여 11월 27일을 택하여 서쪽(명나라)을 침범할 계획을 하고 말하기를,
“조선에서 반드시 사람을 보내 와서 빌 것이니, 마땅히 회보를 보고서 일어나겠다.” 하였는데, 그날이 지나도 우리 사신이 도착하지 않자 다시 29일을 택하여 말하기를, “아직 며칠을 더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날이 지나자 이에 말하기를, “조선의 죄를 먼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동침할 계획을 결정하고 3군으로 나누어 나왔다. 회인군(懷仁君)이 정묘년에 잡혀갔던 사람에게 들은 것이다.
3. 도원수 김자점의 잘못된 상황 인식
12월 6일 이후에 연이어 두 번 봉화를 들었는데,
김자점은 말하기를,
“이것은 박노가 들어가서 오랑캐가 반드시 나와 환영하는 것이다. 어찌 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치계(馳啓)하지 않다가
9일에서야 비로소 군관 신용(申榕)을 보내 의주에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신용이 순안(順安)에 이르니 적의 기병이 이미 가득 차 있자,
곧장 돌아와 감사 홍명구(洪命耈)에게 고하니, 명구가 크게 놀라 단기(單騎)로 자모산성에 달려 들어갔다.
신용이 돌아와 김자점에게 보고하니, 김자점이 말하기를,
“망녕된 말로 군정(軍情)을 어지럽힌다.” 하고, 목을 베려고 하자,
신용이 말하기를,
“적이 내일에는 마땅히 여기에 당도할 터이니 우선 나를 죽이지 마시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나중에 보냈던 군관이 또 와서 급함을 보고하는데 신용이 말한 바와 같으니, 비로소 장계를 올렸다.
대개 적병은 강을 건너서 성진(城鎭)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올라오면서 화친을 맺으려 한다고 칭하며, 바람같이 달려와, 변방을 지키던 신하들이 올리는 장계를 적이 모두 탈취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변방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병자록》
10일에는 안주에 도착하여, 군사를 지휘하여 포위하려고 하다가 도로 군사를 해산하고 곧장 서울로 향하였다.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 군인, 성리학자이며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의 시조부로 왕실의 인척이었다. 본관은 경북 안동이다. 사육신을 고발한 배신자 김질의 5대손이다. 이귀의 딸과 김자점의 동생이 혼인을 하여 사돈지간이 되었으나 김자점의 동생은 병약하여 일찍 죽었고, 이귀의 딸 이예순은 입궐하여 궁중의 무수리가 되었다. 이예순이 무수리로 있으면서 김상궁의 눈에 들자 그는 제수였던 이예순을 통해 김상궁에게 연줄을 댔다. 그러나 반정 이후 김류와 이귀가 대립하자, 김류의 편에 재빨리 가담한다.
1636년(인조 14년) 청나라의 병력 움직임이 예상된다는 보고에 따라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1636년 다시 도원수가 되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 전투에서는 크게 패하였다.
김자점은 의주 부윤 임경업이 마음대로 장사꾼을 보낸 죄로 탄핵을 받자,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려 임경업을 두둔, 용서하여 도로 임소에 부임시켜 군민을 돌보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으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들어주었다. 그러나 도망병과 부상자 등이 속출하여 사태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그는 토산 전투에서 참패한 죄로 벼슬을 빼앗기고 문외출송 당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비난을 받고 1637년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다시 절도정배(絶島定配)형을 받고 충남 서산군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친명파이자 북벌론자인 임경업 등을 제거한 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효종의 북벌을 청나라에 밀고하였다. 이후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식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사형 당했다.
4. 무능한 군주와 그 반정 공신들
여기서 무능한 왕과 신하들의 판단력이며 백성들의 판단력의 괴리를 볼 수가 있다. 왕은 비겁한 할아버지 선조의 손자요. 패덕한 아버지 정안군의 아들이다. 반정 주동자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구인후(具仁垕)가 모의하여 신경진과 인척 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는 받았지만, 나라를 경영할 만한 수준은 품격은 아닌 자였다. 나중에 며느리도 아들도 죽이는 못난 애비이기도 했다. 신경진과 구굉의 고종관계이다.
신하들은 반정을 한 서인의 세력들이 조정을 완전 장악하고 임진왜란 때에 큰 활약을 한 북인을 대숙청하고 몇 안 남은 남인도 제거한 상태라서 적지적소에 인재가 등용되지 못한 상태였다.
영의정 김류는 임진왜란 충주의 탄금대 전투에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과 함께 물에 빠져 죽은 신립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의 아들이고, 남한산성을 지키는 4대장 신경진(申景禛)ㆍ구굉(具宏 : 구사맹의 아들, 원종비 인헌왕후의 친정오빠로 인조의 외삼촌, 구인후는 조카)ㆍ원두표(元斗杓)ㆍ이시백(李時白) 중에 신경진(申景禛)은 바로 그 장수답지 않은 패장 신립(申砬)의 아들이며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은 병조참판으로 인조반정의 주모자 이귀의 아들이었다.
정묘호란 후 10년 동안 재침을 대비해서 성의 보수나 정비를 하였는데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외교와 국방에 대해 준비가 부족했다. 여진족(청)이 명을 정복하기 위해서 먼저 뒤의 조선을 제어하기 위해 침략을 해올 것이라는 전략적인 준비가 되어 있질 못했다. 반정의 열매를 추수하는데 급급했던 것이다. 부덕한 광해라는 왕을 침몰시키고 임진왜란의 승리자인 동인들을 파멸시키는 국내 정치로 국제적인 안목을 갖지 못했다.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 공민왕이 안동으로 파천한 후에 개경을 수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신하들의 판단력과 시간을 벌어 충청, 경상, 전라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전투를 건곤일척의 전쟁을 재개할 수가 있었었다. 굳이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실패할 필요가 없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고 거기에 들어갔으면, 끝까지 항전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조직된 군사나 의병들이 활동할 기회를 주어야 하였음에도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로 강화도로 먼저 보낸 대군과 비빈들이 먼저 항복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강화를 지키던 장수가 조부가 김여물(金汝岉), 아버지는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鎏)의 아들 김경징이었다. 이때 김경징(金慶徵, 1589∼1637 : 김류의 아들)이 강화도 수비를 담당했다. 김경징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어 강화도 방어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장으로,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부임했다.
인조 14년 병자(1636) 12월 14일(갑신)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치계하여 적병이 이미 송도(松都)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播遷)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예방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을 받들고 먼저 강도(江都)로 향하게 하였다.
5. 김류의 무리들이 장수출신이 아닌 자기 아들로 강화를 지키게 하다
문신이던 김경징에게 강화도 방비 총책임자로 맡긴 사람이 누구였을까? 이것만으로도 적재적소에 인재가 등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라를 반정 공신이나 그 자제에게 맡겼으니 전쟁의 소용돌이에 소외받던 사대부나 백성이 애국심으로 총체적으로 대응하려고 했을까? 작은 의문이 든다. 국가나 정부로부터 공정하고 공평한 평가를 받지 못하면 백성은 그 정부를 목숨을 바칠 만큼 신뢰하지 않는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의 행차를 배행(陪行)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이 때에 청나라 군사가 대거 우리 나라로 들어와 신보를 들은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 고을에 이르렀으므로, 김류가 검찰사(檢察使) 두 사람을 내어 먼저 강도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정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그 아들 김경징을 우의정 이홍주에게 힘써 천거하여 입계하게 하였는데, 이홍주의 마음은 그가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권세에 겁이 나 애써 따랐다.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았는데, 이민구는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이다. 평생에 시와 술로 자부하고 본디 실용(實用)의 재주가 없었다.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홍명일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아들이다. 데면데면하고 느려서 일할 줄 몰랐다. 세 사람이 명을 받고 나갈 때에 세 집의 짐이 10리에 잇달고 그 집 사람의 행색이 매우 화사하므로 서울에서 피란하는 자가 모두 분하여 욕하였다.
강도에 이르러서는 적병이 날아서 건널 형세가 아니라 하여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을 일삼으므로 피란한 사자(士子)들이 분통 터져 두어 줄의 글을 지어 검찰사의 막하에 보냈다.
그 글에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술 마실 때가 아니다.” 하였으나, 이민구 등은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몰랐다.
당시 섬에는 빈궁과 원손 및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해 전직·현직 고관 등 많은 사람이 피난해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해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다. 또한 강화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건너오지는 못한다고 호언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그리고 김포와 통진에 있는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배로 실어 날라 정실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는 처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 군사가 부족해 해안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마저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나룻배로 도망해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대간으로부터 강화 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인조가 원훈(元勳)의 외아들이라고 해 특별히 용서하려 했으나 탄핵이 완강해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외할아버지 좌의정 임당 정유길이 살고 있던 서울의 수진방(현 수송동·청진동)에서 태어났다. 김상용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행동이 단정하고 법도에 맞아 주위에서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칭찬하였다고 한다. 16세 때 영의정 권철(도원수 권율의 아버지)의 손녀와 혼인해 3남3녀를 두었고, 권씨 사후 사계 김장생의 누이를 얻어 1남4녀를 두었다.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다. 그 뒤 좌의정 정철(鄭徹),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으로 있었다. 병조좌랑, 응교 등을 역임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처삼촌 도원수 권율을 따라 호남·영남 지방을 왕래했으며, 정유재란이 종결되면서 1598년 승지로 등용되고, 그해 겨울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되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외보로 정주목사, 상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의 가까운 인척이었음에도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다. 광해군 때 한성부판윤·호조참판·승정원도승지·지의금부사·사헌부대사헌·지의금부사·형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도총관과 지중추부사를 지내는 동안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원주(原州)로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갔다. 이후 김상용은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인조 즉위후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6년 3월 좌참찬에 제수되고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1628년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1629년 예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치사(致仕)하고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31년 다시 치사를 청하였으나 불허되었고,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32년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퇴하여 허락받았다. 1635년 우의정을 사퇴하고 영돈령부사로 전임되었다.
1636년 판돈녕부사가 되어 그해 8월 노령을 이유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적병이 강화성으로 쳐들어와 함락 당하게 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폭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명신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 《선원유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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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돌아간다. ‘남한산성’에 등장하는 인물을 본다. 이 영화는 인조와 영의정 김류, 이조판서 최명길, 예조판서 김상헌, 수어사 병조판서 이시백이 중심인물이다. 여기에 배사공의 손녀와 대장간의 대장장이와 거둔 동생이 보조 인물이다.
여기서 김상헌이 나중에 남한산성에 들어가는 설정과 강에서 뱃사공을 죽이고 나중에 그 손녀를 거두는 이야기는 허구이다. 김상헌은 왕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김상헌의 굳건한 항전의지를 뱃사공을 죽임으로써 나타낼 필요는 없다.
김상헌과 대장장이와 관계에서 비록 대장장이의 관계에서 소통하는 모습을 나타낼수록 당시 장수들의 무능함을 나타내는 꼴이 된다. 이것은 당시 장수들을 모독하는 일일수도 있다.
이때에 외부로 임금의 격서를 대장장이에게 주었다는 그 자체가 군사적인 지휘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1. 대장장이가 명을 전하러 간 일 - 왜곡
이 장면에서는 실제 인물인 선전관 민진익으로 대처했어야 한다.
그리고 명을 전달하는 선전관, 의승 등이 성을 빠져나갔고, 장계를 가지고 들어오는 군관들도 많았다.
12월 20일. 납서를 도원수 등에게 보내다.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유시를 내리기를,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이제 벌써 7일이 되었으니, 내가 이 외로운 성에 있으면서 위태롭고 급박하기가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들으니, 경들이 이미 대군을 거느리고 경기도 땅에 와 있다고 하는데 급급히 달려와서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구하라.” 하였다.
납서(蠟書 비밀 편지를 잔글씨로 써서 밀랍으로 뭉쳐서 몰래 전하는 것)로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유시를 내리기를, “군신 상하가 외로운 성에 붙어 있어 위태롭기가 한 오리의 터럭 같으니 급급한 형세를 경들도 상상할 것이다. 밤을 새워 달려와서 전후에서 합세하여 쳐서 기어이 적을 섬멸하여 군부의 위급함을 구하라.” 하였다.
24일 체부(體府)의 군관 임몽득(任夢得)이 성에 들어 왔는데, 상이 하교하였다.
“임몽득이 적진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 왔으니 참으로 가상하기 그지없다. 상당한 직책을 제수하라.”
12월 28일
이때 내외가 통하지 않자 선전관 민진익(閔震益)이 성 밖으로 탈출하여 제도의 군중(軍中)에 명을 전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민진익이 바로 밤에 송책(松柵)을 뛰어넘어 나가 제도에 명을 전한 뒤 그 장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상이 입은 옷을 벗어서 하사하고 실직(實職)에 초배(超拜)할 것을 명하였다.
30일 강도(江都)의 서리(書吏) 한여종(韓汝宗)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서 말을 전하였다.
“도원수와 부원수는 아직 해서 산성(海西山城)에 있습니다. 적병이 잇따라 오므로 도원수가 황해 감사와 함께 병사를 보내어 요격하여서 동선(洞仙)에서 깨트렸습니다.
경상 병사 민영(閔栐)은 어영군(御營軍) 8천과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23일에 충주(忠州) 수교(水橋)에 도착하였습니다.”
1월 4일. 선전관 민진익(閔震益) 등이 나가서 유지를 충청도의 진영에 전하고 돌아왔다. 임금이 이르기를, “담력이 많아 쓸 만하다.” 하고, 칼을 하사하고 통정대부로 올렸다.
선전관 민진익이 조정의 명을 전하러 나갔으나 실패하다
선전관 민진익(閔震益)이 글을 지니고 몰래 나가 여러 진의 근왕병들에게 조정의 명을 전하겠다고 청하여 몸소 적의 화살을 맞으면서 세 번이나 나갔다가 들어왔다. 상이 그를 인견하여 가상하게 여기고 감탄하며 차고 있던 칼을 풀어 하사하고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초계(超階)하였다.
1월 4일. 황해도 관찰사 이배원(李培元), 강도 검찰사(江都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등의 장계가 들어왔다.
1월 5일에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祐申)과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원수의 처소에 이르고, 전라병사 김준용(金俊龍)이 와서광교산(光交山)에 머무르고, 감사 이시방(李時昉)이 직산(稷山)에 이른다는 장계가 들어왔다.
1월 6일(병오)
강원 감사 조정호가 장계하여 전투 상황을 전하다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의 장계가 들어 왔는데, 건치(乾雉) 4수(首)를 올렸다. 그 장계에 “춘천 영장(春川營將) 권정길(權井吉)이 군사를 거느리고 검단산(儉丹山)에 주둔하면서 여러 차례 싸워 많이 이겼는데 갑자기 청병(淸兵)이 뒤를 엄습하는 바람에 무너졌고, 조정호는 현재 용진(龍津)에 주둔하면서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북병(北兵)을 기다렸다가 연합작전으로 진격할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1월 6일(병오)
함경 감사 민성휘의 군사가 강원도 금화현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들어왔다.
평안 병사 유림(柳琳)과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의 장계가 들어오고,
강화도의 아전 한여종(韓汝宗)이 두 대군(大君)의 편지와 분사(分司)의 장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서흔남과 승려 두청이 도원수 김자점 등의 장계를 가지고 오다
7일에 성 안에 사는 서흔남(徐欣男)과 승려 두청(斗淸)이 모집에 응하여 나갔다가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의 장계를 가지고 왔다.
원수 김자점이 광릉(光陵)에 이르러 장계를 올리고,
전라 감사 이시방이 양지(陽智)에 진군하여 장계를 올리기를,
“통제사 윤숙(尹璛)에게 통문을 보내 그로 하여금 군사를 보내도록 하고, 승장(僧將) 각성(覺性) 등이 승군 1천 명을 뽑아서 장차 전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8일에 모든 장수들이 항상 진군한다고 일컫지만 머뭇거리면서 나아가지 않고, 김자점은 군사를 이끌고 미원(薇原)에 있으면서 들어와 구원할 뜻이 없으므로 좌랑 윤지원(尹之元)으로 독전관(督戰官)을 겸하게 하여 원수의 진으로 보냈다.
15일에 심기원(沈器遠)과 민성휘(閔聖徽)의 군관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군관이 말하기를 “미원(薇原)의 군사가 1만 7천입니다.” 하였다.
도원수 심기원(沈器遠)의 군관 지기룡(池起龍)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 대구어(大口魚) 알과 연어(漣魚) 등의 물품을 바쳤다.
체부(體府)가 아뢰기를,
“지기룡ㆍ김기량(金起良)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와 구원병의 소식을 알렸으니, 논상하소서.”
하니, 따랐다.
남 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군사를 합쳐 양근(楊根)의 미원(薇原)에 진을 쳤는데, 군사가 2만 3천이라고 일컬어졌다. 평안도 별장이 8백여 기병을 거느리고 안협(安峽)에 도착하였다.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이 군사를 거느리고 쌍령(雙嶺)에 도착하였는데, 교전하지도 못하고 군사가 패하여 죽었으며,
우병사 민영(閔栐)은 한참동안 힘껏 싸우다가 역시 패하여 죽었다.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진군하여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 진을 쳤으나 적에게 패하여 생사를 모른다고 하였다.
1월 15일에 의승(義僧) 두청(斗淸)이 유지(有旨)를 가지고 나갔다.
남한산성 공방전
2.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을 곤장을 맞은 일
12월 16일에 적의 대군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고, 해가 질 무렵 홀연히 적이 남문에 이른 것을 보고하니, 체찰부(體察府)에서 즉시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을 곤장 쳐 척후를 하지 못한 것을 꾸짖고 성 문을 닫고서 지켰다.
12월 18일에 날씨가 잠깐 따뜻했다. 북문 대장 원두표가 장사들을 모집하여 성을 나가 오랑캐 순찰군을 쳐서 여섯 사람을 죽이니, 군사들이 조금씩 적을 칠 마음을 갖게 되었다.
12월 19일에 구굉(具宏)이 군사를 모집하여 성을 나가서 적 20명을 죽이니, 딴 본에는 10여 명이라 되어 있다. 이로부터 응모하는 자가 자못 많아졌다.
3. 조선군이 화포로 공격하는 장면도 있어야 했다.
12월 19일에 적병이 진격하여 남성(南城)에 육박했는데, 아군이 화포로 공격하여 물리쳤다.
12월 21일에 어영별장(御營別將)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성(西城)을 나가 적 10여 명을 죽이고,
어영별장(御營別將)이 되어 성곽 남문을 지켰으며, 민심이 혼란에 빠지자 그해 12월 21일에 선봉장으로 자원 출정하여 적군을 생포하고, 10여 급의 적군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와 성안의 민심을 일부 안정시켰다.
동성(東城)의 신경진(申景禛)도 조금 쳐서 죽였다.
12월 22일에 이때 북문의 어영군이 적 10여 명을 죽이고, 신경진이 또 30여 명을 죽였다.
유학(幼學) 윤지원(尹之元)이 응모하여 먼저 나가서 철편(鐵鞭)으로 두 오랑캐 기병을 때려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임금이 불러 보고 술을 내리는 동시에 육품 관직에 임명하였다.
12월 23일에 사영(四營)에서 출병하고 임금이 북문에 거둥하여 싸움을 독려하니 각각 적을 죽여 공을 세웠는데, 우리 군사 중에서 사상한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12월 24일(갑오) 군사 4백여 명을 보내어 출전하게 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상이 몸소 나아가 호궤하였다. 어떤 병졸이 대열을 벗어나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비단옷 입은 사람을 장수로 정하면 자기는 성밑에 앉아 있으면서 고군(孤軍)만 나가 싸우게 하니, 대오 중의 사람을 장수로 정하여 출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희 대장에게 말해라.”
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에 어영청이 아뢰기를,
“오늘 출전하여 적을 죽인 수가 그들의 말대로 계산하면 1백 명이 넘습니다.
12월 26일에 원주 영장(原州營將) 권정길(權正吉)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금단(黔丹)에 진을 치니, 산성 안에서 구원병을 바라보고 대포를 쏘고 불을 들어서 서로 응하였다. 《잡기》 금단(黔丹)이 《병자록》에는 검단(劍端)이라고 되어 있다.
4. 김류가 독단의 전투를 지휘한 일 – 상대방의 전술 소개 미비
12월 29일에 날씨가 잠깐 화창하니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남성(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장수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을 역설하였는데 김류가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성 아래에는 개울이 굽이져 있었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곳곳에 매복한 채 겉으로는 고군(古郡) 남쪽 4, 5백 보 거리로 물러가서 군사와 소‧말을 약간 머물려 주둔시켜 놓고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니 우리 군사가 서로 버티면서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 베게 하였다.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이니,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는데, 별장(別將) 신성립(申誠立)은 사람들과 영결(永訣)하고서 가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의 남겨둔 소와 말을 취하는데도 적들은 못 본 체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송책(松柵) 밖으로 다 나온 뒤에야 비로소 적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돌격해 들어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곧장 우리 군사의 앞뒤를 끊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도 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짓밟혀 죽은 자가 거의 2백 명이고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如海)와 이원길(李元吉) 등도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로 죽은 자는 다만 두 사람뿐이었다.
유호가 또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허물을 돌릴 곳이 없자 원두표가 구원하지 못한 탓이라 변명하여 장차 사형에 처하려 하자,
홍서봉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처음에 정예 군사를 모두 체찰부에 예속하였는데, 사상자가 적어도 3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싫어하여 40명이라 아뢰니, 이로부터 사기가 떨어지고 묘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12월 30일 협수사(協守使) 유백증(兪伯曾)이 병이 들어 나만갑이 대신하여 그 임무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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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월 2일. 이때 적 5, 6명이 순찰하다 성 밖에 이르렀는데 훈련원 주부 장성인(張性仁)이 포를 쏘아 세 적을 죽였다. 다른 본에는 2명의 적으로 되어 있다. 임금이 이르기를, “한 번 쏘아 셋을 죽였으니 쾌하도다.” 하고, 특별히 훈련원 첨정을 제수하였다.
1월 12일 어영대장 원두표가 군사 50여명을 이끌고 나가 청군을 공격, 청군 6명을 전사시키고 이들을 물리쳤다. 계속해서
1월 15일까지 이기축, 원두표, 구굉, 김류 등이 청군을 향해 출성공격을 하였다.
5. 청군의 반격 - 승리한 전투를 왜곡한 장면
1월 16일 청군 5,000명이 운제, 화포 등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남한산성에 대공세를 가하자 조선군은 출성하여 청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고 결국 승리하였다.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군 80명이 전사하였고, 청군은 200명이 전사하였다. 두 차례의 집중공격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청군은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항복을 받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작전을 바꾸고 병력을 나누어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 때문에 남한산성의 조선군은 지방의 지방군들과의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추위로 인해 군사들이 죽어나갔으며, 식량 또한 서서히 고갈되면서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1월 19일. 한밤중에 적이 동성으로 쳐들어오자 성이 거의 함락지경에 이르렀다. 남녀가 성을 넘어 달아나는 자가 몹시 많아 성안이 가마 속 끓듯 하였다. 이 때 어영 별장 이기축(李起築)이 장경사(長慶寺)에 있다가 어가를 모시고 장경사(長慶寺)까지 인조와 왕실을 호위했으며 장경사까지 따라온 청나라군사를 죽을힘을 내어 몸을 빼내 독전하니, 적이 물러갔다.
이에 임금이 친림하여 위로의 말을 내리고 특별히 가선대부를 가자하고 완계군(完溪君)을 봉하였다.
1월 21일 충청 감사 정세규가 최진립, 이경징 등의 장수들을 데리고 충청도 근왕군 8,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도중 양고리의 청군과 격돌하게 되었는데(험천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하였다.
계속해서 각 지방에서 근왕군들이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대부분 청군에게 격퇴되었다. 조정에서는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청군을 치기를 원했으나 임진왜란 때처럼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청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남한산성이 외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차단하였다. 그 후 청군은 남한산성을 수 차례 공격하였으나 대부분 조선군에게 격퇴 당하자
인조의 항복을 보다 쉽게 받아내기 위해서는 인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주요 왕족들이 있는 강화도를 도르곤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강화도 방어전).
6. 술을 최명길이 가지고 간 장면 - 허위
12월 26일(병신)
삼공ㆍ비국 당상과 의논하여 적진에 술과 소를 보내기로 하였다.
대사간 김반(金槃)이 아뢰기를,
“소와 술을 보내지 마소서. 비록 보내더라도 재신을 시키지는 마소서.” 하니,
임금이 묻기를,
“무신 가운데 누가 갈 만한가?” 하자,
김류가 이기남(李箕男)을 천거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항복(李恒福)의 아들을 사람들이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어떠한가?” 하자,
우의정이 아뢰기를,
“서자가 적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 단지 소와 술을 보낼 뿐이고, 반드시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 사람을 보낼 만합니다.” 하였다.
12월 27일(정유)
이날 소와 술을 노영(虜營)에 보내려 하는데 대신이 들어와 청하기를,
“재신(宰臣)을 보내었다가 구류되면 도리어 나라의 체면이 손상될 것이니, 이기남(李箕男)을 시켜 보내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김반(金槃)과 승지 최연(崔葕)은 사람을 보내지 말기를 청하였고, 교리 윤집(尹集)은 상소하여 논의를 주도한 자를 목 베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기남으로 하여금 소 두 마리, 돼지 세 마리, 술 열 병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노장(虜將)이 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우리에게 동방을 주셨으니, 팔도의 주육(酒肉) 등 모든 물건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국왕이 현재 석혈(石穴)에 처해 있고 내외가 통하지 않아서, 종신(從臣) 이하가 모두 굶주릴 것인데, 이것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르겠다. 너는 가지고 가서 굶주린 신민에게 나누어 주라.”
하고, 또 말하기를,
“원병이 어느 곳에 도착했기에 우리가 3천 군사로 모조리 죽였고, 또 다른 곳에서 2천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 황제가 이미 나온 것을 너희 나라는 듣지 못하였는가?”
하니, 이기남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고 돌아왔다.
7. 그 밖의 전투 장면도 영화에 삽입되어야 했다. - 부족
동선령 전투(1월 8일~1월 19일) : 승리
검단산 전투(1월 11일~1월 18일) : 1차 승, 2차 대패
토산 전투(1월 19일~1월 21일) : 1차 패, 2차 승
험천 전투(1월 21일) : 패
철옹성 전투(1월 23일~1월 28일) : 패
쌍령 전투(1월 2일) : 1차 승, 2차 대패
광교산 전투(1월 6일~1월 31일) : 승리
강화도 방어전(1월 16일~1월 22일) : 패
8. 김상헌이 자결하는 장면 - 왜곡
이조 참판 정온이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 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조 참판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렸다.
“신이 자결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전하의 오늘날의 일을 차마 볼 수 없어서인데, 실오라기 같은 잔명(殘命)이 3일 동안이나 그대로 붙어 있으니, 신은 실로 괴이하게 여겨집니다.
최명길이 이미 전하로 하여금 신이라 일컫게 하고 나가서 항복하게 하였으니, 군신(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신하라고 해서 임금에 대해 명령을 잘 받드는 것만으로 공손함을 삼을 것이 아니라 간쟁할 일이 있으면 간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명나라의 인(印)을 바치도록 요구해 오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간쟁하기를 ‘조종조로부터 이 인을 받아 사용한 지가 지금 3백 년이 되니, 이 인은 명나라에 도로 바쳐야지 청나라에는 바칠 수 없다.’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들이 만약 명나라를 공격할 군사를 요구한다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간쟁하기를 ‘명나라와 부자(父子)와 같은 은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청나라도 알텐데, 자식을 시켜서 부모를 공격하게 하는 것은 윤리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는 공격하는 자에게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한 자 또한 옳지 않다.’고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이 아무리 흉악하고 교활하다 하더라도 또한 필시 양해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 두 가지를 간쟁하여 천하 후세에 죄를 얻는 일이 없게 하신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의 목숨이 거의 다하여 이미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할 수도 없고 또 길가에서 통곡하며 하직할 수도 없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을 체직하시어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주소서.”
* 이 영화는 오락적이지도 못하여 재미도 없고 역사적인 사실을 정확히 담아내지 못하여 가치도 상실되었다. 만약 무능한 군주(지도자)와 그리고 그를 둘러싼 공신(서인)들의 무능함을 드러내어 교훈으로 삼고자 했다면 더더욱 실패한 영화이다.
그렇게 서인들은 그 이후 또 300년을 그렇게 권력을 잡았고 나라는 망했다. 선조로부터 비롯된 정통성 없는 서자 6촌~7촌 대를 잇는 나라는 참으로 보기 드믄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