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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회 제54차 문화답사(3-2); 昌德宮 後苑(1)
昌德宮 後苑
창덕궁 후원은 궁궐 북쪽에 딸린 庭園으로 조선시대에는 주로 後苑이라 불렀고, 때로는 內苑,
上林苑, 禁苑으로도 불렀으며, 秘苑은 1908년부터 日帝强占期에 流布되어 光復 後에도 無心하게
최근까지 통용되는 用語이다.
창덕궁 후원은 北漢山의 脈이 漢陽의 제1봉 北岳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매봉[鷹峰]을
거쳐 그 남쪽 능선에 後苑과 昌德宮과 宗廟를 앉혔으며, 매봉에서 뻗어내려 樹林이 울창한
자연스런 丘陵地帶에 點點의 시설물을 설치한 정원으로 넓이 약 9만여 평에 이며, 원래는
창경궁의 후원과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日帝가 昌慶宮에 動物園과 植物園을 설치하고
昌慶苑으로 格下시키면서 두 궁궐의 후원 사이에 담장을 쌓아 지금처럼 분리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궁궐의 後苑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다워 일찍부터 王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王들이 많은 樓亭을 건립하여 100여 채 이상의 누정이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누각 18채와 정자 22채만 남아 있다.
後苑은 자연적인 丘陵과 溪谷, 폭포와 숲에 人工的인 손길을 最少化하고 여기에 어울리게 연못,
花階, 翠屛(꽃나무의 가지를 틀어 문이나 병풍처럼 만든 것)을 가꾸어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창덕궁 후원은 한국정원의 특징인 自然順應의 원리와 바깥 경치를 정원 안으로
끌어오는 借景에 능하고 비례적 건축공간의 美가 절정을 이루는 비밀의 정원이다.
따라서 세계 대부분의 정원이 人工的으로 規格化되어, 보고 즐기기 위한 觀覽用인데 비하여
昌德宮 後苑은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自然의 情趣를 온몸으로 느끼는 體驗庭園인
동시에 여러 복합적인 機能을 수용한 장소이기도 했다.
후원은 왕과 왕실 사람들의 휴식처뿐만 아니라 국왕과 왕자들이 글을 읽고 學問을 연마하거나
科擧試驗을 치르기도 하고, 임금이 논밭을 갈고 王妃가 누에를 치는 일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宮闕志>에는 역대 임금이 여기에 있는 樓閣과 亭子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詩와 글,
上樑文과 奇文들이 많이 나오는 宮中文學의 産室이기도 했다.
또한 이곳은 正祖의 꿈이 서린 곳으로 後苑에 奎章閣을 세우고 여러 書庫를 지어 王室圖書館을
마련하고 奎章閣 閣臣들을 길러내어 새로운 정치와 문화를 펼치려고 했다.
正祖는 昌德宮 後苑(上林)에서 아름다운 전경 10곳을 뽑아 詩를 남겼는데, 후원에는
‘후원의 열 가지 아름다운 경치’, 즉 正祖의 ‘上林十景’이 있다.
1. 觀豊春景(관풍춘경) / 창경궁 관풍각에서 임금이 봄에 밭갈이하는 광경
2. 望春聞鶯(망춘문앵) / 망춘정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 것 (*鶯: 꾀꼬리 앵)
3. 天香春晩(천향춘만) / 천향각의 늦은 봄 경치
4. 魚水泛舟(어수범주) / 어수문 앞의 부용지 뱃놀이 (*泛: 뜰 범)
5. 逍遙流觴(소요유상) / 소요정의 曲水에 술잔 돌리기 (*觴: 잔 상)
6. 喜雨賞蓮(희우상련) / 희우정에서 연꽃구경
7. 淸心霽月(청심제월) / 비 갠 밤 청심정에서 바라보는 맑은 달 (*霽: 갤 제)
8. 觀德風林(관덕풍림) / 창경궁 관덕정의 단풍구경
9. 暎花詩士(영화시사) / 영화당에서 과거를 치르는 선비를 보는 것
10. 凌虛暮雪(능허모설) / 능허정에서 바라보는 눈 내리는 저녁풍경
昌德宮 後苑은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된다.
=芙蓉池 일대; 입구의 언덕을 넘어서면 만나는 네모난 못 주위에 芙蓉亭, 魚水門과 宙合樓,
映花堂 등이 들어선 지역이다.
=愛蓮池 일대; 부용지에서 북쪽으로 산자락 하나를 감돌아 나가면 만나며, 寄傲軒, 愛蓮亭,
延慶堂 등이 자리잡고 있다.
=觀覽池 일대; 平面이 부채 모양인 觀纜亭과 二重 지붕을 이고 있는 尊德亭과 砭愚榭 등이 모
여 있다.
=玉流川 일대; 후원에서 가장 깊고 은밀한 지역으로 다섯 개의 정자를 비롯하여 옥류천과 폭포가
숨어 있는 곳이다.
昌德宮 後苑 사진
(51) 창덕궁 후원입구
(52) 昌德宮 後苑 담장, 오른쪽 담장너머가 昌慶宮이다.
芙蓉池 일대
(53) 芙蓉池, 芙蓉亭과 四井記碑閣(오른쪽)
부용지는 長方形 연못으로 愛蓮池와 더불어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方池이며
‘芙蓉’은 연꽃을 뜻하는 漢字語이다.
연못은 사방에 花崗岩 長臺石을 쌓아 마감하였으며, 연못 가운데에는 작고 둥근 섬 하나가
떠 있는데, 연못이 네모지고 그 가운데 둥근 섬이 하나 있는 것은
天圓地方의 동양적 宇宙觀을 반영한 것이다.
(54) 昌德宮 芙蓉亭 -보물 제1763호(2012.03 보물로 지정)-
芙蓉池 남쪽에 있으며 위에서 봤을 때 ‘十’字 모양을 이루는 정자로 礎石 2개가 연못에
들어가 있으며, 이 정자는 원래 肅宗 33년(1707) ‘澤水齋’로 지었던 것을 正祖 16년(1792)
芙蓉池를 고치면서 ‘芙蓉亭’으로 바꾸었다.
연못 안에 八角石柱를 세우고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지은 정면 5칸, 측면 4칸, 背面 3칸의
누각으로,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酒宴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1795년 水原 華城을 다녀온 正祖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 초입에 天圓地方의 조형원리에 따라 조성한 대표적 연못인 부용지에
지은 마루식 정자로 연못에 인접하여 자연의 仙境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風流를 통해
修養하는 한국 亭子建築의 대표적 작품이다.
(55) 芙蓉亭 亞字살문, 연못 쪽의 외부
외부 창은 연못 쪽에만 亞자살문을 달고, 다른 곳은 띠살문이다.
(56) 부용정 내부 창
내부에는 井字살문과 팔각형 교살창을 낸 불발기창을 두어 안팎 공간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였다.
(57) 부용정 뒤에 있는 怪石과 이를 받치고 있는 石盆
(58) 芙蓉池-天圓地方, 연못 건너 魚水門과 宙合樓가 있다.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方池인 芙蓉池는 동서 길이 34.5m, 남북 길이 29.4m에 이르는
네모 반듯한 연못으로, 연못 중앙에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떠 있는데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동아시아 傳統 宇宙論의 天圓地方 思想을
반영한 것이다.
부용지 북쪽에 있는 宙合樓는 주변을 3단의 花階에 정원을 꾸미고, 화계 첫 단에 있는
魚水門을 통해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59) 宙合樓로 들어가는 魚水門 앞의 石階[돌계단]와 소맷돌
(60) 魚水門
어수문은 宙合樓로 올라가는 문으로, 王이 출입하고 신하들은 어수문 양 옆에 있는 夾門으로
출입하였다.
魚水門은 ‘물고기와 물의 문’이라는 뜻으로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君臣은
서로 融和하는 관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一柱門 형태의 작은 문이지만 팔작지붕에
龍 彫刻을 치장하는 등 단청장식이 화려하다.
魚水門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상징적인 문으로, 芙蓉池의 물고기가 현명한 물을 만나 魚龍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人材登用의 登龍門이다.
(61) 昌德宮 宙合樓 -보물 제1769호(2012.08 보물로 지정)-
주합루는 正祖가 즉위한 1776년에 완성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樓閣으로 1층은 王室의
도서를 보관하는 奎章閣, 2층은 열람실이었는데, 원래는 열람실을 宙合樓라고 했으나
현재는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고 부르고 있다.
<宙合樓> 편액은 正祖의 御筆이며 정조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産室로서 茶山 丁若鏞을 비롯하여 楚亭 朴齊家, 冷齋 柳得恭, 炯庵 李德懋 등 文臣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으로 正祖는 열흘마다 詩題를 내렸으며 젊은 학자들이 밤낮으로 학문의
증진에 매달렸다. (*懋: 무성할 무)
正祖의 御製, 御筆, 御眞, 印章 등을 보관했던 장소로 원형이 잘 남아있고, 건물은 경사진
높은 지형에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2층 열람실은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등 건물의 기능에 맞는 室 配分이 충실히 반영되어 주합루는
歷史的, 建築史的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62) 주합루 오른쪽(서쪽)에 있는 昌德宮 書香閣
서향각은 奎章閣의 부속건물로, 御眞과 御製(임금이 지은 글), 御筆을 옮겨와 曝書(書冊을
볕에 쬐고 바람에 쐬는 일)하던 곳이었으며, 王妃가 養蠶을 직접 侍宴하는 親蠶禮를 행했던
곳이다. (*曝: 볕에 말릴 폭)
(63) 芙蓉池 御井
2008년 12월 四井記碑閣에서 북쪽으로 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발굴된 우물로 世祖 때 판 마니(摩尼), 파려(玻瓈), 유리(琉璃), 옥정(玉井) 네 우물 중 2개로
추정하고 있으며, 한 우물은 肅宗 代 이전에 폐기 되고 다른 하나는 肅宗 16년(1690)에
보수하여 근래까지 사용된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64) 四井記碑閣과 龍頭(오른쪽)
(65) 昌德宮 四井記碑閣
芙蓉池 서쪽 가에 있는 碑閣으로 肅宗 16년(1690) 옛 述盛閣 자리에 세웠다.
四井記碑에는 부용지를 만들게 된 배경 및 과정과 世宗 6년 永順君과 烏山君을 시켜
우물을 찾게 하고, 그때 찾아낸 네 우물에 摩尼∙玻瓈∙流璃∙玉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永順君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 廣平大君의 아들이며, 烏山君은 세종의 넷째 아들
臨瀛大君의 아들이다. (*瀛: 바다 영)
(66) 入水口, 龍頭
부용지의 水源은 땅 속에서 솟아나는 물이며, 비가 많이 올 때는 사정기비각 북쪽에 있는
石物인 龍頭의 입을 통해 계곡물이 연못에 흘러 들었다고 한다.
(67) 昌德宮 暎花堂, 부용지 쪽 모습
芙蓉池 동쪽에 있는 건물로, 光海君 때 처음 건립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肅宗 18년(1692)에 再建된 것이다.
(68) 昌德宮 暎花堂
영화당은 왕과 신하들이 宴會를 베풀거나 활을 쏘기도 한 곳이었으며, 원래는 건물 앞쪽에
‘春塘臺’라는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昌慶宮의 담으로 막혀 있고 ‘春塘池’라는 연못으로
바뀌었다.
正祖 때부터 科擧試驗場으로 이용하여 왕이 참석한 가운데 試官이 자리하여 試題를 내리고,
初試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春塘臺에서 마지막 시험을 보았다.
건물 안에 宣祖, 孝宗, 顯宗, 肅宗의 御筆 扁額이 걸려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판소리 春香歌에서 李도령이 壯元及第 할 때의 試題가 영화당과 관련된
‘春塘春色古今同’이었다고 한다.
(69) <暎花堂> 편액. 英祖의 御筆
(70) 영화당 띠살문
(71) 영화당 남쪽 仰釜日晷(복제품)
世宗 16년(1434) 蔣英實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솥이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다고 ‘仰釜日晷’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地球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時刻線, 季節線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仰: 우러를 앙 *晷: 해 그림자 구)
(72) 영화당 앞 마당의 느티나무
愛蓮池 일대
(73) 金馬門
寄傲軒과 雲磬居로 들어가는 문으로, 金馬門은 漢나라 때 西安 郊外 未央宮에 있던 문으로,
문 안쪽 전각에 王世子가 있음을 상징한다.
(74) 昌德宮 寄傲軒 (*傲: 거만할 오)
기오헌은 원래 讀書處인 倚斗閤이 있던 곳으로 純祖 27년(1827) 재 건립하여 寄傲軒이라고
했다. 翼宗으로 追尊된 孝明世子(純祖의 아들)가 독서를 하기 위하여 만든 소박하고 단출한
전각이다. (*倚: 의지할 의)
*’寄傲’는 陶淵明의 「歸去來辭」에 나오는 ‘남쪽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앉으니 무릎 하나
간신히 들여놓을 작은 집이지만 참으로 편안하구나(倚南牕以寄傲 審容膝之易安)’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75) 昌德宮 雲磬居 (*磬: 경쇠 경)
운경거는 寄傲軒에 딸린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창덕궁 안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다.
(76) 雲磬居와 寄傲軒(왼쪽)
雲磬居는 그 이름이 ‘詩와 音樂이 있는 집’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기오헌과 운경거는
孝明世子(翼宗)가 代理聽政을 하는 틈틈이 독서와 시와 음악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77) 蓮池
(78) 演慶堂 外行閣
(79) 演慶堂 外行閣 長樂門 앞 느티나무
(80) 장락문 앞 느티나무 옆 怪石
(81) 演慶堂 정문 長樂門
(82) 昌德宮 演慶堂 사랑채 -보물 제1770호(2012.08 지정)-
‘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며 孝明世子가 純祖와 純元王后를 위한 잔치를 베풀고자
순조 27년(1827)경 지은 孝心이 담긴 집으로 士大夫의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書齋인 善香齋외 뒷마당 높은 곳에는 濃繡亭이 있으며,
‘演慶堂’이란 원래 사랑채를 가리킨 것이었으나 지금은 이 건물들을 통틀어 연경당이라
부르고 있다.
창건 직후 연경당에서는 효명세자가 신하를 접견하거나 進爵禮(尊號를 올리는 禮)를
거행하였으며, 高宗 때는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중요한 정치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83) 연경당 사랑채 뒷모습
(84) 연경당 사랑채 완자살창 分閤門
(85) 연경당 사랑채 지붕골
(86) 昌德宮 演慶堂 안채
(87) 연경당 안채 뒷면
(88) 연경당 안채 내부
(89) 昌德宮 善香齋
선향재는 書齋 겸 응접실로 쓰던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90) 善香齋 측면
선향재의 특색은 전면에 설치된 遮陽과 측면 벽체인데 집이 西向임으로 햇빛을 차단하려고
만든 차양은 집의 길이만큼 덧대어져 있다.
측면 벽체는 아래쪽 아궁이 부분은 네모진 화강석을, 그 위에서 박공 부분까지는 벽돌을
이용해 쌓으면서 중앙에 正方形의 幾何무늬를 넣어 장식하여 독특하며 다분히 중국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91) 善香齋 遮陽 內部의 架構
(92) 昌德宮 濃繡亭 (*繡: 수놓을 수)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지붕집으로 四面의 벽을 모두 완자무늬 四分閤으로 처리하고,
기둥 밖으로는 四面을 돌아가며 쪽마루를 깔고 귀퉁이마다 法首(난간 모서리에 세우는
동자기둥)를 세운 亞字난간을 돌려 건립한 細心한 솜씨의 정자이다.
(93) 昌德宮 愛蓮池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인 愛蓮池는 가운데 섬이 없는 方池이다.
(94) 昌德宮 愛蓮亭
애련정은 肅宗 18년(1692) 愛蓮池의 물가에 지은 정자로,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 있는 잉어 모양의 吐首는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陰陽五行說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愛蓮’이라는 이름은 宋나라의 儒學者 周敦頤가 쓴 <愛蓮說>이라는 詩에서 유래했으며,
肅宗이 지은 <愛蓮亭記>가 ‘宮闕志’에 전한다고 한다.
(95) 昌德宮 不老門
王의 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문으로 昌德宮 延慶堂으로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돌문으로 세로 板石에 돌쩌귀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나무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문을 지나가는 사람은 無病長壽한다고 전해진다.
문의 윗부분에 篆書體로 <不老門>이라고 刻字했다.
*전철 3호선 경복궁역 構內의 경복궁으로 가는 길에 不老門의 複製品이 있다.
(96) 쪽동백나무 꽃
(97) 觀纜池로 가는 길 (*纜: 닻줄 람)
(98) 창덕궁 뽕나무 -천연기념물 제471호-
창덕궁의 후원에 있는 뽕나무로 조선시대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심은 나무 중 하나이며 수령은 400년 정도, 나무높이 12m, 가슴높이
줄기둘레 2.4m(지름 73㎝)로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老巨樹일 뿐만 아니라
창덕궁 내 뽕나무 중 가장 크고 樹形이 아름답다.
太宗 9년(1409) 周 나라 成王 때의 公桑制度를 본 따 궁궐 후원에 뽕나무를
심게 하고 백성들에게도 養蠶을 권장하였으며, 세종 때는 창덕궁에 1,000여 구루,
경복궁에 3,590구루의 뽕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蠶: 누에 잠)
成宗 때도 왕이 後苑에 뽕나무를 심게 하고, 王妃가 친히 누에를 쳤으며,
인간에게 처음으로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쳤다는 養蠶의 神 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親蠶禮를 거행했다.
(99) 매발톱꽃
(100) 산딸나무 꽃
-景福34회 제54차 문화답사(3-3); 昌德宮 後苑(2) 및 齋洞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