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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으로 간 까닭
남천교개건비의 여파는 의외로 심각했다.
전주에 대해서만은 총체적으로 긍정적이었던 내 의식에 급격한 변화가
왔으며 전주를 과대평가해 왔다는 자기비판이 뒤따르고 있었다.
기만적인 전주 이미지의 가면을 벗겨야 한다고.
반년쯤 전(2008년 9월)에 삼남대로를 걸을 때 금구에서 이서(완주군)를
경유해 삼례로 가는 옛길을 따르지 않고 전주로 갔다.
이유는 삼례보다 전주의 인력이 컸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 인력에는 찜질방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때 이른 아침, 한벽교에서 전주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전주천을 따라
추천대교까지 내려갔다.
다리를 건너서 가는 전주~삼례의 도로를 버리고 전주천 둑길을 따라가
삼례교를 건넜다.(메뉴 '옛길' 28번글 참조)
그랬기에, 이번에는 한벽교에서 전주천 지근인 향교, 이목대와 오목대,
양사재, 경기전, 천주교전동교회, 풍남문, 객사(풍패지관), 전주동헌 등
에 들름으로서 통영별로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집 떠나온지 20일이 넘었으며 가족과의 약속일은 아직도 하루가 남았다.
이 하루를 '삼례~이서'의 옛 삼남대로에 투입하기로 마음 정했다.
그러면, 각기 미완으로 남은 삼남대로와 통영별로의 한 점씩을 일시에
찍음으로서 모두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익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지체없이 전주역으로 갔고 익산에서도 곧바로
20리 밖 황등으로 갔으며 다시 낯설지 않은 10리길 농로를 걸었다.
1. 4후퇴 피난생활중에 맺은 인연의 세월이 곧 환갑을 맞게 되는 동안에
혈연들을 부끄럽게 하는 비혈연 아우 C가 사는 농가를 찾아가느라.
전일, 진안까지 간 사연과 같은 이유다.
6. 25민족동란이 이어지고 있던 1952년.
전북 익산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내게 누군가가 솜털이 보송보송한
한 소년을 데려왔다.
무녀독남 중학교 1학년 학생이므로 많이 귀여워해 주기를 바란다며.
전황 따라서 집시처럼 지방을 전전하며 학업을 이어가던 나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근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애지중지 외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응석 한 번 부려볼 겨를을 주지 않고
연달아 몰려온 횡액들을 물리치고 대농의 꿈을 이룬 그다.
그보다도 더 크게 이룬 꿈은 외로움을 달랠 길 없던 독자의 가계가 2남
2녀로 크게 번성했으며 모두 하나같이 효자 효녀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 구체적으로 힘이 되어주지는 못하였으나 원근에서 지켜보며
말로라도 거드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관계는 온도를 높여갔다.
사람의 긍정적인 모든 관계는 화분의 식물(植物)과 같다.
식물이 수분과 양분,일조량에 따라서 튼실하거나 빈약한 것처럼 사람의
관계도 인연이라 해서 절로 돈독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지역의 말 습관이기는 해도 '거시기'를 유난히 많이 쓰는 그.
"거시기, 거시기 하면 거시기 해요"
이 때, 거시기는 주어도 되고 동사, 목적어, 보어도 된다.
영어의 'any way', 일본어의 'あの' 처럼 대화중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힐 때 나오는 '저어'의 뜻이지만 그는 여러 품사로 사용한다.
내가 스스로 와서 한밤을 함께 보내는데 기분이 고조되었는지 거시기를
더욱 많이 써가며 옛 일 살려내느라 또 밤이 깊어갔다.
상전벽해의 조촌읍
예전에도 13개 역을 거느린 삼례도찰방역(蔘禮道察訪驛)이 있던 곳.
삼례읍 후정리(後亭) 삼례역에서 길을 나선 시각은 오전 10시경.
고산자는 대동지지(程里편)에서 삼례역~금구 간을 50리라 했다.
최단 5리, 최장 50~60리 간격으로 지명을 기록했는데 까닭이 애매하다.
그 구간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으로 이해하며 황당한 오류 구간 역시
자료의 수집과 편집 과정에서 일어난 착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비정 마을을 지나 삼례교를 건넜다.
1573년(선조6)에 무인(武人) 최영길(崔永吉/첨사)이 별장으로 지은 후
중간에 철거된 것을 1752년(영조28)에 전주 관찰사(서명구)가 관정(官
亭)으로 재건하였단다.
마을 이름도 정자 이름에서 비롯되었고.
비비정
삼례교에 앞서 대천교를 건너야 하는 이 지역의 만경강은 꽤 복잡하다.
전주천이 구이면 모악산에서 발원한 삼천천과 한 몸이 되고(팔복동, 서
신동에서) 소양과 고산 양천이 하나 되어 각기 만경강에 뛰어들고 봉동
읍 제내리에서 발원한 석탑천이 반대편(삼례쪽)에서 몸을 던지는 곳.
그래서 한천(大川)이라 하고 대천교와 삼례교를 거푸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전주시다.
삼례와 이서는 완주군 땅인데도 전주시를 거치지 않고 왕래핳 수 없다.
옆 지역(삼례와 이서 사이)인 조촌읍(助村邑)을 전주시가 가져감으로서
(1987년) 완벽하게 고립된 월경지(越境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삼례교를 건넌 후 1번국도 따라 동산육교(철로교차지)를 건너면 복잡한
동산광장(전주시/옛 조촌읍) 오거리다.
피난살이 하던 1950년대 초의 조촌면 기억을 살려낼 길이 없다.
이조시대의 옛지도가 무슨 소용이며 걸어본 사람이 생존하지 않고 단지
구전되어 올 뿐인 옛길을 짚어낼 사람이 과연 있는가.
지방의 소위 자칭 향토사학자들의 증언이 과연 귀기울일만 한가.
동명(洞名)'동산'은 이 곳에 있던 일본인 농장이름 동산(東山)에서 비롯
되었으며 농장명 역시 일본인 농장주 이름 히가시야마(東山)를 딴 것이
라니까 일본인이 개척한 농장지대였음을 의미한다.
동산광장에서 지름길(제5길)이 있으나 멀리 도는 길을 택했다.
전주시에 편입되었으며 상전벽해의 변화를 한 옛 조촌읍.
1번국도상의 호남제일문(여의동/덕진구 동산동)과 반월동(덕진구 조촌
동) 월드컵경기장 등을 둘러보기 위해서.
옛 삼남대로는 서쪽 호남고속국도변의 한국도로공사 수목원에서 조촌
동의 원동(院洞)정보화시범마을을 지난단다.
원골로 불리며 옛 허고원(虛高院/관영숙소)이 있던 곳이란다.
지금은 야산을 포함해 사방이 온통 배 과수원 마을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했다는 과수원.
우리나라에도 이미 세종때(1418~1450) 과수가 재배되었단다.
감,밤,대추,귤을 비롯해 여러 과실에 대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니까.
집 주위에 심고 방임상태에서 채집하는 자가소비용 정도였으며 이같은
과수들은 지금도 곳곳 가가에 이어지고 있다.
나도 집 뜰의 감나무, 대추나무, 매실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고 있으니까.
이 땅에서 집약적 재배의 과수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시작했다.
그 까닭에 해방과 더불어 그들로 부터 물려받았으나 6.25동란기인 1950
년대까지 과수원의 시련기일 수 밖에 없었다.
1960년대 이후 과수원예의 기술개발과 교육을 통해 속성재배(速成栽培),
품질향상,생산성제고 등 혁명적 발전을 했고 농촌기업의 일익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배 1등 산지는 단연코 나주다(2010년 기준)
2, 3위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뒤진 천안과 안성이며 전주(원동) 배는
15위를 마크하고 있으나 일천한 역사(1960년대에 도입)에 비해 최상의
품질로 공인받았단다.
친환경농법을 통한 재배와 고객 직거래를 통해 중간 마진을 없앰으로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생관계가 더욱 돈독해 가고 있단다.
소비자와의 직거래에서 인터넷의 위력을 나는 옥천(충북)의 도덕봉농원
(복숭아)에서 이미 확인했다( www.peachland.co.kr 참조)
균형발전은 가능한 현실인가
원동마을의 원동초등학교를 지나면 완주군 땅 이서면이다.
원동마을도 1982년 이전에는 이서면에 속해 있었단다.
원동초등학교가 개교할 때(1965년) 이서면소재지에 있는 이서국민학교
원동분교였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사십수년 역사에 1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음에도 현재는 전교생이
1백명 미만인(70여명?) 미니학교란다.
농산촌에 젊은이의 부재로 학령기 어린이가 없기 때문이다.
곧, 노랑버스가 마을들을 누비게 되겠거니(폐교) 생각하며 지나쳤는데
이 글을 쓰다가 궁금해서 전라북도 교육청 홈피에 들어가 보았다.
전교생71명, 교장 교감과 교사7명, 행정직원과 기타4명 등 총 13명이다.
터무니없는 낭비가 분명하건만 '농산어촌 작은학교 희망찾기' 모델학교
1호로 지정되어 폐교 직전에 회생되었단다.
"작은 학교만의 특색을 살려 내실 있고 알찬 교육과정을 운영, 학생들로
하여금 활기차고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는데 과연 가능할까.
합리적 학교경영 문제는 차치하고 다중의 공동생활을 통한 사회성 훈련
기회는 언제 갖는다?
시군계, 동과 면계인 반교리(盤橋) 원반교는 일명 물고기마을이다.
16,000㎡양어장에 금붕어,비단잉어 등 관상어를 비롯해 80여종 200여만
마리를 양식하며 물고기를 테마로 한 관광농원 형태의 물고기체험마을.
물고기를 형상화한 대형 물고기 조형물과 물레방아, 입체형 아쿠아리움,
수족관과 식당 등 여가를 즐릴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추었다.
1980년 이래 온 마을이 관상어(觀賞魚) 생산에 올인하고 있는 것 같다.
물고기마을
빈곤을 숙명처럼여기던 시절에는 '비딘이 한끼'에 불과했다.
도농을 물문하고 유행병처럼 번져있는 애완동물은 물론 관상어를 기를
엄두나 낼 수 있었던가.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격인가.
농산어촌의 소득원이 다양해 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시와 농촌이 함께 하고 자연과 사람이 함께 하는 곳"이라면 그곳이야
말로 이상향이 아닐까.
상개리(上開) 면사무소를 지났다.
이서면은 들떠 있다.
2005년의 공공가관 지방이전이라는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따라서 농촌
진흥청과 소속 7개 기관이 온다는 것.
(농업과학기술원, 작물과학원, 농업생명공학연구원, 농업공학연구소,
원예연구소, 축산연구소, 한국농업전문학교 등)
"전통과 첨단을 잇는 바이오 생명산업의 중심으로 도약하며 살고 싶은
도시, 가고 싶은 도시로 자리매김 될 것"이라고.
노무현 정부가 강행하려던 신행정수도이전 계획.
우여곡절을 겪으며 누더기가 되었고 이명박 정부 최대의 현안이었다.
국가 균형발전 계획.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통한 지역별 혁신도시의 건설 역시 용이한 일인가.
혁신도시란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산. 학. 연. 관이 상호협력하여 최적의
혁신여건과 수준 높은 생활환경을 갖춘 새로운 차원의 미래형 도시란다.
전주-완산지역의 혁신도시 개발예정지구는 전주시 만성동, 중동과 완주
군 이서면의 금평리, 갈산리, 상개리, 용서리, 반교리 갈산리, 반교리 등
면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잔뜩 기대하도록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으나 이와같은 이상향의 실현이
과연 가능한가.
정치적 구호일 뿐 일장춘몽이며 빛 좋은 개살구 꼴이 될까 걱정된다.
결어(結語)
면사무소 앞에서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는 모악산을 바라보며 은교리를
지나면 완주군과 김제시, 이서면과 금구면을 가르는 두월천이다.
은교리(銀橋)는 옛 삼례도찰방에 속한 앵곡역(鶯谷)이 있었으며 한국판
신데렐라(Cinderella)라는 '콩쥐팥쥐' 이야기를 낳았다는 마을이다.
콩쥐파쥐 설화의 무대는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의 구암마을과 둔산마을
일대라는 주장도 있단다.
산동교(두월천)를 건너면 산동리 구암마을(龜岩/山東里)인데 은교리와
시군과 면이 다르다 해도 바로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설화의 발생지가 "전주 서문밖 30리"라 했다는데 그 지점은 양쪽 마을이
다 해당되니까.
특히 구암마을은 마을 들에 있는 바위가 거북같다 하여 龜岩(구암)이라
했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때 九岩(구암)으로 바뀌었단다.
(1995년에'김제시 한자명칭변경조례'에 의거 거북 구(龜)자로 환원)
또한 이 마을을 거쳐서 한양으로 가던 이들이 “이곳이 바로 한양”이라고
감탄했을 만큼 번성했다는데 구암마을이 바로 삼남대로의 노정(路
있음을 의미한다.
아침에 통영별로의 분기점인 삼례에 도착함으로서 3월 14일에 통영에서
시작한 '통영별로' 걷기를 마쳤다.
오후에는 월전리(月田)의 연동마을에서 호남고속국도와 신 1번국도를
건넌 후 면소재지를 관통하는 옛 1번국도에 들어섬으로서 미완의 삼남
대로를 완결하는 마지막 점을 찍었다.
삼례~이서~금구'의 '삼남대로'의 빈 칸도 완벽하게 채운 것.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주의를 충족시키려면 그래야 했다.
<통영별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