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봄 고생을 엄청 한 끝에 두 번 째 ‘매화 여행’에서 결국 매화를 봤지만 그것이 ‘왜매화’라는 어느 분의 충고로 이번에는 제대로 된 토종매화를 보겠다는 욕심을 가진 나는 친구를 모아 이른 아침 여섯시에 세 번 째의 매화여행 길을 떠나기로 하고 분당에서 선암사로 향했다.
남해 고속도로로 가야 하는 것을 착각해서 88도로로 달리는 바람에 쓸데없는 거리만 더 돌았다. 대전에서 진주 쪽으로 가다 지리산을 훑어서 광주로 갔다가 다시 승주로 내려와서 선암사로 들어갔다.
아치형 돌다리는 여전히 수리 중이었고 선암사 초입의 이층 누각 문에는 무슨 불교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볼썽사납게 걸려 있었다.
꼭 그렇게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입구의 길을 올라가면서 친구의 “왜 나뭇가지 사진만 찍냐?”는 말에 작업의 소재로 써보려고 한다는, 무모한 여행길에 대한 핑계를 겸한 답과 함께 열심히 새로 장만한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서 나무 가지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찍었다.
그러다 보니 선암사를 알리는 현판이 보이고 그 문을 통과해 들어가니 갖가지의 나무들이 역시 우리를 반겼다.
경내를 쭉 둘러 보다 맨 뒷부분의 요사채 담에 기대서 나 있는 매화나무들을 보았지만 아직 봉우리만 올망졸망할 뿐 꽃은 한 주는 더 있어야 필 모양이었다.
결국 세 번 째인 매화 여행을 또 망쳤으니 매화를 제대로 보기가 이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꽃을 제대로 만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다.
절 내를 돌아 나와서 우리는 식당을 갈 요량으로 식당을 찾으니 도통 제대로 된 식당이 없다.
“공무원 들이 잘 알거야”란 친구의 말을 기대서 농촌지도소인지 하는 건물에 들어가 물으니 겨우 한 곳을 가르쳐 주는데 거기도 너무 먹잘 것이 없어서 우리는 좀 고픈 배를 잡고 그냥 다음 여행지인 선운사로 가기로 했다.
다시 광주를 지나 고창 읍내를 지나다 나의 예리한 눈이 생전 처음 듣는 지명을 이고 있는 ‘창평 순댓국’이란 단어를 발견했고 결국 가던 길을 돌아서 그 조그만 식당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댓국도 역시 실망이었다.
송송이 썰어 넣은 돼지고기에 가끔은 털도 박혀 있고 허파 고기며 혓바닥 고기나 귀때기 고기 등 약간은 지저분하면서도 걸쭉한 국물에 구수한 맛을 기대 했건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곱창과 순대만 있고 국물도 그저 밋밋하기만 했다.
그래도 주린 배를 채우고 다시 차를 달렸다.
선운사에 도착하니 역시 여기도 꽃은 두어 송이가 전부이고 대부분 봉우리만 가득하다.
붉은 점으로 살짝 찍혀서 짙푸른 녹색의 잎사귀에 가려서 언뜻 언뜻 보이는 모습들이 앞날의 화려함을 감추려고 무던히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뭐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그런 모습은 아니고 그저 또 “허탕이구나!” 하는
실망감만 그 봉우리의 몇 백 배의 크기였다.
선운사 꽃구경도 실망만 안고 나오면서 내소사로 갈까 하다 너무 시간이 늦어서 포기하고 근처의 지인을 만나기로 하고는 좀 달려서 부안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더니 나의 카페 친구가 울산에 있고 거기가 꽃도 지천이고 자기는 지금 바다로 회를 먹으러 가는 중인데 모든 것을 책임진다나 하면서 오기만 하란다.
그 말에 차를 몰던 친구가 핸들을 ‘홱’ 돌린다.
부안서 울산이면 서해안 끝에서 동해안 끝인데 다 늦은 저녁에 그 길을 달려 가야한다니 조금은 한심한 생각도 들었지만 워낙 오늘의 여행에 건진 소득도 없는 터이다 보니 약간 자포자기 하는 심정과 오기의 발동으로 모두가 의기투합해서 또 다시 광주를 지나 88도로를 달리는데 전화벨이 울이더니 울산이 아니고 통도사 입구로 오란다.
밤길을 여섯 시간 정도 달려서 통도사에 도착해서 꼬불꼬불한 길을 가르쳐 준대로 달리니 ‘니산요’ 간판이 여기 저기 담벼락이며 축대 등에 보인다.
니산요란 곳에 도착하니 그 곳 주인인 도예가와 사진작가 해서 두 분과 엄청 커다란 돌 판이 불에 달구어진 채 우리일행 셋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판의 두께는 한 뼘 정도고 그 크기가 캔버스 80호 크기는 족히 될 만큼 내 생전에 처음 보는 크기의 그런 고기구이용 돌판이었다.
그 돌판 밑은 말하자면 그 돌판 만을 위한 아궁이어서 장작불이 빨갛고 그 돌판 뒤로는 굴뚝이 있었고 돌판과 우리들이 앉아 있는 의자 위로는 순전히 그 돌판만을 위한 지붕이 얹혀져 있었다.
이 돌판으로 돼지 두 마리도 구웠었고 수천 명의 손님도 맞은 적이 있단다.
참으로 문화재급 돌판이었다.
거기다가 비닐 봉투에서 삼겹살을 확 푸니 누가 다 먹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푸짐하고 풍성했다.
이어서 나온 상추와 땅에 묻혔던 김치를 같이 말아서 먹으니 그 맛이 유별나게 쫄깃했고 또 녹차를 타서 특수 조제한 소주와 함께 입속에 붓고 털어 넣으니 주린 배는 잘도 주워 삼켰다.
우리들 일행은 다 같은 심정으로 날름날름 주어먹으니 그 많던 고기들도 금방 바닥이고 주인어른은 어제 너무 술이 과해서 못 먹는 다면서 열심히 고기 위에 소주를 뿌리면서 굽기만 하는데 그 맛나기가 갈수록 더 했다.
적당히 배도 차고 하루 종인 차만 탄 우리는 피곤도 하고 우리를 기다리던 분들도 그 전날의 과음에 조심하는 마음들이고 해서 우리는 자리를 파하고 잠자리를 같이 했다.
정신없이 자는데 옆의 친구의 코고는 소리도 소리지만 웬 닭이 그렇게 오래 우는 지 결국 일어 날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에 닭이 그렇게 오래 울지 않았다는 생각인데 여기 닭은 정력이 좋은지 엄청 오래 울어 쌌다. 얄미운 마음에 그 닭마저 잡아먹고 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침을 돌아보니 밤이라 몰랐던 어제의 주변이 다 보였다.
도자기 공방은 나지막한 집이 서너 채 연결되어 있는 그런 구조였다.
아마 모두 주인이 직접 지은 것 같았다.
나도 불현듯 작업실 지을 생각이 났다.
어떻게 지어야 경제적이고 보기 좋게 지을 수 있을지 통 감이 안 섰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처럼 직접 내 손으로 하나하나 지으면 좋으련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아침목욕을 가자는 말에 변변히 둘러보지도 못하고 나서서 목욕탕에 들렸다.
나는 구두 사서 처음인 듯한 구두닦기를 맡기고 욕탕에 들어가 나의 그 예의 전유방법인 샤워, 사우나, 냉탕, 온탕의 순서를 밟으니 기분이 그만이었다.
특히 냉탕의 수온이 어찌나 찬지 숨이 턱 막힐 정도여서 참으로 맘에 들었다.
냉 온탕 욕은 그저 냉탕의 온도가 생명이다.
그 온도가 낮아야 발이 ‘쩌르르’ 하고 느낌이 상쾌하다.
하지만 열탕은 어찌나 뜨겁던지 성질이 급해서 뜨거운 것을 싫어하는 나는 발만 담가보고는 온탕에서 ‘크으’하고는 냉 온탕을 두어 번 하고 나오니 구두도 반짝거리고 입구의 그 일하는 분이나 입구에서 표 파는 분의 인사성도 지극정성이다.
목욕탕을 수없이 다녀 봤지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절간 입구라서 다들 저절로 불심에 마음에 배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세상에 그런 이들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침 해장으로 ‘올갱이’ 국을 먹잔다.
‘길손식당’은 한적한 곳에 요즘 건물의 모양으로 들어 서 있었고 자매인 듯한 분하고 그 중의 한 여인의 남편인 듯한 남자가 올갱이를 까고 있을 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조금 기다리니 반찬이 나오고 밥과 국이 나오는데 우선 눈에서부터 맘에 착 ‘앵겼다’.
한 숟가락을 호호대며 입에 떠 넣으니 “그래! 이 맛이야!”란 말이 저절로 나왔다.
이번 여행은 이 올갱이 국 한 그릇이 모든 것을 덥고도 남음이 있었다.
희끄무레하고 걸쭉한 올갱이 국물의 맛이 과연 세상 사람이 만든 국물일까 싶었다.
그 속에 생각에 잠긴 듯이 가라 앉아 있는 올갱이의 씹는 맛도 정말이지 고소했다.
다 현지서 잡은 것들이란다.
나는 거기다 밥을 말아 먹을 수가 없었다.
밥이야 매일 먹는 것이지만 이 국이야 언제 또 쉽게 먹게 되겠는가?
밥은 젖혀두고 그저 국만 열심히 된장에 박은 깻잎과 희한한 맛의 무절임과 작지만 맵고 깐깐한 고추 절임과 그리고 김치와 함께 올갱이 국을 퍼 넣었다.
반찬도 가급적 적게 먹고 오로지 올갱이 국만 일편단심으로 후루룩거리며 밀어 넣었다.
어찌나 맛이 있던지 눈물이 날 정도였고 그 아주머니들을 업어 주고 싶었다.
한 그릇을 후다닥 먹고 나니 먹성이 유독 짧은 나는 배를 만지지 않을 수가 없었고 더 먹을 것인지 그만 멈출 것인지를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맛을 생각하면 더 먹어야 하고 배를 생각하면 그만 먹어야 했다.
나는 망설임 끝에 더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친절하게도 국을 다시 끓여서 가지고 오는데 조금만 달라는 나의 말은 완전히 묵사발이 되고 그냥 처음처럼 한 그릇을 꽉 채워서 주었다.
양이 걱정이었다. 친구들에게 권하니 다들 배만 만진다. 국이 처음부터 어찌나 양이 많던지 국만 먹은 나도 배가 불렀으니 밥하고 같이 먹은 다른 친국들이야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맛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양 떨면서 받은 국그릇이니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눈 딱 감고 퍼 넣기 시작했다.
의외로 잘 들어갔다. 하지만 결국 두어 숟가락은 남길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음식을 이렇게 맛나게 할 수 있다니 그 분들의 삶이 예술이란 생각이 저절로 났다.
무거운 배를 두 손으로 감싸면서 우리는 자리를 일어나 매화가 피어 있다는 통도사로 향했다. 절 내로 들어 서기 전의 커다란 소나무 숲을 지나 절 내에 들어서니 오늘이 일요일인 것 말고도 무슨 조금은 특별한 날인지 절은 좀 시끄러웠다.
절 내를 쭉 돌아드니 이름 모를 꽃나무가 시골처녀가 그 옛날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미소로 서 있듯이 어떤 꽃나무가 담장너머 서 있기에 물으니 ‘월계수 나무’란다.
수없이 듣던 월계수가 이렇게 생소하게 보이니 나의 삶이 얼마나 자연과는 동떨어진 호흡으로 살아 왔는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났다.
절 내를 이리 저리 돌며 사진을 찍는데 정말이지 오롯이 고고하게 딱 한그루의 매화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매화가 두 그루도 아니고 한 그루만 너무나 당당히 거기 서 있었다. 그것은 홍매화였다.
햇볕을 잘 받아선지 영양이 좋아선지 붉은 색을 많이 머금고 있었다.
연분홍색이 짙어서 요염하기가 더했다. 친구 말이 향기도 엄청나다니 분명 내가 찾던 토종매화가 맞는 모양이다.
절 내를 통 털어 딱 한그루만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아마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불교적 해석을 간접적으로라도 말하려는 듯 그런지 모르겠다.
그 꽃은 그렇게 혼자서 거기 꽃을 생각하고 온 사람들 전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도 열심히 꽃 사진을 찍고 그것을 배경으로 단체사진도 찍고는 대웅전의 문창살 목각에 감탄하면서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을 마감하고 내려 왔다.
우리는 또 다른 지인인 사진하는 분의 집에 들러서 차 한 잔을 얻어먹고 전에 찍은 나이 프로필 사진을 챙겨들고 좀 이른 시간이지만 저녁의 약속이 있는 터라 집을 향했다.
정작 갔던 꽃 여행은 미흡함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정과 자연의 신선함과 우리들의 긴 차안에서의 시간 중에 나누었던 온갖 삶의 이야기들은 분명 오늘의 여행도 다 하나의 즐거움으로 오래 오래 마음속에 각인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