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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맛있는부산 원문보기 글쓴이: harry
샤브샤브와 빨래
내가 처음 일본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79년 7월 초 韓電의 課長 때 였다. 일본 미츠비시전기로부터 들여오는 전력설비와 관련된 두달간 연수를 위한 것이었다. 동경 도착 첫날 저녁 나를 안내하던 미츠비시상사 직원이 동경의 뉴오타니호텔(뒤에 알았지만 세계정상들이 묵는 다는 곳이었음) 식당(4층)에서 저녁 접대를 한다는 것이었다. 저녁메뉴는 샤브샤브라고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었다. 그러니 먹는 법도 모를 수 밖에 없어 안내한 사람이 하는대로 따라 했다. 그 음식의 이름이 신기하여 서양의 어느 나라 음식 이름으로 알고 어느 나라 말인지 어설픈 일본말로 물었더니 일본말이라 면서 그 뜻까지 설명해 주었다.
"소고기를 빨래한다(?)"는 뜻이란다. 말하자면 "샤브뱌브"란 물속에서 빨래를 할랑거리며 헹구거나 물속을 걸을 때 나는 소리를 말하는데 얇게 썬 소고기를 뜨거운 국물 속에 넣어 할랑거리면서 먹는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명이었다.
일본사람들 말지어 내는대는 알아줘야 한다. 우리나라의 백일홍을 일본에서는 흔히 "사루스베리"라 한다. 사루는 원숭이이고 스베리는 미끌어짐을 말한다. 즉, 나무 타기 선수인 원숭이도 미끄러질 만큼 미끄러운 나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그래서 백일홍 줄기를 만져 보았더니 나루호도(成る程:과연)이었다. .(▶사진 : 新宿역 부근)
바카쫑과 日本紳士
당시 연수는 동경에서 한달간 일본어를 배우는 과정이었고 나머지 한달은 코베(神戶)의 미츠비시공장에서 연수를 하게 되어 있었다. 한달간 동경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일본어 공부는 주 5일간 매일 4시간(9시부터 13시까지)이었으며 오후와 토일은 자유시간이었다.
신주쿠(新宿)역 출입구 부근에는 동경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쿠라야(サクラ屋)와 요토바시야(ヨドバシ屋)라는 카메라점(전자제품포함)이 있었는데 나도 그곳에서 바카쫑이란 카메라를 샀다. 바카쫑이란 바보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라는 뜻으로 당시 처음 나오기 시작한 건전지가 든 자동카메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진 : 카메라를 찾아 준 黑澤壽昶씨)
바카쫑 카메라로 이곳저곳 둘러보다 하루는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를 견학하고 그곳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메이지(明治)신궁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 뒷자석에 앉으니 앞좌석 뒷포켓에 뭐가 들어있어 꺼내보니 분실물 신고시의 안내전단이었다.
하라주쿠(原宿)역 부근에서 내려 메이지신궁으로 들어서면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바카쫑이 없는 것이었다. 앗뿔사 아까 그 택시에서 거스름 돈 받으면서 그만 깜박한 것이었다. 모처름 거금(?)을 들여 산 것도 그렇지만 그동안 찍은 필름이 그대로 그 속에 남아 있는데 아쉽기가 그지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까 꺼내 본 안내전단이 생각났다. 어딜 가나 모으는 습관 덕에 그 안내 전단은 내 수중에 남아 있었다. 다시 하라주쿠(原宿)역 부근의 공중전화까지 되돌아 가서 전화를 하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일본도 처음이고 문제는 이렇게 복잡한 사연을 당시의 일본어 실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고 있는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신사 한분이 다가왔다. 아, 이분에게 부탁하여 보자고 마음을 굳히고 떠듬떠듬 설명을 하니 내 신상에 대해 몇 가지 물어 본후 전화를 대신 걸어 주었다. 결과는 공교롭게도 내가 탄 택시에는 무선이 없는 택시여서 밤 12시가 넘어야 분실물들이 보관소에 모인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는 데다 그 넓은 동경시내의 어디에 분실물 보관소가 있는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보기에 딱하였는지 내일 자기가 찾아서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곳(新宿의 56층 住友빌딩 25층에 있는 문화센터)까지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사진 : 新宿住友빌딩내 문화센타의 일본어 수강생과 여선생들)
이런 고마운 일이 있을 수 있나하고 연신 고개 숙여 인사하고 헤어졌다. 다음날(월요일) 수업이 끝날 무렵 연락이 왔다. 나를 찾는 손님이 왔다고. 건네 받은 바카쫑은 필름 포함 전날 그대로였다. 너무나 큰 친절에 보답하려고 56층 스카이라운지 식당으로 그분을 모셨다.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비싸다고 생각되는 음식을 주문하여 식사가 끝날 무렵 내가 먼저 일어서서 계산을 하려하니 그분이 내 팔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하지만 이게 어디 그분이 계산하도록 내버려 둘 형편인가.
완강히 내 주장을 굽히지 않자 그분이 말하기를 일본속담에 "고오니 잇테와 고오니 시타가에(鄕に入っては鄕に從え)"라는 말이 있다 하면서 기어코 자기가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는 정확한 문장과 그 뜻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라" 정도의 말인 것은 짐작이 갔다.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타향에 가면 그곳의 풍속이나 습관을 따르는 것이 세상사는 도리다"라고 되어 있었다.
일본여행에피소드Ⅱ
선샤인60빌딩과 63빌딩
동경의 시내나 근교를 둘러보는 관광버스로 하토버스란 것이 있다.
버스에 하토(鳩:はと) 즉 비둘기가 그려진 관광버스를 말한다.
이 하토버스는 동경 시내의 시티투어 뿐만 아니라 근교의 당일 코스 그리고 일박2일 코스 등 여러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1979년 처음 동경에 머무를 때에 이 버스의 시티투어 코스로 가본 곳 중에 당시 일본에서 제일 높은 건물로 선샤인60빌딩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를 의식하여 몇 년 후에 우리나라에서 이보다 3층을 높힌 소위 63빌딩이 탄생하였다.
(▶사진 : 일본 동경 이케부쿠로의 sunshine60빌딩)
카마쿠라大佛과 콘텍트렌즈
동경을 방문하는 사람은 대부분 동경 근교의 카마쿠라를 들리게 된다.
카마쿠라(鎌倉)는 동경의 서남쪽의 카나가와(神奈川)현에 있는 문화유적이 많은 곳으로 특히 高德院이라는 절의 카마쿠라대불(鎌倉大佛)로 유명한 곳이다.
나라(奈良)의 東大寺大佛(높이 16m)과 함께 日本二大 大佛로 널리 알려져 있다. 高德院의 本尊인 鎌倉大佛은 1252년 高德院 옥외 마당에 설치된 높이 11.39m의 금동좌상으로 정식 명칭은 銅造阿彌陀如來坐像이며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鎌倉大佛은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어 내가 갔을 때에도 그 속으로 줄을 지어 들어가 보았다. 내부 철제 계단을 오르면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부처님의 등 뒤쪽에 두 개의 네모난 창이 있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 도중 일행중 계단에서 잃어버린 콘텍트렌즈를 찾는다는 사람이 있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하토버스와 게이오대학생
동경 시내 뿐만 아니라 근교인 카마쿠라(鎌倉)와 하코네(箱根) 방면도 돌아 봤는 데 이젠 욕심이나 거금(?)을 들여 1박2일 코스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하토버스는 좌석을 지정하여 예약하면 앞좌석에서 지나가는 풍광을 즐길 수 있을 뿐만아니라 서툰 일본어 공부를 위해서도 가이드의 멘트를 녹음하거나 질문을 하기 편하여 여행시는 항상 앞좌석을 예약하였다. 그리고 예약시 외국인임을 명기하였다.
목적지는 동경 북쪽 후쿠시마(福島)현의 온천휴양지인 이이자카(飯坂)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반다이아사히(磐梯朝日)국립공원 일대를 둘러 보는 여정이었다.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두명이었다. 여자가이드 외에 젊은 남자가이드도 있었다. 버스가 동경시내를 벗어나 토네가와(利根川)라는 강을 지나면서 여자가이드가 승객들에게 일본에서 제일 긴 강 이름이 뭔가고 물었다.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지고 있는 휴대용 지도책의 자료란을 보면서 시나노가와(信濃川)가 제일 길며 방금 지난 토네가와는 두 번째라고 대답하니 가이드가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냐고 물었다.
실은 한국의 부산에서 온 외국인인데 여행시 항상 가지고 다니는 지도책을 보면서 답한 것이라고 하니 옆의 젊은 남자가이드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후 남자가이드는 내게 열심히 영어로 뭔가 말을 걸어 왔는데 영어를 못하는 내게 큰 고역이었다. 그 때까지도 이 젊은 남자가이드의 역할이 뭔지 몰랐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역할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하토버스에 외국인 승객이 예약하면 버스회사에서 외국인을 위해 고용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다. 마침 내가 탄 버스에는 외국인이라고는 나 혼자여서 오직 나를 위해 고용된 학생이었다. 다니고 있는 학교는 케이오(慶應)대학이고 영문학을 전공한다고 하였다.
나는 서툴지만 영어보다는 일본말이 편하다고 부탁하여 이후 일본말로 대화하였다.
일본인 앞에서 불러본 아리랑
첫날의 일정을 마치고 이이자카(飯坂)에 있는 온천여관에 방배정을 받아 짐을 풀었다.
나를 제외한 승객은 모두 일본인이며 한방에 4∼5명씩 그릅별로 방이 배정되었는데 나는 외국인이라 하여 큰방에 혼자 배정을 받았다. 그리고 온천목욕 후 큰 다다미방에서 식사와 여흥이 벌어졌다. 일본식 여관에 들면 옷을 벗고 유카타(浴衣)라는 것을 걸치고 오비(帶)라는 끈으로 허리를 동여매는데 나는 이를 잊고 엉거주춤 손으로 감싸고 나가니 나이드신 할아버지 한분이 친절이 가르쳐주셨다.
유카타차림으로 일본 전통춤을 보며 저녁식하를 마치니 예의 그 남자가이드가 사회를 보며 유일한 외국인인 나를 소개한 후 제일 먼저 노래를 하라는 것이었다. 어렵게 배운 일본노래를 한곡하였더니 한국노래를 하나 더 하라 하여 아리랑을 불렀더니 할아버지 한분은 소리내어 따라부르기도 하였다. 옛날 대구에 산 적이 있었다며.
수학여행과 교장선생
식사와 여흥이 끝난 후 가이드의 제안으로 내방에서 6명이 모여 조촐한 2차회를 갖게 되었다. 참석자는 낮에 관광하며 사귀어 두었던 젊은 여자 4명과 남자가이드였다. 두여자는 치과병원 간호사이고 나머지 두여자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였다.
네여자는 각자 준비하여 온 먹거리와 마실 것을 가지고 내방으로 모여 밤늦도록 시간을 보냈다. 나중엔 술이 모자라자 게이오 대학생 밖으로 나가더니 큼직한 산토리위스키를 사와서 하는 말이 오늘은 河상 덕분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 술이라도 사와서 보답하고 싶었다고. 그런데 나의 일본어 실력으로는 그들끼리 하는 말은 거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자기네끼로 배꼽을 쥐고 웃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저렇게 웃는지 하도 궁금하여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하였더니, 자기들은 수학여행온 학생들이고 나는 이를 감시하는 교장선생님 같다고 말하고 웃었다고 한다. 그들은 20대이고 나는 30대인데도 그렇게 보였다니 조금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경험하는 버스 속의 카라오케
귀로의 버스에서 카라오케(空オケ)라는 것을 처음 해보았다. 지금부터 26년 전이니 한국에서는 카라오케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로 모니터 화면 없이 나누어 받은 노래말 책을 보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의 번호를 말하면 운전기사가 손바닥 크기의 테이프를 골라 넣고 음악이 나오면 신청자가 책을 보고 부르는 식이었다. 나도 모처름 배운 高校三年生이란 일본노래를 카라오케로 불러보았다.
그들과의 재회
이 여행에서 돌아와 열흘 후면 동경을 떠나 한달간 코오베로 간다고 하니 나의 송별회를 위해 다시 만나자는 제의가 있었다. 며칠 후 신쥬큐의 음악이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이 때 마신 술값 등은 내가 내려하였더니 모두가 나누어 내자 하여 못이기는 척 나누어 내었다. 그리고 케이오 대학생이 자기의 하숙집에 초대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의 송별회를 핑계대어 아가씨들을 자기집으로 꼬시는(?) 것 같았지만 또 다른 경험을 위해 쾌히 받아 들였다.
일본여행에피소드Ⅲ
監獄이 된 韓國
동경에서 한달간의 어학훈련을 끝내고 코오베(神戶)로 이동한 것이 1979년 8월 초였다. 코오베에 한달간 머물면서 토,일 뿐만 아니라 8월에는 15일을 전후하여 오봉야스미(お盆休み)라는 5일간의 휴무일이 있어 이를 이용하여 소위 말하는 케이한신(京阪神)지역인 京都, 大阪, 神戶와 奈良 등지를 두루 둘러 보았다.
<사진 : 大阪万博(1970년)기념조형물 앞에서>
그리고 코오베 남서쪽에는 쾌속선으로 한시간 거리에 아와지시마(淡路島)란 섬이 있다. 이곳은 섬 서남쪽 끝의 우즈시오(渦潮:소용돌이치며 흐르는 바닷물)로 유명한 대나루토교(大鳴門橋: 1985년 준공되어 四國의 德島縣과 연결)와 동북쪽 끝의 주탑간의 경간(1,991m)이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아카시해협대교(明石海峽大橋: 1998년 준공되어 神戶市垂水區舞子와 연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95년 발생한 지진(阪神大震災)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다.
<사진 : 아와지시마(淡路島:지도상에서 붉은 선이 비스듬히 지나는 섬)>
당시에는 두 다리 모두 없을 때이며 나루토대교(鳴門大橋)는 건설 중이었다. 그 때는 유람선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바닷물을 보았는데 수년 후 다시 들렸을 땐 이 광경을 나루토대교(鳴門大橋) 위에서 보게 되었다.
<사진 : 우즈시오(渦潮)와 유람선, 우측상단에 교량건설 모습이 보임>
그런데 이 우즈시오(渦潮)를 보려면 코오베에서 쾌속선으로 아와지시마(淡路島)의 동쪽 항구인 스모토(洲本)에 내려 서남쪽의 후쿠라(福良)라는 곳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유람선을 타야한다. 버스 옆자리의 일본인과 서툰 일어로 말을 붙였다가 창피를 당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분도 타 지방 사람으로 이 곳에 관광을 온 사람이었는데 내가 말을 건네자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간고쿠에서 왔다고 하니 잘 알아 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방코쿠(방콕)에서 왔느냐고 되물었다.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간고쿠는 감옥(監獄)을 뜻하는 말이며 한국이라는 말은 칸코쿠(韓國)라 해야 맞는 발음이었다. 차마 감옥에서 나왔느냐고는 묻지 못해 방콕에서 왔느냐고 되물은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얼굴을 붉힌 기억이 난다.<사진:大鳴門橋의 현재의모습>
헷갈리는 일본 한자 읽기
아와지시마(淡路島)에 이어 코오베에서 전철로 오가며 쿄오토(京都)도 몇 차례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쿄오토(京都)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청수사(淸水寺)란 절을 들리게 되었는데 이 절의 한자 표기는 淸水寺인데 淸水는 시미즈란 사람이름으로 늘리 알려져 있고 寺는 法隆寺를 호오류우지라 읽으니 시미즈지라 읽으면 될 것 같았다.
<사진 : 京都의 金閣寺에서>
그래서 같은 버스를 탄 일본인에게 "시미즈지"에 대하여 몇 마디 물어보았는데 도대체 반응이 신통치 않아 종이에다 淸水寺라 적어 보였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떡이며 "키요미즈테라"라고 고쳐 말하지 않는가. 아니 같은 淸水를 어떨 땐 "시미즈"로 또 한편으로는 "키요미즈"로 그리고 寺자도 法隆寺는 "지"로 淸水寺는 "테라"로 읽는다니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인지 헷갈리기만 하였다.
일본에 머물면서 이러한 시행착오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며 짜증나는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나 "외래어로 된 일본말, 예를 들면 coffee를 일본에서는 '코오히이'라고 해야지 '커피'라 하면 아무도 알지 듣지 못하며 이는 외국어가 아니고 일본말이니 일일이 외워두어야 된다"는 동경의 일본어 어학원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곤 하였다.
<사진 : 京都인근의 비와코(琵琶湖)에서>
<사진 : 奈良관광 중 抹茶 試飮>
나와 동석하여 버스에 앉은 사람은 사이타마(埼玉: 동경 바로 위의 도시)에서 왔다는 중년 부인으로 일행이 5명이며 모두 자매간이라고 한다. 두사람씩 짝을 지어 앉고 남은 한사람이 나와 짝이된 것이다.
여행 중 이들 자매들로부터 후한 환대를 받았다. 말차를 마실 때도 옆에서 도와주었으며 버스 속에서도 많은 먹거리를 다투어 나누어 주기도 하였으며 같이 촬영한 사진은 귀국 후에도 서로 주고 받았다. 이들과 여행을 하면서 나라와 말은 서로 달라도 사람사는 정리는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사진 : 奈良관광에서 만난 5자매와 法隆寺에서>▣
일본여행에피소드Ⅳ
나고야(名古屋)와 나고야(名護屋)
1979년에 이어 8년 후인 1987년 다시 두달 간의 일본연수를 하게 되어 이번엔 작심을 하고 여러 곳을 둘러 보았다. 먼저 머물게 된 곳이 나고야(名古屋)였다.
일본에서 "나고야"란 이름의 도시는 두곳이 있다.
아이치(愛知)현의 현청 소재지가 있는 나고야(名古屋) 외에도 큐슈지방의 사가(佐賀)현에도 나고야(名護屋)가 있다. 사가(佐賀)현의 나고야(名護屋)는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 때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사진: 나고야성에서>
우리(檻) 속의 사람을 구경하는 원숭이
나고야城을 비롯한 시내 뿐 아니라 나고야(名古屋) 주변에도 볼거리들이 많았다. 나고야에서 북쪽으로 차로 두시간 거리에는, 옛날 모습 그대로의 목조 天守閣(犬山城)을 볼 수 있는 이누야마(犬山)라는 곳이 있고 주변에는 옛날 메이지(明治)시대의 건축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메이지무라(明治村)와 세계 여러 곳의 가옥을 재현하여 놓은 리틀월드를 비롯하여 몽키센타라는 곳이 있다. <사진: 몽키센타의 철망 터널>
이 몽키센터라는 곳은 자연 속의 원숭이들을 보기 위해 길다란 철망의 터널 속을 사람들이 지나면서 원숭이들을 구경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철망 터널을 지나게 되면 사람이 원숭이를 구경한다기 보다 철망 속에 갇힌 사람들을 원숭이들이 다가와 구경하는 꼴이 되어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
토요타(豊田)가 된 코로모(擧母)
나고야의 동쪽에 있는 인구 30여만명의 토요타(豊田)市는 세계적으로 자동차로 널리 알려진 도시이다. 토요타 자동차는 이곳에서 1937年 설립된 후 점차 번성하여 지금은 종업원 수가 6만 5천(관련회사의 종업원을 포함하면 26만 5천명)에 이르며 연간 생산량은 약 6백만대에 달한다고 한다.
토요타자동차가 번성하여 짐에 따라 이 도시도 번창하여 갔으며 많은 시민이 이 회사와 더불어 삶을 영위하게 되어 도시의 이름도 코로모(擧母)에서 토요타(豊田)로 바꿨으며 심지어 일요일의 종교행사도 평일로 바꾸어 행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요일에 회사를 가동하면 전력료가 싸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날 회사에 출근하기때문이라고 한다.
지역사회와 기업이 서로 손잡고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진: 리틀월드의 한국기와집>
메이지 시대의 면모를 한눈에 보는 메이지무라(明治村)
<사진: 明治村 정문에서> |
<사진: 明治村 호반> |
메이지무라(明治村)는 일본의 昭和(1926∼1989) 초기까지를 포함한 明治(1868∼1912)시대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 등을 원래 있던 곳에서 사용되었던 자재를 그대로 해체 운반하여 이곳에 이축(移築)한 곳으로 1965년 오픈하였다.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국가 중요문화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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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요하네 성당 (1907,京都市下京區) |
西鄕從道 저택 (1877,東京目黑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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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重현 청사 (1879,三重縣津市) |
東山梨郡役所 (1885,山梨縣山梨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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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松家住宅 (1901,名古屋市中村區) |
札幌電話交換局 (1898,札幌市大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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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川燈台 (1870,東京都港區) |
菅島燈台附屬官舍 (1873,三重縣鳥羽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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蒸氣機關車 (1874,輸入品) |
宇治山田郵便局 (1908,三重縣伊勢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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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 외국에 세워졌던 일본의 건축물 등 모두 67개의 건축물 등이 이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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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日系福音병원 (1907,미국시애틀시) |
브라질 이민주택 (1919,브라질상파울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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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집회소 (1889,하와이) |
일본여행에피소드Ⅴ
쿠사와케(草分)와 처녀 관장
1987년 두달간의 두 번째 일본연수를 위해 머물게 된 나고야(名古屋)에는 海外技術者硏修協會(AOTS) 中部연수센타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3주간 머물며 일본에 관련된 기초 소양교육을 받았다.
이 연수센타의 관장은 50대 중반의 여자로 성격이 활달하고 주량도 보통이 넘었다.
(연수 후에도 교분을 계속하여 수년 후 관장 퇴임 직전 부산을 비롯한 한국의 여러 곳의 AOTS를 거쳐간 한국의 연수생들과 만남 시 안내를 한 바도 있으며 지금도 교분을 가지고 있음)<사진 : 중부연수센터 후원에서의 연수생과 관장>
그런데 하루는 교육이 끝난 시간에 나를 비롯한 한국 연수생 몇 명을 자기의 숙소인 관사로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일본의 일반 주택 그것도 여자 혼자 기거하는 곳에 대한 기대감으로 우리들은 조금은 긴장과 흥분된 마음들이었다.
먼저 거실에서 간단한 다과를 들며 몇잔의 술이 오고 갔다.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 모두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관장이 보여 줄 게 있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하였다.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기자 관장은 입고 있던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물론 당시의 우리들 보다 열 살 정도 연상이었지만 여자가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벋다니 우리들은 숨을 죽이고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벗기 시작한 옷은 겉 옷에서 그치고 지금부터 일본의 전통 옷인 키모노 입는 시범을 보이겠다는 것이었다.우리는 조금은 실망했지만 관장의 숙달된 솜씨의 보기 드문 키모노 쇼(?)를 감상하였다. 관장은 덧붙여 말하기를 요즘 일본 여성들은 너무 힘들어서 혼자서는 키모노를 입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진 : 키모노 착용 시범을 보인 관장과>
우리들은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그 중에도 관장이 결혼을 하였는가가 제일 궁금했다. 이 질문에 관장은 자기는 일본의 여성독신주의자의 쿠사와케(草分) 중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쿠사와케(草分)란 말을 듣고 처음엔 글자만의 뜻을 생각하니 무성한 풀속을 헤집는다는 묘한(?) 뉘앙스가 먼저 머리에 떠올랐지만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어떤 일을 처음 하는 것, 즉 효시(嚆矢) 또는 그 사람을 일본에서는 쿠사와케(草分)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AOTS는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각대륙 개발도상국가의 기술자를 연수교육시키는 곳이며 본부는 東京에 있고 산하에 東京연수센타를 비롯하여 橫浜, 關西,中部연수센타 등 4개 연수센타가 있음 |
메오토이와(夫婦岩)의 밧줄
나고야(名古屋)의 중부연수센타에서의 3주간 체류 기간중에는 8월 15일을 전후한 오봉야스미(お盆休み)의 5일 간의 휴무도 있어 나고야 주변의 많은 곳을 혼자 여행하였다.
그 중에는 나고야에서 남쪽으로 이세(伊勢)만을 따라 100km 정도 내려간 곳의 미에(三重)현에 있는 일본 황실 宗廟인 이세(伊勢)신궁과 퇴역하여 관광명소가 되어 있는 브라질 이민선이 있는 토바(鳥羽)라는 곳도 가 보았다.
그런데 볼거리가 많은 이세(伊勢)신궁과 내부가 잘 꾸며진 최초의 이민선인 브라질호에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외딴 해안의 쓸쓸히 솟아 있는 두 개의 조그만 바위섬과 이들을 꼬아 만든 밧줄로 연결하여 둔 메오토이와(夫婦岩)란 곳이 뭐가 볼거리여서 사람들이 보러 오나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 의문은 귀국 후에도 해소되지 않다가 언젠가 이곳을 소개하는 내용의 TV방송을 보고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내용인즉 이곳 바다에서 잠수일로 생계를 이어 가는 부부가 있었던데 남편은 물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따고 아내는 배 위에서 남편의 잠수복에 공기를 불어넣는 펌프질을 하는 부부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큰 바위는 남편, 작은 바위는 아내 그리고 두 바위를 연결하는 꼬아 만든 밧줄은 남편의 잠수복에 공기를 공급하는 생명줄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아내를 믿고 물속에 들어가 있는 남편 그리고 자기에게 목숨을 맡긴 채 물속에 있는 남편을 위해 한눈 팔지 않고 펌프질을 하는 아내, 이들을 연결하는 두 바위 사이의 밧줄인 생명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 가야하는 우리네 삶을 보여주고 있음을 늦게 나마 알게 되었다.
달밤에 춤을
나고야의 연수센터에서 맞은 8월 15일은 일본의 오봉(お盆)이라는 날이었다. 이날 저녁 이웃에 거주하는 젊은 처녀가 찾아와 우리 일행 몇에게 동네 학교 마당에서 개최되는 야간축제인 오봉마츠리(お盆祭り)를 보여 주겠다고 같이 가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젊은 아가씨의 제의에 우리 몇 명은 기꺼이 함께하기로 하고 그녀의 소형차에 올랐다.
차에는 중년 부인 한분이 타고 있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라 하였다.
제법 어둠이 깔린 교정 가운데는 2층의 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맨위에 놓인 큰북을 두사람의 고수가 두드리고 있었다. 그 단 주위로 키모노를 입은 주민들이 춤추며 돌고 있었다.
우리를 초대한 모녀의 권유에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처음으로 일본 사람과 "달밤에 춤(?)"을 추어 보았다.
<사진 : 학교운동장에서의 오봉마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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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에피소드Ⅵ
히포(河馬)클럽
1987년 두달간의 두 번째 일본연수에서 처음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海外技術者硏修協會(AOTS) 中部연수센타에서 3주간 기초 소양교육을 받은 후 東京과 인근의 東芝府中공장에서 2주간 머물게 되었다. 이기간 동안 東京디즈니랜드, 후지산, 닛코(日光) 등을 둘러봤으며 일본의 평범한 가정에서 처음으로 이틀간 홈스테이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일본에는 홈스테이로 외국어 공부와 외국인과의 친교를 도모하는 단체 중에 "히포(Hippo:河馬)크럽"이라는 단체가 있었으며 이곳에 신청하여 이 단체의 시부야(澁谷)지부의 시바야마(柴山)라는 성을 가진 한 회원집을 소개받았다.
이 집은 초등교 5학년의 딸을 둔 나와 동연배의 부부의 집으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저녁까지의 이틀간의 홈스테로 여러 가지 경험을 하였다.
(히포크럽에서는 영어,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등을 위주로 하였으나 나중에 중국어가 포함되었으며 한국어가 포함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피자집 여중생들
첫날 나를 마중나온 부인과 함께 집 부근의 학교에서 귀가하는 딸을 만나 피자집엘 들렸다.
이 피자집은 입장료만 내면 피자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타베호오다이(食べ放題), 우리식으로 말하면 피자부페 같은 곳인데 들어서니 어른들은 보이지 않고 초등생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개중의 몇몇은 피자와 음료수를 앞에 두고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에야 우리나라에도 담배피는 어린학생이 있다고 들었지만 당시에는 처음 보는 일이라, 그것도 몰래 피는 것도 아니고 음식점에서 어린 여학생이 꺼림없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사진: 明治神宮)
오쿠숀(億ション)
부근의 요요기(代代木)공원과 요요기경기장(64년동경올림픽) 등을 둘러 보고 집으로 들어 가보니 지은지 제법 세월이 지난 20평이 조금 넘어 보이는 아파트였다.
동경의 중심부 주위를 순환하는 야마노테(山手)線 주위라 교통은 편리한 곳이었다. 아파트 가격이 얼마나 나가는지 물었더니 이래 뵈도 오쿠숀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처음 이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다시 물었더니 오쿠는 일억의 憶이며 숀은 맨션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즉 이 말은 보기는 이렇게 허름해도 일본돈으로 억대의 맨션이라는 말이었다. 그때의 환율로 일본돈 일억엔은 우리돈으로 7∼8억원에 해당한다. 당시 같은 평수의 우리집의 10배가 넘는 가격이었다.
(▶사진: 시부야(澁谷) 역 忠犬하치 銅像 앞)
이색 환영회
그날 저녁 부인은 뭔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요리를 만들고 있었다.
외국 손님인 나에게 뭔가 맛있는 저녁상을 차릴려고 그런가 보다 하며 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밥상차릴 기색은 없고 준비한 음식을 보자기에 싸고 있는 게 아닌가. 손님을 모셔 놓고 음식을 준비하여 다른 데 외출을 하다니.
나는 무척 실망하였으며 그동안 삼킨 침으로 뱃속에서 염치도 없이 나는 꼬르륵 소리를 참느라고 신경이 곤두섰다.
음식보자기를 챙겨드는 부인을 보자 맘 속엔 이런 무례한 경우가 다 있나 하는 원망마저 생겼다.
그런데 부인은 나에게 따라 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어딘가 가는 곳에 나의 동행을 바라는 것 같았다. 배는 자꾸만 고파왔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동네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한참을 가서 나온 정원이 있는 큰 저택 앞에서 부인은 나와 같이 들어가자고 하였다.
그곳의 큰 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부인은 들고온 음식을 큰 식탁 위에 놓고 나를 소개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들은 나를 위한 환영회에 나온 히포크럽 시부야지부의 회원들이었고 이 집은 지부의 회장 집이었다. 회원들은 각자 맡겨진 음식이나 음료를 한가지씩 준비해와 나를 위해 건배하고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회식방법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를 불렀고 이 노래에 담긴 애환을 그들에게 들려주니 모두들 숙연하였다. 그후 이들이 틀어놓은 테이프의 음악에 맞추어 나의 손을 잡고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동요와 가요가 아닌가. 나는 감격하였다. 우리나라를 알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일본에도 있다는 것에. (▶사진 : 스미다가와(隅田川)의 다리와 유람선)
아사쿠사(淺草)와 센소오지(淺草寺)
일요일인 다음날은 가족 3명과 동경 시내 나들이를 하였다. 동경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동경 동쪽을 흐르는 스미다가와(隅田川)의 15개(당시)의 각각 특색이 있는 다리를 구경하며 올라가 아사쿠사(淺草)라는 곳에 내려 센소오지(淺草寺)라는 절과 부근에 있는 우에노(上野) 공원 등을 둘러 보는 일정이었다.
참고로 센소오지(淺草寺)에서 우에노(上野) 공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인데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걸어가는 것을 권하고 싶다. 택시를 타면 우에노 공원과 역부근의 정체가 너무 심해 움직이지 않는 차 안에서 택시 미터 올라가는 소리만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들 가족과는 4년 후인 1991년 대학다니던 나의 장녀가 이 댁에서 일주일간 홈스테이를 한 것을 비롯하여 1993년 11월 내가 동경에 갔을 때와 2001년 연말 일본에서 이들 가족 3명이 부산 여행을 왔을 때 만났으며 지금도 메일 등으로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日本旅行 EPISODE Ⅶ
<百日紅과 사루스베리>
1987년 여름 나고야(名古屋)연수센터에서 3주간의 기초소양교육을 끝낼 무렵 단체로 연수여행이란 것을 3일간 하게 되었다.
이 여행은 연수센터의 교육 프로그램에 포함된 것으로 일본의 유적과 산업시설 등을 돌아 보는 체험현장 교육의 일환이었다.
히로시마에서 일박하며 원폭기념관과 히로시마성 등을, 다음 날 후쿠야마의 성과 악기제조공장, 히메지성과 토시바공장 등을 둘러보고 나라에서 다시 하루를 묵은 다음 京都를 둘러 본 후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백일홍이 일본에서도 사찰과 공원 등에서 자주 눈에 띄여 일본에서는 이 나무를 뭐라 부르는지 물어 보니 "사루스베리"라 한다고 하였다.
하필 지을 이름이 없어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생각하며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뭔가 느낌이 왔다.
"사루"는 원숭이이고 "스베리"는 미끄러진다는 뜻이니 "나무를 잘 타는 원숭이도 미끄러 지는 미끄러운 나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아직 한번도 만져보지 않았던 나무 줄기를 처음으로 만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나무에 껍질이 없고 줄기가 매우 미끄러웠다. 나는 속으로 나루호도(일본말로 과연이라는 뜻)를 연발하였다.
<사진: 新幹線열차>
<그린 車와 크린 車>
기초소양교육을 마치고 東京 인근의 府中東芝공장에서의 2주간의 현장 연수를 위해 東京으로 올라 오면서 신간선(新幹線) 열차를 타게 되었다.
당시 이 열차를 타 보면서 몇 가지 좋은 인상을 받았다.
먼저 신간선이 빠른 열차임에는 틀림없으나 같은 코스를 달리는 신간선에도 정차역이 적은 급행과 정차역이 많은 보통이 있었는데 같은 표로 급행을 탔다가 도중에 보통을 갈아 탈 수 있었으며 도중에 하차하여 다음날 같은 표로 다시 탈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동경역에 내려 시내를 순환하는 야마노테(山手)線을 신간선 표로 탈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였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서울역에 내려 청량리 가는 국철을 하나의 기차표로 추가 요금 없이 갈 수 있는 셈이다.
또 하나는 자유석 제도 였다. 지정된 좌석 없이 선착순으로 타며 요금도 할인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신간선에는 특실도 있었으며 이 특실을 그린샤(green車)라 하는데 처음 듣기로는 차가 깨끗하여 크린샤(clean車)라 하는 줄 알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는 체를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특실차에는 외부에 초록색 줄무늬가 그려져 있어 그린샤(green車)라 한다고 하여 얼굴을 붉힌 일이 생각난다.
<사진: 버섯구름의 富士山>
<처음 보는 버스 공중전화>
동경에 머물면서 후지산을 가보게 되었다.
후지산 중턱까지 버스가 올라가며 이곳부터는 걸어서 정상 쪽으로 조금 오르다 돌아오는 과정의 관광이었다. 가는 도중에는 富士五湖라 하여 후지산 주변의 다섯 호수를 포함한 주변 관광지를 돌아보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관광버스를 타고 또 한번 신기한 것을 보게 되었다.
버스가 후진하면 운전석 옆에 버스의 뒷면이 보이는 모니터가 달린 것과 버스 안에 공중전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휴일 날의 후지산 여행 길은 갈 때도 붐볐지만 돌아 올 때는 그 정체가 극심하여 예정 시간보다 많이 늦어졌다. 초조해 진 승객들이 하나 둘 씩 버스 속의 전화로 늦어지는 귀가를 알리는 것을 보고 세상이 참 편리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가 일반화 된 지금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20여년 전의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신기하기만 하였다.
<사진: 호수에 비친 후지산>
<쓰레기통이 없는 디즈니랜드>
東京 인근에 東京디즈니랜드란 곳이 있었다. 가는 도중 버스 안내양이 말하기를 東京디즈니랜드엔 쓰레기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쓰레기를 버리지 말던지 꼭 버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아무 곳이나 버려도 된다는 것이다.
시험삼아 휴지를 버려보았더니 쓰레기 치우는 사람이 어디선가 바로 나타나 금방 치우는 게 아닌가. 버리지 않아도 될 휴지를 버린게 조금은 민망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진: 디즈니랜드 중앙광장 부근>
<긴 줄이 좋은 볼거리>
15장은 족히 될 것 같은 버스에서 받은 각 구역 별 입장권철을 들고 한여름 땡볕에 부지런히 뛰어 다니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런데 하룻만에 이표를 어떻게 다 사용할 것인가가 나를 초초하게 하였다.
그래서 기다리는 줄이 짧은 곳부터 들리기 시작했는데 짧은 줄은 들어가 보아도 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긴줄에 서서 흐르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기다리다 들어 간 곳은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사진: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
이렇게 하며 10장 정도의 표를 사용하고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 옆자리의 일본인에게 표를 몇 장 정도 사용했는지 물어 보았더니 사람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어도 많이 사용한 사람이 다섯 장 정도였다. 남은 표는 언제든지 다시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나는 언제 다시 와 남은 표를 사용할 기회가 있을지를 생각하니 표가 아까워 아쉽기만 하였다.
<사진: 해질 무렵의 디즈니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