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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일시 :
2012.08.19.(일) 05:30.
출발장소 :
서방현 임마누엘 아파트 앞(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로 118(길음동 1281, 길음동 e-편한세상 아파트 422-901)
준비물 :
아침 및 점심 식사, 냉수, 간식, 미사도구 등, 김의철 스테파노 성님은 해설, 독서, 신자들의 기도를 준비해주세요.
일정 :
05:30 길음동 출발 -> 07:30 김좌진 생가(조식?) -> 08:30 만해 한용운 생가 및 문학관(조식?) -> 11:10 다락골 성지 미사참여(평소 10~15명 정도 미사참여하신다며 우리에게 미사해설, 독서를 부탁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참석하면 30여명 가까이 되겠지요.) -> 13:00 성주산 휴양림, 중식, 산책, 여흥 및 노래연습, 부부 시낭송 대회 등 -> 20:00 출발, 오성IC -> 17번 고속도로, 400번고속도로 -> 과천 -> 경부고속도로 -> 동부간선도로 -> 내부순환도로 -> 24:00 길음동 도착
님의 침묵(沈黙)
萬海 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追憶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은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 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님은 갓슴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슴니다.
푸른 산빗을 깨치고 단풍나무숩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거러서 참어 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 꽃가티 굿고 빗나든 옛 盟誓는 차듸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 <키쓰>의 追憶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 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맛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녀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 일이 되고 놀난 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것잡을 수 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 때에 떠날 것을 염녀하는 것과 가티 떠날 때에 다시 맛날 것을 믿슴니다.
아아 님은 갓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돔니다.
1. 韓龍雲 시의 님
님의 침묵은 韓龍雲의 시집 님의 침묵을 대표하는 시이다. 韓龍雲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韓龍雲 시의 님에 대해서는 부처, 조국, 연인의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왔고 최근에는 세 가지 모두 옳다는 쪽 견해로 기울어 있다. 즉 님의 의미는 조국도 될 수 있고 부처도 될 수 있으며 연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님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논란은 대체로 님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철저한 작품 분석에 의존하지 않고 韓龍雲의 전기적 사실과 관련하여 님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 데 유래한다. 즉 韓龍雲이 승려였기 때문에 韓龍雲 시의 님은 부처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은 것이고 또 그가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韓龍雲 시의 님은 조국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를 통해서는 어디에도 조국이나 부처라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여기서 韓龍雲의 시에 나타나는 님은 그냥 연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세 가지 견해가 서로 옥신각신하는 틈에 어느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어렵게 되고 때마침 도입된 애매성이라는 용어에 힘을 얻어 세 가지 모두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韓龍雲의 시의 님은 의미의 복합성을 지닌 더 좋은 시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韓龍雲 시에서 님의 의미는 하나로 고정된다. 그것은 韓龍雲이 님의 침묵 "군말"과 "독자에게"에서 님의 의미를 한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시에서 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모든 연구자들이 관심을 집중시켜온 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앞서 언급했듯이 님을 문자 그대로 님으로 볼 것인가, 조국이나 부처 또는 이 셋 모두로 볼 것인가 사이에서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韓龍雲의 시에서 님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이런 순환론에 빠지게 된 원인은 시집 자체에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韓龍雲의 시집 <님의 침묵>은 모두 88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모두 님과의 이별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는 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드러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님의 의미를 표면적으로 국한시켜 단순한 연인으로 보거나 그 내포적인 의미를 작품 외부에서 구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 외부에서 구하든 표면적인 의미를 인정하든 그것은 작품 내적으로 시 자체의 단일한 전체적인 의미를 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환론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곤란은 韓龍雲의 시집 <님의 침묵>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님의 침묵>은 일반적인 시집들과는 다른 독특한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 시집에서 개별 작품들은 다른 부분의 도움 없이 그 자체로 독립된 완결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님의 침묵>의 경우는 다르다. <님의 침묵>에서는 개별 시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의미를 갖지 않으며 시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부분과 의미를 매개해 주는 개별 시들이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개별 시들을 읽을 때 우리는 표면적인 의미만을 보게 되며 시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부분과 연결시킬 때만 진짜 시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韓龍雲의 시집에서 시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부분은 <군말>과 <독자에게>이다. <군말>과 <독자에게>는 시집 앞뒤에서 액자 구실을 하면서 시집 전체에서 사용되는 님의 의미를 한정하는 역할을 해주고 있고 중간에 있는 88편의 시들은 그 액자와 관련하여 의미를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 액자를 제거할 때 88편의 시들은 단순한 연시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액자와 관련시킬 때 88편의 시들은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시적인 의미로 전환된다. 개별 시들은 의미의 매개체이며 <군말>과 <독자에게>는 의미의 생성인으로서 서로 비유관계를 형성하며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시적인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한용운 시집의 이러한 구조상의 특징은 그의 개별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군말>과 <독자에게>를 검토하여 그의 시에서 사용되는 님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규명하지 않으면 개별 작품의 올바른 의미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衆生이 釋迦의 님이라면 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戀愛가 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조은 自由에 알뜰한 拘束을 밧지 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羊이 긔루어서 이 詩를 쓴다. <군말>
讀者여 나는 詩人으로 여러분의 압헤 보이는 것을 부끄러 함니다.
여러분이 나의 詩를 읽을 때에 나를 슬버하고 스스로 슬버할 줄을 암니다.
나는 나의 詩를 讀者들의 子孫에게 까지 읽히고 십흔 마음은 업슴니다.
그 때에는 나의 詩를 읽는 것이 느진 봄의 꽃숩풀에 안저서 마른 菊花를 비벼서 코에 대히는 것과 가틀는지 모르것슴니다.
밤은 얼마나 되얏는지 모르것슴니다.
雪嶽山의 무거은 그림자는 엷어 감니다.
새벽 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짐니다.
(乙丑 八月二十九日 밤 끗) <讀者에게>
앞서 韓龍雲 시에서 님의 의미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독자에게>와 <군말>을 검토해 보면 이러한 혼란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군말>에서 韓龍雲은 <님>이 문자 그대로의 님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라는 말은 韓龍雲이 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표면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포적인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표면적인 뜻으로 해석할 경우 잘못된 해석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은 그러한 잘못된 해석의 여지를 막기 위해 <님>이라는 단어로 사용된 여러 가지 경우를 예로 들어 이 시집에서 단순히 님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 예들의 경우처럼 단순한 연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중생이나 철학, 봄비나 조국 등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한편 <군말>과 <독자에게>는 님이 표면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님의 의미가 결코 종교적인 의미도 아님을 보여준다. <군말>은 표면적으로 상당히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너에게도 님이 있너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羊이 긔루어서 이 詩를 쓴다> 같은 구절은 더욱 그러하다.
얼핏 보기에 이 구절은 진정한 자아를 상실한 중생들(어린양)에게 참 나를 깨우쳐주고 부처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구절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을 막아주는 것이 <독자에게>이다. <독자에게>는 분명히 이 시가 불교적인 깨달음을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인은 스스로 이 시를 독자들의 자손들에게 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말하고 <그 때에는 나의 詩를 읽는 것이 느진 봄의 꽃숩풀에 안저서 마른 菊花를 비벼서 코에 대히는 것과 가틀는지 모르것슴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종교적인 의도에서 이 시가 씌어졌고 님을 그런 의미로 사용했다면 이 구절은 삭제되었을 것이다. 독자들의 자손들에게 읽히고 싶지 않다는 것은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동 시대를 사는 독자들에게만 관련된 것이며 독자들의 자손들에게 가서는 이미 해결되어 꽃수풀에 앉아 마른 국화를 비벼 코에 대고 향기를 맡는 것처럼 현실감을 상실할 것이라는 韓龍雲의 예측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인 문제는 보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문제이다. 그러나 앞의 구절은 분명히 이 시집의 내용이 시인과 동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고 이 시대를 벗어나서는 현실성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문제 삼는 내용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문제이며 님 역시 종교적인 님이 아니라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님, 곧 상실된 조국 내지는 국권이라는 것이 쉽게 드러난다.
물론 韓龍雲의 시에 나오는 님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님이라는 사실이 곧 韓龍雲의 시가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韓龍雲의 시들은 불교적 깨달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국권 상실과 회복을 노래한 것이지만 국권상실을 노래한 이면에는 분명히 불교적 인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점은 韓龍雲 시와 불교의 관계를 논의할 때 검토할 것이다.
2. 님의 침묵의 구조
님은 갓슴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갓슴니다.
푸른 산빗을 깨치고 단풍나무숩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거러서 참어 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 꽃가티 굿고 빗나든 옛 盟誓는 차듸찬 띠끌이 되야서 한 숨의 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 <키쓰>의 追憶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 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맛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녀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 일이 되고 놀난 가슴은 새로은 슯음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것잡을 수 업는 슯음의 힘을 옴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 때에 떠날 것을 염녀하는 것과 가티 떠날 때에 다시 맛날 것을 믿슴니다.
아 아 님은 갓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돔니다.
<님의 沈默>
앞서 韓龍雲 시집의 개별적인 시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액자를 구성하고 있는 <군말>, <독자에게>와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의미를 갖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님의 침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님의 침묵>은 연인간의 이별을 노래한 시, 불교적인 깨달음을 노래한 시, 국권의 상실과 회복을 노래한 시, 또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시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단순한 연시일 뿐이다. 그러나 이 연시는 단순한 남녀 간의 이별과 만남의 시가 아니라 액자와 관련하여 다른 내포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선 이 시의 표면적인 의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표면적으로 이 시는 단순한 남녀 간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때 이별은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의 이별이 아닌 죽은 이와 살아있는 사람 사이의 이별로 생각되며 따라서 이 시는 연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로 이해된다.
<님의 침묵>이 만가라는 것은 우선 <님의 침묵>과 만가의 형식상의 동일성에서 유추될 수 있다. 만가는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충격적인 인식, 망자에 대한 추모,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의 재확인, 그로 인한 새삼스러운 슬픔, 망자에 대한 산 사람의 맹세와 다짐의 형식을 취하는 관례를 가지고 있다. <님의 침묵> 역시 동일한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님의 침묵>은 일반적인 이별가가 아닌 죽은 이를 애도하고 산 사람의 다짐을 보이는 만가로 볼 수 있다.
<님의 침묵>을 만가로 볼 수 있는 근거는 그 외에 제목의 <침묵>이나 1행에서 두 번 반복되는 <갓슴니다>라는 단어에도 있으며 2행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침묵>이나 <갓슴니다> 같은 표현은 일반적인 이별 상황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과의 이별 상황에서 흔히 나타나는 어휘들이다. 죽음을 <침묵>이나 <갓슴니다> 같은 말로 완곡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죽음 자체를 사실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의 심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행의 <푸른 산빗을 깨치고 단풍나무숩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거러서 참어 떨치고 갓슴니다>라는 표현은 이 시 속에 나타나는 님의 죽음을 더 분명하게 해준다. 흔히 이 구절은 님이 떠남으로 인한 話者의 충격과 슬픔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님이 간 곳이 어디이며 어떻게 갔는지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즉 님이 떠남으로 인해 푸른 산 빛이 단풍으로 변할 만큼 충격이 컸던 것이 아니라 님이 간 곳이 단풍나무 숲으로 난 길이요, 그 길을 차마 떨치고 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님이 간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히 명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푸른 산빗>, <단풍나무숩>의 대조적 짝에서 님이 간 곳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푸른 산빗>은 여기서 <단풍나무숩>과 대조적으로 사용되어 생명이나 삶을 <단풍나무숩>은 죽음과 조락을 의미한다. 따라서 님이 단풍나무 숲을 향해 난 적은 길을 걸어서 갔다는 것은 삶으로부터 죽음으로의 님의 이행을 의미하게 된다. 죽음의 길이기 때문에 적은 길이 되고 <참어 떨치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차마 떨쳐지지 않는 사랑과 그리운 것들을 떨치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님의 침묵>을 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로 볼 때 1행에서 6행까지는 님의 충격적인 죽음에 대한 인식과 슬픔, 님과 가졌던 과거의 추억의 반추와 추모, 믿어지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님의 죽음의 재확인과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새로운 슬픔을, 7행 이후 마지막 행까지는 죽은 이에 대한 산 사람의 맹세와 다짐을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행은 님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고 있다. <갓슴니다>를 두 번 반복하여 님의 죽음이 주는 충격과 슬픔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님은 실제로 죽었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2행은 님이 간 곳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해주는 구절이다. 님이 간 곳은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이며 그 길은 앞서 말한 것처럼 죽음의 길이다. 죽음의 길이기 때문에 그는 지상의 차마 떨치지 못할 그리운 것들을 떨치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어>는 님의 떠남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숙명적인 원인, 즉 죽음에 의해 강요된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4, 5, 6행은 님과 가졌던 과거의 추억의 반추와 죽음의 재확인, 그리고 그로부터 솟구치는 새로운 슬픔을 보여준다. <날카로은 첫 키쓰의 追億은 나의 運命의 指針을 돌너노코>에서 보이듯이 님과의 첫 만남은 지금까지 話者의 어두운 삶과 운명을 백팔십도 전환시킬 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날카로운>이라는 표현은 그 만남이 話者의 운명을 정반대로 바꿔 놓을 만큼 충격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님의 존재가 話者에게 운명의 지침이나 생명과 같은 위대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황금의 꽃처럼 빛나던 미래의 약속과 꿈을 님과 만나기 이전의 절망과 어둠 속으로 되돌려 놓게 된다. 話者는 이러한 님의 죽음을 전혀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님의 목소리, 님의 얼굴은 話者의 귀를 먹게 하고 눈을 멀게 할 만큼 아직도 생생하고 님과의 추억은 지금도 님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님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새삼 슬픔이 북받쳐 오르지 않을 수 없다.
7행에서 이 시는 전환을 맞는다. 지금까지 話者는 님의 죽음과 그로 인한 슬픔, 절망을 노래했다. 그 슬픔은 여기서 새로운 희망을 위한 다짐과 맹세로 전환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산 사람은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 슬퍼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슬픔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망치는 것은 결코 님의 뜻은 아닐 것이며 오히려 님의 사랑을 깨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님과의 약속이 있었다면 님의 뜻을 받들어 그것을 끝까지 이루어내는 것이 님과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길일 것이요 망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일 것이다. 평생을 슬픔 속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산 사람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살아가야 하며 죽은 이의 뜻을 받드는 것은 산 사람의 임무로 남는다. 죽은 이의 뜻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슬픔을 감내하고 그 힘을 앞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여기서 슬픔을 희망을 위한 실천과 의지로 바꾸는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8행은 님의 죽음이 님과의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다시 만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역설에 기초하고 있다.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현상이다. 사람은 소중한 것, 지켜야 할 것,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경계한다. 마찬가지로 이별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죽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죽음을 영원한 이별로 보지 않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주검 앞에서 슬퍼서 실신할 정도로 기진해 있던 여인이 "자식이라도 떳떳이 길러야 저승에 가서라도 당신을 보지" 하고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불교의 會者定離(회자정리), 去者必返(거자필반)의 논리로 흔히 설명되는 이 구절은 불교 논리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만남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망자의 뜻을 받들고 실천하여 사랑을 완성시켰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9행에서 시인은 이러한 이치를 통해 대 역설을 이루어내고 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는 그 자체로 역설이면서 제목 <님의 침묵>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제목을 읽고 그 내용이 침묵에 관한 어떤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러나 시의 본문은 님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고 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논리로 제목을 부정하고 독자의 기대를 위반함으로써 시적 긴장을 극대화시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본문의 백미이면서 시 전체를 구조적 역설로 만들어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님은 실제로 죽어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논리상으로 모순이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님은 갔지만 話者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살아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논리적 타당성을 얻는다. 즉 님은 죽어서 존재하지 않지만 님의 죽음으로 인해 話者는 슬픔과 고통을 받고 그 고통과 슬픔 속에서 물질적으로 부재하지만 여전히 존재를 드러내는 님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만 바꾸었을 뿐이며 영원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 님은 부재로, 즉 마이너스로 존재하면서 여전히 작용하는 것이다. 이 마이너스로 존재하는 님의 목소리는 부재하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크게 話者의 가슴을 울리고 더 분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내게 되며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話者는 님이 부재하는 공간을 사랑의 노래로 채우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천을 통해 님과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지금까지 <님의 침묵>의 表面的인 意味를 살펴보았다. 1차적으로 <님의 침묵>은 단순한 님의 죽음과 산 사람의 다짐을 노래한 만가 형식을 띠고 있다. 만가로서의 <님의 침묵>은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는 구조적 역설을 통해 님의 죽음을 부정하는 그 나름의 시적인 틀을 갖추고 있는 시이다. 그러나 <님의 침묵>의 진짜 의미는 그 이상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韓龍雲의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시집의 액자를 구성하는 <군말>, <독자에게>와의 비유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그렇게 될 때 텍스트 자체의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시적인 의미를 성취하도록 되어 있다.
<님의 침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1차적으로 텍스트 자체만을 볼 때 <님의 침묵>은 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일 뿐이다. 그러나 의미 발생인으로서의 <군말>, <독자에게>와 결합될 때 그것은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놀라운 구조적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韓龍雲은 <군말>과 <독자에게>를 통해 그가 시집 전체에서 사용하는 님이 문자 그대로의 님이 아니라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님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님의 침묵>은 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에서 당시 시대적, 역사적 과제였던 국가와 국권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로 바뀌게 된다. 즉 韓龍雲은 국가와 국권의 죽음을 연인의 죽음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는 것이고 연인의 죽음을 통해 국권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권의 죽음을 노래함에 있어 그는 국권상실을 국가의 영원한 죽음으로 생각하여 슬픔과 절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는 역설을 통해 님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만 바꾸었을 뿐이요 마찬가지로 국가는 영원히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만 바꾸었을 뿐이라는 역설적인 논리로 국권의 죽음을 부정하고 적극적인 사랑과 실천을 통해 국권상실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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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8월 25일 토요일 꼭 참석해야 하는 결혼식이 있어
트레킹에 불참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멋진 일정으로 트레킹을 할 수 있음에
찔레가족 모두에게 무한감사를~~
우리 아파트 들어 오실 때 후문으로(샴양로(정문) 쪽 말고 정문 지나 다음 사거리에서 우회전 조금 올라오면 후면 입니다.) 들어 오셔야 합니다.
주차는 지하에 해야 하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1, 2층은 빈곳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3층은 엘리베이터가 닿지가 않아 조금 불편합니다.
만해 한용운 님에 대한 공부좀 해서 가르쳐 주시와요!
진호! 우리는 진호가 태워가는거죠?
당근이죠!
5시 10분에
죄송함다.
베드로는 참석 못하고 발레리아만 갈께요.
담 달에 뵈요,(베드로 씀)
어!
왜 남의 아이디로 헛갈리는 글을 쓰고 그래??
아침 점심 두끼의 식사를 준비하나요?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싶어서.
점심은 사 먹는걸로 하면 어떨까요?
성주산 휴양림 들어가서 편안하게 우리들만의 성찬이 좋을 것 같고요,
저녁은 보령이 의철이 성님의 고향이라니 성님이 맛있는 집으로 안내를 하시는 것이 어떨지유?
야호 신난다!!
점심까지 싸 가지요.
글코 저녁에는 조금 서둘러 출발하시지요.
다음날 새벽에 출근해야 합니다.(을지훈련)
우리가 싸가서 먹는 맛이 최고여!
제30차 트레킹답사 동행자 : 박청옥, 김의철, 황순필, 김진호, 양성욱, 오한택, 임정수, 서방현, 조석순 이상 9명!
그럼 스타렉스 1대로 언능 댕겨오갔습네다.
단촐하네요
그럼 벽산아파트 잠시 들려주시면 안될까요?
이 시상엔 안 될 일이 없시유!
그럼제가스테파노형님댁으로5 시10분에 가있습니다. 발레리아입니다.
Yes! I will go to t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