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지나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거만하고 화를 잘 내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600개에 달하는 논거를 한 조(組)로 묶어 내 주장을 취소하도록 몰아세울 것이다.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들은 즉각 나를 이단자로 선언할 것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방법은 난해한 것들 가운데 가장 난해한 것을 더욱 난해하게 만들 뿐이다.”
에라스뮈스는 어리석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광대 같은 부류의 바보와, 가장 똑똑한 체하는 지식인이나 현자 부류의 바보가 있다 말하면서, 똑똑한 체 하는 부류의 바보들을 풍자한다. “광대들은 군주에게 진실을 받아들이게 하고, 군주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을 즐겁게 하는 놀라운 일을 해치운다. 신들은 오직 이런 광대들에게만 진실을 맡겨 놓는다.” 에라스뮈스는 문법학자, 시인, 법학자, 신학자, 군주, 궁정인, 교황, 추기경, 주교, 수도사, 신부 등 그 시대의 지식인과 지도층을 모두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우신예찬]이 금서(禁書)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대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불온하다고 지목될 수 있는 부분이 삭제되거나 저자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로 널리 유포되었다.
마르틴 루터와의 관계, ‘격렬한 언동보다는 정중한 중용’ 지켜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논제를 못 박아 걸었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 행위를 규탄하면서 루터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펼친 이 논제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사적 계기로 일컬어진다. 루터는 에라스뮈스를 비롯한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자신의 지원 세력으로 확보하려 했다. 그래서 1519년 3월 에라스뮈스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당부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이에 대한 에라스뮈스의 답장의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그리스도 안의 내 소중한 형제여! 당신의 책들이 이곳 루뱅에서 얼마나 큰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당신의 저작들이 저의 후원으로 쓰였다고도 하고, 또는 내가 당신 파당의 지도자라 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증언하기를, 당신의 책은 읽은 적도 없고, 당신의 주장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는 중립을 지킬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한 학문의 부흥에 기여할 생각입니다. 나는 격렬한 언동보다는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에라스뮈스는 루터가 박해 받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루터의 안전을 위한 진정서를 대주교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루터가 온건한 태도를 취하기를 바랐다. 그는 교회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옳다고 보았지만, 은총, 자유의지, 예정설 등의 중요한 교리에서 루터와 의견을 달리했다. 무엇보다도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격렬한 언동이 교회 내 강경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게 되리라 우려했다. 1520년 여름 교황은 루터를 이단자로 선언했고 루터는 교황의 칙서와 교회법을 불태워버렸다. 이후 에라스뮈스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교회 측은 루터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 곧 루터에 동조하는 것이라 보았고, 종교개혁 진영은 그가 보다 분명하게 루터 편에 설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루터가 [노예의지론]과 함께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귀하의 오만하고 무례하고 반골적인 본성으로 인해 온 세상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귀하는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을 저지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루터파와 기성 교회의 보수적 입장 사이에서 설 자리를 잃은 ‘관용과 타협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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