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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지를 사용한 정조 |
김 문 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
『서경』에 ‘나랏일에 부지런하고 집안에서는 검소하다(克勤于邦, 克儉于家)’는 구절이 있다. 순 임금이 우 임금의 공덕을 칭찬한 말이다. 『서경』은 유학자의 필독서였으므로 조선의 국왕도 이 구절을 읽고 외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조선시대의 자료를 보면 국왕의 검소함을 언급한 기록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국왕이라면 화려한 궁전에서 누구보다 좋은 음식에 좋은 옷을 입고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우리에게 이런 기록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좋아하며 생활화한 정조 |
정조의 검소함에 대해서도 여러 기록이 보인다. 할머니 정순왕후는 정조가 중년 이후로 검소한 것을 더욱 좋아했다고 한다. 겨울에 곤룡포 이외에는 늘 올이 굵은 무명옷을 입었기 때문에 옷을 자주 만들거나 기워서 입었고, 여름에는 옷을 자주 빨았으므로 해진 것도 그냥 입었다고 한다. 반찬도 보통 때에는 세 가지를 넘지 않았고, 평상시에 좋아하는 놀이도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 혜경궁이 말을 보탠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놀이를 할 때에도 질박한 것을 좋아하여 장난감을 버리지 않고 오래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다. 정조가 영조의 유일한 손자로 태어나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국왕이 되었음을 고려하면 실제로 그랬을까 의심이 나는 대목이다. 정조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신하들의 기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윤행임은 정조는 조각한 그릇을 쓰지 않았고, 자주 세탁한 옷을 입었으며, 무명으로 된 요를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국왕의 거처는 단청도 하지 않은 몇 칸짜리 건물에 창문이나 벽에는 매연이 시커멓다고 했다. 관리가 건물을 수리하자고 하면 내가 비용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성품이 이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만수는 정조의 식사가 하루 두 끼에 불과하고, 음식은 서너 가지였으며, 침실은 낮고 좁은데다 비가 오면 새는 곳이 있었다고 했다. 부친의 이러한 처신은 자연스레 자식의 표준이자 모범이 되었다. 정조의 아들이었던 순조는 어려서부터 화려한 의복이나 기름진 음식을 가까이하지 못했다.
필자는 정조가 사용한 편지지에서 그의 검소함을 느꼈다. 오래전 정조가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을 때 정조의 편지라고 확신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궁중에서 사용한 종이치고는 질이 나쁜데다 글씨도 몽당붓 같은 것으로 급하게 흘려 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조의 어찰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편지는 판단을 유보했다. 다음으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서,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가 정조의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도 같은 종이에 같은 필체의 편지를 보냈고, 심환지는 편지에 일일이 수신 날짜를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최근 정조가 외가에 보낸 편지에서 마침내 편지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1799년 10월에 정조는 큰 외삼촌 홍낙임에게 새로 만든 재생지 300폭을 선물로 보냈다. 함께 보낸 편지에서 정조는 깨끗하고 두터운 편지지를 사용하는 것이 사치스러워 매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휴지를 사용하여 재생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만든 재생지는 지장(紙匠)의 솜씨가 좋지 않아 사용하기가 적합하지 않았지만, 올해에는 화성의 장인에게 만들게 하자 서울의 것보다 질이 좋다고 했다. 이를 보면 정조는 꽤 오랫동안 재생한 편지지를 사용했고, 1799년에 재생지를 만드는 장소를 서울에서 화성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재생지를 편지지로 사용했다고 해서 남아있는 편지가 모두 재생지인 것은 아니다. 정조의 편지에는 왕실용 고급지를 사용한 것이 많으며, 더러는 중국에서 수입한 종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정조는 일상생활에서 검소함을 실천한 것이지, 공무에 들어가면 국왕의 위엄을 뚜렷이 갖추고 질서정연함을 중시했다. 정조가 화성에서 재생지를 만든 장소가 어딘지, 재생지를 만든 장인은 누구인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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