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계폭포를 비롯 곳곳에 비경이 감춰져 있는 황매산.
그러한 황매산 아래 펼쳐진 영암사터[靈巖寺址].
희고 검은 바위 사이로 수를 놓듯 자라고 있는 오래된 소나무들.
대가람은 바로 그러한 곳에 반드시 위치합니다.
최성호님의 답사기는 정말 실감이 납니다.
아주 오래된 과거로부터 현실화시키시는 능력, 그건 신기(神技)입니다.
제가 영암사터를 다녀온지 벌써 수십년이지만 다시금 그곳에 있는 듯 생생합니다.
대학시절 혼자 합천 해인사와 그 부근을 돌아보고(무척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영암사터를
찾았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습니다. 그당시 모두 마찬가지였는지 몰라도 여관은 꿈
도 꾸지 못하고 민가의 방을 얻지 못하면 노숙을 해야할 상황이었습니다.
별다른 지식이 없었던 철부지 학창시절, 그냥 왜 이런 오지에 이렇게 커다란 절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쌍사자석등은 그 유래를 들어서인지 몰라
도 상당히 오랫동안 쓰다듬었던 기억이 납니다. 잘못했으면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갈 것을
그래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손으로 보전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암사에 대한 전설이 생각납니다.
영암사 주위의 산세가 너무 아름다움에 반한 왕비가 어느날 이곳에 납시었다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산세를 배경으로 구름다리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 왕비가 그 다리를 건너다 다리가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래 왕비는 다리밑으로 떨어져 죽고 이에 화가난 왕은 주위에 있는 영
암사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을 했고 불을 지른지 3년간이나 타고 있었다는 전설입니다.
왕비가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또 영암사도 그에 못지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영암사(영암사란 이름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그저 구전된 이름이니까요.)만큼 베일에
싸인 절도 있을까요? 영남지방에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 대가람, 언제 누가 이 절을 왜 창
건하였는지, 그저 적연선사의 입적에 관한 문헌과 현 국립박물관 한쪽에 남아 있는 돌조각
에서 나타나는 영암사라는 흔적밖에는....
어느 시인이 말했답니다. " 세상의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영암사터를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렇게 말입니다. 그 정의는 조금은 과장일지 몰라도 진정 옳은 말인 것
같습니다.
최성호님이 말씀한대로 황매산의 극한적인 대립으로 전해오는 느낌, 강함과 연함, 양과 음이
잘 조화되지 못한 산세에 먼저 주눅이 들고 그 인상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사실 조금은 소
름이 끼쳤던 것 같습니다. 너무 강렬했지요.
오랜만에 접한 영암사터 덕분에 너무 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반갑기도 했구요. 정말 최성
호님의 눈빛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계속 전문적인 답사기를 올리시기를 바랍
니다. 참, 여주 금사면 이포에 위치한 고려의 문신 호연(浩然)인 둔촌(遁村)의 봉서정과 헛
갈리는 합천 봉서정과 도촌별묘(鳳棲亭及陶村別廟)의 묘자가 무덤 묘(墓)자가 아닌 사당 묘
(廟)가 아닌지요?
항상 최성호님의 글을 주의깊게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종묘지킴이 김승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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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4일 맑음
그간 너무도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서 늘 뒷전에 밀려있던 영암사지를 연휴를 이용하여 기로 하였다. 징검다리 연휴라고 길이 너무 막혀 경부고속도로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합천으로 가는 길은 예전보다는 많이 편해졌다. 오늘은 거창에서 묵기로 하고 서울을 출발한 시간은 7시, 88고속도로를 지나 거창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날 12시 40분, 5시간 반의 여정 끝에 거창에 도착하였다.
2002년 4월 5일 맑음
아침 7시 50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숙소를 나온 시간은 9시 거창 읍내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읍내를 돌아보니 아침을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아 간단히 먹을 요량으로 김밥집으로 들어갔다. 김밥 2인분과 만두 2인분을 시켰다. 서울과 같겠거니 하고 주문하였는데 양이 서울의 배가된다. 맛도 그만하면 좋은 편이어서 저렴한 가격으로 훌륭한 아침을 즐겼다. 가격대비 만족도가 높은 아침식사였다. 서울을 떠나기 전 합천의 자료를 정리하고 보니 합천의 문화재는 모두 168가지가 되었다. 많은 부분이 해인사에 있는 전적류와 해인사경내에 있는 문화재이다. 합천의 답사는 3권역으로 나누어진다. 합천군의 북부지역인 해인사 부근과 남서지역인 영암사지 부근 그리고 합천읍을 중심으로 한 남동부지역이다. 2박3일로 예정된 답사 첫날은 영암사지와 용암리 석등을 보고 시간이 되면 주변의 것을 보고 다음날 해인사와 청량사를 본 후 서울로 올라오는 것으로 일정을 정하였다.
식사를 한 후 첫 번째 답사지인 봉서정도촌별묘(鳳棲亭陶村別墓:지방유형문화재 제235호)로 향하였다. 이름이 특이한데 이것은 봉서정이라는 건물과 도촌선생의 별묘를 붙여 문화재 명칭으로 붙였기 때문이다. 문법에 맞도록 표현한다면 '봉서정 및 도천별묘'가 맞을 것이다. 봉서정은 인조 원년(1623년)에 오계 조정립 선생이 인재를 키우기 위하여 세운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이곳(봉산면 압곡리)에 있는 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4㎞ 정도 떨어진 강가에 있었던 것인데 합천댐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관리하는 후손의 말에 의하면 원래의 자리는 합천 10경으로 꼽히던 곳으로 경치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이곳 외에도 댐을 만들면서 이전된 많은 문화재를 볼 수 있다. 그러한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하여 한번은 다시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건축을 전공하는 나의 관점에서 볼 때 건물이 건물자체만으로 존재한다보다는 주변환경과 같이 공존하며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병산서원의 경우를 보자. 병산서원의 가치는 건축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을 가본 누구나가 사랑하고 있는 만대루는 건물 자체로는 건축적인 가치를 느낄 수 없다. 만대루가 가치를 가지는 것은 만대루 앞에 있는 낙동강과 그 건너에 병풍처럼 둘려져있는 산 때문이다. 이러한 주변의 풍광과 함께 하기에 병산서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이제는 그러한 병산서원을 보지 못하게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 건축계를 한참이나 시끄럽게 하였던 병산서원 환경보전의 문제가 결국에는 무산되고 앞에 까페가 들어섰다고 한다. 건축 문화를 단순히 건물 하나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특히 우리의 전통건축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건물 자체의 가치보다는 환경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나아가서는 당시의 생활과 관련시켜 건축을 파악하여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의 위치로의 이전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건물의 이름은 봉서정이다. '봉서(鳳棲)"라는 뜻은 '봉황이 깃든다'는 뜻이다. 지금은 볼 수 없게되었지만 예전 이 봉서정이 있었던 곳의 경치는 봉황이 깃들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름을 감히 붙였을 것이다.
건물의 배치는 전면에 봉서정이 있고 후면에 좁은 길을 지나 언덕 위에 별묘가 있다. 이러한 배치만으로 보면 서원이라는 느낌이 드는 배치이다. 앞의 설명처럼 인재를 키우기 위해 건물을 세웠다는 것에 어울리는 배치라고 느껴진다. 이곳을 관리하는 후손의 말에 의하면 현재의 배치와 기타의 부속시설은 이전전의 상태와 다름없다고 한다. 도촌선생의 직계손은 없다고 한다. 직계손은 역모에 연루되어 대가 끊겼기 때문에 문중에서 시제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봉서정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오량집으로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양 측면 1칸이 온돌방으로 되어있고 가운데 2칸이 마루로 되어있다. 앞 뒤에 그리고 측면에 퇴를 두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봉서정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좌측의 방에 설치된 문이다. 대청으로 통하도록 된 문이 매우 기능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전체의 문은 들어열개로 되어 있어 많은 사람이 모일 때 적합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창호의 일부를 다시 여닫이로 열고 닫을 수 있어 평소 때는 창호의 일부만을 열고 닫도록 배려하였다.
다음의 답사지인 영암사지로 향하였다. 영암사지로 가는 중간 고택이 보여 잠시 차를 멈추고 돌아보기로 하였다. 이 집은 문화재 자료 제 105호로 지정된 송씨종가(宋氏宗家)였다. 이 집 역시 함천댐 때문에 이곳으로 옮긴 집으로서 본채와 옆에 별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집의 안주인인 듯 한 분이 열심히 일을 하고 계셨다. 무슨 일을 하시는가 여쭈었더니 메밀묵을 쑤고 계신다면서 옆의 식당이 자기네가 직영을 하는 곳이니 식사하고 가라고 하였다. 묵을 직접 쑤는 모습을 보니 맛도 괜찮을 것 같아 보여 마음이 동하였다. 그러나 아직 점심을 먹을 때가 되지 않아 우선 영암사지를 보고 점심을 이곳에서 먹기로 하고는 영암사지로 발길을 돌렸다. 영암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안내판이 잘못 표기되어 한참을 지나간 후에야 되돌아갈 수 있었다. 영암사지(靈巖寺址:사적 131호)는 황매산에 있다. 그간 이곳을 오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초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영암사지를 간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이 초등학교 때 처음 소풍을 가는 어린이의 마음과 같다. 황매산 쪽으로 접어드니 들어가는 길에 바라보는 황매산은 다른 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악산(嶽山)과 토산(土山)의 느낌을 같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황매산의 악산 부분은 매우 힘이 넘쳐 내노라하는 악산과 비교하여도 결코 뒤지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반대로 토산은 매우 부드러워 대조적인 두 성격의 대비가 매우 인상적인 산이다. 영암사지는 악산을 主山으로 하여 東向하고있다. 움푹 들어가 빨아들이는 듯한 형상을 지닌 바위산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는 듯 서있는데 그 기운이 대단하다. 기가 약한 사람은 뒷산의 힘찬 바위의 기에 질려 산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이 들것이다. 절 이름이 '영암사(靈巖:신령한 바위)'라는 것도 뒷산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암사지에 들어서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거대한 석축이다. 이렇게 석축을 만든 것은 고저차가 심한 지형의 탓도 있겠지만 뒷산에 힘에 눌리지 않으려는 의지 표현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석축은 매우 정교하게 쌓여졌다. 가로로 놓인 장대석사이로 간간이 돌을 세로로 깊게 박아 석축의 붕괴를 막으려는 지혜가 보인다. 이러한 시도가 자칫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석축에 변화를 주고 있다.
문지(門址)를 돌아 올라가니 삼층석탑과 석축 위로 쌍사자 석등이 보인다. 참으로 감격스럽다. 그간 이 쌍사자 석등을 보고 싶어 꽤나 안달하였는데 이제야 보게 되었다. 석축 위에서 보는 풍광은 그야말로 시원하면서도 장대하다고 할 만하다. 절터하나는 잘 잡았다는 생각에 절을 세우는 사람의 정성이 깊게 느낀다. 석탑의 주위를 둘러보니 석탑 앞쪽 석축근처에는 가지런히 놓여진 주초가 보인다. 아마도 회랑이 둘러졌던 듯하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앞으로 돌출된 부분은 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축아래에도 많은 석재와 주초의 흔적이 널려있다. 앞쪽에도 많은 전각이 있었던 듯하다. 석탑 좌우에 있는 집도 정리하고 보면 회랑 또는 건물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영암사지 3층 석탑(보물 제 480호)은 전형적이 신라의 탑이다. 안내판의 설명에 의하면 탑이 조성된 시기를 통일신라 후기로 보고 있다. 다른 유물과 연관하여 결정한 연대이리라. 탑만을 놓고 보아도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붕돌 받침이 4단인 점이 그렇고 지붕돌에 반전이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이 영암사지는 통일신라시대 말인 9세기경에 최소한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말에 이르면 탑의 크기가 작아지는데 이 탑의 크기는 그리 작아지지 않았다. 주변의 건물이 추정해서 옛 모습을 상상하며 생각하여 보아도 적정한 크기가 될 것 같다. 영암사를 조성한 이의 공간적 미감의 수준을 느끼게 한다.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탑신이나 기단에 신장상을 조각하여 놓지 않은 것을 보면 절을 조성한 사람의 안목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영암사지를 돌아보면서 전체적으로 매우 장식적인 절이었던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 자칫 탑까지도 장식적인 요소로 채울 수 있는데 탑에는 아무러한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은 절제를 아는 장인이 탑을 조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암사지가 다른 사지와 다른 점은 금당 부분의 기단이 앞으로 돌출된 점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돌출된 기단 좌우로는 사분원(四分圓)의 돌로 조성된 계단이 있다. 통돌을 사분원으로 가공하여 계단까지 만들어 놓은 솜씨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계단의 소맷돌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구멍이 있다. 구멍의 뚫은 모습을 보면 흥미가 있다. 모두 세 곳에 구멍이 있는데 아래의 것은 별석으로 계단의 기단역할을 하는 돌에 있는데 이 곳에 있는 것과 윗 부분에 있는 것은 수직으로 구멍이 파져있다. 그러나 가운데 있는 구멍은 약 60°정도의 경사로 뚫려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난간의 설치모습을 상상하여 보면 재료의 여부를 떠나 난간도 원형으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난간의 재료가 혹시 돌은 아니었을까. ...... 설마 그렇게까지 하였을까?" '아닐 것이라'고 머리를 흔들어보지만 너무도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것들이 많아 감히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계단에 난간을 설치하였다면 기단에도 난간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단에 난간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예는 숭복사지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숭복사지를 보면 기단의 갑석에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 명확하게 남아있다. 이곳도 기단의 높이나 계단에 있는 구멍을 보아서는 그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계단 하나 하나를 보면 가공한 정성이 대단하다. 계단도 수직으로 가공하지 않고 아래쪽을 안으로 들어 밀어 계단을 이용하는 이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현재의 건축에서도 경사가 급한 계단에서 쓰는 방법인데 요사이 만든 계단이야 모두 가공하기 편한 재료로 만들어 그렇다고 하지만 돌을 이렇게 만든 것을 보면 석공의 정성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계단을 올라가면 돌출된 석축 위에 쌍사자 석등(보물 제353호)이 있다. 이 쌍사자 석등은 일제시대 때 반출될 뻔하다가 이곳 주민들의 노력으로 반출되지 않고 1959년 이곳에 다시 설치되었다고 한다. 국내에 쌍사자 석등은 모두 3곳에 있다. 법주사(국보 제 5호)와 중흥사지(국보 제103호)그리고 이곳이다. 세 곳의 형식이 모두 같지만 느낌은 조금씩 다르다. 법주사 것이 화려하고 세련되어 있다면 중흥사지의 것은 각이 살아 있어 강인한 힘을 느낀다. 이곳의 것은 그 둘의 중간정도라고 느껴진다. 이곳의 석등은 하대석과 사자가 한 돌로 되어있다. 이것은 법주사의 것과 같다. 법주사와 중흥사지의 것은 화사석에 아무러한 문양이 없는데 영암사지의 것은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또한 다른 석등과 다른 점은 지대석에 사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사자의 형상이 역시 재미있다. 이러한 지대석 또는 기단에 새겨진 사자를 차근차근 관찰하여 보는 맛이 그리 좋을 수 없다. 지붕돌에는 비바람에 씻겨 희미하여졌지만 귀꽃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 다른 두 석등과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이 석등이 그간 비바람에 많이 씻겨나가 원래의 정치한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석질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너무 아쉽기만 한다. 석등은 예전에는 이 석축 아래 석탑과 석축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영암사지 발굴조사보고서(1985년 : 동아대학교박물관)를 보면 반출된 것을 1959년 이곳에 다시 옮겨오면서 석축이 붕괴될 위험이 있어 아래 설치하였다가 보수공사를 하면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석등 뒤에 있는 금당지를 돌아보면서 나는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한마디로 그간 내가 보았던 어느 사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식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금당의 기단은 한번 고친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즉 지금 바닥에 깔려있는 전돌은 초기의 것이고 기단의 면석은 후대의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발굴당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의 제작 연도를 8세기 이후로 추정하고 있고 기단 안에 있는 흙에서 나온 와편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8세기경에 크게 지어지고 통일신라말기에 중창되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금당의 기단에는 사방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정면인 동쪽과 측면인 북쪽과 남쪽의 계단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반면 후면인 서쪽의 계단은 현재 소맷돌을 설치한 흔적은 있으나 소맷돌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아래 모아둔 석재가 이곳의 소맷돌의 일부로 생각된다. 그러나 사자상이 정면과 좌우측면의 기단에만 조각되어 있고 후면 면석에는 안상만 조각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기능상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면의 계단은 중앙계단답게 계단 중앙에 식물의 문양이 있는 분리석이 있다. 분리석의 하부에는 분리석의 문양을 연결시켜 계단에 연화문을 배설하여 놓아 조그마한 곳까지 정성을 기울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의 소맷돌은 많이 손상되어 잘 확인은 되지 않지만 아마도 용이 조각되어 있는 것 같고 좌우측의 소맷돌에는 가릉빈가 또는 비천상인 듯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그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갑석에는 앞서 말하였듯이 삼면에 사자상이 있는데 각각 두 구씩 조각되어 있다. 각 면의 사자는 두 구씩을 묶음으로 하여 같은 계열의 사자상을 보여주는데 각 면의 한쪽은 머리가 앞을 보는 형식을 취하고 다른 쪽은 머리를 돌린 형상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이곳의 사자 역시 해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살펴보는 이에게 한껏 즐거움을 베풀어주고 있다.
금당지를 보면 기둥의 배열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여러 층을 이루고 있다. 발굴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한 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높은 주초가 나중에 중수한 것으로 보고 있고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금당지를 보면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건물은 중앙에 불상을 모신 지대석이 있는데 중앙에서 약간 뒤쪽으로 배치되어있다. 불상의 지대석 주변은 기본 바닥보다 약간 높은 단이 조성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신 것 같다. 지대석을 모신 단의 뒤쪽 부분에는 조각상이 3구 새겨져 있다. 발굴조사보고서에는 팔부중상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조각의 솜씨가 매우 정교하여 전체가 있었으면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대석을 둘러싸고 있는 석조 불단을 보면 불에 손상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최종적으로 이 절이 폐사된 것은 화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절에 대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조선 조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금당 말고도 사지 전체에 남아있는 주초의 대부분이 불에 손상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규모 화재 후 폐사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전쟁에 의한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곳에서 입적하신 적연국사(的然國師:931-1014)비가 세워진 1023년 이후 몽고전란 또는 고려 말 왜구의 침략으로 소실된 것은 아닌가 짐작하여본다. 발굴조사보고서의 배치도를 보면 건물의 크기는 초기에 만들어진 금당이 한 변의 길이가 약 10m 정도이고 후대에 만들어진 금당의 길이가 약 8m 정도가 된다. 주변의 산세와 4면에 계단이 있는 기단을 고려하면서 건물의 형상의 상상하여 보면 아마도 중층으로 된 탑상의 건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건축설계를 하는 입장에서 내가 설계한다면 어떻게 설계를 하였을까 결국 현재의 대웅전과 같은 단층의 건물을 대입하여 보면 이곳의 형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산세나 주변의 기단의 모습 등을 고려하여 볼 때 이곳에 있었던 금당은 중층 형식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온다. 새로이 복원하여 놓은 현재의 쌍봉사의 대웅전이나 금산사 대웅전을 규모에 맞도록 정리하여 이곳에 옮겨다 놓으면 정확하게 그 모습이 맞을 것이다. 단지 내부의 배치를 볼 때 불상이 놓인 자리가 그리 크지 않아 건물 내부가 높아지면 불상이 위축되어 보일 가능성은 있다. 이러한 점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하는 점에 대하여는 조금도 연구하여보아야 할 것이다. 초석의 상태로 보면 별도로 내부에 불상을 위한 소규모로 불상을 모신 집이 다시 설치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렇게 되었을 경우 허전함은 많이 감소될 것이다. 초기에 지어진 금당과 나중에 중창을 한 금당의 건물구조는 많은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건축을 전공하신 분들과 의견을 나누어보니 지금의 초석의 배열로는 중층의 건물로 추정하기에는 의문이 간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나의 감각으로는 그러한 건물로는 이곳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과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하여본다.) 초기의 지어진 금당은 불대좌가 있던 부분도 고맥이 부분이 있어 완전히 별도의 실로 구분하여 본존불을 모신 흔적이 보이지만 후대의 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건물의 구조와 변화에 대하여는 한국건축을 전공하신 분에게 자문을 구하여 계속 연구를 하여야 할 것 같다. 금당 옆에는 건물지가 있다. 너무 붙어있어 후대에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무슨 용도의 건물이었는지 알 수 없다. 공부가 너무나 미진함을 이럴 때마다 깊게 느낀다. 건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당대의 문화전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당대의 문화전반에 대한 이해가 없이 현재의 유구를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의 공부는 문화의 공부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당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다면 건물지의 해석은 쉽게 되었을 것이다.
금당지의 답사를 마치고 금당 좌측 언덕에 있는 귀부를 찾아보았다. 귀부가 있는 곳도 건물의 흔적이 있었다. 전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지 측면에 2구의 귀부가 위치하고 있었다. 건물지는 정면 부분에 2개의 계단이 있고 중앙에 지대석으로 보기에는 조금 어색하지만 무엇인가 놓였던 기단이 있었다. 이 기단은 뒷 기둥열과 같은 위치에 있어 배치에 있어 금당으로 보기에는 어색하다.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측면기단의 길이가 현재는 7.5m 정도이지만 발굴 결과 9.85m 정도였다고 한다. 후대에 기단의 길이가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기단의 길이가 변한 이유를 추측하기 어렵지만 뒷편에 암반이 돌을 따낸 흔적이 있고 많이 노출된 것으로 보아 측면 2칸의 건물은 아니고 원래부터 측면 1칸의 건물이었던 것 같다. 보고서의 축대는 후면에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일부에서는 이곳에서는 재가 나와 밀교의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신영훈 선생이 쓰신 영암사지 답사기에서 화재 때문에 생긴 재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부도전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좌우에 2구의 귀부가 있고 또한 2곳에 계단이 있다는 점과 지대석이 뒤쪽으로 쳐져 있는 것을 보아 금당으로 보기보다는 부도를 모신 부도전으로 생각하여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귀부는 건물터를 중심으로 좌우에 있다. 둘 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적연선사부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귀부 중 어느 것이 선대이라고 하는 것을 구분하기에는 힘든다. 양식상의 특징만을 찾아보면 북측의 부도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비신받침에 새겨진 어문(魚紋)이다. 여러 곳의 부도와 부도비를 보았지만 이렇게 물고기문양이 명확하게 조각되어진 것은 이곳에서 처음 본다. 좌측의 어문이 가운데 여의주(보고서에서는 연꽃이라고 칭함)를 희롱하는 문양이고 우측의 것은 물고기가 서로 꼬리를 쫓는 형상을 되어 있다. 특히 우측의 원형으로 서로의 꼬리를 쫓는 모습은 예전에 황의수선생(문화재보호재단이사)께서 보여준 인도기행의 슬라이드에 똑같은 형상의 문양이 있어 주목되는 문양이다. 인도를 기행할 때 이러한 형상의 물고기문양 자주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황의수 선생은 이것이 간략화되면 태극문양이 된다면서 태극문양의 인도 전래설을 조심스럽게 제기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러한 것은 아니더라도 물고기 문양이 이렇게 명확하게 새겨진 것은 이 귀부 뿐만이 아니라도 석조물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예가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현재 직지사의 성보박물관 앞에는 물고기 문양의 돌이 있다고 한다. 사진으로 확인한 결과 각각 한 마리씩 새겨놓은 물고기 문양의 돌이 두 개가 있는데 시대적인 구분은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다.) 물고기 문양은 아니더라도 거북(자라?) 또는 개구리 등의 동물의 형상이 새겨진 예는 부도뿐만 아니라 주초 등에서 몇 곳을 보았지만 시대가 많이 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명확한 어문의 형상이 나타난 예는 나는 보지 못하였다. 물고기 문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선 궁금하고 또한 어디에서 기원을 가지는 지 역시 의문점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지식이나 자료가 있으신 분들의 많은 도움을 바란다. 귀부를 보다보니 예전에는 스쳐지나 갔을 것을 발견하였다. 두 귀부 모두 코에서 나오는 서기가 표현되어 있었다. 이전의 귀부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서야 그 서기를 보게되었다. 아마도 많은 귀부에서 이러한 서기가 표현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간 놓치고 오늘에서야 느끼게된 것이다. 앞으로 좀더 세밀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깊게 느낀다.
귀부의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북측 건물지를 돌아보았다. 건물지에는 기둥이 하나 서있는데 아마도 문설주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떠한 건물이기에 이렇게 돌로 된 문설주를 설치하였을까? 그간 전혀 보지 못하던 새로운 것이어서 궁금하지만 나로서도 일말의 감조차 잡을 수 없다. 문설주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돌의 두께가 가늘어 이것을 가공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정성에 다시 한 번 감복한다. 북측 건물기단 아래에는 예전부터 사용하여왔을 석조가 있다. 그리 크지 않고 다듬어진 것은 아니지만 연륜을 느끼게 하는 석조이다. 석탑의 옆에는 주변에서 가져다 놓은 석재의 부재들이 있다. 눈에 띄는 것이 불대좌와 금당의 계단의 소맷돌 일부이다. 불대좌 역시 매우 정교한 솜씨고 가공된 것이다. 불에 손상된 흔적이 있으며 일부 손상되지 않은 부분의 조각은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부재의 상태를 보아서는 입불로 추정되며 금당에 남아있는 지대석과 비교하여 너무 크기 때문에 금당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다른 곳에 있었던 것으로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금당부근의 답사를 마치고 아래 발굴현장을 내려가 보았다. 아래 석축부분에 남아 있는 배수구는 기단과 어울리게 별다른 장식이 없이 만들어졌다. 아래의 발굴현장은 초석과 좌대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어 정확한 유구를 추정하기가 힘들었다. 예전에 밭으로 사용하던 곳이라서 유구들이 많이 흩어져있는 상태이어서 정확한 유구의 추적이 그리 쉽지 않았다. 현재는 발굴상태대로 널려져있는 상태라서 자칫 큰비가 오면 더욱 교란될 우려가 있어 보인다. 조속한 시일 안에 발굴조사를 완료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에 돌아와서 발굴조사 보고서를 얻을 수 있는가 확인하여 보니 3차 발굴조사 후 보고서 발행예정이라는 답만을 들었다.
시간이 허락되면 더 있고 싶지만 다음 여정 때문에 이만 영암사지를 떠나기로 하였다. 2시간 여에 걸친 답사였지만 아직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어차피 한 두 번 올 곳이 아니니 올라가서 영암사지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때는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영암사지를 보게될 것이다. 그 때를 기약하고 다음 답사지인 합천적연선사부도(陜川寂然禪師浮屠:지방유형문화재 제360호)로 향하였다. 영암사지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1㎞정도 가면 마을이 나오고 이 마을 뒷산 기슭에 있다. 마을 사람에게 위치를 여쭈어 보니 손으로 있는 곳을 가리키는데 멀리 부도의 지붕돌이 보인다. 알려준 길로 접어들어 조금 올라가니 산기슭에 있는 부도의 모습이 보인다. 논길을 지나 부도에 도착하여 보니 탑신이 없어졌던 것을 다시 고쳐 올린 모습이다. 탑신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영암사지발굴조사보고서에서 이 부도를 적연선사의 부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적연선사의 부도'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의문이 간다. 적연선사비문에 의하면 '開泰 삼년(1014년) 6월에 입적하였고, 그 달 28일 서쪽 산봉에 장사를 지냈다(葬于靈巖寺西峯).'라고 기록되어있다. 보고서에는 원래의 위치는 가회면 중촌리 산24번지에 있었던 것을 조선조 말에 땅주인이 부도를 넘어뜨리고 자신의 조상의 묘를 모셨다고 한다. 부도는 물길을 따라 밑으로 흘러 내려온 것을 모아서 다시 조립한 것이라고 한다. 원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현재 두 개의 탑비가 있어 적연선사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과 현재 부도가 있는 위치가 원래의 위치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한다면 이곳이 서쪽의 봉우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암사가 동향을 하고 있으므로 서쪽이라면 뒤쪽의 산을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음 답사 시에는 부도가 있었던 원래의 위치를 찾아보고 다시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상륜부가 사라져 버린 이 부도의 높이는 현재 약 3m정도이다. 이러한 규모의 부도가 그리 많지 않다. 매우 큰 부도에 축에 드는 부도이다. 이 부도는 전형적인 8각당형의 부도이다. 지붕돌에는 우동이 강하게 조출되어 있고 그 끝에는 귀꽃이 새겨져있다. 우동이 강조되는 것은 고려 중기 이후에는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것의 시초가 어디인가를 찾아보고 있는 중인데 이미 고려 중기이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단 부분은 운용문(雲龍紋)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깊이가 얕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찾기가 힘든다. 용의 문양은 여의주를 놓고 마주보고 다투는 형상으로서 2개소에 새겨져 있다. 이 부도는 전반적으로 의령에 있는 의령 보천사지 부도(보물 472호)와 같은 느낌을 준다. 보천사지의 부도가 이 부도와 크게 다른 점은 지붕돌 우동이 강하게 표현되었다는 점과 지대석 부분에 사자상이 없다는 것이다. 기타의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보천사지 부도를 보면 전반적으로 세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 부도는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부도의 몸돌을 만들 때 이 보천사지 부도를 참고하였다면 지금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천사지 부도의 중대석을 보면 적연선사부도의 중대석의 형식은 같은데 위아래가 바뀌었다. 영암사지발굴조사 보고서에는 중대석에 안상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현장에서는 안상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였다. 다시 한번 확인하여 볼 필요가 있다. 하여간 보천사지부도와 적연선사부도는 지역적으로 보나 형태적으로 보나 같은 계열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데 중대석을 보면 둘 중에 하나는 틀린 것 같다. 검토하여 제대로 된 부도로 만들었으면 한다.
적연선사부도 답사를 마치고 식사를 위하여 중간에 잠시 들렀던 송씨 고택으로 향하였다. 송씨 고택 옆에 새로 집을 지어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한참 넘어 3시가 다 되었는데도 손님이 줄을 잇고 있다. 나중에 얻은 합천 관광안내 팜플릿에도 이 집을 음식점으로는 유일하게 소개하고 있다. 음식은 어머님이 하고 있지만 식당을 경영하는 분은 이 댁의 큰아드님이시다. 음식을 정식(5,000원)을 주문하였더니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오히려 백숙(15,000원)이 20분 정도를 기다리면 나온다고 하였다. 본가에 들어가 보니 백숙은 주문과 관계없이 계속 장만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집의 주메뉴는 백숙인 것 같다. 시간이 없어 빠른 것을 알려달라고 하였더니 묵채(2,000원)과 생두부(3,000원) 그리고 찌짐(3,000원)만 먹어도 식사는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집에는 술이 유명하다는데 이름은 고가송주(古家松酒)이고 청와대에도 두말씩이나 들어갔다고 주인어른의 자랑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맛을 볼 겸 작은 것(360ml:6,000원)과 주인의 이야기대로 그대로 주문하고 기다리니 먼저 두부가 나온다. 두부도 이곳에서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데 다른 곳의 두부보다는 조금 더 단단하였다. 김치가 나왔는데 묵은 김치였다. 묵은 김치의 깊은 맛과 두부와 어우러지는 맛이 즐길 만하였다. 아이들도 맛있다고 하면서 한 접시를 뚝닥 비웠다. 술을 약주로서 12도짜리 술이다. 맛이 순하고 향이 은은한 것이 입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 운전만 아니라면 한 병을 비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할 수없이 맛만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다음에 나오는 것은 묵반이었다. 무엇인가 궁금하였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묵밥이라는 것이다. 순흥의 묵밥이 유명하고 대전 부근에도 유명한 곳이 있고 기타 여러 곳에서 먹어본 터이라 낯설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추천한다면 목아박물관 안에 있는 '걸구쟁이집'이고 산사음식을 전문을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의 묵밥이 제일 나은 것 같다. 이곳의 묵반은 밥이 들어있지 않아 묵밥이 아니고 묵채이다. 그릇은 공기정도의 크기의 목기이다. 이보다 그릇이 크면 질릴 수 있기 때문에 크기도 적당한 것 같고 목기로 나온다는 것이 이미 사람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원래 이 집의 김치 맛이 좋아 김치맛과 어우러지는 묵맛이 일품이어서 즐길 한 집이다. 된장찌개의 맛을 보기 위하여 주인에게 별도로 청하였더니 자기가 식사하려고 준비하였던 것을 내주셨다. 된장 맛이 그 집의 음식맛의 기본인데 이 곳의 된장찌개도 맛이 그만이다. 그리 강하지 않게 끓여낸 맛이 깊은 맛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찌짐'이다. 찌짐은 쪽파 밀가루 부친개이다. 맛이 담백하면서도 재료 자체의 맛을 잘 살리고 있다. 한번 사용한 프라이팬에다 계속 부치게 되면 맛이 깨끗할 수 없는데 맛이 깨끗한 것을 보니 부치는 도구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 같다. 주인이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사용하는 재료가 대부분 자신이 재배하는 것이라서 깨끗하고 싱싱하여 맛이 각별할 것이라고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주인과 건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도 손님이 끊이지 않아 오래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다. 안내문에는 이 집도 합천댐의 공사로 옮겨온 것이다. 본채와 부속채로 이루어졌는데 부속채는 손님 접대를 위한 집이라고 한다. 별채는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다. 주인어른에 이야기에 의하면 별채의 규모가 지금보다는 더 컷다고 한다. 지금 옮겨다 놓은 집 뒤로 별도의 건물이 몇 채 더 있었는데 별채만 옮겨다 놓았다고 한다. 대지가 천여 평이 훨씬 넘었다고 하면서 이 별채에서는 예전에 이곳의 현감이 집무를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옥호(屋號)가 00軒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감이 집무를 보았기 때문에 붙이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별채를 구경을 하려고 청하였더니 지금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 집에 없어 곤란하다고 하여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별채는 누마루 형식 집으로 전면 4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집이다. 집의 구조는 중앙 2칸이 방으로 되어 있고 방의 주변으로 마루가 둘러져 있는 형식이다. 안채는 일자형의 집으로 솟을대문을 지나면 사랑채가 1자형으로 있고 그 뒤에 안채가 1자형으로 되어 있다. 두 건물 모두 맞배지붕으로서 경사지에 자리를 잡고 있어 사랑채가 누마루처럼 높게 솟아있고 뒤의 안채도 높은 기단 위에 서있다. 안채는 전면 4칸 측면 1칸에 전 후면으로 반 칸씩 퇴를 두었다. 전면은 툇마루로 처리하고 후면은 벽을 쳐 실내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좌측은 반 빗간식의 아궁이로 되어있고 나머지 3칸은 방, 대청, 방의 배열로 되어 있다. 사랑채 역시 전면 4칸의 집으로 우측 1칸은 아궁이가 설치되어있고 뒤쪽 반 칸이 광으로 이루어져있고 아궁이 상부는 다락으로 꾸며져 있다. 나머지 세 칸 중에 2칸은 온돌방이고 좌측의 1칸이 마루로 구성되어있고 앞쪽으로는 반 칸 규모의 계자난간이 설치되어있는 퇴가 설치되어있다. 지금의 구조로는 전면에서 사랑채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할 수 없이 옆에 아궁이 쪽으로 어렵게 올라가 내부를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고 다시 아궁이 쪽으로 뛰어 내리는데 아차 싶었다. 발을 헛딛어 발이 접질리고 말았다. 순간 뼈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답사고 뭐고 없이 식당 쪽으로 가서 병원이 어디 있는가 물었더니 마침 집주인의 동생 분이 뼈를 잘 맞춘다고 하여 응급처치를 받았다. 서울로 돌아갈까 생각하여 보았는데 동생 분의 말로는 조심하여 다니면 크게 문제되지 않으니 일정대로 하셔도 된다고 하여 다음 답사지로 향하였다.
다음의 답사지는 대동사지석조여래좌상(유형문화재 42호)과 백암리석등(보물 제 361호)이다. 합천읍을 지나 백암리로 들어서 찾아보니 두 개가 한곳에 있었다. 주변을 정리하면서 한 곳으로 모아 놓은 것 같다. 차를 세워놓고 석등이 있는 곳까지는 논둑길을 따라 50m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아까 포장된 곳을 걸을 때와는 달리 흙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발의 상태가 생각보다는 심각한 것 같다(다음 날 서울에서 확인한 결과 예상대로 뼈에 금이 갔다.). 주변이 정리되어 절의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이곳은 오래 전부터 대동사터라고 불리는 곳이라고 한다. 석등은 화사석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이다. 비바람에 많이 손상되어 문양이 그리 명확하지는 않지만 연꽃문양의 솜씨로 보아 높은 수준의 석등임을 알 수 있다. 화창에는 사창을 설치하기 위한 못구멍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옆에 있는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목 부분은 한번 도괴되었던 것을 다시 올려놓아 수리한 흔적이 있다. 전체적으로 비바람에 마모가 많이 되어 정확한 형상을 알 수는 없지만 통견에 육계가 상당히 크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좌대의 중대석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있고 각각의 면에는 팔부신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옷주름과 중대석의 팔부중상 그리고 연화문의 솜씨를 보아 대단한 석불이었을 것으로 느껴진다. 좌대의 상대석 연화문은 많이 손상되어 불상에 비하여 빈약하여 보지만 원래의 모습대로라면 안정감이 있고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두 석조물 옆에는 연화문 좌대에 포탄형의 석주가 세워져 있는 전체 높이 1m 정도의 석조물이 있다. 그간 이러한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이 사지에 오랜 동안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떠한 이유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우선 생각이 나는 것은 전북 귀신사의 석수이다. 사자의 등에 남근의 형상을 올려놓은 것인데 그것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남근을 상징한다고 보기에도 문제가 있다. 우선 좌대인 연화문이 석등과 같은 수준의 솜씨로 만들어져 있고 위에 올려져 있는 석주도 잘 가공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합천군청에 확인하여 보니 주변을 정리하면서 논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그것에 대하여 연구하여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조금 더 자세히 돌아보려고 하였지만 발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것 같았다. 더 이상의 답사를 하는 것은 무리다 싶어 다음 날의 답사일정을 포기하고 서울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