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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7주기를 맞아 2월 26일 경기도 가평 현리 작은예수회마을에서는 추기경을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한국가톨릭생활성가 창시자 ‘문화대담콘서트’가 열렸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지 7년 됐는데 벌써 세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고 올해는 일간 지나 방송에도 거의 소개되지 않아 안타까움이 더하는 가운데 열린 이 콘서트는 더욱 값진 행사였다.
마침 추기경이 사석이나 공석에서 즐겨 부르던 생활성가 ‘난 알아요’의 주인공 김정식씨가 지난해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로부터 한국가톨릭 성음악 문화를 발전시킨 점을 높이 평가받아 제32회 가톨릭대상을 받았다.
이에 본지는 가톨릭교회 안에 생활성가가 탄생되고 정착 되도록 견인차 역할을 한 김정식(로제
리오), 신상옥(안드레아), 고영민(안드레아)씨를 초대해 추기경을 추모하고 그들의 음악 안에 하느님이 어떻게 현존하는지를 들어보는 토크콘서트를 개최했다. 고영민씨는 일정상 참석치 못했다. 특별히 이 자리에는 ‘영음악’ 장르를 창시해 30여 년 동안 많은 이들을 치유해온 박성구 신부가 함께해 추기경의 사랑을 생각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시간을 가졌다.
▲ 한국가톨릭 생활성가 창시자와 개척자인 김정식씨와 신상옥씨 그리고 영음악 창시자인 박성구 신부가
콘서트를 마치고 함께했다.
축하인사 : 권순기 (진실의 소리신문 편집위원)
오늘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영적아버지로 모신 박 신부님 계셔서 좋지만 제가 오래전 신문사 있을 때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꿀맛 같은 목소리를 가진 좋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가수는 하느님에게만 노래를 바친 데요. 그 분이 바로 김정식 로제리오 형제님인데 이 자리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신학생인데 노래가 너무 좋아 신부 안하고 장가도 간다고 그랬어요, 예수님의 눈매 같은 음성을 가진 멋진 친구 신상옥 형제가 추기경님의 사랑을 노래로 울려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추기경님은 작은예수회 자랑스러운 아버지이십니다. 추기경님께서도 “오늘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천국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특히 올해가 1886년 병인박해 150주년인데 그때 신자가 24,000명인데 박해 후 8,000명만 살아남았어요. 성인품에 오른 100분 신앙선조들도 기억하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해입니다. 오늘 좋은 시간 예수님 함께할 것이며 하느님께서 좋은 선물 주실 것입니다.
#추기경과의 추억
사회자 - 김수환 추기경님을 회상해보면,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비신앙인들도 존경하는 한 세기에 나올까하는 한국교회 큰 어른이셨습니다. 문화대담콘서트에 모신 세분과 김수환 추기경님과 추억을 잠시 영상을 보신 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곁에서 6년간 공동생활
신상옥 - 제가 김수환 추기경님과 무슨 특별한 인연이 있었겠어요? 그때는 신학생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신학교 이사장으로 계셨던 추기경님께선 저희 신학생들과 식사를 자주하셨어요. 그때는 민주화운동 시절이었기 때문에, 추기경님께서는 항상 신학생들에게 ‘깨어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신학생들이 외부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는데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계셨을 당시는 인식이 달랐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내 입장에서만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항상 남들의 종교, 그들의 사회, 그들의 언어를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미래의 사제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든 노래가 ‘임쓰신 가시관’ 조금 전에 불렀지요
‘임 쓰신 가시관’지그시 눈감고 듣던 추기경님 신학생 400명 전부 3박 4일 휴가 허락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님이 신학교에 오셨는데 그때 많이 피곤하셨는가 봐요 “여기 요즘 돌아다니는 유명한 곡이 있다던데 나 좀 한번 들려줘봐.” 하시는 거였어요. 그때 신학생들이 다 일어나서 ‘임 쓰신 가시관’을 불렀습니다.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추기경님께서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시더니 “참 좋다.”고 하셨어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저희, 방학 좀 주십시오.” 했지요. 추기경님의 표정이 근엄하게 바뀌시더니 “한 번 더 불러봐.” 하시고는 신학
생 400명 전부에게 3박 4일 휴가를 허락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서울성모병원에서 주제가로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선택하게 되어 추기경님 곁에서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상옥아~ 신부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잘 살고 있어요, 좋은 노래 많이 만들고 수녀원 갈 때도 네 노래가 많이 나와.. 네가 노래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든 것을 네 시대에 주신 것이므로 항상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제 삶에 소명으로 담아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 올초 신씨 가족은 경사로 문을 활짝 열었다, 장남 신인환 군은 국민대 성악과, 차남 신지환 군은
인천가톨릭대 성악과에 입학해 '살며 사랑하며 예수와 함께' 가훈이 이뤄졌다.(인천 서운동성당에서)
박성구 신부 -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저의 사제서품을 주셨고 작은예수회 수도,수녀회를 인가해주셨고 남북한장애인걷기운동본부의 총재로 계셨습니다. 이분은 정이 넘치신 분입니다. 사랑이 넘치신 분입니다. 저를 많이 반대했지만 나를 진정 위하시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나에게 원고 부탁한 적이 없는데 어쩌다 일간신문에 나서 그런지 원고청탁이 와 성산동 물난리 사건 때의 얘기를 썼는데 “박 신부님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 몰랐다.” 며, 칭찬해 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이분은 참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때 나를 야단 치고 한 것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은 진정한 아버지이시고 진정한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들은 바로는 ‘성령 충만은 박성구 신부가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셨다고 하십니다. 추기경님은 작은예수회 행사가 있다면 많이 참석하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참석 못하신다고 하셔도 바람처럼 행사 당일에 오셨다가 가시곤 하셨습니다.
▲ 김정식씨가 제32회 가톨릭대상 수상 직후 염수정 추기경과 인하대 상담심리학과 교수 및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2015년 11월 명동성당 문화회관)
▲ 김정식씨 생일날 배우자 홍순옥(베로니카)씨와 이삭(30),이슬(28),이랑(24) 삼남매가 외식하며 찍은 가족사진인데
주인공은 촬영하느라 자녀들이 대신 오려 붙였다.
김정식 로제리오 - 김수환 추기경님은 늘 상 열악한 환경에서만 뵈었어요. 철거민들을 위한 미사나 노동자를 위한 미사, 사형폐지를 위한 미사 등 그런 곳에서 뵈었습니다. 여의도에서 있었던 세계성체대회 며칠 전엔 전화를 주셔서 ‘난 알아요’라는 음반과 악보를 갖다 주면 연습해서 부르신다고 하셨어요, 그땐 직접 뵙기도 하고요. 추기경님과 저는 ‘광산 김씨’예요. 언제 한번 추기경님께서 “로제리오는 항렬이 어찌되는가?” 하고 물으시기에, “저는 37대 식자 항렬입니다.”하고 대답했는데 추기경님께서 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추기경님께서는 다른 데를 한참 보시다가, “내가 워낙 나이가 많으니까 나는 말을 계속 내리겠네.”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 ‘조카’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추기경의 아재다”라고 말합니다. (웃음)
찬찬히 들어보니 추기경님의 노래에는 자신의 삶을 실어서 부르시더라고요. 분명히 내 노래인데, 그분이 부르실 때는 당신 삶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잘 부르고 못 부르고 떠나서, 사람들이 들을 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영가를 잘 불러서 세상에서 영으로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는데 영가는 부르지 않고 알아주지도 않고요. 그런데 혜성과 같이 나타난 신상옥이란 친구가 있었어요. 마침 신상옥 형제가 당시 작사에 공항이 와서 1년 동안 헤메이던 시절였는데 제가 쓴 시집 세권에서 가장 맘에 드는 시를 노래로 만들겠다 고 작은예수회 6. 7감사제 때 발표를 하겠다해 허락했습니다. 제가 깜짝 놀란 것은, 이 가사를 가지고 작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는 바로 ‘노래하는 십자가’였었거든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나와의 나이 차이는 상관없이, 신상옥 씨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메시아 만나는 꿈꾸던 중 박성구 신부 시집 ‘노래하는 십자가’ 갈증 채워
저는 신학교 2학년 때 김정식 형님의 ‘하느님 난 당신을 알아요’ ‘예수 나의 기쁨’ 노래를 들으며 나의 로망이며 이상형으로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신학교 나간다면 가서 밥해드리고 천주교 해바라기를 만들어 봐야지 그런 꿈이 있었지요, 그런데 한 번도 그런 기회를 주시지않다가 나중 신학교를 나온 후에 첫 콘서트 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김정식 님을 소개토록 하겠습니다. 하느님 더 이상 외사랑 안 해
김정식 로제리오 - 저는 드릴 말씀이 일천해서 노래를 하나 부르겠습니다. (박수) 김정식 로제리오 - 저는 어릴 때 좀 슬픈 시절을 보냈어요.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 마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 당시는 유신정권이 있었고, 새마을 운동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그 시절을 제 느낌으로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데도 다들 배고프고 힘들고 한이 많았어요.
일상 삶으로 노래하고파 계기
제가 방금 애절한 사랑노래를 불러서 여러분에게 가슴을 건드린 이유는 우리교회가 올해 자비의 희년인데 많은 분들에게 자비의 희년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물을 때 그냥 자비로우면 되는 것 아니에요? 하고 막연히 대답하는 모습을 봅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자비는 부처님의 자비라고들 많이 생각하시는데, 교회에서 말하는 자비는 신학적인 의미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애로운 사랑의 자비, 긍휼이 여기는 자비, 고통과 함께의 자비.” 고통 중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자비롭다하십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 함께하신 하느님을 자비의 하느님이라 한다면, 고통과 자비는 서로 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지만 이 고통을 잘 받아드리려고 하는 체험을 하다보면 그분을 닮아서 저도 자비로워지고 거꾸로 내 고통만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잘 받아드리려 할 때 우리도 자비로워 진다는 거고 그래야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은 왜 사랑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지요. 작은예수회가 외적인 장애뿐만이 아니라, 심적인 장애의 고통을 끌어안으려하지 않습니까? 고통을 잘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자비로워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성구 신부 - 저하고는 반대적인 노래 참 좋습니다, 저는 또 로제리오님의 노래가 부럽지요. 2001년 강원도로 가서 콘도에서 음반연습하고 오려는데 눈이 1m도 넘게 와서 차길이 막혀 밤을 꼬박 새곤 했지요, 그 당시 저는 디스크에 걸려 누워서 사람들 만나고 고통 중에 있는데 오다가 청평에서 너무 설경이 아름다워 즉석에서 지은 노래가 ‘고산에 사슴노루 사람들 사랑 속에 잘 큰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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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진실의소리신문 > 원문출처 http://www.vot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71 |
유경환시/김정식 곡 제비꽃이 핀 언덕에(Guitar버전)2.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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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시간 되셨군요~
추기경님은 노래를 좋아하셨으니
분명 흥도 많으신 분이셨을거예요...
삐에로님 덕분에 김수환추기경님을 한번 더 기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