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이에게 왕렌쇼는 생모 이상이었다. 흔히들 왕자오(王焦)라고 불렀다. 자금성 시절 애견을 안고있는 왕렌쇼 .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
청 황실은 아들이 태어나면 딸을 출산한 여인들 중에서 유모를 선발했다. 딸이 태어났을 때는 그 반대였다. 1906년 가을, 청 제국 최고의 명문인 순친왕(醇親王)의 왕부(王府)에서 장남이 태어났다. 관례대로 유모를 물색했다. 내시들을 풀어서 베이징 성내의 골목을 샅샅이 뒤졌다. 딸을 출산한 여인들이 20여 명 있었다. 빈농 출신 왕렌쇼도 그 중 하나였다.
남편이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지 3개월 만에 딸을 출산한 왕렌쇼는 살 길이 막막했다. 순친왕 측에서 유모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자 응모했다. 왕렌쇼는 빈농집안 출신 티가 안났다. 용모가 단정하고 유즙(乳汁)도 걸죽했다.
왕부의 요구는 가혹했다. “외부 출입을 금한다. 친딸을 만나서는 안된다.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매일 소금기 없는 돼지 넙적다리를 한 사발씩 먹어야 한다.” 왕렌쇼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였다. 시부모와 딸을 굶어 죽게 하지 않으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2년 후, 왕렌쇼의 딸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순친왕부는 상심한 나머지 젖의 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딸의 사망소식을 왕렌쇼에게 알리지 않았다. 1908년 10월 말, 광서제(光緖帝)가 세상을 떠났다. 서태후는 순친왕의 장남 푸이를 차기 황제로 낙점했다. 서태후의 명을 받은 왕공대신(王公大臣)과 태감(太監)들이 순친왕부로 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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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에서 목을 웅크리고 있던 왕렌쇼는 눈물범벅이 된 어린 푸이가 안쓰러웠다. 갑자기 달려가 태감이 안고 있던 푸이를 나꿔챘다. 남들이 보건 말건 가슴을 풀어헤쳤다. 유모의 젖꼭지를 문 푸이는 그제서야 울음을 그쳤다. 유모의 품 안에서 떠날 기색이 아니었다. 왕공대신들이 머리를 맞댔다. “어쩔 도리가 없다. 유모도 궁궐에 데리고 가자.”
푸이는 왕렌쇼의 품에 안겨 궁궐에 들어왔다. 황제 즉위식 날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뭔가 찾는 눈치였다. 푸이의 회고록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유모의 품 안에서 성장했다. 아홉살 될 때까지 함께 생활하며 9년 간 그의 젖을 먹었다. 다른 애들이 엄마 곁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나도 유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태비들은 푸이가 아홉살이 되자 왕렌쇼를 궁궐에서 내보냈다. 태감들과 충돌이 잦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일을 계기로 푸이는 두고두고 태비들을 원망했다. “평소 유모는 말수가 적고 뭐든지 잘 참았다. 그런 유모가 남과 다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유모가 떠난 후 나는 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다. 인간성을 상실하자 성격이 변하고 포악해졌다. 태감들과 충돌한 원인이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태감들 꼴도 보기 싫었다. 틈만 나면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유모는 딸이 오래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궁궐에서 쫓겨난 후에야 알았다고 한다. 태비들이 내 결혼을 서두를 때 나는 유모의 딸과 결혼하고 싶었다.”
결혼을 한 푸이는 태비들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고향에 가 있는 유모를 데려오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다. 십여년 만에 푸이를 만난 왕렌쇼는 한번 웃고는 별 말이 없었다고 한다. “유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마음이 편했다. 유모에게 딸 소식을 물었다. 진작 죽었더라는 말을 듣자 골육을 잃은 것 같았다. 유모는 자신의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나나 다른 사람에게 뭐 하나 요구한 적이 없다. 성격이 온화하고 남과 다투는 법도 없었다.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침묵할 때가 많았다. 언제 봐도 단정한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 웃음의 의미가 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의 눈은 항상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벽화를 좋아하는 줄 안 적도 있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나의 신세나 내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게 내색 한번 안했지만 대청 제국의 황제에서 일본의 괴뢰로 전락한 나를 바라보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지 짐작이 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