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보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어떤 부유한 상인이 있었다. 그는 보물들을 팔아 많은 이윤을 남기려고 보물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어떤 마을을 지나가다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는 아주 현명한 사람이 그 마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상인은 진귀한 보석을 아주 싼 값에 구할 수 있는 곳을 물어보리라고 생각하고 그 현자를 찾아갔다.
상인을 보자 현자는 상인이 묻기도 전에 말했다. “물론 잘 알고 말고. 히말라야 산으로 가게.” 그리고는 가야 할 산봉우리 이름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 그 위에서 사흘 동안 앉아 있게. 사흘이 지나면 전혀 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돌아오라.” 신이나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구해 그 산꼭대기로 올라간 그는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사흘 동안 보물이 어디에서 나타날 것인가 고대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보물에 대해서만 몽상하고 꿈꾸었다.
그의 눈에는 고요히 흘러가는 아름다운 시냇물과 계곡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지저귀는 새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아름다운 황혼도 볼 수 없었다. 사흘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가 나서 달려 돌아와 따지는 상인에게 현자는 말했다. “그대는 결코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시냇가에 있는 돌은 모두 다이아몬드였다. 그러나 그대는 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서 그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마음과 눈은 늘 무엇인가로 꽉 차 있다. 마치 보석들이 가득 널려 있는 시냇가에서 그 다이아몬드를 보지 못했던 상인처럼, 우리의 마음과 눈은 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어 정말로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그것을 보기 위해 우선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눈에 묻은 세상의 때, 소유욕, 탐욕, 분노, 교만의 때를 다 씻어내야 한다. 즉 마음과 눈이 침례를 받는 진정한 회개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말씀은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히브리어로 회개의 원뜻은, “테슈바흐”, 즉 “돌아옴”과 “응답”이다. 그리고 그 당시 쓰이던 아람어로 “회개”란, “돌아감”, “원천으로의 귀향”을 뜻하는 말이었다.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께 응답하고 원래 하나님과 하나 되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엄마가 부르면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처럼,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과거에 하던 죄된 일과 행동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외적으로 이것과 저것을 고치는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다. 회개는 내적 혁명이다. 죄된 모든 것을 비우고 장사지내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죄가 없으셨지만, 그 당시의 결례를 따라 침례를 받으셨던 예수님의 행위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분의 행동은 언제나 말이 없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영적인 교훈이었다. 요한에게 침례 받기를 간청하시고 물 속에 잠기셨던 그날, 예수께서는 죽으셨다. 요단강의 물살을 타고...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강에 잠기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행동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그리고 물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자아의 “절대적인 없음”의 완전한 죽음을 통과해야만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인 새로운 부활, 거듭남을 이룰 수 있다고... 우리가 새로운 다른 세상을 맛보기 원한다면, 우리의 이전 생애에 대하여 완전히 죽는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비취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은 우리를 그분께로 이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철저히 포기하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신다. 만일 이 이끄심을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고귀한 피를 흘리게 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울며 회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새로운 삶의 장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생의 전주곡일 뿐이다.
회개하라고 하면, 사람들은 가지를 치고 전정해내기에 바쁘다. 자신의 이러 저러한 잘못된 행동들을 뉘우치고 사과하고 용서 받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와 거듭남이란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다. 나무 전체가 변하는 것이다. 접붙여진 가지가 그 나무가 되듯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 전체에 대해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의 방식 - 과거의 사고방식, 과거의 생활태도, 과거의 판단, 과거의 관념 - 을 다 버리고 전체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 전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마음의 냇물이 맑게 되려면 먼저 마음의 샘이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찌꺼기가 갈아앉았다간 그것을 휘젖는 어떤 무엇이 오면 다시 확 일어나 예전처럼 되는 그런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가라앉은 찌꺼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죽음을 거쳐야 진정한 거듭남이 이르러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옛 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이 완전히 죽고 새로운 본성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 그것이 거듭남이다.
애벌레가 나비처럼 전혀 다른 피조물이 되듯이,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난 내적인 혁명은 우리의 생애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우리의 얼굴은 깊은 하늘의 평화와 사랑의 빛을 반사한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이루어졌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마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흔들리는 꽃에서 향기가 발하여지듯이,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늘의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여 그 사람의 삶을 향기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에 새 새명을 지어 준 것이다. 그것은 심령에 역사하시어 사상과 욕망을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인 것이다. 그때에 우리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쓰여지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 나이다”(시 40:8)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새롭게 태어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마음에 잠기고, 우리의 눈동자는 예수님의 눈동자의 일부가 된다.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우리의 눈이 바뀌었기 때문에 온 세상도 바뀌어 버린다. 처음에는 우리 가슴의 적은 부분이 그리스도로 되지만, 그 작은 부분은 곧 빨리 자라나 가슴 전체가 그리스도가 된다.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분을 깊이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쳐 그 가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분을 보호하고 자라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가슴에서 전부가 될 때까지... 영적인 요단강 물결에 매일 우리 자아를 장사지내고, 그 요단강 물로부터 매일 새롭게 부활하는 경험을 아주 철저히 할 때, 우리의 가슴과 마음은 온통 전부가 그리스도로 될 것이다!
기독교 서점에 가면 종말에 관한 예언들을 해석한 책들이 꽤 많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도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코너에는 거의 매달마다 새로운 책들이 출판되어 나오고 있는 듯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되어 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전쟁이야말로 인류가 싸워야 할 마지막 전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심지어는 할리웃에서 만들어졌었던 공상 과학 영화도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아마겟돈에 관한 책의 거의 모두 다가 이 전쟁을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으로 싸우게 될 실재적인 세계 대전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므깃도 골짜기는 매우 적은 평야로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세계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또한 유프라테스강도 그것이 꼭 말라야지만 동방으로부터 오는 대군이 건널 수 있는 그렇게 큰 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아마겟돈 전쟁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실제 전쟁이라고 고집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번 호는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연구 자료를 제공하는 기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글들을 읽으시면서 성경 말씀과 예언의 해석 원칙들에 관하여 배우게 되실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상징적 예언들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이해를 얻게 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마겟돈 전쟁에 관한 예언을 통하여 얻게 되는 유익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아마겟돈 전쟁을 위하여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기만적인 전략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단의 속임으로부터 보호하시면서 인도하시는 계획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지금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가오고 있는 아마겟돈 전쟁과 새로운 천년기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습니까? 이번 호를 통하여 하늘의 지혜를 발견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2~16.
많은 기독교인들은 요한 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큰 날”인 “세상의 종말”이 올 때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아마겟돈 전쟁에 대하여 읽은 기독교인들이나 신학자들이 이 사건에 대하여 각기 다른 해석들을 함으로써 아마겟돈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기독교 안에 난무하게 되었고, 그 해석들은 각 시대에 따라 다른 시나리오들로 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아마겟돈 전쟁은 무엇일까? 먼저 이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시나리오와 해석, 그에 따른 오해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1). 아마겟돈 전쟁의 각각 다른 시나리오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해석은 시대마다 서로 달랐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는 아마겟돈 전쟁을 이슬람 문화권의 터키 제국과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 있을 최후의 전쟁으로 생각하는 아마겟돈 전쟁 시나리오가 대중적인 예언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정세가 바뀌자 아마겟돈 전쟁에 관한 이 예언 해석도 바뀌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되면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본격적인 냉전시대가 시작되자,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아마겟돈 전쟁은 소련이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써 무신론 세력인 공산주의와 기독교 국가들 사이의 최후 대결전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급기야는 중동 지역에서 최후의 대결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새로운 예언 해석이 나돌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도에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냉전 시대도 과거의 역사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몇 번에 걸친 실망을 되씹으면서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깊은 회의와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과연, 아마겟돈 전쟁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일어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 시작되어서 어떻게 종전될 것인가? 또한 그 최후의 대결전에서 누가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인가?
2).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현대 기독교의 견해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하여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또한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최후 종말에 관한 아마겟돈 전쟁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예언 해석들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구 종말에 관한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비기독교인들의 견해
일반 대중적인 잡지나 공상 과학 소설 그리고 영화에서는 아마겟돈 전쟁을 인류와 지구가 전멸하는 최후의 대전쟁으로 소개하고 있다.
2. 세대주의자들의 견해
물론, 일반 잡지나 공상 과학 소설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의 기독교 서적들도 아마겟돈 전쟁을 총과 현대식 무기를 사용해서 싸우는 현대식 전쟁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갈멜산 근처나 아랍의 석유지대와 사해 근처, 즉 중동 지역을 전쟁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남진 세력과 아프리카의 북진 세력, 그리고 서쪽에서 몰려오는 유럽과 미국의 군사력 그리고 동쪽에서 올라오는 2억에 달하는 중공의 군사력이 인류의 최후의 날에 대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견해는 다음과 같이 5가지로 그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A아마겟돈 전쟁의 유일한 승리자는 현재 존재하는 이스라엘 국가이다. 비록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에 대한 은혜의 시간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지금 현재 중동 지역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
B아마겟돈 전쟁은 중동 지역에서 발발하는 국부적인 전쟁을 말한다.
C아마겟돈 전쟁은 총과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물리적인 전쟁이다.
D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는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실제적인 국가나 세력을 의미한다. 마지막 순간에 실제적으로 유브라데 강이 마르는 일이 생기면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라고 표현된 세력에 의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위기의 순간에 기적적으로 구원받고, 승리를 얻게 된다.
E아마겟돈 전쟁을 전후로 현재 존재하는 이스라엘 국민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된다.
3. 역사적인 예언 해석 원칙에 입각한 견해
이것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견해인데,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을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때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재강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과 사단의 세력 간에 펼쳐지는 치열한 마지막 영적 투쟁으로 보는 견해이다.
◈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견해 중 비그리스도인들의 추측과 공상은 제외시키고, 현재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견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과연 어떤 가르침이 성경으로 입증될 수 있는 가르침인가? 성경은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러면 이제부터 아마겟돈 전쟁의 실체를 검증해보자.
2부-누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1). 최후의 승리를 얻을 사람들
누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얻고 살아남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아마겟돈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첫 번째 중요한 열쇠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아마겟돈 전쟁은 이스라엘 국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중동 지방의 무력 전쟁이 될 수도 있고,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과 사단의 백성들 간에 펼쳐지는 마지막 대쟁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요한계시록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할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살펴 보도록 하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2~16.
2). 승리할 사람들의 특징
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사람들의 특징이 위의 성경 구절에 나타나 있다. 그 사실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매우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15. 성경은 최후의 승리자인 사람들을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마지막 투쟁인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옷을 입는 것과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가장 성경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성경 요한계시록 19장은 이 질문에 대해서 매우 놀랄만한 답변을 우리에게 준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 계 19:7,8(킹제임스 성경역).
이 말씀은 마치 안개 낀 바다에 우뚝 서있는 등대처럼 요한계시록 16:15에 기록된 “옷”의 의미를 비추어 준다. 요한 계시록 19장 7, 8절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정결하고 흰 세마포”이다. 그런데 이 세마포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는가?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 (8절)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인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맞기 위한 준비는 “옷”을 입는 것이다.
3). 옷을 입는다는 의미
성경은 성도들이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옷의 의미는 그냥 의복이 아니라 “의의 옷”을 가리키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같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주시는 정결한 의의 옷만이 우리를 하늘 왕국의 시민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사 64:6).
또한 예수께서도 성도들이 마지막 심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복”(옷)을 입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비유로 설명하셨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2:11~13.
또한 세상 역사의 마지막 교회로 표상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에서도 마지막 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반드시 희고 깨끗한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 3:18. 그러므로 옷을 입는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다.
* 옷 = 흰 세마포 = 성도들의 의 = 그리스도의 의의
4). 아마겟돈 전쟁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흰 옷,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 마음과 생애로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새롭게 거듭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에 순종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는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과 혈통에 관계없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얻게 된다. 곧 자아가 죽고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늘 내재함으로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마음속에 덧입혀진 사람들이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며, 바로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비결이다.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들에 대해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3부-2000년 전에 결정된 이스라엘의 운명을 아십니까?
앞의 기사에서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얻는 자들은 혈통적 유대인들이 아니라, 의의 “흰 옷”을 입은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옷 입어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에 순종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영적인 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렇다면, 현재 중동 지방에 존재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이번 기사에서는 바로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록 하자.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심각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유일한 사람들은 구약시대 때로부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던 유대 민족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믿는 것처럼 유대 민족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된 민족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인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이스라엘 역시 유대 민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유대 민족은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약 2000년 전에 이미 잃어버렸다고 선언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 놀라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유대 민족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유예 기간, 70주일
구약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역사를 보면 반역과 불순종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상의 복의 기관으로 삼으시려고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빅성들이 반역을 거듭하고 하나님을 떠나자,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과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 등과 같은 고난을 통하여 유대 민족이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하나님의 선민처럼 살게 되기를 고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유예 기간을 주시는 것이 다니엘 9장 예언이다.
다니엘서 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니엘 선지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을 주시면서, 그들이 메시야와 그분의 복음을 거절할 경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서 가진 특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주셨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조건으로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예언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다니엘 선지자에게 전달하셨다. “네(다니엘)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주일)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단 9:24. 이 70주일 예언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번 주어진 마지막 은혜 기간이었다. 이 예언적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위하여 잘 준비해야만 하였다.
2). 70주일의 의미
다니엘 9장에 나와있는 이 예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70주일” 이라는 암호를 풀어야만 하는데, 기간적인 예언을 해석할 때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풀 수 있는 암호 해독법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1일은 1년이니라” 에스겔 4:6과 민수기 14:34. 건축기사들이 1센티미터를 1미터로 계산하여 도면을 그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기간적 예언을 해석할 때에도 그분께서 지정하신 이 특별한 계산 원칙을 따라야 한다.
다니엘이 이 예언을 잘 이해하도록 가브리엘 천사는 9장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그 설명을 공부해 보면, 성경의 계산 원칙에 따라 70주일은 490일(70주일x7일)이 된다. 그리고 490일은 기간적 예언의 계산 원칙에 의거하여 490년이 된다. 그러면 490년이 시작되는 시점은 언제인가? 계속되는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들어 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7주)와 육십이 이레(62주)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요” 단 9:25.
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70주일 즉, 490년의 시작점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때이며, 그때부터 시작해서 7주일과 62주일 즉, 69주일(69 x 7=483일, 즉 483년)이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70주일 예언의 시작점인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려진 해는 언제인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마지막 명령이 언제 포고되었는가? 에스라 7:7,13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의 중건령을 찾을 수 있다. “아닥사스다 왕 7년에 ... 조서하노니.” 중건령이 내려졌던 아닥사스다왕 7년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해이다. 성경의 관주에 나오는 해석을 보아도, 중건령이 내려진 해는 B.C. 457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70주일 예언의 시작점은 B.C. 457년이다. 예루살렘성의 중건령의 조서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B.C. 457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483년을 내려가면, 역사의 연대표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는 해를 만나게 되는데, 그 해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셨던 해이다. 곧 기름부음을 받으신 해였던 것이다.
3).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신 메시야
누가복음 3:1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침례 받은 해에 관한 매우 결정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디베료 가이사 즉위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으로...” 역사는 가이사가 즉위한 해가 A.D. 12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디베료 가이사 즉위 15년은 A.D. 12년에 15년을 더한 해, 곧 A.D. 27년이 된다. A.D. 27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같은 장 21절에 답이 나와 있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심으로써, 다니엘 9장에 나오는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근거로 당신의 지상 사업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The time is fulfilled, 때가 성취되었고)” 마가복음 1:14~15. 무슨 때가 찼다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9장에 예언되어 있는 69주일(483년)이라는 예언의 때가 찼던 것을 가리키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된 대로 서기 27년에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셨으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공중전도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4). 정확한 시간에 메시야를 살해한 유대 민족
그런데, 70주일 중에 마지막 남은 1주일(70주일-69주일=1주일)동안, 즉 7년 동안에는 무슨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마지막 남은 1주일에 대한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자, 곧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지겠고.”단 9:26. 가브리엘 천사는 62주일 후, 즉 서기 27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하실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1week)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week)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27절. (여기서이레(week)의 절반은 7년의 반이므로 3.5년 즉, 3년 반이 됨)
그렇다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서기 27년 가을부터 3년 반 후인 서기 31년 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메시야의 죽음을 상징하여 드려온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성소의 번제단 위에서 태움으로써,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으며, 양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70번째 주일의 중간인 서기 31년 봄,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더 이상 양을 잡아서 죽이는 제사 제도가 필요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였도다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브리서 10:5~7. “또한이 (구약 시대의)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2,18. 얼마나 분명한 예언의 성취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제사 제도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적이 성소에서 일어났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마 27:50. 성소 안에 있던 성전 휘장이 갑자기 찢어짐으로써, 모세가 제사 제도에 대해서 기록하였던 의문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제사와 예물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셨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골로새서 2:14.
5). 정확한 시간에 결정된 유대 민족의 운명
유대 민족은 메시야를 거절하고 죽였지만,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께서는 70주일이 끝마쳐지는 순간까지 유대 민족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를 고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490년을 채우기까지 반역과 불순종의 길을 고집하였다. 마지막 7년의 절반인 서기 31년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이제 그 나머지 절반인 3년 반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허락하신 70주일의 전체 예언이 완전히 종결된다. 십자가 이후에도 한동안 제자들은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일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3년 반 후인 서기 34년, 새 언약의 복음을 끝까지 거절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경고와 호소의 설교를 하던 스데반에게 산헤드린 공회가 돌로 쳐서 죽이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스데반은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으며 (사도행전 7:51~60), 이로서 유대 민족을 위한 70주일(490년)의 유예 기간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일어난 핍박과 함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8:1~). 바로 이것이 70주일 예언의 끝을 알리는 최후의 신호였으며, 유대 민족의 운명이 영원히 결정되는 순간이었고, 온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 교회 시대가 개막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행 13:46.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유대인들은 한 국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더 이상 한 국가로서 선택받은 백성이 되기를 끝까지 거절하였기 때문에, 서기 34년 이후부터 유대 민족은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이방인과 같이 개인 단위로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민족과 족속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유대인들)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태복음 21:43. 유대 민족은 구약 시대에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볼 수 없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주인공의 자리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누가 유대 민족의 자리를 넘겨 받았는가? 이 흥미있는 문제를 다음 기사에서 공부해 보자.
4부-현대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를 성경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선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어도, 사람들은 신약 성경 마지막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서 어떤 사람들이 새 이스라엘을 구성하면서 요한계시록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는 성경절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새로운 주인공들이 진짜 이스라엘이며, 아마겟돈 전쟁의 주역들이요, 승리자들이다.
사실 이스라엘 나라는 A.D 70년도에 예루살렘이 멸망 된 후, 온 세상에 흩어져 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8년도에 다시 하나의 국가로 재건되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현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현대 실재 이스라엘 나라의 건국을 보고 성경 예언의 성취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현대 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결국 승리하는 편이 바로 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겟돈 전쟁을 러시아와 중국이 실재로 이스라엘 나라로 쳐들어오는 전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참 이스라엘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할 참 이스라엘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가? 현 시대의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잡이이므로 성경을 보면서 연구하기로 하자. 성경은 하나님께서 실재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들이신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을 읽어 보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또한 로마서 2장 28,29 절에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써 있으며, 로마서 9장 8절에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쓰여 있다. 이 성경 구절들에 언급된 이스라엘은 현재 이스라엘 국가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성경절은 영적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데, 실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절하므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영적인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참 백성인 교회가 생긴 것을 가리킨다.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절하여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바울은 사도행전 13장 4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이제, 사도 바울의 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정의를 보자.
2). 참 이스라엘의 정의
◈ 갈 6:15,16 “할례나 무 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성경은 참 이스라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자, 거듭난 자들, 곧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 곧 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흔히들, 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은 유대인들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7장에, 14만 4천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나온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말들을 한다. 그러나 계시록의 12지파의 이름들은 원래의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들과 조금 다르다. 또한 야고보는 성경 야고보서 1장 1절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이 안부의 말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초대 교회들에게 한 것이었으며, 그 교회의 교인들은 이방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진 후에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선택된 민족이 아니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세상에 전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국가 대신 교회를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빛, 곧 진리를 전수하시기 위하여서였다.
하나님께서 이제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영적인 이스라엘로 택하셨다. 초대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제일 먼저 예루살렘과 유대에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진리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도록 계획하셨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3). 현대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
이러한 모든 성경적인 증거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현대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짜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참 교회, 참 백성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실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교회 안에는 참된 알곡만 남게 될 것이고, 마지막에 남은 알곡, 곧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하나님의 증인들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스럽게 싸울 것이다.
현재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옛날처럼 선택된 민족이 아니다. 그들도 다른 민족들과 같이 개인적인 단위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택하신 선민들이 더 이상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을 믿는 교회에게 천국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분부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의 주인공은 유대인들이었다. 실재적인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교회, 곧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더 이상 실재 이스라엘 나라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예언을 살펴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모든 약속들과 예언들이 이제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현대 교회에게로 다 옮겨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조건적이다. 복음을 거절한 유대 국가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선민 국가로서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대신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을 대신 받게 된 것이다.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왕상 9:4-7).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조건적인데, 그 조건은 순종이다.
4).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참 교회
유대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역했을 때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려고 그 고난을 허락하셨다. 그때 여러 선지자들이 일어나 예루살렘과 유대 나라의 회복을 예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을 고취시켜 주었다. 이 회복의 성경 구절들을 어떤 사람들은 1948년도의 이스라엘 나라의 재건국으로 적용시킨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의 회복 예언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 후에 다시 돌아와 느헤미야 때 성전을 재건축하는 일로 이루어졌다.
약속을 받은 자들의 배도나 반역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무조건 성취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그것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이루이지게 된다. 아모스 9장 11절에 보면,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며” 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 이루어졌다고 다음과 같이 적용했다. 사도행전 15장 14~16절을 보자.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였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지어 일으키리니”...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리라는 아모스의 예언을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영적으로 적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벧전 2:9,10). 여기에서 베드로는 고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등장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소개하고 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과 예수를 받아들인 소수의 유대인들과 합하여 새로운 언약 속으로 들어간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고 다 영적인 이스라엘 아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이스라엘 아니다. 열매를 맺는 백성,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성화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 변화함을 받은 사람들이 참 이스라엘이다. 실재 유대인들도 순종치 않고 열매를 맺지 않았을 때에 버림을 받았다. 그 조건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유대인들도 버림받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더 신실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 시작한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경고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꺽기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0,21).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무슨 열매를 말하는가?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품성을 닮은 열매,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순종의 열매를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복하며, 주님과 늘 동행하고, 마음속에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그리스도의 의의 옷, 곧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때에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될 것이다.
5부-유대 민족 전체가 개신교회로 개종하게 될까요?
앞에서 우리는 현재 이스라엘 국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고 영적인 하나님의 참 백성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모르고 또 잊어버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과 심지어는 많은 무신론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재 이스라엘 나라를 마치 성경의 마지막 예언을 성취시킬 주인공인 양 생각하여, 중동 지방에서 되어가고 있는 일들의 귀추를 열심히 주목하고 있고, 또한 그곳으로 이민을 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때에 자신도 그 대열에 참여하여 유대 민족의 승리와 영광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로 이민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한다. 빗나간 확신을 가지고 그토록 엉뚱한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신약 요한계시록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지금 현재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여자의 남은 자손” 즉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대 민족의 지파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을 잘못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국가가 언젠가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인 노선을 완전히 바꾸고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킬 것이며, 과거에 거절하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진실한 개신교 국가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어디서 이러한 오해가 시작되었는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오해가 유대 국민 전체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빗나간 추측을 유도하였다.
1). 조건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이 아니다. 한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운명은 이미 2000년 전에 결정되었다. 그들 역시 우리 이방인들과 같이 개인 단위로 구원과 심판을 받을 뿐이다.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지만, 그들은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일에 실패하였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은 조건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구원을 유지하고 축복에 대한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한 조건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순종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고, 불순종하면 끊겨져 나간다”는 것이다. “네가 만일 ...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 내가 너희 이스라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면 ...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며 내 이름을 위하여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왕상 9:4~7. 이와 같은 하나님의 조건을 이해하지 못할 때, 아마겟돈 전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현재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명예에 대한 말씀을 인용한다. 그들은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서 등에 언급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최후의 승리에 관한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 후에 본국으로 귀향하는 예언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불순종하는 반역의 길을 걸어갔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군대에 포로로 잡혀서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허락하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언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소망을 고취시키셨다. 과연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만에,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스 강의 하상을 통하여 바벨론성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기이한 전략을 성공시킴으로써 바벨론 제국은 몰락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은 과거에 이미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물론, 구약에 나오는 여러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하여 영광스럽게 묘사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을 다스리게 될 이스라엘의 명예에 대한 수많은 약속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분명한 조건 하에서만 성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고대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의 배도와 반역과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성취되어야 하며, 또한 그러한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유대 민족은 언젠가는 민족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성서적도 아니며 합리적인 생각도 아니다.
2). 그 당시에는 유대 민족에게, 미래에는 전 세계로
기간적인 예언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1일을 1년으로 환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오는 예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이 있다. 만일 이 원칙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아무도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이 역사와 예언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심각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이 원칙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일어나게 될 아마겟돈 전쟁이 중동 지역의 국부 전쟁으로 제한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아마겟돈 전쟁의 주인공을 유대 민족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성경 해석 원칙이란 무엇인가? 예언은 1차적으로 그 당시에 문자적으로 적용되며, 2차적으로는 미래에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영광스러운 약속들이 일차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반역의 길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 “순종”이라는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성취되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유대 민족에게 성취될 수 없었다.
그러나, 비록 유대 민족의 불충실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1차적으로 당대의 유대 민족에게 성취되지 못했을지라도, 그 약속들은 결코 무효가 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그 약속들은 2차적으로 신약 시대에 태어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세계적이고 영적으로 적용된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 민족의 거절과 반역으로 성취되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은 세계 도처에 있는 신약 시대의 영적 아브라함 자손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성취된다.
이러한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고대 이스라엘이 원수들을 쳐부수는 승리의 장면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곧 건축하게 될 장엄한 성전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에스겔 40~48장에는 그 성전의 크기와 실제 모양이 어떠한지가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 성전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다른 선지자들 역시 그 성전의 건축내지 재건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그 중 아모스 선지자는 성전의 재건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며” 암 9:11.
이러한 구약 성경의 예언을 근거로 해서, 어떤 사람들은 미래의 어느 때에 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전이 유대 땅에 실제적으로 건축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언이 당대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을 영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다는 예언 해석 원칙을 유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취되지 않은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세계적으로 그리고 영적인 의미로 적용시켰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였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4~16. 여기서 바울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재건한다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의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지는 것에 적용하여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부터, 즉 신약 성경에 기록된 성전은 문자적인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온 세상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영적인 교회를 가리킨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3). 빗나간 적용의 결과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오늘날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에게 적용할 때에 심각한 오해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유대 국가가 그들에게 주어진 70주일이라는 예언적 기간이 끝마쳐 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메시야를 거절함으로써, 오늘날의 유대 국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아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를 막론하고 구세주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교회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그들이 오래 동안 사용해 오던 관습에 따라서,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약시대부터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표현들과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해서 예언을 상징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배경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이스라엘, 성전, 예루살렘, 시온, 이스라엘 지파 등과 같은 어휘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며,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진짜 이스라엘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영광과 승리를 중동 지방에 있는 유대 민족에게 돌리는 엄청난 착오를 범하게 만든다. 이러한 착오가, 아마겟돈 전쟁이 발발하는 때를 전후로해서 유대 민족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면서 개신교회로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시나리오로 발전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못 박고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그들은 희고 정결한 의의 옷을 입고 다니는 새 이스라엘이지, 2000년 전에 민족과 국가로서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된 유대 민족이 아닌 것이다.
6부-아마겟돈 전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까?
아마겟돈 전쟁이란 마지막에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감행하는 악인들의 최후의 공격을 말하며, 사단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있을 전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성경적인 해석이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전쟁이 언제쯤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사건들의 순서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마지막 사건들이 어떠한 순서로 일어날 것인가를 알면, 아마겟돈 전쟁의 전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마지막 사건들의 순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짐승의 표 강요
마지막 사건은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계 13:15~17. 이 말씀은 사단과 그의 지상 대리자들에 의해서 전 세계적으로 짐승의 표가 강요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고 파는 매매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사형 명령이 세계적으로 발표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
오늘날에는 마치 하나님과 사단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짐승의 표가 세계적으로 강요되는 그날이 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든지 사단을 경배해야 하는 마지막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 그 때에 세상은 완전히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인을 받은 참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고, 사단에게 속한 무리들은 짐승을 경배함으로써 그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을 뿐 아니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죽일 것인데, 바로 이것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있는 선과 악의 마지막 대쟁투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은, 온 세계가 둘로 나누어지는 배경에는 누구를 경배(worship, 예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경배”라는 단어는 종교계에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뿐만 아니라, 짐승을 경배하는 무리들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양쪽 다 그리스도인들이 중심 세력을 이루게 될 것인데, 한 무리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로만 형성될 것이며, 다른 무리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종교,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사항은 “어떻게 이방 종교와 세상 사람들이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하게 될 것인가?” 라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이 의문에 대한 힌트가 기록되어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계 13:13,14.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이방 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하나로 끌어 모으는 방법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놀라운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다. 사단은 자신의 대리자인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온갖 기적을 행하게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세상 사람들이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미혹할 것이다.
2) 은혜의 시간의 끝
마지막 시대를 위한 가장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 요한계시록 14:9~10에 나타나 있다.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서 완전히 거두어지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부어지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사단의 세력은 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경배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최종적으로 거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들을 자행함으로 인류의 반역과 죄악은 그 한계를 채우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 대한 은혜와 자비의 손을 거두실 수 밖에 없게 되고, 이로써 마지막 7재앙은 시작된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계 15:1.
온 세상이 사단의 대리자들이 일으키는 기적과 이적에 기만당하여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만,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짐승의 우상에 대한 경배와 짐승의 표를 거절한다. 이러한 거절이 하나로 연합된 사단의 대리자들과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핍박의 정신을 불타오르게 만든다.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마지막 대쟁투는 선과 악의 쟁투이다. 마지막 대쟁투는 짐승의 표를 받은 악인들과 그것을 거절한 의인들 사이의 쟁투이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고, 하늘의 놀라운 기적과 능력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데, 왜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이유로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면서 의인들을 핍박하며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과 오해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장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일곱 재앙을 악인들에게만 내리도록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 이때에 세상의 은혜의 시간이 끝나는 것이다. 악인들은 재앙의 원인을 의인에게로 돌림으로써, 박해의 불길을 더욱 드높힐 것이지만, 계속되는 재앙들을 통하여 악인들의 마음에 “왜 우리와 연합하지 않는 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데, 우리들에게는 온갖 재앙이 내릴까?”라는 의혹이 생기게 될 것이다. 물론, 7재앙이 의인들에게도 불편과 어려움을 줄 것은 사실이지만, 악인들에게는 직접적으로 가해질 것이다.
3). 7 재앙
짐승의 표 강요 사건이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은 악인들에게 내리는 일곱 재앙 역시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곱 재앙의 순서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앙: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지금은 의인과 악인이 공히 질병과 전염병의 피해를 당하지만, 이때부터는 오직 짐승의 표를 받은 악인들에게만 재앙이 집중적으로 내린다.
둘째 재앙: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셋째 재앙: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넷째 재앙: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다섯째 재앙: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다섯째 재앙은 짐승의 보좌가 있는 장소를 암흑으로 둘러치는 재앙이다. 이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세력의 정체와 그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며, 누구 때문에 일곱 재앙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나타내 보이신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며, 어떤 무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무리인지를 온 세상 앞에 드러내기 시작하실 것이다.
여섯째 재앙: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2~16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주제인 아마겟돈 전쟁이다.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은 일곱 재앙 중에서 여섯번째로 내리는 심판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은 사단의 편과 하나님의 편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인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게 되는 영적 전쟁이다. 사단의 편에서 전쟁을 주도하는 세력은 “세 더러운 영” 즉 “귀신의 영”들이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들, 즉 하나님께 목숨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는 진짜 이스라엘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다.
일곱째 재앙: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니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이러한 일곱 재앙을 통과하면서 지구는 황폐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의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은 언제 일어나는가?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강요하는 무리와 그것을 거절하는 무리 사이에 마지막 대쟁투가 세계적으로 시작되고,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성도들이 핍박과 순교를 당하는 사건들이 생길 때, 이 때 내리는 일곱 재앙 중에서 다섯 번째 재앙이 내린 직후에 세계적으로 아마겟돈의 대쟁투가 일어난다.
7부-사단의 군대를 지휘하는 세 장군의 전략은?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묘사를 읽어보면, 사단의 편에 서서 그의 악령들의 능력과 사주를 받아서 최전방에 나서서 싸우게 될 세 장군이 나온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한다면, 아마겟돈 전쟁을 위하여 세어놓은 사단의 전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누가 또는 무엇이 사단이 사용하는 세 장군인가? 요한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의 장면을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2~16.
1). 세 장군
1. 세 장군의 이름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모여 있는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면서 “옷”을 입고 있다고 묘사했던 것처럼, 사단의 깃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고 묘사하였다(13절). 바로 여기에 사단이 사용하는 세 장군의 정체가 그려져 있는데, 그들은 “세 더러운 영” 즉 “귀신의 영”들이며, 그들 각자의 이름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이다.
2. 세 장군의 전략
사도 요한은 세 장군, 즉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아마겟돈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하여 어떻게 사람들을 기만하여 사단의 편으로 끌어들인다고 했는가?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4절. 그들의 전략은 “이적”을 사용하는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을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시키고, 그의 표를 강요하기 위하여 사용했었던 전략인 “이적으로 끌어 모으는 작전”은 아마겟돈 전쟁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단은 세 더러운 영들 즉, 거짓 선지자와 짐승과 용을 사용해서 온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천하 임금들” 즉 각국 정부의 권력자들까지도 기적으로 미혹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3. 세 장군의 정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단의 세 장군은 총과 미사일을 사용하는 군대가 아니라 종교적인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적”은 종교의 영역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세 장군의 이름 중의 하나가 “거짓 선지자”라고 표현된 것을 보아서도, “세 더러운 영”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기독교회뿐만 아니라 뉴 에이지나 강신술과 같은 이방 종교를 포함한 종교적 세력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사단이 베푸는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하나의 연합된 세력으로 뭉치게 된다.
개구리가 혀로 먹이를 잡아먹는 것처럼, 이들 세 가지 종교 세력도 그들의 입으로 거짓 가르침과 이적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을 사단의 먹이로 만들어 간다.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13절. 용은 이교의 세계와 세상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강신술과 거짓 계시들을 말하며, 짐승은 교황권의 세력을 말하고, 거짓 선지자는 타락한 교회들을 의미한다.
2). 세 장군의 기만 전술을 피하는 방법
사단이 조종하는 이 세 장군의 기만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의 쟁점과 공격 목표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마지막 대쟁투의 핵심 쟁점(issue)인가?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사단이 마지막 시대에 총력을 기울여서 싸우는 공격 목표가 나오며, 14장에는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승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1. 사단의 공격 목표
“용(사단)이 여자(교회)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사단과 그의 세 장군은 “여자의 남은 자손”을 없애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일 것인데,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은 “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공격 목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 않고 그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 역시 사단의 공격 목표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사도 요한의 계시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1,12. 요한계시록 12장과 14장에 기록된 이 두 말씀은 모두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가 “하나님의 계명”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일어나는 대쟁투의 중심이며, 모든 혼돈과 기만을 벗어날 수 있는 열쇠이다.
2. 승리하는 자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논리적인 예측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사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사도 요한의 계시록으로 가서 과연 어떤 사람들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는지를 확인해 보자.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아마겟돈 전쟁의 최후 승리자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동일한 묘사를 하고 있다. “누구든지 깨어서 자기 옷을 지”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진짜 이스라엘이며,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다. 사단이 “이적”을 통하여 온 세상을 기만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사단과 세 더러운 영들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부인하고, 좁은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사는 것이다. 반면에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지 않은 채, 각종 은사와 기적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감정적 확신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들은 세 가지 종교 세력들에 의해서 가장 쉽게 기만당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이 폐하여졌다고 가르치면서, 기적과 각종 은사들만을 강조하는 종교 세력을 조심해야 한다!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죄된 삶을 살아도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설교하는 종교 세력을 조심하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오해와 비난이 쏟아지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3). 사도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도 “그때(말세)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을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던 것이다(살후 2:9,10). 말세에 “불법한 자” 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모든 능력과 기적과 속임수를 행할 것이라는 바울의 경고를 간과하지 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 재림의 징조를 설명하시면서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6번이나 반복하시면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고 경고하셨던 것이다(마 24:24).
사단과 악령들은 총력을 다하여 사람들을 기만할 것이다. 그리하여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치 하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이 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과 이방 종교인들도 그들의 놀라운 기적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놀랍고도 기만적인 분위기하에서 온 세상의 국가와 정부 권력자들까지도 미혹당하여 세 종교 세력 즉, 사단이 지도하는 이방 종교의 강신술 세력(용)과 교황권 세력(짐승), 그리고 타락한 교회(거짓 선지자)의 연합된 요구에 따라서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형 명령을 내리는 일을 추진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놀라운 기만적 분위기는 아마겟돈까지 연결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의 대쟁투는 연합된 종교 세력과 국가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함으로써, 극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소수의 무리는 온 세상의 비난과 조롱과 핍박하에서도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으로 그들의 자리를 지키게 될 것이다.
8부-아마겟돈 전쟁은 어디서 일어날까?
아마겟돈 전쟁을 사단의 편에서 주도하는 세 더러운 영들이 어디로 사람들을 모은다고 하였는가?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계 16:16.
사도 요한은 전쟁이 일어나는 곳을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어디인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정통한 학자들은 사도 요한이 말한 아마겟돈(Armageddon)은 헬라어로 Har-megedo(산-므깃도) 이며, 이것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그러면 “므깃도”란 어디를 말하는가? 그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신의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 대쟁투가 벌어졌었던 “갈멜산”의 아래에 펼쳐져 있는 조그만 평야와 계곡의 지명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음으로 아마겟돈, 그리고 헬라어로 Har-megedo(므깃도의 산)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갈멜산”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전쟁을 실제적인 중동 전쟁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갈멜산 아래에 있는 평야와 계곡에 온 세상의 군대들이 집결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공격하는 전쟁을 벌인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많은 군대들이 모여들어서 전쟁을 벌이기에는 이 갈멜산 아래에 있는 평야가 너무나 협소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한번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곳에서 온 세계로부터 집결한 수많은 군대들이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을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비성서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사단의 대리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설명하면서, 왜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인 갈멜산을 언급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구약 시대에 갈멜산에서 있었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신의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 있었던 투쟁을 통하여 아마겟돈 전쟁을 묘사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멜산에서 있었던 투쟁과 아마겟돈 전쟁에서의 대쟁투의 비교표를 만들어 살펴보면,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실체를 좀 더 정확하게 엿볼 수 있다.
요한은 구약 시대에 있었던 갈멜산에서의 투쟁을 통하여 세상 끝에 있을 아마겟돈 전쟁을 상징적으로 조명하였다. 그 당시의 정치 세력인 아합왕권과 종교 세력인 바알신의 거짓 선지자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참 백성인 엘리야를 향하여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던 극적인 클라이맥스가 갈멜산에서 있었던 것처럼, 사단의 거짓 종교 세력과 그들에 의해서 미혹당한 세상 정권들이 연합하여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인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핍박과 박해의 불길을 치솟게 하는 클라이맥스가 아마겟돈 전쟁이다. 이 마지막 투쟁의 결과, 갈멜산 위에서 바알의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이 폭로되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적인 정체가 폭로되고, 산채로 유황불 못에 들어가게 되는 심판을 받게 된다.
아마겟돈 전쟁은 어디서 일어날까? 이 전쟁은 중동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에 대한 핍박의 불길인 동시에,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마지막 영적 대쟁투이다.
9부-유브라데 강물이 마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계 16:12.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유브라데 강물이 실제적으로 마르면서 동쪽으로부터 오는 엄청난 군사력에 의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마지막 순간에 기적적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이것은 어떤 다른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1). 실제가 아니라 상징
유브라데강이 마르는 사건을 실제로 해석하지 않고, 상징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브라데강은 그것이 말라야만 현대식 장비를 갖추고 있는 군대가 도하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은 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물이 아무리 많이 불어나 있을 때라도 요즘처럼 현대화된 군대에게는 전혀 장애가 될 수 없다. 가장 도하하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볼 수 있는 시리아 지역의 강폭은 불과 1마일 미만에 불과하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낡은 장비를 가지고 있던 연합군도 악천후 속에서 폭이 100마일이 넘는 영국 해협을 도하하는데 성공하였던 사실을 돌이켜 보면, 오늘날의 초현대식 군대가 유브라데 강이 기적적으로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도하 작전을 실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유브라데강이 마르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에 사단의 대리자들에 의해서 핍박당하면서 쫓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는 기적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사도 요한은 구약 성경으로부터 두 가지 사건을 빌려와서 아마겟돈 전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하나는 앞에서 설명하였던 갈멜산에서의 사건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페르샤의 고레스왕이 유브라데강을 기이한 방법으로 말림으로써 바벨론을 멸망시켰던 사건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고레스왕이 유브라데 강물을 말리게 된 사건의 배경과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아마겟돈 전쟁에서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는 사건의 의미를 알아 보도록 하자.
2). 고대 유브라데스 강물이 마르는 사건
먼저, 이 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계속적으로 불순종의 길을 걷자,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잡혀가서 종살이하는 고난을 허락하셨다.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정복하던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지 거의 70년이 되던 때였다. 고레스 왕은 그 당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바벨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특별한 전략을 생각해 내어야만 하였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왕은 비밀리에 유브라데 강물을 옆으로 빼어 돌림으로써, 강물의 수위를 크게 낮추는데 성공하였고, 이로 인하여 유브라데 강물이 관통하여 흐르던 성밑 수문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달밤에 고레스 왕의 군대는 유브라데강의 하상을 도보로 걸어서 바벨론 성안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이 이 땅에 태어나기 150년 전에 이미 “고레스”란 이름을 정확하게 지목하시면서 위에서 언급한 고레스 왕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미리 예언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사 44:27,28.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 강물을 말리는 전략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킬 것과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이 중건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을 아셨다. 얼마나 놀라운 예언적 안목인가!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고레스 왕의 전략을 인용하면서,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계 16:12). 유브라데강은 바벨론 성을 관통하면서 흐름으로써, 고대 바벨론을 유지시키는 젖줄이었다. 유브라데 강물이 마른다는 것은 곧 바벨론의 생명줄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영적으로 아마겟돈 전쟁에 적용시키면, 구약 시대에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 강물을 빼돌림으로써 바벨론성을 함락시켰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 장군(용, 짐승, 거짓 선지자)으로 등장하는 세 가지 종교 세력인 영적 바벨론을 지지, 후원하던 젖줄을 마르게 하심으로써 사단의 세 장군을 몰락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단의 세 장군인 영적 바벨론을 지지하던 세력이 어떻게 마르게 되는가? 요한계시록 17장에 그 힌트가 나온다.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계 17:15. 그렇다! 유브라데강의 “물”은 백성들, 즉 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브라데강이 마른다는 뜻은 온 세상 사람들이 사단의 세 장군(용, 짐승, 거짓 선지자)에게 보내던 지지와 후원을 중지함으로써, 그 세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고대 유브라데강이 바벨론을 유지시키는 주요 자원이지만, 후에는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유브라데강의 “물”(백성, 사람들)은 영적 바벨론의 세력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된다.
3). 유브라데 강물이 갑자기 마르는 이유
그런데, 왜 온 세상 사람들이 사단의 대리자들에게 보내던 지지와 후원을 갑자기 중지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곱 재앙을 악인들에게만 내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여섯째 재앙인 아마겟돈 전쟁의 전후에 나오는 다섯째 재앙과 일곱째 재앙,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17장에 차례로 나오는 장면들은 유브라데 강물이 갑자기 마르는 이유와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섯째 재앙: “여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 지고” 계 16:10.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보좌”가 있는 장소를 암흑으로 둘러치심으로써, 사단의 세 장군 중의 하나인 짐승의 정체와 그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며, 누구 때문에 일곱 재앙이 내리게 되었는지를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신다. 또한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며, 어떤 무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무리인지를 온 세상 앞에 드러내기 시작하심으로써, 사단의 대리자들의 기만적인 정체를 드러내신다.
일곱째 재앙: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되어 그의 맹렬한 분노의 잔을 받으니” 계16:19. 여기서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단의 세 장군 역할을 했었던 세 더러운 영인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연합 세력이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등장한다. 일곱 번째 재앙에는 하나님의 참 백성을 괴롭히던 바벨론이 무너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진다는 뜻은 사단의 연합 세력인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세 종교적 연합 세력이 세 갈래로 분열된다는 의미이다. 이 때에 종교 세력뿐만 아니라, 이들을 후원하던 각국의 정치적 세력들도 붕괴된다.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계 16:19
악인들은 재앙의 원인을 의인에게로 돌림으로써, 박해의 불길을 드높히지만, 계속되는 재앙들을 통하여 악인들의 마음에 “왜 우리와 연합하지 않는 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데, 우리들에게는 온갖 재앙이 내릴까?”라는 의혹이 생기게 된다. 또한 자신들이 핍박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생애와 품성에 나타나는 거룩한 증거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사단에게 기만당했음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일곱 재앙의 고통스런 과정 속에서, 사단의 세 장군에게 보내던 세상 사람들의 지지와 후원은 완전히 중단된다.
요한계시록 17장: 요한계시록 17장에는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는 장면이 좀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바벨론이 음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 그(여자)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 ...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계 17:1,2,5,15,16. 요한계시록 17장 후반부에는, 세상 사람들이 사단의 세 장군(용, 짐승, 거짓 선지자)에게 보내던 지지와 후원을 완전히 중단할 뿐 아니라, 그들을 향하여 참혹한 복수를 가하는 두려운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영적 유브라데 강물이 말라가는 과정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된다.
10부-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제일 마지막 장면을 살펴볼 것이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강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계 16:12. 하나님의 백성을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구원해 내기 위하여 동쪽 방향에서 나타나는 동방의 왕들은 누구인가?
1). 도적같이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구원자
아마겟돈 전쟁을 설명하는 요한계시록 16장 본문에서 직접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4,15. 이 말씀에는 사단의 세 장군이 “세 더러운 영”들이 이적을 통하여 온 천하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장면이 나오면서, 예수께서 “도적같이” 재강림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이어서 재강림 때에 승리하며 살아남게 될 사람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있다. 그렇다! 동방(동쪽)에서 오는 왕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타나는 방향을 동쪽으로 표현한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27.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이 나니” 겔 43: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돋는 데(동쪽)으로부터 올라와” 계 7:2.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재강림을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라는 복수로 표현하였는가? 왜냐하면 그 때에는 천만천사들을 대동하고 오시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동방의 왕들”이 오는 모습이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오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19:14,16. 계속해서 이어지는 장면에는 예수께서 천만천사 대군과 함께 재강림하시면서 아마겟돈 전쟁의 전범들을 체포하여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 말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계 19:20,21
2).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구약 시대의 고레스 왕의 이야기를 아마겟돈 전쟁에서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는 사건에 영적으로 적용하였다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구원하는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구약 시대에 고대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압제에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동방에서 온 고레스는 영적 이스라엘을 영적 바벨론에서 구출하는 “동방에서 오는 왕들”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에 대하여 소개하는 표현들을 살펴보면, 마지막 시대에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누구인지를 재 확인할 수 있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 나의 목자라 ...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고레스” 사 41:2;44:28;45:1.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고레스 왕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표현, 즉 1)동쪽 방향에서 나타나시고, 2)모든 악인들의 세상을 굴복시키고, 3)목자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으며, 4)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소개를 받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 오직 한 분밖에 없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대리자들에게 쫓기고 핍박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야말로 유일한 소망이다. 애굽의 바로왕 군대에게 쫓기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홍해를 가르셨던 예수께서, 아마겟돈 전쟁에서는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하늘을 가르시면서 나타나심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하늘로 데려 가실 것이다.
마치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은 실제적인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사단의 백성 사이에 있을 최후의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에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자신이 죽고 마음속에 예수께서 온전히 임재하시는 경험을 매일 하는 사람만이 아마겟돈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다. 이제 곧 머지않은 장래에 지구 최후의 싸움인 아마겟돈 전쟁이 치루어 지게 될 것이다. 두 무리가 갈라지고 있으며 서로 전쟁을 위하여 칼들을 갈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그때에 나는 과연 어느 무리에 속해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갑옷을 입음으로 죄를 승리하고 예수님의 성품인 흰 세마포를 덧입어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