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전무후무한 런앤건 슬램덩크팀
1983년 휴스턴 Cougars를 소개합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세 시즌 동안에 걸쳐 미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농구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휴스턴 대학교의 농구팀 Cougars입니다. 여러 회원들이 익히 잘 아시는 아킴 올라주원과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끌었던 위대한 대학 농구팀이지요.
이 80년대 초반의 휴스턴 대학 농구팀은 미국 농구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팀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휴스턴대 농구 하일라이트입니다.
올라주원의 블락샷과 드렉슬러의 덩크에만 편중된 영상입니다.
이 대학교가 남겨놓은 농구 유산을 언급하기에 앞서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Run-and-Gun 농구의 역사적 고찰
100여년 전 네이스미스 박사가 창안해 낸 농구란 스포츠는 60년대에 레드 아워백 감독과 빌 러셀이 이끌었던 보스턴 셀틱스 (13년 동안 11회 우승)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곧이어 대학 농구에서도 명장 존 우든 감독과 압둘자바, 빌 월튼이 이끌었던 UCLA가 12년 동안 10번의 우승을 해내며 아마 농구의 왕조를 구축했습니다.
이 두 명장과 두 왕조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기본기’ (Fundamental basketball)였습니다. 이 두 팀은 기본적으로 팀 수비와 리바운드, 그리고 출중한 빅맨을 중심으로 철저한 팀웍에 의거한 공격을 펼치는 전통적인 시스템 농구를 고수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들의 전통적인 농구 스타일에 반기를 들었던 리그가 있었으니 그 리그가 바로 American Basketball Association, 즉 ABA였습니다. 위대한 레전드 빅맨 조지 마이칸이 협회장이었던 ABA 리그는 모든 면에서 NBA와 구별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당시 NBA에서 보기 힘들었던 스타일과 방식들이 리그에 새롭게 도입되었습니다. 3점 라인도 이 때에 생겨났고, 치어리더들의 서비스나 하프타임 때 관중들을 위한 이벤트도 ABA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ABA를 NBA와 다르게 규정지었던 것이 바로 ‘런앤건’ 농구였고 ‘덩크’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에 의하면 ‘런앤건’ 농구와 ‘덩크’는 소위 “저급하고 격조가 떨어지는” 농구였습니다. 레드 아워백 감독이나 존 우든 감독은 ABA의 ‘닥치고 달리며 덩크하는’ 농구를 “길거리 농구” 수준이라고 대놓고 비난했습니다. 레드 아워백 감독은 “ABA는 마이너 리그입니다. NBA의 라이벌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ABA는 줄리어스 어빙을 위시로 두어 명의 NBA급 스타를 보유한 마이너 리그일 뿐입니다”라고 폄하해 말했고, 존 우든 감독은 “화려한 농구, 즉 덩크를 강조하는 ABA 농구가 정통 농구를 나쁜 쪽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팀 아이들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덩크할 때 소모되는 힘을 리바운드와 수비에 쏟아 부으라고.”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70년대에 유일하게 ‘런앤건’ 농구를 구사했던 NBA 팀이 바로 샌앤토니오 스퍼스였지요. ABA에서 NBA로 승격(?)된 팀이었고, 당시 ABA의 스타였던 제임스 사일러스, 조지 거빈, 래리 키넌이 공격 3인방이었던 이 팀은 수비는 신경 안쓰고 무조건 달리며 득점을 하는데만 치중하던 팀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현 스퍼스는 완전히 정반대, 즉 60년대의 셀틱스와 70년대 UCLA의 정형화된 정통 농구 스타일을 통해 우승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런앤건 농구와 덩크가 우습게 여겨지던 시대에 이 두 레전드 명장들이 구축해 놓은 농구 전통에 반기를 든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휴스턴 대학 농구팀의 감독 가이 루이스(Guy Lewis)였습니다. 그의 농구철학은 이 한마디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뛰고 덩크하는 농구도 정상에 올라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다.” 그리고 그는 다음 세 시즌 동안 이 휴스턴 대학팀을 3연속 Final Four에 진출시키는 기염을 토합니다.
Phi Slama Jama
왼쪽으로부터 가이 루이스 감독, 드렉슬러, 올라주원
가이 루이스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후 텍사스주 근방의 준족들과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들이 앞을 다투어 휴스턴대에 입학했습니다. 루이스 감독은 잘 뛰는 빅맨을 구할 수가 없자 아프리카로까지 눈을 돌려 축구 골키퍼였던 올라주원을 스카웃하는데 성공합니다. 평소에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휴스턴 로켓츠의 센터 모제스 말론에게 올라주원을 소개해 주며 개인지도와 편달까지 부탁하는 정성을 보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말론과 올라주원은 의형제 지간이 되었고, 말론은 올라주원에게 NBA 인사이더의 모든 기술을 전수해 주게 되지요.
이제 루이스 감독의 휘하로는 당시 대학 최고의 점프력을 보유하고 있던 스몰포워드 클라이드 드렉슬러, 고등학교 전국 1위였던 슈팅가드 마이클 영, 달리는 터프가이 파워포워드 래리 미샤, 그리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덩크와 블락 뿐이었던 아킴 올라주원이 있었습니다. 가이 루이스 감독은 이들을 포함한 팀 전원에게 NCAA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무조건 점프력을 90cm 이상으로 만들어 갖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결과로 그리 키도 크지 않던 백인 포인트가드 리드 게티스도 점프력을 90cm 이상으로 만들어야만 했던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루이스 감독은 선수들에게 기회만 나면 무조건 속공을 하라고 주문했고, 가능만 하다면 림이 부서질 정도의 덩크로 끝을 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1981~82 시즌. 휴스턴 대학은 폭풍같이 질주하며 전국을 강타했고, 길거리 농구와 과거 ABA 리그의 추억에 잠겨 있던 올드팬들에게까지 어필을 하며, NBA 팀들을 포함 당시에 미국 내에서 최고로 인기좋은 농구팀으로 떠오릅니다. 그동안 대학농구에 소원했었던 TV 중계국들도 휴스턴 대학의 경기만큼은 서로 앞을 다투어 중계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덩달아 NBA에 편향되어 있던 농구팬들의 관심이 대학농구에도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때맞추어 마이클 조던이라는 신성까지 크게 부각이 됐지요. 마이클 조던은 시대도 잘 타고난 인물입니다.
매게임 화려한 덩크로 수놓는 경기력을 선보이며 휴스턴 쿠가스는 비교적 쉽게 Final Four에 안착했지만, 준결승 상대였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게 아깝게 석패를 하지요.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는 전미 대학 최고의 선수, 제임스 워디가 있었고, 노련한 센터 샘 퍼킨스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특급 1년생 가드 마이클 조던까지 버티고 있었습니다. 농구 구력이 1년여 밖에 안된 센터 올라주원과 주전들 대부분이 1~2학년생이었던 나이 어린 휴스턴대가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팀이었습니다. 드렉슬러가 맹활약했지만 전체적으로 경험이 부족했던 휴스턴대는 Final Four 진출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1982~83 시즌. 파이널포에 올라갔던 주전 전원이 돌아온 휴스턴 팀은 오프시즌부터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고, 휴스턴 대학 농구 선수들은 길거리에서, TV 토크쇼에서, NBA 최고 스타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머리가 벗겨지기 전이었던 미남 드렉슬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곳곳에서 그를 습격(?)하는 여성팬들 때문에 학교 측에서 경호원까지 고용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드렉슬러의 플레이는 프로에 들어왔을 때와는 좀 달랐습니다. 당시의 드렉슬러는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뒤로 젖히며 팔을 360도로 휘젓는 폭발적인 토마호크 덩크와 윈드밀 덩크를 자주 터뜨리던 리바운드가 뛰어난 스몰포워드였습니다. 이런 스타일이 부상위험이 매우 크다고 판단한 포틀랜드 잭 램지 감독의 권유에 의해 드렉슬러는 프로에서는 이런 파워덩크를 지양해야만 했고, 대신 패스나 리바운드, 외곽슛 쪽으로 자신의 올라운드 기량을 발전시켜 나갔지요.
1982년 당시에 토마스 봉크라는 휴스턴 신문사의 한 칼럼니스트가 이 매력적인 농구팀에게 Phi Slama Jama라는 별명을 붙여 줬습니다. 우리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슬램덩크 동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곧이어 이 별명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휴스턴대 선수들의 warm-up 져지에는 쿠가스라는 팀명 대신 Phi Slama Jama라는 별칭이 수놓아 졌습니다. 휴스턴 쿠가스는 파죽지세로 31승 2패에 26연승을 기록하며 아주 쉽게 Final Four에 올랐고, 모든 스포츠지는 휴스턴대를 우승후보 0순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멤피스 주립대와의 16강전에서 터진 드렉슬러의 인유어페이스 자유투라인 덩크는 본인 자신도 어떻게 그런 플레이가 가능했었는지 지금도 의아스러워 하는 유명한 덩크이기도 합니다. 당시 AFKN 뉴스가 이 덩크와 휴스턴대의 승리를 헤드라인 기사에 놓을 정도로 휴스턴 쿠가스의 인기는 주한미군들 사이에서도 대단했습니다.
준결승에서 만난 루이빌대와의 격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대학농구 역사상 최고의 경기였습니다 (이경기는 꼭 구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시즌 내내 전미 2위를 고수했던 루이빌대 또한 달리고 덩크하는 농구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팀의 별명 또한 “Doctors of Dunk”였지요. 바야흐로 “슬램덩크 동아리” 대 “덩크 박사들”의 준결승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전반에는 서로 주고 받으며 접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다가 시작된 후반전. 올라주원(20리바운드, 8블락샷)과 미샤의 제공권 장악, 앞선에서 상대팀의 볼무브먼트를 차단하는 마이클 영과 앨빈 프랭클린의 perimeter 수비, 그리고 이어지는 드렉슬러(21점, 8리바운드, 9어시스트, 6스틸 - 드렉슬러의 시즌 평균 스틸이 3.3개였습니다)의 융단폭격이 시작됐고, 순식간에 휴스턴 쿠가스는 점수차이를 15점 차로 벌여 놓습니다. 휴스턴대의 완승으로 경기는 끝이 났고, 휴스턴대는 이 한 게임에서만 18개의 덩크를 성공시키며 “덩크 박사들”을 묵사발로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스포츠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83년 대학농구 준결승전
1983년 결승전은 대학농구 역사상 최고의 업셋이라 불리우는 게임입니다. 휴스턴대는 당시 파이널포 진출만으로도 감지덕지였던 신데렐라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에게 마지막 팁인 덩크를 허락하며 또 다시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맙니다. 패인은 3가지였는데, 첫째로 파이널포가 벌어진 알베쿼키가 고산지대여서 뛰는 농구를 고집하던 휴스턴대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했고, 둘째로 휴스턴팀 선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유투를 너무 많이 실패했으며, 셋째로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석연치 않은 심판의 파울콜로 드렉슬러가 벤치에 대부분 앉아 있었다는 점입니다. 경기 외적인 요소로는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루이빌대와의 준결승을 완승으로 이끈 후 휴스턴대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나태해졌던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경기가 끝나자 코트 바닥에 엎어져 닭똥같은 눈물을 쏟던 올라주원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983~84 시즌을 앞두고 드렉슬러는 중대한 결정을 합니다. NBA 드래프트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이런 결정의 배후에는 드렉슬러의 고향이 연고지였던 로켓츠 구단의 스카우터들과 드렉슬러 사이에 맺어졌던 모종의 구두계약이 있었습니다. 1983 드래프트 1번과 3번 픽, 그리고 1984년 드래프트 1번 픽까지 갖고 있던 휴스턴 로켓츠가 드렉슬러에게 대학 최고스타였던 랄프 샘슨, 아킴 올라주원을 자신들이 뽑을 것이니까 이 둘과 함께 빅 3를 구축해달라고 드렉슬러를 구워 삶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드래프트 당일날 휴스턴은 루이빌대의 로드니 맥크레이를 3번 픽을 이용해 뽑았습니다. '닭쫓던 개'의 꼴이 된 드렉슬러는 설성가상으로 정통 농구만 구사하던 포틀랜드에 의해 드래프트됩니다. 본인의 런앤건 스타일 농구가 빛을 발할 수 없었던 팀이었죠. 최근에 구입해 읽은 드렉슬러의 회고록을 읽어보니, 드렉슬러는 아직도 그때의 휴스턴 구단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더군요.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드렉슬러가 떠난 휴스턴대는 아직도 막강한 팀이었고, 팀의 리딩스코러인 마이클 영과 제공권 장악의 귀재 올라주원을 중심으로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런앤건 농구를 펼치며 1983~84 시즌에 또 다시 Final Four에 진출합니다. 결승까지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온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팀이 있었으니 바로 패트릭 유잉의 조지타운대였습니다. 빌 러셀의 백업요원이었던 존 톰슨 감독이 이끈 조지타운대는 레드 아워백과 존 우든, 그리고 지금의 그렉 포포비치 감독이 사용하는 빅맨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 시스템 농구를 구사하던 팀이었습니다. 이들의 수비에 가로막힌 휴스턴대는 이렇다 할 만한 플레이 하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또 다시 우승의 문턱에서 분루를 삼킵니다.
이렇게 해서 3시즌에 걸친 파란만장한 가이 루이스 감독의 꿈은 끝이 납니다. 82년과 84년은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83년 파이널 만큼은 분명히 런앤건 덩크 농구로 전국을 제패할 수 있었던 시즌이었습니다. 허나 운명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12년 후, 휴스턴 홈구장에서 벌어졌던 1995년 NBA Final 4차전때 그 루이스 감독이 관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두 수제자 올라주원과 드렉슬러가 함께 우승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승 후 인터뷰에서 드렉슬러가 그 날의 우승을 과거의 은사였던 가이 루이스 감독에게 헌정을 한다고 말했을때 가이 루이스 감독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런앤건 농구의 전국제패는 아니었지만 그의 감회는 실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휴스턴대 농구팀이 농구계에 남겨놓은 유산들
40번이 '달리는 터프가이' 래리 미샤, 34번이 올라주원, 22번이 드렉슬러, 42번이 마이클 영입니다.
32번은 드렉슬러의 운동능력을 압도했다던 베니 앤더스, 그리고 앞줄 왼쪽 끝이 리드 게티스입니다.
뛰고 점프하며 덩크하는 농구로 리그를 제패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실제로 보여준 가이 루이스 감독. 그의 이러한 농구는 당시 미국의 1,900만 가정이 1983년 파이널포를 시청하게 만드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농구가 결코 저급한 농구가 아니며 잘만 훈련되면 팬들도 즐겁게 할 수 있고, 나아가 리그도 제패할 수 있는 강력한 농구임을 그가 전세계에 알려 줬습니다. 그가 발굴해서 키워낸 드렉슬러와 올라주원은 길고도 화려한 NBA 커리어를 가져가며 그의 농구철학이 결코 저급하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의 농구스타일에 자극받은 많은 농구팬들의 성화에 힘입어 NBA 협회는 1984년 올스타 게임에 때를 맞추어 1976년 ABA가 이미 창안해서 실행에 옮겼던 슬램덩크 컨테스트를 부활시킵니다. 이러한 것들이 80년대 초반 휴스턴 대학의 Phi Slama Jama가 농구계에 남겨놓은 유산들입니다.
제가 아는 한, 아직까지도 이런 “정통 런앤건” 농구가 NBA 리그를 제패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농구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고유 팀 색깔에 접목시켜서 큰 성공을 거둔 팀이 하나 존재합니다. 바로 80년대의 레이커스죠. 1981~82 시즌이 시작하고 나서야 팀의 지휘봉을 잡은 팻 라일리 감독은 이러한 농구 방식을 자신의 팀에 응용해서 리그를 제패했습니다. 물론 80년대의 Showtime Lakers는 런앤건 농구는 구사했지만 압둘자바라는 빅맨을 중심으로 한 팀수비와 제임스 워디가 이끈 하프코트 오펜스도 뛰어났던 팀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매직 존슨의 힘과 사이즈를 앞세워 상대팀에 따라 스타팅 멤버 전원을 202cm 이상의 장신선수들로 가져갈 수 있었던 특이한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이 루이스 감독의 농구철학이 이 80년대 레이커스의 속공농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현재 우승권에 근접해 있는 피닉스 선즈의 런앤건 농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연 런앤건 농구로 리그를 제패할 수 있을까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의 런앤건 농구가 우승을 하기에 부족하다면 그 부족한 부분을 더 뛰는 농구로써 메꾸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한 댄토니 감독의 말이 제 귀에 메아리 치는 1월의 밤입니다.
글: Doctor J
|
첫댓글 83년에 NCSt가 분전한 가장 큰 이유는 챔피언쉽 전 연습 당시 휴스턴은 거의 전원이 슬리퍼 찍찍 끌며 거의 놀러 나온 분위기라 울팩에게 스팀팩을 먹인 꼴이 되었죠.
예 맞습니다. NCSt대를 너무 우습게 봤었지요. 루이빌대와의 준결승이 사실상의 결승이었기 때문에 그 경기를 승리한 후 휴스턴대는 이미 우승을 딴 것처럼 긴장을 완전히 풀었었죠.
최연길님이 등장하시네요~^^
멋진글 잘읽었습니다^^ 역시 Doctor J님글ㅋㅋ
Run&Gun이 우승한 경우 꽤 있습니다. 90년 UNLV, 64년 UCLA 등이 있죠.
그렇지요. 제가 '전무후무'라고 강조한 것은 80년대 초반의 휴스턴대처럼 모든 속공이 호쾌한 덩크로까지 이어지는 특이한 런앤건 스타일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패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은 대학농구가 아니고 NBA "리그"를 말한 것이었죠.
꺅~ >_<;; 연길오라버니~♡
이야~~~ 정말 대단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올라주원이 농구를 대학때 시작했었군요. 근데 어떻게 그런 레전드가 됬을까 ㅡㅡ 그리고 마이클 영 저선수는 NBA에서 성공 했나요?
불행히도 마이클 영은 NBA에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984년에 보스턴 셀틱스에 의해 1라운드에서 드래프트가 됐지만, 아시다시피 당시의 보스턴 셀틱스는 래리 버드 휘하에 패리쉬, 맥헤일, 데니스 존슨, 데니 에인지가 꽉 잡고 있던 팀이라 아예 출장기회도 못 받았습니다. 대신 영은 프렌치 리그로 가서 대스타가 됩니다. 1993년에는 소속팀인 리모게스가 프랑스 농구 클럽으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로리그에서 클럽대항 챔피언쉽을 따냈었는데, 이 때 이 우승팀의 에이스로서 일등공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을것같네요 ^^
직접적인 휴스턴대 관련 영화는 아니지만, 83년 휴스턴을 업셋시킨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의 명장 지미 발다노씨의 짧은 생애를 그린 다큐멘터리 형식의 전기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휴스턴 대학이 당시 농구에 미친 효과에 대해서도 간헐적으로 다뤄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KBL에도 이런 팀 나오면 좋으련만~
결과론적으로 그해 드래프트에서의 로케츠의 픽은 완전 뻘짓이 되었군요;;;;만약 드렉슬러와 올라주원이 애초에 같은 팀에서 뛰었다면 역대 최고의 듀오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만약 그랬었다면 역대 최고의 트리오가 나왔겠지요 - 드렉슬러, 샘슨, 올라주원. 그런데 오히려 드렉슬러 개인적으로는 포틀랜드에 갔기 때문에 더 완전한 농구인으로 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휴스턴으로 갔었다면 덩크만 호쾌하게 잘 하는 스윙맨 소리 듣다가 부상과 함께 은퇴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포틀랜드의 잭 램지 감독은 드렉슬러를 운동능력에만 의존하는 선수가 아닌 모든 것을 두루 잘 할수 있는 기본기가 탄탄한 올라운더로 키워 줬습니다. 드렉슬러의 커리어 평균인 20.4점, 6.1리바운드, 5.6어시스트, 2.0스틸이 그의 올라운드 능력을 잘 설명해주지 않습니까?
와 진짜 정신 없이 읽엇습니다~ 닥터j님 글 정말 잘쓰시네요~~ 하킴의 휴스턴대가 유잉의 조지타운대에게 파이널에서 패했고 NBA 파이널에서 이둘이 리턴매치를 했을때는 올라주원이 이긴 정도만 알고있었는데요~~ 드렉슬러,올라주원,루이스감독의 휴스턴대에게 이런 스토리가 있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좋은글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이~야 엄청난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한수 배우네요. 이분글 볼때마다 항상 겸손해집니다.
정말 재밌게 잘봤습니다.. 드렉슬러 머리벗겨지기전의 모습도 한번 보고 싶네요 ㅋㅋ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제 알럽 베스켓볼 게시판에서 닥터 J님 글 볼때마다 정신없이 읽게 된다는...
닥터제이님글 잘읽었습니다... 이런말씀 드려도될지 모르겠지만 닥터제이님이 쓰신 글만보면 제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저도 닥터제이님처럼 저런 지식을 많이 쌓았으면 좋겠는데...^^
칭찬은 너무 고마운데..... 제 글을 보고 부끄러워지신다니요? -_-;;)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제가 지식을 많이 쌓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카페 회원들보다 나이가 좀 더 많은 관계로 일찌감치 농구를 접했어서 발생하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입니다. 짬밥의 차이지 지식의 차이가 아닙니다. 요즘같이 정보들이 많은 세상에서 NBA를 알아 가시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저는 일찌감치 정보의 홍수 속에서 농구를 알아가시는 요즘의 젊은 NBA 팬들이 너무나도 부러운 올드팬일 뿐입니다.^^
추천입니다요 ^^
잘 봤습니다~~~조던 안티의 반사효과로 드렉슬러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써 머리 안 벗겨진 드렉슬러의 얼굴 클로즈업 사진을 보고 싶은데 가능할런지요?ㅎ
사진게시판 9078번 글에 몇장 올려 놓았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한참 전 이야기들이라 꼭 옛날얘기 듣는것처럼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나중에 제이박사님 글을 책으로 엮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_-;;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휴스턴대가 당시에 강한팀이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매력적인 팀인줄 몰랐네요.
3.3스틸이라....무서워서 패스나 하겠나...--;;
저 당시의 올라주원은 팀의 공격옵션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수비리바운드와 블락샷 밖에는 할 줄 아는게 없었던 미완의 대기였죠. 팀의 리딩스코러는 마이클 영이었지만... 휴스턴대의 공격과 수비는 드렉슬러에 의해 시작됐고 드렉슬러에 의해 끝이 났었습니다. 저 시즌에 스몰포워드 드렉슬러의 시즌 평균은 15.9점, 8.8리바운드, 3.8어시스트, 3.3스틸이었고 야투성공률은 55%였습니다. 굉장히 이타적인 팀의 에이스이자 플레이메이커였죠.
이야 글 잘 읽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라인업이네요. 특히, 마이클 영 선수에 관심이 가네요.
매력있는 선수였습니다. 기본기가 출중했고, 슛폼도 좋았던 왼손잡이 선수였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엔 이 마이클 영이 텍사스 주 최고였습니다. 드렉슬러는 그냥 영에게 묻어서 휴스턴 대학에 들어 왔는데... 2학년 때부터 영을 추월하기 시작했지요. 둘이서 3학년이 됐을 시점엔, 팀의 에이스이자 the man은 드렉슬러의 몫이었습니다.
이 글 처음 읽었을 때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
클래식 게시판에 이동됐길래 복습하고 갑니다..^^
정말 상상만 해도 흐뭇하면서도 멋진 조합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