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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소리
양심 처리
A. 양심과 다스림과의 관계
몇몇 성경 학자들은 성경을 일곱 시대-무죄 시대, 양심 시대, 인간 통치 시대, 약속 시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왕국 시대-로 나누고 있다. 처음 세 시대는 통치의 원리에 따라 분류되어진다. 무죄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원리를 보고, 양심 시대에서는 자기 지배의 원리를 보며, 인간 통치 시대에서는 인간이 다스리는 원리를 본다. 세 가지 다스림 중에서 자기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과 관계있는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라는 장애가 없었다. 이것이 소위 무죄 시대였으며 사람은 하나님께 직접 지배를 받았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을 신뢰했다. 불행히도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에서 벗어나 안팎으로 죄가 가득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을 떠나셔야 했다.
따라서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때부터 노아가 방주를 떠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그분을 대표하는 양심을 설정하시어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다스리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이것이 소위 양심 시대이다. 이 시대에서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의해 다스림 받으며 자신의 양심을 신뢰했다. 이러한 자기 지배하에서 불행히도 사람은 또다시 타락했다. 사람은 양심의 책망과 통제를 무시했으며, 그 결과 살인과 간음에 빠지고, 또한 완전히 타락하여 사악이 가득한 곳으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말미암아 이러한 시대를 심판하셨다.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창 9:6)라고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배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다스림에도 복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권위를 주시어 사람을 다스리는 것에서 그분 자신을 대표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오래 지나지 않아서 국가가 시작되었고, 인류 가운데 정치적인 권력의 지배나 사회 권력, 또는 가족 가운데의 통제가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한 국가 안에는 대통령과 관료들이 있고, 한 공장에는 감독자들이 있으며, 한 가족 안에는 부모와 형님들 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이다. 이 때문에 로마서 13장 1절에서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고, 사람에게 책임이 맡겨진 인간 통치 시대이다.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자기 통치로의 타락이며, 또한 자기 통치에서 사람의 통치로의 타락이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은 더 고상하게 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은 더 천하게 된다. 오늘날 사람의 상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완전히 거절한 상태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의해 통제를 받음으로 자기 통치 아래 있지만, 그들의 양심의 영향은 매우 약하다. 대다수가 인간 통치를 받음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그들은 어떤 사람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결코 순응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인간 통치 시대에서도 여전히 실패했다. 그들은 불순종할 뿐 아니라 벗어나고자 하며, 심지어 인간 통치를 전복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반역적이고 무질서한 상태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와 사람의 지배를 받는 데서 완전히 실패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인간의 통치로 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면 반드시 인간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회복시켜, 사람으로 다시 단순하게 하나님 앞에 살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 생활할 수 있도록 하셔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이 한순간에 실현될 수는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인간의 통치로 떨어질 때 그 사이에 있는 자기 통치의 단계를 지나 타락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계획에서 사람이 인간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되돌아갈 때에도 그 사이에 있는 자기 통치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자기 통치는 인간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 사이에 있는 중간 단계이므로 사람은 구원을 얻을 때 먼저 인간 통치에서 벗어나 자기 통치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 통치를 받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사람 앞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이 두려워서 많은 것들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판결과 주목 아래 있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한다. 그러나 자기 통치 아래 있는 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양심의 느낌에 따라 생활한다. 자기 양심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통치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모든 말과 행동에 제한을 받는데, 이는 사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기 양심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들은 자기 양심이 인정할 때만 행동하기 때문에 자유스럽다. 외적으로는 그들이 여전히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이러한 지배는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태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의 행위는 여전히 사람의 통치를 요한다.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근로자는 감독들에게 통치를 받아야 한다. 흔히 그들은 다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관심할 뿐 속의 양심은 주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여전히 사람의 통치를 받는 타락된 상태에 살고 있음을 크게 증명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양심이 철저히 처리될 때만 타락된 인간 통치의 상태에서 구출되어 양심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럴 때 모든 일에 있어서 양심의 느낌을 따라 살며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양심을 처리하는 최종 목적은 자기 통치로 복귀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다만 양심의 느낌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여전히 절반 정도 타락한 상태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을 처리하는 것은 단지 사람으로 인간 통치에서 자기 통치로, 사람의 시야에서 양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이 사람으로 자기 통치를 거쳐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데에 이르도록, 즉 양심을 거쳐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심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여 양심을 처리하는 것은 여전히 부정적인 목적이지만, 긍정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께로 회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심을 처리하는 최종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자기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는 크게 다르다. 자기 통치는 사람이 자기 양심의 느낌으로 살며 자기 양심을 처리함을 말하는 것인데 반하여, 하나님의 지배는 사람이 영의 직감으로 살며, 직감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 안에 사심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영 안에 있는 직감을 하나님의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감으로 말미암아 살고 직감에 의해 통제받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며,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고 있는 것이 된다. 양심은 옳고 그름의 느낌만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양심은 그릇되고 악한 것은 모두 정죄하며, 옳고 선한 것은 모두 의롭다고 한다. 그러나 직감은 선악 시비를 능가한다. 직감은 그릇된 것 이상이고 옳은 것 이상이며, 악한 것 이상이고 또한 선한 것 이상이다. 직감은 그릇되고 악한 것을 모두 정죄하지만, 옳고 선한 것이라고 반드시 다 인정하지는 않는다. 직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고, 그 영에 속하며, 생명에 속한 것만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양심은 거짓말을 정죄하고 진실된 것은 입증한다. 만일 우리가 양심으로 산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한 다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직감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느낌을 따라 행하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진실이라고 언제나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말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아니면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인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도 진실을 말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께 속하고, 그 영에 속하고, 생명에 속한 말만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형제가 말씀을 전할 경우,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양심에 의해 점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며, 무슨 주제를 선택해야 하며, 또는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사 그로 하여금 말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들은 선악 시비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양심의 느낌으로는 이런 면에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직감을 통해서만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만질 수 있고, 하나님께 인도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양심과 직감의 이러한 차이점들은 또한 자기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 사이의 차이점들인 것이다.
오늘날 완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세 가지 통치 형태의 결합 상태로 살고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인간의 통치를 받고 있는데, 그들은 여전히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그들 중 또 한 부분은 자기 통치인 양심의 통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극히 일부만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직접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그러므로 더 철저히 양심을 처리하여 부정적으로는 인간 통치에서 구출되고,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 직접적인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B. 양심의 느낌
1. 느낌의 기원
수 세대에 걸쳐서 생명을 추구해 온 모든 성도들은 눈이 우리 몸의 창문이듯이 양심이 우리 영의 창문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창문 자체는 빛이 없고, 모든 빛이 다른 근원에서 전달되어 온다. 양심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양심 자체에는 느낌이 전혀 없다고 감히 말하지는 않지만, 그 느낌의 대부분이 인접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접 부분을 총합해 보면 일곱 가지가 된다. 생각, 감정, 의지, 직감, 교통,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영 등 이러한 일곱 가지 인접 부분들은 모두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느낌이 양심에 침투될 때 양심의 느낌이 된다. 이것이 양심의 느낌의 기원이다.
2. 다른 종류의 느낌
성도들의 양심의 느낌은 여러 방면이 있다. 예민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범사에 양심의 느낌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양심의 느낌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죄에 대한 느낌이다. 죄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장(章)에서 우리는 죄를 처리하는 근거가 내적인 의식이라고 했었다. 이 속의 의식이 양심의 느낌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에서 죄를 범한다면 양심은 즉시 정죄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범주의 양심의 느낌이다.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한 느낌이다. 세상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 장에서 우리는 세상을 처리하는 근거 역시 내적인 의식이라고 했다. 이러한 내적인 의식도 여전히 양심의 느낌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것들을 좋아하거나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면, 양심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정죄하는 느낌을 줄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범주의 양심의 느낌이다.
양심의 느낌에 대한 이 두 범주 이외에도 세 번째 범주가 있는데, 죄와 세상과 상관없는 것인데도 불안한 느낌이다. 죄도 아니고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데도 우리 양심으로 평강의 느낌을 잃어버리게 하는 문제들이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전혀 통과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 일상생활에서 느슨함과 부정확함은 죄도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 양심은 그러한 것들로 인하여 불안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의복이나 물건들을 주위에 흐트러뜨려 놓고서 무질서한 상태로 그 방을 나선다면 그의 양심이 그를 책망할 것이다. 만일 우리 성격에 어떤 결함과 괴상함이 있거나 타인에 대한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적합하지 못하고, 혹은 하나님 앞에서 바람직하지 않거나 적합하지 못한 태도를 지닌다면, 비록 그러한 것들이 죄나 세상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양심은 상하게 된다.
이 모든 불안한 느낌은 세 번째 범주의 양심의 느낌이다. 양심의 느낌에 대한 세 가지 범주 중에서, 죄와 세상에 관한 처음 두 가지는 표면적인데 비해 세 번째 것은 더 깊은 것이다. 양심을 처리하는 초기 단계에서 우리 속의 느낌은 죄와 세상에 대하여 다소 민감하다. 이러한 느낌을 모두 처리하고 나서야 세 번째 범주의 느낌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양심을 더 엄격하고 철저하게 처리할수록 이 세 번째 범주의 느낌은 더 증가된다. 양심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강조점은 이 세 번째 범주의 느낌을 처리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이러한 세 범주의 느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양심은 불신자의 양심보다 더 선명하고 더 예민하다. 불신자는 세상에 대하여 느낌이 없으며 세 번째 범주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 사람은 단지 죄에 대한 느낌인 선악 시비의 느낌만 지니고 있을 뿐이며, 이 느낌조차도 아주 둔하다. 불신자의 양심의 느낌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느끼는 것의 삼분의 일 정도에 해당된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느낌이 더 선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부드럽고 새롭게 된 새 마음이요, 그의 영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되고 새롭게 된 새 영이며, 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도 상당히 새롭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느낌은 실로 선명하다.
C. 양심의 허물과 정죄
양심의 느낌에 대한 세 가지 범주는 우리의 허물-우리의 의도, 동기, 말, 행동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사람에게 죄를 범함-에 대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느낌을 송사의 느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의 양심이 더 예민할수록, 또한 하나님 앞에서 더 생활할수록 그는 송사의 느낌을 갖기가 더 쉽다. 그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죄를 범할 때마다 그 양심에는 즉시 송사하는 느낌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송사의 느낌의 강약에 따라 사람의 양심의 예민한 정도와 하나님께 빛을 받은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송사 그 자체의 느낌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에 심각한 손상을 준다. 사람의 양심이 이러한 송사의 느낌을 지니게 될 경우, 하나님과의 교통이 방해를 받으며, 이로써 그의 모든 영적 상태는 저하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양심에 송사하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마다, 즉시 주님 앞에 나아가 이러한 느낌에 따라 자기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보배로운 피의 씻음을 구해야 한다. 때로는 사람 앞에 나아가 그 문제를 처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렇게 할 때 송사의 느낌이 사라지고, 양심에는 송사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양심을 처리하는 것은 한 면으로 우리 양심을 느낌에 있어서 예민하고 선명하게 하는 것이요, 또 한 면으로 우리 양심을 평안하게 하고 송사함이 없이 안전하게 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양심을 처리한 결과는 한 면으로 우리가 더 비췸을 얻게 되도록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며, 또 한 면으로 그러한 빛을 받아 우리로 하나님을 벗어나고,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지 않은 모든 것을 제함으로 더 깊은 씻음을 체험케 한다.
이제 양심의 정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정죄는 양심 안에 송사하는 느낌에서 나온다. 우리가 그릇 행하였다고 느낄 때 우리 양심은 정죄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사실상 하나이다. 이 둘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어떤 이는 양심의 정죄를 양심의 고소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 또한 한 가지 사항의 두 방면이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 재판관은 정죄하는 반면 검사는 고소한다. 이와 같이 우리 양심에서 우리가 그릇되었다고 느낄 경우, 이것은 한 면으로 우리를 고소하는 사람을 나타내며 또 한 면으로 우리를 정죄하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양심 안에 송사하는 느낌은 우리 영으로 영적인 일에 있어서 심히 억눌림당하고 무력하게 하는데, 이는 송사하는 느낌이 양심의 고소와 정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심의 고소와 정죄에서 구출되려면, 송사하는 느낌을 조심스럽게 처리하는 길 이외에는 달리 취할 방도가 없다. 우리의 양심에서 송사하는 느낌이 사라진다면, 양심의 고소와 정죄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D. 양심의 예민함과 약함 그리고 사탄의 고소와 공격
양심의 예민함은 신중하고 철저한 처리에서 생긴다. 만일 양심을 처리함이 없다면 양심의 느낌은 틀림없이 더디며 둔할 것이다. 양심이 철저한 처리를 통과할 때, 양심의 느낌은 예민하게 되어 민감한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양심의 예민함은 좋은 현상이다. 이러한 사실은 양심이 이미 아주 철저히 처리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 양심이 예민하게 되는 정도에까지 처리받지 못하였다면, 그러한 처리는 그리 철저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이가 죄의식을 느낄 때마다 양심을 너무 철저히 처리함으로써 그들의 발언이나 행동이 다소 힘 없이 보인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를 때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어떤 잘못을 하게 될지 모른다고 할 만큼 예민하다. 게다가 그런 사람의 양심의 예민한 정도는 그들이 행동하고 발언하는 모든 일에 잘못을 느끼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그들은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아도 역시 잘못을 느낀다. 이 지점에 올 때 그들 전체는 완전히 혼돈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그처럼 예민한 단계를 지나서 양심의 민감함에 이르게 되어야 양심을 썩 잘 처리하는 교훈을 배운 것이다. 이럴 때 그 사람의 양심의 느낌은 계속 예민하고 정상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의 예민함은 필요한 현상이다.
그러나 사람의 양심이 예민해지는 데까지 처리를 받을 때 그것이 지나치게 민감한 상태로까지 발전되어, 이로 인하여 양심이 약하게 될 수도 있다. 지나치게 민감함으로 인한 이러한 연약함은 양심을 지나치게 처리한 결과이다. 새로 구원을 받았거나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연약한 양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진지하게 주님을 추구하며 자신의 양심을 철저하게 처리하는 자들로서 아직 미숙하고 생명이 약한 자들만이 이러한 연약함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주님께 얻어질 때, 양심을 철저히 처리하며 모든 어두움에 속한 것과 그릇된 행위를 일소하게 된다. 그들의 양심은 유리와 같이 맑고 투명하다. 이럴 때 그들의 양심은 철저히 처리를 받아 더 이상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어리고, 영적인 사실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들도 종종 너무 많이 처리하여 지나치게 민감한 양심을 갖게 되고 연약한 양심에 이르게 된다. 우리 몸의 피부와 같이, 어떤 부위는 느낌이 무감각하고 둔한데 어떤 부위는 느낌이 약하며 민감하다. 상처 부위에 새로 생긴 피부는 약하며 극히 민감하기 때문에, 약간만 건드려도 상하기가 쉽다. 이 부위를 연약한 피부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양심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될 정도로 너무 처리하면, 모든 일에 송사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많은 문제에서,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정죄하시지 않는데도 그 사람은 자신을 정죄하며,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인정하시지 않기도 전에 그 사람은 자신의 평강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정죄와 불안은 심지어 그 사람이 문제를 처리한 다음에도 계속 남아 많은 불필요한 고통과 고뇌를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약한 양심의 상태는 양심이 지나치게 민감한 결과이다.
양심의 여러 가지 약한 상태를 묘사하고 설명해 보겠다. 한 가지 상태는 우리가 송사하는 느낌을 따라 양심을 처리한 다음에도 양심이 여전히 정죄받고 고소받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어느 형제에게 죄를 범했다면 하나님과 교통할 때 빛을 받아 그것을 의식하게 되고, 따라서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와 그 형제에게 자백한다. 당신이 이렇게 했을 때, 당신의 양심이 강하고 정상적이라면 평강을 가지고 그 문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 문제가 여전히 당신 안에 남아 계속 불안과 정죄를 느낀다면 양심이 약하다는 표시이다.
또 한 가지 상태는 처리할 필요가 없는 어떤 죄에 관계된 것인데, 당신의 양심은 그것도 처리하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속으로 한 형제를 싫어했는데 이것이 그릇된 것이라고 느낄 때 당신이 할 일은 주님 앞에 고백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단지 주님 앞에서 개인적인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상대방을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이러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 다음에도 여전히 그 형제에게 가서 자백하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괴로움을 당한다면, 이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 형제에게 자백한 후에도, 당신 속에서 여전히 불안하고 또다시 그에게 자백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이는 당신이 어떤 문제는 너무 많이 언급했고 또 다른 문제는 너무 적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다시 그에게 나아가면 그가 당신을 싫어할까 봐 두려워하여 갈피를 못 잡고 모든 평강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한층 더 약한 양심의 상태다.
또 다른 상태는 송사하는 느낌을 갖는 양심과 이것을 처리할 확실한 길을 찾지 못하거나 그 처리가 철저하지 못하다고 항상 느끼는 사람의 상태다. 예를 들어, 한 형제가 십 년 전에 십만 원을 훔쳤다고 하자. 이제 그 형제가 구원을 받은 후 이 상황을 처리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그는 얼마 정도의 금액을 상환할 것인지를 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구약의 원리에 따르면(레 6:5) 원래 금액에다 오 분의 일을 더해야 하는데, 그는 이것이 충분치 않다고 느낀다. 신약에는 주어진 원칙이 없기 때문에, 원금에다 이자를 더하여 상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자의 액수에 대하여 의문이 일어나게 된다. 그 형제가 은행 이자로 상환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채 이자로 상환해야 하는가? 연 이자로 상환해야 하는가, 월 이자나 주 이자로 상환해야 하는가? 얼마로 정하든지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이것은 양심의 또 다른 약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민감한 양심은 합당하고 정상적이지만 약한 양심은 지나치게 민감하여 비정상적이다. 이것은 첫째, 사람으로 불필요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게 하며, 둘째, 사람으로 지속적인 불안을 갖게 함으로써 사탄에게 고소하고 공격할 근거를 준다. 그러므로 약한 양심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그러나 약한 양심은 처음 양심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산물이다. 예민한 양심은 양심을 철저히 처리한 데서 나타나며, 흔히 약한 양심이 된다. 양심을 처리할 때, 민감하게 될 때까지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 처리는 철저하지가 못하고 아직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양심을 처리하여 예민하게 될 때, 틀림없이 지나치게 민감하며 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님을 따라 우리의 양심을 철저히 처리할 때,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약한 상태를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이 예민하게 될 경우, 우리는 의지를 사용하여 조절함으로 너무 지나쳐서 약하거나 불안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약한 양심이 사탄에게 고소하고 공격할 근거를 가져다 준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사탄의 송사란 무엇인가? 사탄의 송사와 양심의 송사나 정죄는 다르다. 양심의 송사와 정죄는 죄이든 세상이든 또 다른 문제이든 간에 언제나 분명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잘못을 범한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사탄의 송사는 그렇지가 않다. 이것은 사실무근한데 이유 없이 우리를 속이고 자극하여 우리 양심으로 실패한 느낌과 평강을 잃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때때로 사탄은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여 우리를 송사한다. 사탄은 우리가 과거에 이미 처리한 어떤 것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여 우리로 평강을 잃게 한다. 그러므로 사탄의 송사는 모두가 거짓이다. 사탄은 약한 양심을 이용하여 우리를 송사함으로써 우리로 불필요한 고통을 받게 하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로 하여금 균형을 잃게 하며, 평강 가운데서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여 큰 손실을 입게 한다.
사람이 사탄의 송사를 받게 되면, 사탄의 책략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것을 양심의 소리로 생각하여 거듭거듭 불필요한 송사를 받게 되므로 그 사람의 양심은 더 약해지고 사탄의 송사는 더욱 심해진다. 결국 이러한 사탄의 송사는 사탄의 공격이 된다. 일단 사람이 양심에 이러한 공격을 받으면 영과 혼과 몸에 큰 해를 입게 되고, 더 심한 경우는 이성을 잃고 정신 이상자가 되며 심지어 죽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앞에서, 전도할 때 땀이 나는데도 손수건을 사용하지 않던 형제를 생각해 보았었다. 이것은 그 형제가 양심을 너무 심하게 처리함으로써 양심이 약해져 사탄에게 송사와 공격의 기회를 열어 준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형제는 침대에서 자지 않고 마룻바닥에서 잘 정도까지 공격을 당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에 평강이 없어서였다. 이리하여 그의 몸은 큰 손상을 입어 일찍 죽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나이든 자매도 세상을 처리할 때에 역시 사탄의 공격을 당했다. 심지어 그 자매가 아주 형편없는 음식을 먹는데도, 사탄은 그녀에게 육신을 너무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자지 않고 마룻바닥에서 잤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매는 죽었다. 이러한 일들은 사탄의 무서운 공격을 드러내는 몇 가지 심각한 실례이다.
주님의 피는 사탄의 송사와 공격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이다. 계시록 12장 10절부터 11절까지에서는 사탄이 밤낮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소하지만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써 사탄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일서 1장 7절과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들을 사하시며, 주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양심의 송사하는 모든 느낌을 적절히 처리했다면 믿음으로 피 아래 숨어야 한다. 오직 이럴 때만이 온갖 사탄의 고소와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다.
E. 양심의 누출
양심의 누출 역시 양심 안에 있는 일종의 송사하는 느낌이다.
이러한 상태도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상태에 크게 손상을 입힌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양심의 느낌은 성령의 빛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꿔 말해서 그것은 우리 생명의 분량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이 자란 만큼 성령의 빛도 그만큼 받게 된다. 성령의 빛을 얻는 만큼 또한 양심의 느낌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양심의 느낌은 우리 생명의 분량에 따라 적절히 처리된다. 성령이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생명의 능력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적절히 처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할 마음만 있다면, 그 요구를 처리하기 위한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심의 느낌은 양심의 누출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될 수 있는데, 이는 양심이 생명의 분량으로 적절히 처리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느낌은 성령의 빛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성령의 빛은 언제나 생명의 성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생명의 성장에 따라 적절히 처리될 수 없는 것으로써, 조숙한 지식에 의해 나타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열 살 난 아이가 스무 살 된 사람의 상황을 알고서 스무 살 된 사람에게 요구되는 바를 모두 수용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그의 생명이 적절하지 못하여 그 요구를 충족시킬 힘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양심에 조숙한 느낌을 갖고 있는 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 그는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데, 이는 그가 그것을 한다면 그 양심이 정죄받고 불안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그는 승리할 만큼 강하지가 못한데도, 먼저 그것을 시도한다. 이것은 조정될 수 없는 양심의 침해나 위배를 초래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양심의 누출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한 형제가 최근에 구원을 받았는데 그에게 나쁜 습관이 있다 하자. 그 안에 빛이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양심도 그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는 기도할 수 있고, 집회에 참석할 수 있고, 주님과 교통할 수도 있다. 평강과 기쁨으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 후 어느 형제가 이러한 나쁜 습관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니 그것을 즉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자. 그가 “나는 기도할 때,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말했던 형제는 그 관점을 증명하기 위해 그 문제에 대한 온갖 성경적 진리를 설명해 준다. 마침내 새로 전향한 그 형제는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억지로 이 진리에 순종하여 나쁜 습관을 제하고자 한다. 이러한 일은 결국 실패로 끝나는데, 왜냐하면 그의 생명의 성장이 적합하지 못하고 충분한 생명 능력의 공급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계속해서 이러한 나쁜 습관에 거하게 된다. 이럴 때 그의 양심은 심히 그를 정죄하고 송사의 느낌이 계속 그를 누른다. 원래 그 형제는 기도하고, 자신을 헌신하며,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자신에게 “나 같은 자가 기도하고, 자신을 헌신하고, 집회에 참석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의 양심은 크게 누출된다. 누출이 심하면 더 이상 기도하거나 간증하거나 집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 마침내 그 형제의 전 그리스도인 생활이 파탄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양심의 누출은 아주 심각하고 위험한 일이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은 우리 양심의 누출이 물이 새어 가라앉는 배와 같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일단 구멍이 생기면 파선하게 된다.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필수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필수적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믿음과 사랑의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양심이 누출되면 믿음과 사랑은 달아나고,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은 파탄을 입게 된다. 금이 간 전구가 빛을 발하지 못하듯이, 누출되는 양심도 그리스도인의 영을 위축되게 하며, 모든 영적인 것들도 그 안에서 시들어지게 된다.
양심의 누출이 이렇게 심각한 문제이므로 우리는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는 길에서 그러한 것을 피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을 피하는 길은 조숙한 지식에서 비롯된 어떠한 느낌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속 생명의 공급을 능가하는 어떠한 요구에도 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다 적용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조숙한 느낌을 갖도록 너무 진전된 지식을 가져다주거나, 다른 사람이 처리할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고려해 보지도 않고서 그 사람의 문제를 지적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양심은 손상을 입어 누출된다. 우리는 다만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이 생명 안에서 자라도록 생명의 방면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양심의 느낌도 동시에 증가되며, 그들의 처리도 적합하게 증가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조숙한 지식에서 나온 느낌을 갖는다면, 주님의 피로 우리를 덮어 달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주여, 저는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함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힘겨운 일입니다. 당신의 피로 덮으시고 사탄이 공격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피를 의지한다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약할지라도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주님과 교통을 가질 수 있고, 우리의 영적인 생활도 손실을 입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피 아래 숨는 한편, 주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도록 주님을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주님의 은혜의 공급이 우리에게 이르고, 필요한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하실 때, 우리는 처리해야 할 것들을 즉시 처리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은 한 면으로 속 생명의 공급을 의미하며, 또 한 면으로 바깥 환경의 안배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재정적인 부채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한 면으로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운행하시어 우리로 적합한 속의 느낌을 갖게 하시도록 앙망해야 하며, 또 한 면으로는 우리가 속의 느낌을 따라서 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환경 가운데 적당한 금액을 공급하시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이 외부적인 공급 역시 우리로 하여금 관련된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하나님의 공급이다.
F. 양심의 느낌과 생명의 성장
우리 양심의 느낌은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기 전후에 이러한 관계를 배울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 안에 사망과 어둠이 있어서 우리 양심은 빛이나 느낌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와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영이 소생되었다. 동시에 우리의 속 부분들도 모두 새롭게 되어, 양심의 기능이 회복되었으며, 양심의 느낌도 되살아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느낌은 영적 생명의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의 참된 상태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 양심의 느낌은 생명이 자라는 만큼 증가한다. 우리 생명이 자라는 만큼, 우리 양심의 느낌도 같이 증가한다. 우리의 생명의 성장이 진전된 만큼, 양심의 느낌도 더 풍부하고 예민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더 예민하고 더 풍부한 느낌을 갖기를 갈망한다면, 생명을 더욱 추구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생명이 부유하다면, 우리 양심의 느낌도 강하게 된다. 더욱이 양심의 느낌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한다면, 생명의 성장도 증가할 것이다. 생명의 성장은 양심의 느낌에 영향을 미치고, 양심의 느낌은 생명의 성장을 돕는다. 이 둘은 상호 인과 관계로써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G. 양심의 느낌과 성령의 빛비춤
양심의 느낌은 또한 성령의 빛비춤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느낌은 생명의 출생에서 비롯되고, 생명의 성장에 따라 증가되며, 또한 성령을 체험함으로 성령에 의해 빛비춤을 받는다. 생명과 성령을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성장을 성령의 빛비춤과 분리시킬 수 없다. 성령이 우리 안에 더 빛을 비출수록 생명의 성장도 더 증가된다. 또한 생명의 성장이 더 증가할수록 성령의 빛도 더 강해진다. 이 둘도 역시 상호 인과 관계로 작용하며, 언제나 같은 비율로 존재한다.
양심의 느낌이 생명의 분량에 근거를 두고 있고 생명의 분량이 성령의 빛비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의 느낌은 당연히 성령의 빛비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성장이 증가할 때, 성령의 빛비춤이 강해지며 양심의 느낌도 더 강해진다. 이것은 마치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가르칠 것을 정하는 선생님과도 같다. 정상적으로 학생의 학년 기준은 자기 나이에 알맞게 이루어지는데, 달리 말해서 이것은 선생님의 강의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의 최상의 선생님이시다. 우리가 지닌 생명의 분량이 우리의 영적인 나이이다. 우리 양심에 느끼는 느낌은 무엇이든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빛비추시는 교육이다. 양심의 느낌은 각자가 다른데, 이는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생명의 분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빛비춤은 적절하게 다르다.
바꾸어 말하면 양심의 느낌도 역시 성령의 빛비춤을 강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양심의 느낌을 따라 문제를 처리한다면 성령은 자연히 더 많은 기반을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더 많은 빛비춤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빛비춤과 양심의 느낌은 상호간에 인과 관계로 서로 영향을 미친다.
H. 양심의 느낌과 영적인 지식
양심의 느낌에 대한 또 하나의 강한 근거는 영적인 지식이다. 영적인 지식은 성경 진리나 영적인 것들에 대한 정신적인 지식과 이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과 거룩한 계시와 빛비춤을 통하여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식은 생명과 성령에 속한 것이다. 어떤 지식이 생명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적인 지식이 아니다. 참된 영적인 지식은 생명과 성령에서 온 것이다.
그러한 것은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우리의 영적인 지식은 생명의 정도에 따라 얻어진다. 어떤 종류의 지식이 생명의 성장을 능가한 것이라면, 조숙하고 지적인 것에 불과하며 참된 영적인 지식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 생명의 공급을 줄 수 없고 유익도 없다. 그러나 만일 생명의 성장이 어느 정도 증가할 때 어떤 지식을 갖게 된다면, 이것은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영적 지식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유익하다.
왜 영적인 지식이 생명의 성장에 비례하는가? 이것은 실제적인 영적인 지식이 성령의 조명에서 오고, 이 조명은 생명의 성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메시지를 듣고, 성경을 읽고, 영적 서적을 보며,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들을 때, 빛비춤이 없다면 우리는 다만 많은 지식만 쌓게 된다. 이러한 것은 참된 영적 지식이 아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참된 영적 지식과 생명의 성장과 성령의 조명은 절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성령의 조명에서 비롯되는 참된 영적 지식이란 무엇인가? 첫째, 그것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인 우리 영의 느낌으로서 이것에 의해 처리해야 할 것을 내적인 계시로 느끼게 된다. 둘째, 이 느낌은 하나님의 나타남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우리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느끼게 한다.
예를 들어, 한 자매가 기도 중에 주님께 빛을 받고서 유행을 따르는 그녀의 많은 옷들을 입지 않겠다고 간증할 때, 다른 자매가 그 자매의 간증을 듣고서 스스로 마음에 이르기를, “그 자매가 그런 옷을 입을 수 없다면, 그보다 최신 유행의 옷을 내가 어떻게 입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사실 유행하는 옷에 대한 이 두 번째 자매의 관념은 단지 감정이 섞인 정신적인 지식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것은 성령의 조명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지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전혀 다른 상태에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곧 그 자매가 생각으로 이 문제를 이해할 뿐 아니라 간증으로 인해 속에 부딪힘이 있는 것이다. 그 자매는 주님의 손가락이 그녀의 유행에 따른 옷을 지적함을 느끼며, 다시는 결코 그 옷을 입을 수 없는 느낌을 주셨다고 느낀다. 이러한 것은 그 자매에게 비추는 성령의 빛이다.
전자의 상황은 그 자매가 단지 머리를 끄덕여 동의하기는 했으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후자의 상황에서 그 자매는 집에 이르기도 전에 “주여, 용서하소서. 이 유행을 따르는 옷에서 저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간증으로 말미암아 그 자매를 감동시키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그 자매에게 나타내시며 말씀하신다. 그럴 때 그 자매는 자기가 더 이상 유행을 따르는 옷을 입을 수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된다. 이것이 참된 영적 지식으로서 성령의 조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매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지식을 주시고, 우리로 그분의 얼굴에 빛나는 빛을 접촉하기를 갈망하시며, 성령의 계시를 깨닫기 원하신다. 이러한 비춤과 계시는 어떠한 문제에 대해 우리를 책망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며, 책망받은 것을 모두 처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공급과 생명의 능력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하심과 구출하심을 우리로 간구하게 한다.
예를 들어, 교회 중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자. 형제자매들 가운데에는 생명의 성장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성령의 빛비춤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각자가 얻는 영적인 지식이 크게 다르다. 생명 안에 성장이 더 깊을수록 성령께서 빛비추실 수 있는 더 많은 여지를 주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얻은 영적인 지식은 더 크고 더 깊은 것이다. 영적인 성장이 얕은 자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같은 집회에 참석하여 같은 메시지를 듣는다 하더라도, 성령의 계시하는 빛이 제한을 받게 된다. 따라서 그들 안에 있는 영적인 지식은 제한되고 얕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영적인 지식, 생명의 성장 정도, 성령의 빛비춤-는 연관되어 있으며 함께 섞여 있다.
참된 영적 지식은 생명의 성장과 성령의 빛비춤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지식은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영 안의 느낌이다. 그것이 우리의 양심을 접촉할 때 영 안의 이 느낌은 양심의 느낌이 된다. 영적인 지식이 결핍되면 양심에도 느낌이 없다. 거의 대부분의 정상적인 양심의 느낌은 참된 영적 지식으로 말미암는다.
I. 양심의 느낌과 은혜의 공급
정상적인 양심의 느낌이 생명과 성령과 영적인 지식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그것은 틀림없이 은혜의 공급을 수반한다. 이것이 신약의 영광스러운 특성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구약의 율법은 공급이 없이 요구만 있다. 사람에게 분배된 새 언약의 생명률은 요구뿐 아니라 더더욱 공급을 포함한다. 생명률의 요구는 공급 그 자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양심이 생명률의 요구를 제시할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정상적인 느낌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느낌이 은혜의 공급에 대한 미리 알려줌이라는 것을 알고 다만 머리 숙여 경배하고 인정할 따름이다.
양심에서 요구하는 느낌이 은혜의 공급을 수반하더라도, 이러한 공급을 깨닫고자 한다면, 한 가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이는 곧 믿음으로 이러한 요구에 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은 언제나 우리의 신뢰와 순종에 달려 있다. 우리가 신뢰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은 따라온다. 그렇지 않으면, 공급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먼저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응하기를 원하신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공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우리의 적용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전보를 쳐달라고 부탁할 때에, 세상의 사업 원칙에 의하면, 먼저 그에게 돈을 주어야 그가 수행한다. 그러나 영적인 원칙은 먼저 순종하고 적절하게 행해야 돈이 따라온다. 어떤 사람이 수입이 없다고 행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금전은 틀림없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행하여 비용을 지불하면, 금전이 수중에 들어온다. 성경 안의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이 이 원칙을 예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요단강을 건너게 하실 때에, 그들이 발을 내딛기까지는 물이 갈라지지 않았다. 그들이 믿고서 발을 내딛자, 그때 물이 갈라졌다. 은혜의 공급도 역시 믿음으로 얻게 되며 믿음 안에서 체험된다. 그러므로 양심을 처리하는 것을 배우는 자는 누구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양심의 느낌이 요구할 때마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공급임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이 요구에 응한다면, 하나님의 공급이 반드시 이르게 된다. 우리의 책임은 응답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책임은 공급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나 투쟁은 소용이 없다. 정상적으로 양심의 느낌이 생명의 성장과 일치할 때, 우리는 믿음을 가짐과 동시에 순종함으로 따르게 된다. 만일 양심의 느낌이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을 능가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것은 조숙한 느낌이며, 생명의 성장이 이 단계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런 경우에는 피를 의지하고 이 단계에 이르도록 생명이 전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충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적용함과 동시에 양심의 느낌을 순종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양심의 느낌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급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양심의 느낌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때, 즉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공급하기 위해 온다. 한 면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문제를 처리하고 깨끗게 되는 능력을 주며, 또 한 면으로 이 공급과 은혜는 우리 안에서 서로 짜여지게 되어 생명의 성장을 가져온다.
Ⅱ. 양심 처리의 실행
위의 열두 가지 관점은 양심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지식에 속한 것이다. 다음 사항은 양심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인 적용에 관련된 것이다.
A. 성경적인 근거
디모데전서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사도가 언급한 착한 양심은 책망받을 것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흠을 처리하는 양심을 의미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양심 안에 어떤 공격이 남아 있게 되면 그의 믿음은 파선할 것이며 점차적으로 그의 영적인 보화는 새어나가게 되고, 또한 자기 자신도 주님 앞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디모데전서 1:5
“… 청결한(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그리스도인으로 행하는 데 필요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선한 양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사도행전 23:1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사도는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을 두 번이나 간증했다. 이것은 그가 주님의 일을 하는 데 그렇게 강하고 담대했던 한 가지 이유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계속 자기 양심을 처리하여 정죄받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B. 양심 처리의 대상
우리가 처리해야 할 대상은 양심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양심의 느낌이다. 이외에도 조숙한 느낌, 지나치게 민감한 느낌, 사탄의 송사와 공격의 느낌, 온갖 양심의 비정상적인 느낌이 처리해야 할 대상이다.
에베소서 4장 17절에서는 죄인들이 “모든 느낌을 버렸다”(다비역)고 말한다. 여기에 강조된 느낌은 양심의 느낌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는 죄에 빠져 있다. 그의 생활과 행위에 있어서 그는 자기 양심의 느낌을 무시하고 없애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방인 가운데 도덕적인 사람은 자기 양심의 느낌을 존중하나 악한 사람은 자기 양심의 느낌을 무시한다. 이 원칙은 구원받은 자들에게도 동일하다. 사람이 영적일수록 그 사람의 양심의 느낌은 더 예민해진다. 또 한편으로 사람이 거의 기도하지 않고 주님과의 교통이 부족하다면, 그 사람의 양심의 느낌은 둔감해진다.
에베소서 4장의 문맥을 볼 때, 사도는 우리에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며, 부르심받은 은혜를 따라서 생활하라고 권고한다. 이와 같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양심의 느낌과 절대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과거 옛사람 안에서 생활할 때는 모든 양심의 느낌을 무시하였으나, 지금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며, 양심의 느낌에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 생활함으로 이러한 느낌들에 따라 처리해 나가야 한다.
C. 양심을 처리하는 근거
양심을 처리하는 근거도 역시 양심의 느낌이다. 우리 양심에서 모든 정상적인 느낌이 생명의 성장과 일치하고 성령의 빛비춤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양심을 처리하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앞에서 양심의 느낌에 세 가지 범주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그것은 곧 죄에 대한 느낌과 세상에 대한 느낌과 온갖 불안한 느낌이다. 죄를 처리할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우리 양심에 존재하는 느낌만 처리해야 한다. 세상을 처리할 때도, 세상에 대해 우리 양심에 있는 느낌만 처리해야 하며, 죄와 세상 이외의 다른 문제를 처리할 때도 역시 우리 양심 안의 불안한 느낌만을 처리해야 한다. 처리 대상에 따르면, 이 세 가지 범주가 다르게 보이지만 그것들의 유일한 근거는 양심의 느낌이다.
앞 장에서 우리는 죄와 세상을 처리하는 근거를 양심의 느낌에 두지 않고 오히려 속 생명의 느낌에 두었다. 우리가 이렇게 한 것은 양심의 느낌이 본래 속 생명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의 느낌이 비록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으로부터 온 것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양심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그것은 생명의 느낌이지만 또한 양심의 느낌이기도 한 것이다.
D. 양심을 처리하는 정도
우리가 양심을 처리하는 정도는 죄와 세상을 처리하는 정도와 마찬가지로 ‘생명과 평강’이 있기까지이다. 우리는 속에 평강과 생명을 느끼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안식과 안전과 확신을 느낄 뿐 아니라, 강함과 빛비춤과 만족함도 느껴야 한다. 어느 것이든 생명과 평강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가 처리한 것이 충분히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생명과 평강의 느낌이 언제나 변함없이 유지될 수는 없다. 도리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마치 생명과 평강의 느낌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공허하고 혼동되며, 불안하고 불안전함을 다시 느끼게 될지 모른다. 이러한 상태의 원인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부주의와 실패인데 이 때문에 우리가 또다시 더럽게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계속 양심에 따르고, 은혜의 공급을 받아들이며, 생명 안에서 자라고 생명의 빛비춤이 확대될 때 하나님의 속 생명이 요구하는 기준이 크게 향상되는 데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과 평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생명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우리 안에 이러한 느낌이 모호하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결핍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내적으로 배워야 할 깊은 교훈과 외적으로 우리가 처리해야 할 부수적인 문제를 가지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이때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더 밝혀줄 빛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사 우리에게 처리되어야 할 문제들을 보여 주실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빛이 분명해질 때, 생명의 결핍으로 인해 모호하던 느낌이 불안한 느낌으로 뚜렷이 드러난다. 이 느낌이 양심의 느낌이다. 우리는 속에 생명과 평강의 상태를 회복할 때까지 이러한 느낌을 따라서 처리해야 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처리의 주기는 우리를 반복해서 정결케 하며,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E. 양심을 처리하는 기준
양심을 처리할 때, 생명과 평강을 지니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처리해야 하지만, 또한 처리에 있어서 통제하는 기준도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속에 생명과 평강이 결여되어 있다면 생명과 평강을 얻기까지 처리해야 하지만, 생명과 평강이 결여된 모든 느낌이 처리를 요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느낌이 처리 기준에 달하는 것인지를 다만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그것이 기준과 일치하면 그것을 처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 따라서 처리 기준은 우리가 처리를 실행하기 시작할 때 중요한 척도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사랑에 붙잡혀 주님을 따르기를 결심할 때 그는 주님께서 철저히 처리하시는 것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며, 심지어는 체면을 버리고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때 사탄은 흔히 많은 거짓 느낌을 가져오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가 사람을 속였다는 것으로 지나친 처리를 요구하는 느낌을 갖게 되며, 이로써 영적 손실을 입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든 처리의 기준을 인식해야 하고, 생명과 평강이 결여된 모든 느낌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많은 위험과 실수를 피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처리하는 기준이 경계와 보호가 된다.
우리는 죄를 처리하는 기준이 의라고 말했었다. 의롭지 못한 문제만이 처리되어야 한다. 불의가 없다면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세상을 처리하는 기준도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서 세상에 노예처럼 사로잡혀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우리의 생존에 불필요한 모든 것이나 우리를 사로잡는 모든 것은 처리되어야 하지만, 그 이외에는 더 처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을 처리하는 기준은 그 문제가 의미가 있는지, 혹은 감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것을 우리 양심에 평강이 결여된 것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이 평강의 결여가 의미가 있는가? 내가 그것을 처리할 경우 덕이 되겠는가? 다른 사람이 도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수 있겠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 적절히 처리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가 없다면, 그것을 무시하고 처리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나서 아무렇게나 집어던져 버리는 형제를 생각해 보자. 즉시 속에서 평강이 사라져 버리고, 그의 부주의는 양심에 의해 책망받는다. 이런 경우에 그 형제는 가서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제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 형제는 자기 속의 느낌을 따라서 그 책을 취급해야 하며 그때 속에 평강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이 평강의 결여는 그 형제에게 부주의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는 데 명백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제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평강이 없고, 마루에 앉아 있어야만 평강이 있다면, 자기 양심을 의미 없는 일에서 처리해 온 것이다. 만일 그 형제가 성경을 손에 들고 다닐 때는 평강이 없고 어깨에다 메고 갈 때에만 평강이 있다면 이러한 평강의 결여는 무의미하다. 그 형제가 이러한 무의미한 느낌을 처리할수록, 그러한 느낌은 더 증가된다. 결국에는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근거를 주어 많은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한 면으로 우리는 속의 생명과 평강의 요구에 따라서 엄하게 우리 양심을 처리해야 한다. 또 한 면으로 우리는 처리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기준에 의하여 통제받아야 한다. 원칙에 따라서 우리가 균형을 이루고 유익한 처리를 할 때 우리의 생명이 자라고 대적이 우리를 공격할 근거를 주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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