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이 보물로…폐플라스틱 재활용이 뜬다
폐플라스틱을 400~500도 고온으로 끓여서 나온 열분해유는 진한 꿀물색에 가까웠다. 열분해유는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기름이다. 고온·고압 등 자극을 가해 불순물을 거르는 후처리 단계를 거치자, 이 기름은 하얗고 반투명한 색으로 바뀌었다. 이를 다시 정제해서 투명한 상태의 기름이 되면 석유화학 공정에 쓸 수 있게 된다. 에스케이(SK)이노베이션의 대전 환경과학기술원 연구실에서는 이런 공정 작업이 연일 진행되고 있다.
열분해유의 출발지는 전국 각지의 폐기물 선별장이다. 에스케이이노베이션의 화학사업 자회사인 에스케이지오센트릭은 열분해유화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과 협력해 폴리프로필렌(PP)이나 폴리에틸렌(PE) 소재의 폐플라스틱을 녹인 열분해유를 공급받고 있다. 선별장에서 폐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열분해유를 먼저 뽑아낸 뒤, 이를 다시 기술원으로 가져와 후처리하는 식이다. 경기 안성에 있는 에코인에너지도 열분해유를 공급하는 중소기업 가운데 하나다. 안성 쓰레기 선별장 한쪽에 마련된 열분해유화 장비는 지름 2.5m가량의 동그란 원통 형태로 마치 쇠로 된 드럼세탁기 같았다. 에스케이지오센트릭 관계자는 “과거엔 폐기물 산업에 관심을 두는 기업이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앞으로 재생원료는 석유화학 기업이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자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금광 된 플라스틱 폐기물 시장
에스케이지오센트릭, 엘지(LG)화학, 롯데케미칼, 지에스(GS)칼텍스, 한화솔루션 등은 모두 최근 폐플라스틱 재활용 산업에 뛰어든 석유화학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은 향후 재생원료에 대한 수요가 크게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단순 재활용이 아닌 화학 반응을 통한 ‘화학적 재활용’ 기술 선점 경쟁을 펼치고 있다.에스케이지오센트릭은 지난해 8월 에스케이종합화학이던 사명을 바꾸고 적극적인 투자에 나선 기업 중 하나다. “세계 최대의 도시유전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포부로 화학적 재활용의 일종인 열분해 기술에 특히 집중하고 있다. 열분해는 폐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기름을 뽑아내고 이를 다시 석유화학 공정에 투입해 새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2027년까지 생산하는 플라스틱 가운데 연간 250만t을 직간접적으로 재활용한다는 것이 에스케이지오센트릭의 계획이다.엘지화학도 기계적 재활용에서 화학적 재활용 영역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2024년 1분기까지 충남 당진에 2만t 규모의 초임계 열분해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초임계 열분해는 고온·고압 수증기를 이용해 폐플라스틱을 분해하고 기름을 뽑는 기술이다. 롯데케미칼도 2024년까지 울산에 11만t 규모의 화학적 재활용 페트 공장을 신설한다. 지에스칼텍스는 열분해유를 석유 정제 공정에 투입하는 실증 사업을 시작했고, 한화솔루션은 열분해유에서 납사(나프타·원유 부산물)를 생산하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플라스틱 시장 규모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마켓앤마켓은 전세계 재활용 플라스틱 시장이 지난해 279억달러(약 34조6601억원)에서 2026년 435억달러(약 54조400억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정부는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석유화학업계의 재생원료 이용을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지난해 12월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공동으로 발표한 ‘케이(K)-순환경제 이행계획’을 보면, 정부는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석유제품 원료로 활용할 경우 탄소 감축효과를 고려해 탄소배출권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관련 지침을 개정한다. 재생원료 사용 비율을 제품이나 용기에 표기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올해 안에 마련하고, 재생원료 사용 제품의 폐기물 부담금과 생산자책임재활용 분담금을 더욱 감면할 방침이다.
기후변화 대응→플라스틱 규제→시장 수요 연쇄효과고물상 등 소상공인의 영역이던 폐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이 대기업의 새 사업 분야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기후변화 대응 흐름과 플라스틱 재활용 규제, 늘어난 재생원료 수요 등으로 이어지는 연쇄효과가 자리한다.가속되는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국제사회의 탄소배출량과 폐기물 감축 노력은 본격화됐다. 유럽연합 등 국제사회에서는 플라스틱 제품 생산 때 재생원료를 포함하도록 하는 규제를 속속 만들고 있다. 유럽연합의 경우 2025년까지 음료 페트병의 25% 이상, 2030년까지 음료 플라스틱 용기의 30% 이상을 재생원료로 만들도록 의무화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영국은 이달부터 플라스틱 포장재 생산과 공급 과정에서 30% 이상 재생원료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 ‘플라스틱 포장재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기후변화와 환경에 대한 소비자들의 높아진 관심에 새로운 규제까지 더해지면서, 식음료 업체 등 플라스틱 소재를 쓰는 제조업계가 1차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다국적 식음료 기업들이 플라스틱 이용과 관련해 자발적으로 제시한 목표를 살펴보면, 이런 변화 양상을 읽을 수 있다. 코카콜라는 2030년까지 모든 포장재에 재생원료를 50% 이상 사용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펩시코도 같은 해까지 플라스틱 포장재에 재생원료를 절반까지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네슬레도 2025년까지 재생 페트 사용량을 기존보다 50% 이상 늘리겠다고 약속했다.이런 흐름은 결국 석유화학 기업으로 향한다. 양질의 재활용 플라스틱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게 됐기 때문이다. 에스케이지오센트릭 관계자는 “사회적 책임을 지자는 취지도 있지만, 경제성이 없는 분야라면 기업이 이렇게 움직이긴 어려웠을 것”이라며 “최근 열분해유를 이용해 새 플라스틱과 동일한 품질의 플라스틱을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국외 시장에서 재생원료에 대한 세금이 면제되면 일반 플라스틱과 견줘 가격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롯데케미칼 관계자도 “국제사회의 플라스틱 규제나 재생원료 사용 의무화 조처가 확정될 때를 대비하고 있다”고 했다.탄소 감축이 정부와 기업이 나아갈 방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탄소배출량이 많은 석유화학업계가 이런 사업을 통해 돌파구를 찾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관건은 자원순환 체계 구축 석유화학 대기업들의 진출로 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이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남은 과제는 기업들이 재활용 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자원순환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달라진 재활용 산업 구조에 맞춰, 재활용이 가능한 자원을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도록 환경부가 역할 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석유화학업계와 다른 업계 간 폐플라스틱 확보 경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배재근 서울과학기술대 교수(환경공학과)는 “최근 석탄 등 다른 에너지원의 가격이 오르면서, 시멘트업계와 제지업계는 그 대체품으로 폐플라스틱을 태워 열에너지원을 구하고 있다”며 “폐플라스틱이라는 자원을 두고 업계 간 쟁탈전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이어 “폐플라스틱은 이러한 쟁탈전에서 살아남아 열분해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충분한 폐기물 자원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