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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202권 / 시장(諡狀)
규암(圭菴) 송 선생(宋先生) 시장
선생의 휘(諱)는 인수(麟壽), 자(字)는 미수(眉叟)요, 자호(自號)는 규암(圭菴)이니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다. 휘 명의(明誼)는 사헌부 집단(司憲府執端)을 지냈는데 그 청명(淸名)과 직절(直節)이 정포은(鄭圃隱) 등 여러 어진 이들과 서로 같았고,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건원릉은 태조(太祖)의 능임』 세량(世良)은 선생의 황고(皇考: 죽은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며, 어머니 유씨(柳氏)는 승사랑(承仕郞) 승양(承陽)의 딸이다.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기미년(1499, 연산군 5) 동짓날, 11월 16일(임신)에 선생이 태어났다.
선생은 날 때부터 자질이 아름다웠고, 크면서 더욱 단정하고 후중(厚重)하여 7, 8세 되면서부터 이미 학문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고 널리 경사(經史)를 연구하여 날로 더욱 발전해 나갔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임오년(1522, 중종 17)에 문과(文科)에 뽑혀 사원(史院)에 들어가 한림(翰林)이 되었다가 이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옮겼고, 다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았으니, 이는 당시의 극선(極選)인데도 선생은 그다지 영예롭게 여기지 않았다.
이어 저작(著作)을 거쳐 박사(博士)가 되었고, 병술년(1526, 중종21)에 수찬(修撰)이 되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 애모하는 정성이 지극했다. 상을 마치고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고 사헌부 지평에 병조 낭관(兵曹郞官)ㆍ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었다.
선생이 사헌부에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재집권을 탄핵하여 막으려다가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는데, 돌림병이 심해 큰 병을 얻어 수레에 실려 향리로 돌아왔으나 안로(安老)의 모함으로 마침내 사천(泗川)으로 귀양 갔다. 사천은 바닷가여서 풍속이 미개하였다.
선생은 날마다 그곳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구암(龜巖) 이정(李楨) 같은 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잘 배워 명사가 되었다. 안로가 처형되자 다시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고 이어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과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내고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했다. 상을 마치고 다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어서 성리학(性理學)을 크게 일으켰는데, 가르침을 받은 선비들이 모두 열복(悅服)하고 공경하여 크게 변화시킨 공적이 많았다.
다시 사헌부로 옮겨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을 때,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의 계비 윤씨(尹氏))가 중전이 되었는데, 그 아우 원형(元衡)이 화심(禍心 남을 해치고 모반(謀反)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아들이 없고 명종(明宗)이 대군(大君)으로 있으매, 인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여 그릇된 말이 널리 떠돌았다.
이기(李芑)와 원형이 서로 후일의 일을 몰래 획책하면서 선생의 강직함을 미워하여 전라 감사로 좌천시켰다. 선생은 부임 초부터 도(道) 있는 선비를 찾아 학문을 강론하는 데 힘써, 풍속을 교화시키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는데, 호남의 사민(士民)들이 그 덕화를 따라 크게 신복(信服)했다.
얼마 후 왕명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공의 모습을 보고 서로 칭찬하기를,“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고결한 선비이다. 다른 나라에 태어나서 함께 같은 조정에 서지 못함이 애석하다.”하였다. 갑진년(1544, 중종 39)에 중종(中宗)이 승하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하니, 여론이 더욱 흉흉하므로 안팎에서 선생을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의지하여 바라보았다.
그때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와서 사헌부(司憲府)의 장(長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는데, 선생 역시 세도(世道)를 스스로 맡아 강유(剛柔) 겸전의 자세로 당시의 어려움을 구제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때 원형이 외람되이 벼슬을 차지하고 있었고, 윤임(尹任)이 추관(秋官 형조(刑曹)의 장(長 판서(判書)으로 있었는데, 선생은 둘 다 탄핵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어떤 다른 일로 원형을 다스리려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선생은 말하기를, “앞서의 임금 때에는 그럴 수 있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그 일로 죄를 준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하여 허락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의 마음가짐이 공평함에 감복하였다.
다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고, 을사년(1545, 인종 1)에 인종(仁宗)이 갑자기 승하(昇遐)하였다. 명종(明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화(禍)를 선동했다. 문정왕후가 충순당(忠順堂)에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여 크게 형륙(刑戮)을 행하니, 당시의 선비로서 화(禍)를 면한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전날 선생과 사이가 좋지 않던 자들이 서로 다투어 선생을 부박한 무리의 우두머리라고 지적하여 헐뜯어 배척하니, 선생은 마침내 선영(先塋)이 있는 청주(淸州)로 돌아와 방에 가득히 책을 쌓아 놓고 신명(神明)을 대하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옛날 배운 학문을 다시 익히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때로 회포를 풀어 글을 짓기도 하였는데, 깨끗하고 밝아 유유자적함이 이 세상에는 뜻이 없는 듯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진실한 정성은 잠깐 사이도 잊은 적이 없었다. 2년 뒤인 정미년에 양재역(良才驛) 벽 위에 당시의 일을 배척하는 글을 붙여 놓은 사건이 있었는데, 간신 정언각(鄭彦慤)이 그 글을 떼어 가지고 대궐로 와서 고변을 했다.
문정왕후가 보고 크게 노하자, 이기(李芑)와 원형(元衡) 등이 선생의 문도(門徒)들이 한 짓이라고 하였다. 이기 등이 빈청(賓廳)에 모여 귀양 간 사람들의 명단을 놓고 사약을 내릴 사람의 이름에 점을 찍다가 선생의 이름에 이르자, 이기가 다시 먹을 찍어 크게 점을 찍었다. 정순붕(鄭順朋)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이었는데, 애석하다.”하자, 이기가 순붕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뽑아 쓰자는 주장을 내세운 사람이 죽지 않으면 어찌되겠는가?”하였다.
얼마 후 이기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송모(宋某)가 왜 착한 선비가 아니겠는가. 다만 큰일을 행하는 사람이 조그만 정에 얽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집을 지으려고 터를 닦는데 비록 좋은 꽃이나 나무가 있더라도 베어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하였다.
사약을 내리는 명이 이르매, 선생이 목욕한 후 관디를 갖추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글에, “하늘과 땅만이 실로 이 마음을 알 것이다.”하였고, 그의 아들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나의 이 일로 해서 착한 일 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하고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여유 있게 사약(賜藥)을 마시니, 이날은 9월 20일(무진)이었다.
이날 밤에 흰 기운이 그의 집에서 하늘까지 뻗쳐서 며칠 동안을 흩어지지 않았다 하니 아, 어찌 까닭없이 그러한 일이 있었겠는가. 선생은 천품이 도에 가까워 마음이 진실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 행동이 언제나 옛사람의 가르침에 부합하였고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착함을 보면 자기의 착함처럼 기뻐했다.
기묘년의 사화(士禍)를 겪은 뒤로 사기(士氣)가 꺾여서 사람들이 《소학(小學)》이나 《심경(心經)》 등을 꺼리고 피하여 감히 읽으려들지 아니하고, 조금만 행동에 법도가 있고 규범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화를 당할 것으로 지목하기도 하고 혹은 꾸짖고 용납하려들지 아니하기도 하여 사문(斯文)이 긴 밤보다 더 어둘 때에 선생은 홀로 개연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夕死]’는 뜻을 가지고 성현의 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의리에 잠겨 독실하게 믿고 행하기를 힘써, 평소 집에 있을 때도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엄숙히 하여 잠시도 게을리함이 없었고,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용모가 온화하고 순수하여 마치 만물을 자라게 하는 따뜻한 봄볕과도 같아 비록 부인들이나 어린아이들이라도 도(道)를 지닌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효도와 우애는 처음부터 타고나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받드는 데 각각 그에 따른 도리를 극진히 하였고, 제사에는 엄숙함을 다했으니, 윤리를 바로잡고 은의(恩義)를 돈독하게 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배운 그대로 정성과 충심을 다하여 끝내 변함이 없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함이 없었다.
이는 타고난 성품도 훌륭하였지만 학문에서 얻어진 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같은 시대의 명현(名賢)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임종할 때 나라의 일을 부탁했고,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廸)이 왕의 즉위 초에 진계(陳戒)할 글을 선생에게 질정 받은 것을 보면 당시의 모범이 되는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대저 공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훌륭함과 마음과 몸가짐이 광명정대하고, 지극히 화(和)한 가운데 지극히 강(剛)함이 있어 털끝만큼도 자기의 정당함을 굽혀 다른 사람의 뜻을 쫓지 않으려는 뜻을 지녔으며, 삼대(三代 중국의 하ㆍ은ㆍ주 시대를 말함)의 다스림을 반드시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하여 시세의 흐름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곧바로 앞으로만 나아가 좌우를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음흉하고 간특한 무리에게 미움을 사서 몸마저도 보전하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천리와 인심은 끝내 속일 수 없는 것이어서, 원형(元衡)ㆍ이기(李芑)와 같이 원한을 가진 자들도 오히려 공정(公正)하다는 탄복과 난초와 대에 비유함이 있었으니, 선생의 훌륭한 덕의 일단을 이런 점에서도 볼 수 있다. 선조(宣祖)가 즉위 초에 특별히 공의 원통함을 풀어 주고 관작을 복구(復舊)시킬 것을 명하므로 인심이 기뻐하고 사림(士林)이 감동하였다.
이로부터 사문(斯文)이 점차 진작(振作)되어 문명(文明)의 기틀이 열렸으니 어찌 위대하다 아니하랴.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의 시호)이 일찍이 말하기를, “선생은 충효에 모두 지극했다.”하였다. 어려서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아직 예(禮)를 배우기 전이었으므로 정(情)에 맡겨 너무 슬퍼해서 엎드렸던 거적자리가 눈물에 젖어 모두 썩었고, 여막(廬幕)에 제비가 집을 지었는데, 그 새끼가 모두 흰 색이었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이름이 당대에 존중되었고, 인종(仁宗)이 즉위한 초기에는 사림(士林)들이 의지하여 존경하였다. 선생은 사심없이 사람을 대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속임을 많이 당하였으며, 시세(時勢)를 생각지 않고 삼대(三代)의 사업(事業)을 하려고 했다.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은 칭송하여 말하기를, “선생은, 봉황(鳳凰)이 세상에서 상서로운 모습으로 뭇 새들의 표준이 됨과 같았다.”
하였는데, 이 몇 마디의 말만 보아도 선생에 대한 대개를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해 11월 신묘일에 문의현(文義縣)의 저자산(楮子山)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목사(牧使) 박(博)의 딸이고, 아들은 하나 두었는데 이름은 응경(應慶)이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자 연신(筵臣) 송준길(宋浚吉)이, 공(公)의 바른 도학(道學)과 혹독한 화(禍)를 당하였음을 자세히 말하고 나서, 관직을 높여 추증(追贈)하고 유사(有司)를 시켜 역명(易名 시호를 내림)의 은전(恩典)을 내려서, 어진 이를 존대하고 충신을 어여삐 여기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매,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아, 앞서의 여러 임금들의, 어진 이를 숭상하고 충성에 보답함도 아마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으리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늦게 태어났고 식견이 고루하므로 평일에 부형과 사우(師友)들에게 들은 바를 삼가 기록하여 간략히 그의 대개를 펴서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의 별칭. 제사와 시호를 맡는 관청)의 참고에 도움이 되게 하고자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소동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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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文]
圭菴宋先生諡狀
先生諱麟壽。字眉叟。自號圭菴。宋氏系出恩津。有諱明誼。司憲府執端。淸名直節。與鄭圃隱諸賢相埒。 健元陵參奉諱世良。是爲先生皇考。妣柳氏。承仕郞承陽之女。以弘治己未南至日壬申生。先生生而粹美。長益端重。自髫齔。已知爲學之方。喜讀書。博究經史。日益長進。嘉靖壬午。擢文科。選入史院。爲翰林。遷弘文正字。仍賜暇讀書。乃一時極選。而於先生不爲榮也。轉著作,博士。丙戌。至修撰。丁內憂。極其哀慕之誠。喪除。爲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兵曹郞官,侍講院文學,議政府舍人。其在憲府。金安老將復柄用。輒劾去之。由是出爲濟州牧使。癘毒所聚。疾病大作。輿還鄕里。安老誣搆成獄。遂竄泗川。泗濱海。俗尙貿貿。先生日聚其子弟。敎誨不倦。如李龜巖楨輩。最蒙其奬進而成名焉。安老伏誅。徵拜禮曹參議。遷承政院承旨。己亥。特陞嘉善大夫兵曹參判。歷禮刑曹。丁外艱。沒喪。拜成均館大司成。倡以性理之學。盡其誘掖之方。士皆悅服而矜式。蔚有丕變之效。移司憲府大司憲,吏曹參判。時文定王后正位坤極。而其弟元衡包藏禍心。仁廟在東宮無嗣。明廟以大君在邸。人心危疑。訛言煽動。李芑與元衡。陰相交結。以爲日後地。而惡先生持正。黜爲全羅監司。先生攬轡之初。便訪有道之士。一以講學敦化爲務。湖之士民。從化大悅。已而承命觀周。華人望其儀表。嘖嘖稱賞曰。是眞氷淸玉潔之士也。惜乎生於海外。不得與之同朝也。甲辰。中廟賓天。仁廟卽位。時論益洶洶。中外倚望先生若山斗焉。時先生自燕將還。道拜憲長。先生亦自任以世道。誾誾謇謇。期濟時艱。時。元衡濫叨爵命。尹任長秋官。先生並彈去不少饒。有以他事欲治元衡者。先生不許曰。在先朝則可。今不可假以爲罪。人服其秉心公平。遞爲漢城府右尹。乙巳。仁廟遽爾賓天。明廟以沖年卽位。時事大變。群凶煽禍。文定御忠順堂。大行刑戮。一時士類殆無得免者。於是曩所不悅於先生者。爭相齮齕。指先生爲浮薄徒領袖而斥逐之。先生遂歸淸州先墓之下。一室圖書。對越神明。溫尋舊學。不懈益勤。時有遣懷之作。沖澹自適。若無意於斯世。而其愛君憂國懇懇之誠。未嘗食息忘也。越二年丁未。良才驛壁上有書。指斥時事。奸臣彥愨。取其壁載。詣闕下上變。文定見之大怒。李芑,元衡等。指以爲先生之徒所爲。芑等會賓廳。錄在謫籍人。定其當死者點其名。至先生。芑改濡筆大點之。鄭順朋曰。惜哉此人愿愨士也。芑顧順朋曰。鼓擇賢之議者。不死而何。旣而芑語人曰。宋某豈不是善士。但行大事者。不可拘小仁。譬之作室 室。拓其基址之時。雖有好花佳木。豈得不刈去也。命至。先生沐浴具冠帶。貽書親舊曰。皇天后土實監此心。顧其子曰。勿以我爲戒而怠於爲善。顏色不亂。從容就命。是九月戊辰也。是夜有白氣。自其廬直亘于天。彌數日不散。嗚呼。豈無以致之歟。先生天姿近道。誠心好學。出言制行。動合古訓。自少時見人有善。若己有之。當己卯斬伐之餘。士氣摧沮。人以小學,心經等書爲忌諱而不敢讀。稍有繩趨規步者。則人目以爲禍祟。或譏誚而使不容。斯文之晦塞。不翅如長夜。先生獨慨然有朝聞夕死之志。聖賢之書。未嘗去手。沈潛義理。篤信力行。平居端肅自持。未嘗懈怠。及其接人。則容貌溫粹。如春陽和煦而萬物茁長。望之者雖婦人孺子。皆知其爲有道君子也。孝友出於天性。事親事兄。各盡其道。喪致其哀。祭致其嚴。其所以正倫理篤恩義者。無有餘憾。至其立朝事君。則期展所學。盡誠殫心。終始不變。以至於滅命而不悔也。雖其生質之美。而學問之力有不可量也。同時名賢金慕齋安國。易簀之際。托以國事。李文元彥迪。亦以初服陳戒之事就正焉。其爲一時之楷範可知也。夫其殉國忠君之盛。處心行己之光明正大。至和之中。自有至剛者存。無一毫枉己徇人之意。三代之治。謂必可興。不度時宜。直前不顧。則無惑乎見嫉凶邪。身且不保也。雖然。天理人心。終有所不可誣者。雖以元衡,李芑之仇怨。而猶有公正之歎蘭竹之喩。則先生之盛德。於此亦可見其一端矣。宣廟初卽位。特命伸冤復爵。人心慰悅。士林感動。自是斯文稍振。以啓文明之運。豈不偉哉。栗谷李文成公嘗謂先生忠孝俱至。幼年喪其母。時未學禮。任情過哀。所伏苫席。因淚盡腐。燕棲廬幕。其雛皆白。及其立朝。名重一時。仁廟初年。士林倚以爲重。而先生虛心待人。多被人欺。不量時勢。欲做三代事業。申文貞公欽頌之曰。先生如儀鳳瑞世。建標百禽。觀此數說。則先生之大槩。庶可以想像也。其年十一月辛卯。葬于文義縣楮子山。夫人安東權氏。牧使博之女。一男應慶。逮聖上嗣服。筵臣宋浚吉極言公道學之正。罹禍之酷。請加 贈顯秩。使有司特擧易名之典。以示尊賢愍忠之意。上卽允從焉。嗚呼。列聖之所崇報者。殆無以復加矣。嗚呼休哉。時烈晩生孤陋。謹述平日所聞於父兄師友者。略敍梗槩。以備太常之採摭云。<끝> ⓒ한국문집총간 |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