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마을
홍 한 기
위치: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개요: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은 행정지명으로 대율리이다. 마을의 이름은 대율리 외에도 율리, 율촌(栗寸), 일야, 대야라고 부르는데 이보다 널리 쓰이고 훨씬 정겨운 순 우리말 이름이 한밤마을이다.
신라시대인 950년경 홍란(洪鸞)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로 이주해 오면서 부계 홍씨 일족이 번창하였으며, 고려 때 까지는 一夜, 혹은 大夜로 불리었으나 1390년 문과에 오른 홍씨의 14대손 홍노(洪魯)라는 선비에 의해 夜 자가 좋지 않다 하여 밤 율栗자인 대율로 개칭하였으며, 의미는 “크다, 많다, 하나다.”이다. 처음 이 곳에 와 마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신천 강씨들이었으나 부림 홍씨가 大姓을 이뤄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다.
답사 포인트: 마을 어귀의 비보송림 성안솔숲(한밤성안)
길이 약 1,600m의 돌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62호의 대청
대율리석불입상(보물 제 988호, 신라시대)의 대율사
팔공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해 있어 사방으로 경치가 대단히 수려하며 마을 전체의 집들의 주택은 대부분 전통가옥 구조로 그 대분분이 초가로 되어 있던 것을 1970년대에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했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한밤마을의 얼굴이자 자랑거리인 “한방성안”의 솔숲이 나온다. 도로 양쪽 5천 평쯤의 터에 200년이 넘게 자란 늙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비보송림으로 겨울의 찬바람을 녹여주고 여름의 시원한 휴식처가 되어 마을을 한층 더 운치 있고 유서 깊게 만들어 준다. 3~4m의 화강암을 다듬어 세운 솟대가 마을의 평안을 지키고 기원해주는 진동단(鎭洞壇)에는 단기 사천이백구십 년이란 글자를 따서 솟대를 세운 해가 1966년임을 표시하며 요즘도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사람들이 모여 이곳에서 동제를 지낸다. 오리모양의 솟대는 70년 전 대홍수 때 68명의 목숨을 잃어 재앙을 막기 위해 오리모양 형상으로 바위 끝에 조각 해 배의 균형을 잡으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나 모양이 좀 이상하다.
철새인 오리는 이승과 저승을 오간다는 믿음으로 봄이면 날아가는 곳이 북쪽이라 저승은 북쪽에 있다는 우리의 신앙에서 근원을 찾는다.
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돌담으로 경오년(1930) 대홍수로 떠내려 온 돌들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축조방법은 막돌 허튼층쌓기로 하부가 넓고 상부가 다소 좁은 형태로 넓은 곳이 1m이상 되는 곳도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 내에서 채집된 강돌로 자연스럽게 축조된 돌담은 전통 가옥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곡선형의 매우 예스러운 골목길의 자취를 자아내고 있으며 현존하는 우리 마을 역사와 500년을 넘지 못하는 것만 봐도 전통성을 잃지 않는 이들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육지의 제주도로 불리는 돌담은 집집마다 돌로 담장을 쌓아 한밤 전통마을의 명물로 알려져 있으나 상 없는 행정 규제안이라 마을 사람들은 전통마을 지정을 꺼린다. 허나 민속마을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이나 낙원읍성 마을들의 박물관식 전시공간보다 살아있는 전통마을로 보존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전통가옥으로는 상매댁(上梅宅), 또는 쌍백당이라 불리는 280년 전 건립당시 최고의 가옥인 남촌(南村)고택이 있다. 부림 홍씨 입향조인 노(魯)의 10세손인 홍우태씨의 살림집으로 그 후에도 주손들로 이어지면서 수차례 걸쳐 중수해 가며 지켜오고 있다. 상매댁 바로 옆에는 현재 마을 경로당으로 사용되는 대청이 있다. 조선 초기 건립된 대청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그 후 1632년 중수 하였으며 효종2년(1651) 숙종32년(1706)때 각각 수리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밤마을이 내세우는 자랑거리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덩벙 주초위에 놓인 두리기둥도 튼실하고 대들보를 비롯한 각 부재들이 여유로우며 그 짜임새도 간결하여 매우 단박하며 건실해 보인다. 벽체 없이 사방으로 트인 구조도 시원스럽고 집 전체에 높직하게 깐 마루도 넉넉하다. 한 때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쓰였다고 한다. 원래는 사찰의 대종각이 있던 자리에 세운 건물로 “군위 대율리 대청”이 공식 명칭이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오지와 다름없는 이곳이 팔공산과 한티재, 시주봉, 파계재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좀처럼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가 팔공산 순환도로가 생기면서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한티재를 넘어 연결되는 2차선 도로 옆으로 여관과 식당, 상점들이 제법 늘어서 마을의 경관을 흐리게 하고 팔공산 골짜기에서 수습한 3층 석탑이 있었는데 하룻밤 자고나니 탑신이 사라지고 두개의 안상이 뚜렷한 하층 기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새마을 운동 때도 지킨 돌담이고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율사의 석불입상(높이 2.65m)과 송광 홍천뢰장군 추모비도 세워져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