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
사실 성격적인 특성에 ‘장애’라는 말을 넣는 것은 상당히 안 좋은 표현인 걸 알면서도 사소한 것조차 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한 특성을 뇌까릴 때 이처럼 희화화할 수 있는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자신이 결정을 못하는 것의 정도가 참담하여 실제로 인격 장애의 일종이 아닌가 초록창 지식인을 뒤적인 적도 있을
거예요.
건너건너 전해들은 어떤 분은 음식점에 갔을 때 메뉴를 정말로 정하지 못해서 옆 사람이 시키는 것을 무조건 따라
시키신다고도 하더라고요. 든짱 또한, 사전 지식이 없는 음식점에 가서 어떤 메뉴를 고를지 고민하면서, 혹은 일단
친구는 만났는데 어느 음식점에 가얄지 몰라 고민하면서 친구와 함께 서로 또 각자 자기 자신을 결정장애라고
자책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결정장애’라고 부를 때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들은 사실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서
‘장애’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로 공들여서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들.
내가 지금 식사로 내가 스파게티를 먹을지 라자냐를 먹을지, 면을 먹을지 밥을 먹을지, 영화관에 가서는 로맨틱
코미디를 볼지 수퍼 히어로물을 볼지는 어찌 보면 서너 시간의 기분을 좌우할 뿐이니까요.
그 결정들이 틀려 봤자 포기한 라자냐의 겹겹이 쌓인 녹진함이 혀 끝에 맴도는 것만 같아 아쉬워하고 면을 먹고 나서
배가 빨리 꺼졌다고 조금 괴로워하거나 로맨틱 코미디를 보니 헤어진 연인이 생각나 차라리 쳐부수는 히어로물을
볼걸 하는 정도일 뿐이겠지요. 여름철의 회와 같이 찜찜한 것이나 아예 자신의 취향이 아닌 것은 알아서 피할 테니까요.
우리가 정말로 결정해야 할 것, 동시에 ‘결정장애’를 일으키지 않고 결정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이번 휴가로 어디에
갈까? 명절에 본가에 내려갈 것인가? 등등 한 계절에 속하는 결정에서부터, 취직을 할 것인가,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
결혼흘 할 것인가? 자식을 낳을 것인가?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갈 것인가? 집은 어느 지역에 구할 것인가? 마음 속
위시리스트였던 기타 배우기를 이번 가을에는 시작할 것인가? 이렇듯 삶의 한 분기를 바꾸고, 그에서 파생되어 삶의
방향성마저 온전히 바꾸는 결정들도 내려야만 하지요.
이런 결정들에 있어서 우리는 ‘결정장애’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사실 앞서 말한 ‘결정장애’가 불러오는 고민들보다
고민할 것이 더 많아 결정하기 굉장히 힘든 요소들입니다. 많은 고민을 해야 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결정을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을요.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자살하려는 것을
살려놨더니 홀연히 붉은 코트만 남기고 사라진 여인을 좇아 곧 출발하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 선택은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뒤흔들어 놓지요.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썼던 독일의 철학자 페터 비에리가 이처럼 삶을 바꾸는
‘결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해 《삶의 격》에서 삶에 대해 가장 절실한 가치로 ‘존엄성’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그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한 조건으로 ‘자기 결정’을 내밀었습니다. 실제로는 《삶의 격》보다 먼저 쓰여진 책인 만큼,
두께감 있는 《삶의 격》을 읽기 전에 워밍업하셔도 좋을 듯한, 바로 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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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직조해나가는 수많은 결정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부제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삶을 구성하는 그 결정들은 바로
나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을 때라야 우리가 진정한 자기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맞이하는 무수한 전환점들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마음으로
결정할 때라야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지요.
《자기 결정》은 2011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열린 3일간의 강연을 토대로 쓰여져,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질문들에
답합니다.
자기 결정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자기 인식은 왜 중요한가?
문화적 정체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진정한 ‘자기 결정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이때 페터 비에리는
소설가로도 활약하는 자신의 이력에 따라 우리가 삶에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문학!을 꼽습니다.
우리 은행나무 독자 여러분들이라면 누구나 저도 모르게 즐기고 있을 자기 결정의 연습 과정이겠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인물들의 인생 속에 자신을 녹여보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들의 결정으로 자기가 내렸을 결정의
결과들을 가늠해보는 것이지요.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 읽기 교과서에 꼭 이런 문제가 나오던 것과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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