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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니 의장대와 군악대가 그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었다. 그는 팬티 바람으로 의장대를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그는 팬티 차림으로 의장대 경례를 받은 사람은 그가 전무후무할 것이다라고 적어놓았다. 그는 지옥여행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임대령은 회고록에서 경비사관학교 시절 동갑내기(1917년생) 박정희 대통령은 103번,
그는 104번이어서 나란히 앉아 수강했다는 것과, 그는 애국가 3절을 알고 있지 못했는데
박정희는 정확히 알고 있어 기입했기에, 그것을 베껴 썼다가 둘 다 커닝 혐의로 걸렸던 것 등의 에피소드를 개했다. 학생과에 불려간 두 사람은 ‘누가 베껴 썼는가’란 질문에 서로 베껴 썼다고 주장해, 친해진 과정도 소개했다.
박정희 후보생과 몰래 사관학교를 빠져나가 술을 마시고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온 것도 적어 놓았다.
임대령은 당시에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즐겼던 술과 담배를 멀리한 원칙주의자였다.
여순사건 후 빨치산 토벌전에서 큰 공을 세웠던 그는 6·25전쟁 중인 1951년 9월 철원에 주둔하게 된 9사단 30연대장을 맡아 유명한 백마고지 전투를 치름으로써 ‘백마고지의 영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원래 그 고지는 이름이 없고 높이가 395m이기에 395고지 등으로 불렸다. 그는 그 고지를 뺏는 전투에서 이기려면 고지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참모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 회의에서 그 고지는 적의 포격을 하도 많이 받아 산등성이가 하얗게 드러났기에 ‘백마(白馬)의 등’ 같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부르자는 합의가 나왔다.
1951년 10월 중공군 38군(우리의 군단에 해당)과 30연대를 중심으로 한 국군 9사단이
이 고지를 놓고 12번 뺏고 빼앗는 전투를 거듭했다. 하도 많이 주인이 바뀌었기에 이 전투를 30연대는 ‘피스톤 작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30연대를 중심으로 한 9사단이 최종적으로
이 고지를 확보했다. 백마고지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군이 단독으로 전방의
중요 고지를 격전 끝에 차지한 것이다. 미군은 한국군을 믿지 않았다. 미군 10군단장은
한국군 9사단으로 백마고지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보고 미군 사단을 투입하려고 했으나
김종오 사단장 이하 9사단 간부들이 반대해서 이룬 승리였다.
이 승리 덕분에 9사단은 ‘백마 부대’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가장 큰 공은 세운
30연대장 임대령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Reason of Merino를 수여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미 육군 교재에 격전사례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회고록에 백마고지의 영웅이 된 작전보다는 적의 포로가 됐던 시절에 대해 더 많이 적어놓았다.
북한에서 돌아온 임대령은 그때까지도 암약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돼 모든 빨치산을 소탕했다. 그러나 포로 출신이라는 것이 약점이 돼 더 이상 진급하지 못했다. 그는 전쟁터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쉽게 타인에게 동조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군에 만연돼 있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꼬장꼬장하게 따졌던 것이다.
그리고 5·16 직후 만 10년의 대령 생활을 끝내고 예편했다.
7월 27일은 정전협정 체결6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의 한반도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고 싶다면, 그 시절의 20~30대들은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고 살았는지 알고 싶다면
고 임익순 대령의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을 일독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많은 전쟁 회고록이 미담과 자화자찬 일색이지만 이 회고록은 자아비판을 포함한 많은 비판을 담고 있다.
실재로 그는 북한군이 쏜 포탄 파편을 심장 근처에 박아놓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지미
20.03.06 13:59
첫댓글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 전투에서 전사한 강승우 소위(제주 성산읍 출신), 안영권·오규봉 하사를 백마고지의 3군신(軍神)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임익순 대령 얘기는 처음으로 접합니다.
탑재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