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김영성 ( http://club.nate.com/clubcsi )
인디고 차일드, 천재와 광인의 경계
천재와 광인의 경계는 늘 아슬아슬하다.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천재들의 삶이 모 아니면 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화 <뷰티플 마인드>(론 하워드 감독, 2001)의 실제 주인공 존 내쉬처럼, 지금도 어디에선가 수많은 천재들이 모와 도가 겹쳐져 있는 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방황의 끝에서 신에 의해 허락된 영감과 그 영감을 둘러싼 광기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그들의 운명과 미래는 천사와 악마의 차이만큼이나 극단적으로 갈라진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방황과 선택에 가급적이면 끼어들지 않는 게 현명하다. 괜히 마음 착한 척 하며 천재들에게 조언 비슷한 거라도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The Unusual Suspect>에서 새라가 그랬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IQ 177의 천재 소녀 한나는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일부러 앉아서 ‘조언’을 해주는 평범한 어른 새라에게 고백을 한다. 무슨 고백이냐고? 그걸 여기서 밝히는 것은 CSI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사실 이 정도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혹자는 스포일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의 비범한 제목의 모태인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브라이언 싱어 감독, 1995)가 세상에서 활개 치게 만든 악명 높은 ‘스포일러’들의 행태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하다. 어찌 되었든 아직 ‘범인이 누구’라고 외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다시 천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렇게 돌아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새라를 당혹스럽게 만든 한나와 다시 마주치게 된다. 도대체 한나는 누구인가? 자신보다 6살이 많은 언니 오빠들과 함께 고등학교에 다니며, 나트륨 같은 불안정한 화학 물질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12살짜리 천재 소녀 한나, 이 ‘범상치 않은 용의자’는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다.
먼저 한나는 자신이 캐리로 불려지길 원한다. 스티븐 킹(주1)의 소설 <<캐리>>에 등장하는 괴팍한 여고생처럼 자신을 경멸했던 스테이시에게 복수를 했을 뿐이라고 한나는 주장한다. 하지만 레슬리 피들러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를 탐색하는 작가이자 ‘애드가 앨런 포(주2)의 공식적인 후계자’라고 추켜세웠던 스티븐 킹의 이 소설을 한나의 침실에서 찾아낸 닉과 새라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오빠가 아니라 자신이 범인이라고 말한 법정 진술을 노골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한나가 의도적으로 그 책을 갖다 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캐리’로 불려지기를 원하는 한나의 의지와는 달리, 우리의 CSI 요원들에게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닉과 새라가 한나의 침실에서 오리무중에 빠져있는 바로 그 시간에 한나는 자신의 부모님에 의해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진다. 남을 돕기 위해 태어난 아이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한나의 어머니가 소피아 형사에게 가르쳐준 ‘인디고 차일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새로운 종족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바로 전 장면으로 리바인딩해보자. 새라는 한나의 침실에서 파티용 드레스 한 벌을 발견한다. 그런데 피해자인 스테이시가 화해의 선물이라며 한나에게 선물한 그 옷에는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민망한 문구가 하나 써 있다. ‘무지개 파티’. 닉은 이 파티가 여고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문란한 성(性)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아무튼 이 옷을 입고 댄스 파티에 참여한 후 스테이시에 대한 한나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그래서 누구나 ‘무지개 파티’가 사건을 이해하는 단서 중에 하나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인디고 차일드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미국사회의 문란한 성(性)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고등학생들의 ‘무지개 파티’가 우연하게도 인디고 차일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인디고 차일드(Indigo Child)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남색의 아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남색이 무지개의 일곱 빛깔 중 하나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이렇게 무지개 파티와 무지개 빛깔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연이어 등장하는 게 과연 우연일까? CSI가 언제나 은유(metaphor)와 말 장난(fun)을 통해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고는 하지만 이번 연결만큼은 지나친 비약인 것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인디고 차일드’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야 할 듯하다.
인디고 차일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원래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리처드 시글이다. 그는 나바호 인디언들에 대해 연구하던 중 부족 안에 종종 신기(神技)를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특별한 아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인디고’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뉴에이지(New age) 운동의 주창자들은 바로 이런 ‘인디고’의 특별한 의미를 자신들의 운동과 결합시키게 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물질적인 것만을 숭상하는 현대사회는 그 기운이 다했고 머지않은 장래에 ‘영적인 것’이 지배하는 새로운[New] 시대[ Age]가 도래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주역이 바로 남색의 빛깔을 갖고 태어나는 ‘인디고 차일드’이다. 인간의 영적 에너지와 신성성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고자 한 뉴에이지 운동 추종자들에게 인디고 차일드는 단순한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타락한 영혼을 우주적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선도자이자 예언자인 셈이다.
<<인디고 아이들 Indigo Children>>이라는 책의 저자인 리 캐롤과 잰 토버는 이러한 인디고 차일드가 창의성이 높고 의지가 강하며, 제3의 눈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제3의 눈’이다. 힌두교와 탄드라 불교에서는 일곱 개의 차크라를 통해 인간의 내적 에너지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 일곱 개의 차크라에는 무지개 빛깔에 상응하는 고유한 색이 부여되어 있다. 이 중 남색에 해당하는 것이 6번째 차크라인 아즈나 차크라이다. 우리는 이전 에피소드를 통해 이미 이 아즈나 차크라가 양 미간 사이에 있는 제3의 눈을 지칭한다는 사실과, 인간의 인식 능력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주3) 요컨대, 인디고 차일드는 자신들이 지닌 탁월한 인식력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선도해갈 영적 천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앞의 의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인디고 차일드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난교 파티인 무지개 파티와 나란히 놓여있었을까? 인류의 영적 구원자라고 추종되고 있는 인디고 차일드와 무지개 파티 사이에 ‘무지개’라는 공통점 말고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뉴에이지 운동 추종자들이 천재들만큼이나 위태롭게 극과 극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적 체험과 초월적 인식을 갈망했던 그들은 19세기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환각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영적 구원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door)(주4)이 마약 투입, 즉 사이키델릭(주5)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게 된다. 뉴에이지 운동은 영적인 구원과 사이키델릭의 타락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줄타기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우리의 CSI 제작진이나 요원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CSI의 모든 에피소드를 통해 반복적으로 이야기되었듯이, 마약은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인디고 차일드라 불리는 12살짜리 천재 소녀 한나는 두 가지 위태로운 경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하나는 신적 영감과 광기의 경계이고, 다른 하나는 무지개빛 미래(구원)와 무지개 파티(타락)의 경계이다. 그런 이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소녀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새라가 선택한 대답은 평범한 것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한나가 캐리나 인디고 차일드이기 이전에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12살 소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새라는 눈높이를 맞추고 한나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려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샘의 아들 법’을 들먹이며 한나는 소녀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거부한다. 4번째 차크라인 아나하타 차크라에서 사랑의 마음이 성숙하기 이전에(인디고 차일드는 어른이 되면 아나하타 차크라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이미 한나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법칙에 통달해서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더 불행한 사실은 한나의 그런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자신 있게 지적해줄 수 있는 ‘어른’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영악한 천재 한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970년대 미국 사회 전체를 공포에 빠뜨린 연쇄살인범이었던 ‘샘의 아들’ 데이빗 리차드 버코위치에게 살인 행각(주6)을 출판하자며 수많은 출판업자가 거액을 제안하며 달려들었던 것처럼, 언젠가는 돈에 눈먼 어른들이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는 늘 사랑보다는 돈이 우선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수일의 사랑이 아니라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선택한 심순애가 되기로 작정한 한나를 그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범상치 않은 용의자’를 보면서 평범한 어른이 쥐구멍을 찾게 되는 이유이다.
(주1) CSI 7x13 Redrum도 스티븐 킹의 소설과 관련이 있다.
(주2) CSI 6x16 Up in Smoke에서 캐서린과 새라가 포의 소설 <고자질하는 심장>에 대해 언급한다.
(주3) 일곱 개의 차크라에 대해서는 CSI 2x17에서 로버슨 박사가 태국 스님들을 해부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주4) 그룹 도어즈(Doors)의 명칭이 유래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도어즈의 리더였던 짐 모리슨은 약물 체험을 다루었던 올더스 헉슬리의 <인식(지각)의 문>이라는 글에서 영감을 얻어 그룹 명칭을 정했다고 한다.
(주5) 그리스어 ‘프시케psyche(영혼)’와 ‘델로시스delosis(계시)’의 합성어인 사이키델릭(psychedelic)은 정신과 의사인 험프리 오스먼드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약물(마약)에 의해 야기되는 환각적 체험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주6) 이 에피소드의 피해자인 스테이시는 버코위치가 살해한 마지막 6번째 희생자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