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대중문화라고 하면 저급문화, 몰개성, 저속성, 상업성 등의 특징을 얘기한다. 비평에서든 그 비평을 들은 사람들의 입에서든. 그러한 대중문화의 반대편에는 거의 언제나 고급문화, 즉 순수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역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그러한 고급문화를 학습하거나, 또는 운좋게도(?) 고급문화를 눈과 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을 지니게 된 사람들에게는 종종 경계의 대상, 또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화의 향수 대중에는 고급문화 소비층, 대중문화 소비층, 인디-기존의 주류적인 문화 분류에 편입되어 있지 않은-문화 소비층 정도의 층위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오늘날 사회적 의식을 주도하는 사람들은(오피니언 리더라고 해도 무방할 듯) 역시나 안타깝게도 대중문화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서양음악사나 재즈나 록에 대한 담론들은 조금 과도할 정도로 풍부하지만, 상대적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들은 취약한 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사회적 위치상으로는 정말 별볼일 없는 나도 대중문화를 조금 만만히 보고 있는 듯도 하다.
오늘날 대중문화 영역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대중가요도 이러한 모습에서 그다지 자유롭진 않다. 즐기는 대중들은 조용히 소비 형태를 변화시켜 가며 문화실천을 해왔고, 적어도 90년대 중반까지 대중가요에 대한 주류적인 평가는 거의 언제나 그 외곽에서 이루어져 온 듯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러한 주류적인 대중가요 평가에 기꺼이 동의를 표했었다. 음악 산업이라는 것이 문화가 지니는 심미적 기능을 배제시키고 철저하게 이윤가능성에 집중되면서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안정적인 수익모델로서 보장을 받은 장르만 줄기차게 생산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영미 씨의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는 트로트에서부터 댄스가요로 주류를 이루었던 90년대 가요까지 대중가요의 변천과정 차근차근 짚어오면서 그것이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를 성실하게 보여줌으로써 문화로서의 대중가요를 좀더 애정어린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지몽매하고 판단력 없는 대중들이 주체성 없이 가요산업에서 주는 것들만 받아먹고 살아왔다는 인식을 명쾌하게 불식시키고, 흔히 하찮게 취급되는 대중가요의 리듬, 멜로디, 가사 등의 변화를 제시하고 그것이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 따른 대중들의 취향의 변화에 어떻게 조응해 왔는지까지 보여준다.
이영미씨의 대중가요(문화)에 대한 평가
“트로트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기본 욕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순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학적 자괴감을 외향적인 탄식과 눈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팝은 서구 근대가 이룩해 놓은 문명과 이성, 발전에 대한 동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반면 포크는 기존의 타락한 세상에서 감춰져 보이지 않는 작고 초라하지만 젊고 참신한 순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세상을 지적이면서 관조적으로 응시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중략) 록은 서구의 근대가 이룩해 놓은 이성과 발전의 신화를 부정하는, 도시의 개인화된 인간들의 차가운 절망의 몸부림... ..(하략)”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서부터 서태지의 ‘교실이데아’까지 한 시대 인기를 누리는 대중가요가 그 시대 대중들의 사회심리나 취향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왜색문화의 하나로서의 트로트가 60년대 서구적인 선법과의 조우를 통해서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70년대에 서구 문명이 이룩해 놓은 것들에 대한 동경으로서 블루스 등의 서양음악에 왜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산업화되고 정치적으로는 다소 어두운 국면에 와서 취향이 포크로 옮겨가게 된 과정, 이성의 왜곡으로서의 격렬한 창법을 내세웠던 록이 어떻게 시대의 언어로서 등극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현장가요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민중가요가 한때는 어떻게 대중콘서트도 개최할 만큼의 인기를 획득할 수 있었는지, 시대를 불문한 보편적 언어로서의 사랑이야기가 가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등을 알기 쉽게 얘기해준다. 다시 말해 대중가요 속에 담긴 대중성의 원리란 어떤 것인지, 통시적으로 사례를 들면서 이해하기 쉽게 얘기해준다. 문화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이 존재하지만, 문화의 한 영역에 불과한 가요의 이야기를 통해 문화라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지 누구에게나 쉽게 보여준다.
90년대 이후, 즉 서태지 이후의 대중가요에 대해서는 난감한 입장을 숨기지 않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몰이성의 객체, 또는 알맹이 없는 그 무엇으로서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의견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대중가요가 기본적으로 대중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또 수용자 대중들의 사랑과 지원으로 성장하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자신의 할 말을 지닌 줏대 있고 능력 있는 작가의 힘과 결합할 때에, 그리고 끊임없이 획일화되려고 익숙함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따끔하게 비판하는 수용자 대중들이 힘을 발휘할 때에 질적으로 부쩍 성장하는 것이지요. ”
말미에 대한 생각
일단 이영미 씨의 주장에서는 수용자의 비판의식의 함양-그녀는 가치중립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의 변화를 얘기하고, 수용자 대중이 그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응원을 해야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러한 변화에는 틀림없이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이 종국에 필요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적어도 문화라는 것은 사회의 구조 속에서 이식된 것과 수용자 대중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기보다는, 문화, 특히 대중가요는 역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갖추어진 조건 속에서 형성된 그 무엇이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싸움이나 대결, 변화에 대한 응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집단의 해석방식의 문제에 가깝다. 일제시대, 일본의 국어로서의 일본어가 우리나라에서 일방적으로 교육되었으나, 그것은 결코 일본의 국어처럼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내용의 문화라고 해도 그것이 특정한 감정체계를 지닌 다른 집단으로 이식되게 되면(조건이 다른 곳에 오게 되면), 필연적으로 물리학적인 결과 변형이 이루어진다. 한 마디로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해석방식)은 물론 단 하나의 그 무엇으로 체계지워진 것은 아니며, 절망적인 자기학대를 좋아했던 가치, 서구의 문명과 이성이 가져온 달콤한 발전에 대한 가치, 다시 그에 대해 저항하는 가치, 경제 사회적으로 구축된 소비지향의 가치, 또다시 그에 대한 저항의 가치, 상발하향(上發下向)식으로 구축된 범주에 구속되지 않고 독자적, 개별적인 것을 지향하는 가치 등 이 모든 것들이 혼재된 것이다.
그렇다면 손댈 수 있는, 또는 코멘트를 남길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질문하면서 이미 나왔듯이 그것은 평가 내지 비판이라고 들 수 있겠다. 즉 해석방식의 문제이고 지금의 언어로 얘기한다면 비평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수용자의 비판의식의 함양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사실 이영미씨는 그것을 지배적인 가요 생산 시스템과 구별되는 개별 생산주체의 확대와 그것에 대한 응원으로서의 자본주의적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구조에 종속되지 않는 수용자의 주체적 소비 확대 수준에서 수용자의 변화촉매적 소비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그렇지 않게 된다고 해도 그녀에게 있어 대중가요를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했다.
비평이라고 하는 영역, 즉 해석 방식의 영역에 손댄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 와서 이전보다는 독립적인 섹션이 되었고, 심지어는 비평의 소비라는 현상까지 낳은 해석방식의 영역까지 건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수용자가 소비의 영역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비평의 영역까지 손대는 것이 필요할 듯 싶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전제로 하는 문화산업을 낳은 자본주의란 생각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견고하다. 사람들이 스스로 감각하면서 변화의 주체로서 작용한다는 것은 기실 많은 것들을 요구하게 된다. 별비용(시간적, 금전적, 지식탐구적)없이 즐겼었던 문화가 노력이 필요한 어떤 것이 되어버리게 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책은 분명히 한국 대중가요를 재조명하는 데 있어 굉장히 큰 공을 세우고 있다. 동시대, 동공간의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가요를 천박하고 속된 것으로 바라보았던 주류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좀더 애정어린 시각에서 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변화를 위해 가요 소비자로서 적극적인 견제가 양속(樣俗)으로서 필요하다고 보기보다는, 애초에 변화란 것이 가치중립적인 것이라면, 그러한 내용은 이미 집단 내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작위로서 필요한 것은 해석과정에 있어 타자를 물리쳐 내는 것, 나아가서 우열의 가림 없는 대상으로서의 대중가요를 자리매김하도록 비평권력의 해체 또는 교체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홍도의 그림이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나서야 중요한 평가를 받도록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전성기때 제대로 된 평가를 해주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다 쓰고 나니 문득 이영미 씨의 글을 오독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대중문화 영역에 대해서만도 십년을 넘게 애정으로 바라본 이영미 씨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나조차도 잘 모를 말을 쓰다니..... 내가 참 말이 많은 사람이거나, 무언가 말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둘러쌓여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적어도 대중가요 영역에 대한 담론들이 이렇게 애정어린, 그러면서도 억지스럽지 않은 시각을 바탕으로 이루어 지는 한, 많은 사람들이 보고 배우고 또, 변화할 것이다. 이영미 씨의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는 충분히 그런 역할을 하고도 남을 책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