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철학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 과정으로 보인다. 철학의 문제가 언어의 오용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았던 비트겐슈타인 은 철학의 임무를 언어로부터 발생한 혼동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본다. 혼동을 제거하기 위해서 출발한 그의 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전ㆍ후기에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혼동에 대한 처방으로 언어를 단일한 기준, 즉 논리적 형식으로 규정하려고 했다면, 후기의 그는 일상 언어의 모호 함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언어가 쓰이는 다양한 방식을 '보라'고 말함으로써 철학적인 문제를 해소시키 려고 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세계의 논리적 그림으로 보고, 세계사실을 반영하거나, 참ㆍ거짓을 판정 할 수 있는 명제만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한다. 또한 인간의 의도나 욕구를 반영하는 형이상학적, 윤리적, 그리고 심리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침묵 해야 한다고 언명한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는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변화 무상한 의도와 욕구를 드러낸다는 것, 즉 언어가 인간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실제적인 삶과 무관한 언어 그 자체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쓰임'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철학에 있어서도 단일한 원리란 없으며 다양한 방식만이 있다고 말하고, 기존의 철학이 본질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면 이제 철학은 다양한 용법들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설명하지 말고 기술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요약되는 그의 후기 철학관은 이전의 체계 건설적 철학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다.(2절) 철학에 있어서 우리가 설명하지 않고 기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고정적이고, 단일한 방식으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언어는 더 이상 세계의 논리적 그림이 될 수 없다. 언어는 다양하고 유동적인 인간의 삶을 기술하는 활동이다. 이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주목했던 '언어 게임'(language game)의 요지다. 따라서 언어게임 속에서 언어가 쓰이는 방식이 언어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이론은 인간의 삶의 형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필자는 삶의 형식이 그의 철학에서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차이를 제약하는 요소로 파악한다. 필자의 이해에 따르면 이러한 삶의 형식은 문화적인 영역과 원초적인 영역을 모두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원초적인 영역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편향된 시각이다.(3절) 본래적이고 단일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게임 속에서 의미가 결정된다는 그의 이론이 체계 건설적인 철학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이유는 '철학'을 문제로 진단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시각과 직결되어 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치유의 활동으로 본다.
2. 설명에서 기술로
철학적인 문제들이 사고의 혼동으로부터 온다고 본 비트겐슈타인은 사고의 혼동을 불러오는 원인이 언어의 모호함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이 그러한 모호함을 제거하기 위해 단일한 방책을 제시하고 있다면, 후기의 그는 다양한 언어 게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철학에 단일한 본질이란 있을 수 없고, 단지 '쓰임'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적 탐구}에서 그는 언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생각하지 말고, 보라!"고 말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사고의 혼동은 우리의 언어가 모호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이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지 않은 데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어가 어떤 언어 게임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관찰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언어는 더 이상 '본질'을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명'(explanation)이 아니라 '기술'(desc ription)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어떠한 언어도 유일하거나 본질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을 기술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고찰 속에는 어떤 가설적인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설명은 사라져야 하고, 오직 기술만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한다." 기술하는 것은 그것의 쓰임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다. 다양한 게임들에서 언어가 쓰이는 방식을 단지 기술함으로써 그것의 전체적인 용도를 파악할 때 그것의 쓰임은 명확해지 고, 우리는 사고의 혼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고의 혼동을 제거하기 위한 단일한 방책 또한 거부한다. 언어가 쓰이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데도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질병에 다양한 치료법이 있듯이, 철학적 문제도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될 수 있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에 본질이나 절대적이고, 단일한 이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자는 어떤 확정적인 이론이나 논제를 제시할 수 없다. 철학자의 임무는 우리에게 언어 게임에 관한 친숙한 자료를 제시하고 우리가 어떤 표현의 쓰임에 관해서 명확하고 전체적인 견해를 갖도록 그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철학에서 논제들을 수립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은 결코 논의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그것들에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즉 철학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만을 진술한다. 다만 언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보여줌으로써 의미를 명확히 할뿐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전의 철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해왔고, 그것을 단일한 진리인 듯 가장해 왔기 때문에 사고의 혼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언어가 어떻게 쓰이는 지 기술함으로써만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고, 그 때 철학적인 문제도 해소 될 수 있다. '전자'나 '원자' 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에서 그것이 쓰이는 방식을 살펴봐야 하고, 철학자가 '신', '이성', '인식'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그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선'이나 '죄'와 같은 일상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단어들과 개념들이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을 탐색해야 한다. "철학은 언어의 실제 사용을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그러니까 결국 그것을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3. 삶의 형식을 바탕으로 한 언어 게임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에 어떤 본질적인 설명도 있을 수 없고, 그것의 쓰임을 관찰해야 한다고 했던 것은 언어의 의미가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언어 게임에 서의 역할이 언어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사에는 다양한 게임들이 있고, 그러한 게임들마다 언어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무엇도 본질적이지 않다는 것, 즉 다원성은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다원성이 소통하는 지점에 대해서는 명백히 밝히고 있지 않다. 이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겨진다. 언어는 전적으로 맥락 의존적으로 작용하는가? 본질에 대한 거부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과 동일시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다원성은 '무엇이든 된다'는 식의 허무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다원성을 제약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고, 필자는 이러한 제약이 가능한 지점을 '삶의 형식'이란 개념에서 찾는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삶의 형식을 공유할 때만 우리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언어에서 사람들은 일치한다. 이것은 의견들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이다." 그러나 삶의 형식이 문화적인 코드로만 읽힐 때는 그것에서 다원성을 제약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찾을 수 없다.
어느 지점에서든 우리가 일치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반은 언어 게임 속에서 언어의 의미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다. 나는 매우 특수한 상황들 속에서 자라난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지구가 50년 전에 생성되었다고 가르쳐 왔으며, 그래서 그는 또한 이를 믿는다. 이 사람에게 우리는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이미 오래
전에 생성되었다고 하는 따위를.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세계상을 주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일종의 설득을 통해서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이승종은 비트겐슈타인을 자연주의자로 규정하고, 의미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삶의 형식에서 찾는다. 삶의 형식이 설득의 지반으로서 작용하는 확실성이라고 본 그는 "삶의 형식이란 어떤 문화적 속성이기보다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인간만이 희망할 수 있다는 사실 등 인간종에 고유한 특징들을 겨냥해서 쓰이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의 삶의 형식이 있을 뿐이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설득을 통해 의미를 이해하는 지반을 자연적인 요소로 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그것이 둥글다는 걸 마침내 확인한다. 우리의 전 자연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견해에 머무를 것이다.' 어떻게 당신은 그걸 아는가?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우리가 종적인 요소를 공유하고 있을 때 삶의 형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지동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천동설을 믿었고, 따라서 그들은 그러한 삶의 형식을 공유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명현은 삶의 형식을 두 가지 국면을 갖는 것으로 본다. 첫째는 문화적인 국면으로, 우리가 우리의 사회와 역사에 따라 각기 다른 의견과 반응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원초적인 국면으로,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인간이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삶의 형식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어느 한 가지를 제외시키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나타난 언어 게임이 아니라 그 세기를 지배한 하나의 '삶의 형식'이다.
한 시대의 믿음은 종적인 인간이 공유하는 삶의 형식의 일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각자가 그것을 확신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과학과 교육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도 뜻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서 받아들이 는 확실성이 어떤 이성적 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육과 설득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양한 언어 게임을 서로가 공유하는 본래적인 확실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설득을 통해서 이해하게 된 다는 것은 삶의 형식이 문화적인 국면 또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확실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일반적 경험 명제들"에 근거할 뿐이다. 확실성의 지반으로서의 삶의 형식 또한 필연적이고, 선험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종으로서의 인간이 공유하는 '삶의 형식'은 경험적인 영역에서 입증될 수 있는 정도의 확실성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사회ㆍ역사 속에서 문화적인 삶의 형식을 공유하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자연적인 삶의 형식을 공유할 뿐이다.
4. 맺음말
비트겐슈타인은 일관되게 언어에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것은 그가 언어를 보는 관점이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전기의 그가 언어를 세계의 논리적 그림으로 보았다면, 다시 말해 세계가 언어의 성격과 작용을 규정하는 근거였다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가능 근거를 인간의 실제적인 삶의 형식에서 찾는다. 전기에서는 세계사실을 반영하거나 논리적으로 참ㆍ거짓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명제만이 의미를 갖기 때문에 언어의 의미가 분명하게 정해지지만 후기에는 의미가 '삶의 형식' 속에서 맥락 의존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언어의 본질적인 의미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철학에 있어서도 우리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고,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가 인간의 의도와 욕구를 반영하기 때문에 유동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다는 사실은 언어 게임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나 다양한 언어 게임들 속에서도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보편적 지반이 있기 때문이며, 필자는 그러한 지반을 삶의 형식에 있다고 보았다. 삶의 형식이란 다양한 언어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차이, 즉 문화적 국면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국면을 포함하는 개념인 것이다. 삶의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쓰임' 속에서 의미가 결정된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은 본질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려고 했던 기존의 철학에 대한 반성적 고찰로 보인다. 그의 철학이 단지 '드러냄' 을 통한 소극적인 언명일 뿐 적극적인 주장이 아닌 것은 그가 '철학'을 문제로 진단한 것과 연관된다. 즉 철학의 목표는 "파리에게 파리 병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던 그의 철학관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치유로서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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